동항성당 아래에 있는 두매 약국 자리는 원래 일제 때 창고였는데, 우암동의 역사와 더불어 많은 역할을 한 곳이다. 해방 후에 이 곳에서 몇몇 선각자가 야학을 했었고, 6ㆍ25 후 피난민들이 들어오자, ‘적기피난민수용사무소’가 되어 여기에서 피난민 3,000명~4,000명을 관리하였다. 1956년에는 몇 몇 교사들이 ‘우암고등공민학교’를 만들어 중학 과정을 가르치기도 했다.
피난민으로 거제도에서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박노일(1935년 생)씨는 1953년 우암동에 정착하여 생활하였는데 1954년 당시 송도에 있었던 연세대에 입학하여 대학교에 다니던 중 1956년 이현구(후에 민선초대 동장 역임) 씨, 김중걸(동항초등학교 교장 아들)씨 등과 함께 우암고등공민학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암동에 피난민들이 정착했으나 생활이 곤란하여 청소년들의 학업은 전무한 상태였다. 우암고등공민학교에서는 중학교 1ㆍ2학년 과정을 가르쳤다. 2년을 이수한 학생들은 편입 시험을 거쳐 배정중, 동성중, 선화여중, 동주여중, 덕명여중 등으로 전학을 갔고, 1년 뒤 졸업을 하였으며 취업이나 대학 진학 등을 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얼마 동안 배정 중학교 분교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1971년 무시험 전형으로 폐교 될 때까지 1,200여명이 수료했다. 맨 마지막까지 학생과 학교의 뒷정리는 손홍종 선생님이 하셨는데, 이분은 특히 사도 정신이 아주 투철했다고 한다.
이 학교의 학생 수는 많을 때는 80명 정도였고, 보통 20~40명 정도였다. 졸업생 중에는 현재 대학교수가 2명, 시청 공무원 1명 등 다수가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이들 수료자들이 모여서 동문회 결성 준비를 하고 있다. 이후 우암동의 지식인층이 두터워 동네가 정화되면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