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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의 시에 나타난 “누나”의 이미지
(《石華の詩に見られる「姉さん」のイメージ》)
남철심
일본 치바대학(千葉大學)
“인간은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서 만들어진다.”
―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나”는 “나입니다”라는 말과 “여자”는 “여자입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그것은 “나”가 “나”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여자”도 그냥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처음부터 그렇게 거기 있었던 것이다. 대립이 아니라 차이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差異」”는 “이질성「異質さ」”이라는 것과 다르다. 이 “차이”는 많은 면을 공유하면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서 생겨난 “차이”이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강조하는데서 “이질성”이라는 “상대성 관념「幻」”이 생겨나게 된다. 같은 사람이라 하여도 단지 피부색갈의 “차이”로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상대성 관념”이 생겨나 “백인”과 다른 “흑인” 혹은 “황색인”이라는 “이질성”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남자”의 상대인 “여자”도 자연적인 성, 생식기관의 차이를 강조하는데서 생겨나는 “상대성 관념”인 것일 뿐으로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이”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전체 인류를 피부색갈로만(이질적인 요소로만) 나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빵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과 밥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 골프 칠 줄 아는 사람과 골프 칠 줄 모르는 사람… 이와 같은 이질적인 “차이”의 대립관계는 최종에 가서 “나”와 “너” 그리고 “자기”와 “타인”의 관계로 모아지게 된다.
그러나 “나”와 “너”,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대립되는 관계뿐만이 아닌 것으로 “나”는 “너”로 될 수도 있고 “너”가 “나”로 될 수도 있다. “나”를 주체로 생각하여 본다면 존재하는 전체는 “나”가 “발화「発話」”하는 “주어「主語」”에 의하여 시작된다. “나”로부터 “당신”이란 상대가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당신”을 주체로 본다면 그 “당신”은 바로 “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나 “여자”도 마찬가지로 같은 주체이다. “여자”도 “여자”로 본다면 하나의 “나”이고 하나의 “발화”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페니스가 없기 때문에) “여자”일수밖에 없다. “여자”는 처음부터 “여자”였으며 계속 “여자”로 존재하게 된다. “사내(남자) 같다”는 말 가운데는 사실 “여자”가 존재한다. 그 내면으로부터 “여자”를 쫓아내버린다면 “사내(남자) 같다”는 말은 의미 없는 말이 된다. “여자”가 없다면 “남자”도 없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리라. “남자”와 “여자”의 상호의존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남자”가 있기 때문에 “여자”가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여자”가 있기 때문에 “남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남자”가 없다면 “여자”도 없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여자 같다”는 말 가운데도 “남자”가 존재한다. 그것은 “여자 같다”는 말에서 “남자”가 도망쳐 버린다면 그 “남자” 속에는 “여자”만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며 다른 말로 하면 “여자 같다”고 강조하는 말 속에는 “남자”라는 의미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라는 “나”와 “여자”라는 “나”의 사이에는 대립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가 있을 뿐이고 “대립”은 없기 때문이다.
젠더(gender 사회적 성별)는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성별을 가리킨다. 젠더가 문제시 되는 것은 종래의 사회․문화구조가 무성(無性)의 중성적 방식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나 그 가운데는 “남근중심주의”가 은밀히 가려져 있으며 그것을 자연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성을 강조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몸=자연”, “여자=어머니(생산의 성)”이라는 등식을 이루어내면서 “어머니 품과 같은 대지”와 같은 레퍼토리(repertory)로 미화되고 “가족의 천사”라든지 “현모양처”라든지 말로 표현된다. 이것은 결국 “여자”라는 의미를 강제적으로 덮어씌우기 위한 덫에 지나지 않는다.
