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02. 19:26
아빠의 직장따라 홍콩으로 유학갔는데
그후 매스컴에 홍콩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는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다.
올해 스승의 날에는
바둑할아버지가 무슨 스승이라고
홍콩에서 선물까지 보내왔다.
집중력이 좋아 향상도가 아주 빠르던 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자라기를 기대한다.
21.07.02. 19:49
젊어서 산에 오르면 미래의 꿈을 그렸지만
요즘에는 산봉우리 휘감는 구름처럼
회한이 가득하다.
옛시절 희노애락을 함께하던 동료, 친구들
이제는 소식도 근황도 모른다.
나 역시 그들에게는 그런 존재일 것이다.
강물처럼 흘러온 세월, 허망하고 허무하며
하루하루가 쓸쓸하고 외롭다.
아마 내 또래는 거의 그럴 듯하다.
21.07.02. 20:02
바둑을 두는 상대를 의식하지 말고
바둑판위의 바둑돌만 바라보며
상대가 고수라 하여 주눅이 들거나
하수라 하여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이긴 바둑에서는 안일함을 경계하고
진 바둑에서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편협한 외곬수에서 벗어나
지형에 따라 물이 흐르고 채워지듯
유연하고 무리없이 둬야 한다.
21.07.04. 22:54
LP레코드에서 음악이 쏟아져 나오니
너무도 신기한지 아이들 눈이 휘둥거린다.
지금은 곡명을 알려줘도 기억하기 어렵겠지만
어른이 되어 우연히 들을 때도 오겠지.
그때에 이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21.07.06. 14:51
배롱나무는 가지가 불규칙하다.
중2시절,여름방학 미술숙제에
사생화 그리기가 있어서
화단에 심어진 배롱나무를 그려 냈더니
선생님은 잘 그렸다 칭찬하시고
교실칠판에 게시하여 주셨는데
어떤 친구는 배롱나무 가지 뻗음을 보더니
사생화가 아니고 추상화를 그렸다고 깐죽거렸다.
그 친구는 배롱나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럴 수도 있었는데..
나는 졸업하기까지 옹졸하게도
그 녀석과는 외면하고 지냈다.
21.07.09. 01:00
꽃은 기하학적이다.
그러한 모양으로 된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것이 진화학적이든 창조론적이든
생물의 모든 형태에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편리한 구조로 되어있다.
나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싶고
생물의 창조는 신의 영역이지만
생존을 위한 진화도 인정하고 싶다.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신의 도움 역시 포기해야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도 기대할 수 있다.
우주의 먼지보다 못한 하찮은 인간이
신의 존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조차
어쩌면 넌센스인지도 모른다.
21.07.15. 07:53
졸업후 30년이 지나
쉰 살이 된 제자들이 찾아왔다.
함께 늙어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듣고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고..
벌써 타계한 제자의 부음도 듣게 되니
숙연하고 미안했다.
요즘 인터넷뉴스에 별별 잔혹한 뉴스 -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평균수명은 연장되어 가는데
극도로 오염된 환경속에서
생존경쟁 역시 극심하다보니
일상이 곧 죄가 되어가는 세상이다.
21.08.22. 10:52
누구나 결국 생로병사를 겪기 마련 -
부자나 권세가나 위인이거나 성직자거나
그저 평범한 사람이거나 ..
나이들어 갈수록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시들어가는 꽃처럼 한 세상을 마무리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자기 육신을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대소변가리는 것까지
남의 손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 상황에 이르러 인격이, 인권이,
자존심이 그리고 존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애물단지 짐승일 뿐이다.
늦가을 썰렁한 요양원 복도에 옹기종기
양지 햇볕아래 자장면과 우동을 즐기던 노인들..
지금은 코로나로 그런 낙조차 없다.
그저 돌아가실 날만 기다릴 뿐..
누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머지않아 나도 그 속으로 던져 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나마도 감사해야 한다.
21.08.25. 03:55
졸업 30주년 사은회에 초대 받아 갔더니
벌써 제자들이 열둘이나 세상을 떠났다고..
집에 돌아와 앨범속 사진들을 조심히 오려
마치 하듯 액자에 옮겼다.
숙제GMG 하지 않아 손바닥 맞던 녀석도 있었다.
인생은 이렇듯 허무하고 허망하다.
21.08.25. 04:36
처서가 지난 가을 - 소슬바람이 반갑다.
태풍은 연례행사인데도
매번 그 피해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는 부터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모범적인 사람들이 정치를 싫어하다보니..
정치는 자연스레 넉살 좋은 친구들 몫이다.
그들 틈바구니에서 공직자들이
청렴한 소신을 지키기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전임 대통령들이 넷이나 형무소를 가는가하면
(그중 두 사람은 육사 동기생이다)
하와이로 망명하여 거기서 죽고..
가까운 김해출신 대통령은 임기후
자기 동네 바위에서 투신하고..
지금은 그 분의 비서출신이 대통령이다.
쿠데타 군인들에게 한 분은 쫒겨 나가고
또 한 분은 허수아비 노릇 이용만 당했고
그때 그 시절의 독재자는 장기 집권중에
딸 또레의 여자들과 동석한 술자리에서
심복에게 사살되고..
그 독재자의 딸 역시 또 대통령하다가
결국엔 탄핵되어 감방에서 5년이다.
정치는 이렇듯 무상한데..
이 정치판이 곧 우리나라 현실이다.
태풍은 해마다 찾아 오는데
그때마다 부산시내는 물바다 -
어느 미래학자는 50년 이후 부산은
1/3이 바닷물에 잠긴다고..
우리 아이들 어쩌나..
21.08.25. 05:07
묘원산책 - 장로는 맞는데
권사는 한자가 틀렸다.
권할 勸에 선비 士가 맞다.
심지어 권세 權에 스승 師로 오인하는
사람중에는 목사들도 꽤 있다.
그러니 교회 모든 일에 시어머니 노릇이다.
교회 갖은 궃은 일에 봉사하다가
늙어 요양시설에 입원하면
그 분들과 깊은 인연 없는 담임목사는
입원 직후에 심방하고..
몇 년이나 차일피일 방치하다가
결국 소천예배로 끝이다.
교회건물에만 주님이 계시나..?
예수를 믿는 건지..
목사를 믿는 건지..
기업화된 대형교회를 부러워하는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들..
지교회를 관리하는 노회한 목사들..
그 위에 군림하는 총회 유명목사들..
어느 종교이든
종교업자가 소리를 내면 그곳은 부패한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무교회주의에 호감을 더 느낀다.
묘비에 새겨진 엉터리 글자..
자손들 역시 부끄럽지 않다.
를 모르니까..
21.08.25. 05:20
떡잎이란 씨가 싹터 처음 나온 여린 잎이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기를
전라,충청도에서는 떡애기라고도 한다.
떡잎에 푸르른 엽록체가 많으면
광합성도 활발하여 건강하지만
엽록체가 부족하여 누렇게되면
결국 잘 살 수가 없다.
"싹수가 노란 놈"은 그래서 욕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다.
그저 돈벌이에 급급했던 시절 -
아이들을 잘 보살피지 못했기에
부모로서 낙제점이 부끄럽다.
21.09.02. 05:22
젊은 시절
이런저런 대회에서 획득한 우승컵 -
이사 때 마다 거추장 스러워서
모두 분쇄해 없애 버렸다.
조금은 아쉽기도 했지만
홀가분한 느낌이 더 컸다.
나이들어 갈수록
어김없이 상실의 아픔이 찾아온다.
이 세상 내 것이 어디 있으랴.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