누나,
지금 꽃은 피여있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살결처럼
내 눈을 간지럽히던 얄포름한 꽃잎
…… (략)
이쁜 꽃송이는 어데도 없습니다
누나,
그 파란 잎사귀도 지금 없습니다
…… (략)
천잎만잎 푸른 잎사귀들이
지금은 한잎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나,
어쩌면 그 고운 두뺨에
발그스레 피여나던 예쁜 홍조인양
알알이 빨갛게 물들어가던 능금
…… (략)
두볼이 빨간 능금알들이 지금 없습니다
색채와 향기
계절과 함께 모두 떠나가버려
그림이 지워진 빈 액틀속같은
겨울과수원
겨울과수원 한가운데로 깊숙히 뻗어간
이 오솔길 한가닥 따라
발걸음 조용히 옮겨딛는 지금
누나,
그래도 나의 가슴엔 한가득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이
그래도 가슴에 한가득 넘쳐남은
무엇때문일가요
누나,
지금 이 겨울과수원 한가운데서...
― 석화, 시《겨울과수원에서 ―누나에게》일부
석화시인의 시 《겨울과수원에서 ―누나에게》의 일부이다. 시인은 작품에서 “누나”를 향하여 무슨 말인가 연신 “발신「発信」”하고 있다. 이 “누나”라고 불린 “상대”는 물론 “여성”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서 “물론”이라는 부사를 덧붙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여자”만이 “누나”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간혹 어린 친구들이 “누나”와 “형님”을 잘 분간하여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성별차이로 인기되는 성차별현상이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기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멋쟁이 남자도 좋아하면서 또 남자들처럼 거친 장난을 치기 즐기는 여자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속의 “누나”는 “형님”과 헷갈릴 염려는 없다. 다만 이 작품을 몇 번이나 마지막까지 읽어보아도 텍스트에서 “누라”라고 불린 “여성”의 이미지 즉 “누나”의 구체적인 형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일방적인 “발신”이다. “누나”라고 불리는 “대상”에서부터 한번도 “답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다만 “수신”할 뿐 한차례도 “발신”하지 않는다. “누나”는 마지막까지 “수신”만 한 것이다. “내”가 겨울과수원의 한가운데서 “누나”에게 말을 건넨다기보다 “누나”에게 일방적인 “통신”을 하고 있었으며 “누나”는 한 마디 말도 없었으며 마지막까지 듣기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응답이 없는 “통신”이였다. 하늘을 향하여 “통신”을 발송하였지만 무수한 전파는 공중에 분해되고 흩어져버렸을 뿐이다. 거기에는 “누나”가 없었다. “겨울과수원”의 한 가운데에도 그 밖의 어디에도 “누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누나”를 향하여 “통신”을 진행하고 있다. “누나, 지금 꽃은 피어있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과수원”, 이 어휘로부터 우리들은 “어여쁜 꽃송이”와 “푸른 잎사귀”와 “빨간 사과” 등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의 한 복판으로 그것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 반드시 존재하여야 할 것들이 지금은 하나도 없다. 여느 계절에는 존재하고 있던 그것들이 지금은 모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겨울과수원”의 한가운데도 “누나”가 없다. “어여쁜 꽃송이”와 “푸른 잎사귀”와 “빨간 사과” 들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는 “누나”도 없다. 아니 “누나”가 없기 때문에 “어여쁜 꽃송이”와 “푸른 잎사귀”와 “빨간 사과” 들이 하나도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이 “나”더러 “누나”를 향하여 “통신”을 하도록 부추킨다. 그러나 이 “통신”은 “누나”에게 도착되지 못한다. 언제까지 “통신”을 시도하여도 “누나”는 받지 못하는 것이다. “누나”는 이것을 “수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신”하는 것은 “누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누나,
그래도 나의 가슴엔 한가득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이
그래도 가슴에 한가득 넘쳐남은
무엇 때문 일가요
누나,
지금 이 겨울과수원 한가운데서…
― 석화, 시 《겨울과수원에서 ―누나에게》일부
“누나”가 “발신”하지 않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수신”하고 있다.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을 “나”는 “가슴”으로 “수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살펴보면 이것은 “나”의 “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나”가 진행하는 “발신”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 일가요.”
석화시인은 《가을밤에 쓰는 편지》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이 “누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런 늦은 가을 깊은 밤에는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가을처럼 떠난이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도시이름도 우편번호도 거리와 골목의 번지수도 모르지만 무작정 쓰는 이 편지, 이 가을의 편지가 닿는 곳은 어쩔 수 없이 끝 간 데 없는 내 상상이 살포시 나래를 접는 그 곳, 누나가 계시는 그곳입니다.
― 석화, 수필 《가을밤에 쓰는 편지》일부.
석화시인은 이 수필에서는 확실하게 “나”가 “누나”를 향하여 통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통신은 닿을 곳 없는 통신이다. “나”는 통신의 대방인 “누나”에 대하여 지금까지 한 가지도 아는 것이 없다. 도시의 이름도, 우편번호도, 거리와 골목의 번지수도 모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빈번하게 일방적인 통신을 계속하고 있다. “나”의 통신(정)이 가 닿는 곳은 “나”의 상상속의 고향(누나가 사는 고향)이며 거기에는 “나”의 통신(정)이 도착하는 “누나”에게만 속한 우체통이 걸려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누나”의 이미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나”의 상상속의 고향처럼 상징화되어 있다.
“나”는 “겨울과수원” 즉 한겨울의 한가운데 있다. “그림이 지워진 빈 액틀 속 같은” “겨울과수원”에는 응당 있어야할 것들이 하나도 없다. “어여쁜 꽃송이”도 “푸른 잎사귀”도 “빨간 사과”도 여기에는 없다. “나”의 몸이 놓여 있는 삶의 현장은 삭막하고 소리하나 없고 냉랭하다. 그러나 “나”는 이 겨울의 과수원 한 가운데서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을 느끼고 있다. “봄”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누나”는 “꽃송이”이고 “잎사귀”이며 “사과”이며 이 모두가 상징하는 “봄”으로 되었다.(“누나”는 “나”가 상상하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가 “겨울과수원” 한가운데서 “누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이 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누나”(여자)가 왜서 “꽃송이”이고 “잎사귀”며 “사과”가 되고 “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여자 같다”라고 미화하고 “여자 같다”라고 강조하는 것인가.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일방적으로 “어여쁜 꽃송이”와 “푸른 잎사귀”와 “빨간 사과”와 같은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등등의 표현을 동원하여 “누나”(여자)의 아름다움과 선량함과 순수함과 올바름과 고결함과 같은 상징을 묘사하면서 다른 한 방면으로는 이것을 가지고 “여자 같다”는 것을 강조하며 “누나”(여자)를 “나”(남자)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로 보려고 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겨울과수원 ―누나에게》 이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누나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다른 일련의 작품들에서도 모두 보여진다. 《겨울과수원 ―누나에게》가 응당 있어야 할 것들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에 반하여 시 《도시의 달 ―누나에게》에서는 “누나”의 인정과 진실과 순결에 대치되는 차갑고 어지러운 도시의 “콩크리트문화”를 비난하고 농경생활의 순수함을 동경하고 있다.
누나!
우리의 달은 마을뒤 재너머 할아버지산소로 가는 휘우듬한 언덕마루에서 고무뽈처럼 튕겨올랐는데 여기 도시에서는 높은 아빠트와 커다란 빌딩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떠오르고있습니다
― 석화, 시 《도시의 달 ―누나에게》첫 연
빛과 밝음의 상징으로 되기도 하는 달이 이 작품에서는 도시의 “콩크리트문화”의 피해로 “높은 아빠트와 커다란 빌딩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떠오르고” 있다. 시 《코스모스여 ―누나에게》에서는 “코스모스”의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시골누나의 이미지를 그려가면서 인간이란 소박하고 정직하고 타인(남자)를 위해 희생할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읊조리고 있다.
누구와의 약속이었기에
모두가 떠나가는 계절뒤끝에
오히려 긴 목을 하고 피어있는것인가
코스모스여
(중략)
어느 통속잡지 뒤표지에도 오른적 없는
내 시골누이 같은
코스모스여
하나의 약속을
한송이 꽃으로 피울줄 아는
안스러움이여
― 석화, 시 《코스모스여 ―누나에게》일부
“코스모스”는 계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도 오지 않는 길섶에서 아쉬움도 후회도 없이 웃는 얼굴로 피어있다. 이것은 소박한 인정미가 넘쳐나는 시골누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물론 “남자”가 “여자”을 아름답고 순결하고 소박한 존재로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도 이와 같은 여성에 대한 미화를 통하여 “여자 같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여자”를 “여자”라는 틀 속에 가두고 그 기준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바르지 못한 현실을 정시하지 못한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실로 석화시인 본인에게는 누나가 없다.
언제라도 이렇게 “누나―” 가만히 불러보면 아득한 그리움과 함께 한 가닥 이름 모를 향수가 가슴에 가득 스며듭니다. 나에게 있어서 누나는 이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끝없는 바램이었고 신비롭기까지도 한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일곱 살 위의 형 한분뿐인 나에겐 이웃집 누나와 누나가 있는 친구또래들이 한없이 부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석화, 수필 《가을밤에 쓰는 편지》에서
시인은 실제로 누나가 없었기 때문에 누나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오히려 이와 같이 더욱 짙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존재하지 않는 “누나”는 “나”의 옹근 상상의 고향이고 지워버릴 수 없는 희망이며 신비한 동경의 대상이 된 다. 따라서 이와 같은 “누나”의 이미지는 “나”가 이루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그리움과 애틋함과 부드러움 등)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나”더러 시를 쓰게 하고 노래를 짓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 많고 애틋하던 추억들을, 햇볕에 따스해진 빨래터의 강변에 가득 널려있던 조약돌과 교외로 달리는 버스의 종착역에서 내려 바라보는 들녘의 새하얀 갈꽃, 빈가지의 사과배나무(연변 특유의 과실- 논자 주)들 사이에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이야기하며 오르던 겨울과수원의 언덕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얼어버린 두 손과 빨갛게 상기된 두볼을 감싸주던 크림냄새가 약간 풍기는 하얀 토끼털의 목수건 그런 향긋한 추억들을 가득 가진, 마치도 호주머니를 들추면 나오고 또 나오군 하던 닦은 콩알처럼 그런 향긋한 추억들을 한없이 가진 아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 석화, 수필 《가을밤에 쓰는 편지》에서
석화시인의 작품에서 보이는 “누나”의 이미지는 이와 같이 은근하게 표현되지만 “남자”의 상대로서의 “여자”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누나”이며 “어머니”와 같고 대자연속의 꽃송이와 같고 한없는 그리움을 불러내고 끝임 없는 아름다운 감각과 상상을 불러오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잠재의식 속에도 “여자=아름다움=자연”과 같은 구도가 깔려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석화시에 나타나는 “누나”는 실체로서의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누나”는 언제나 “나”와 어울려서 그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이 “누나”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몽환적인 존재로 “나”에게는 보여 지지 않는 것이다. “누나”와 “나”는 여기서 하나의 일체적인 존재가 된다. “나”가 “누나”가 되면서 “누나”가 다시 “나”로 된다. “나”가 “누나”를 부르고 있을 때 그것은 다름아닌 “나”가 “나”의 내면을 향하여 웨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나”는 “누나의 향기”, “누나의 촉감”, “누나의 체온” 느끼는 일이 가능해 지게 된다. “누나”가 “발신”하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수신”할 수 있는 것이다. “누나”를 향하여 진행한 “통신”은 사실 결국은 “나”를 향한 “통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과수원에는 꽃이 피어있지 않고 “나”의 곁에는 “누나”가 없다. 그렇다고 “나”는 “누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없는 “누나”를 찾아 나서고 “누나”를 만나려는 노력이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나”가 “나”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누나”를 찾는 과정에서 “나”를 찾게 된다. 여기에는 “여자”도 “남자”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도 “남자”도 벌써 “나” 가운데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남자”로 되는 것과 “여자”가 “여자”로 되는 것은 모두 “나”가 “나”로 이뤄지는 과정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석사학위논문 《석화의 시를 텍스트로 본 중국 조선족문학 제 현상에 대한 재검토》 제 3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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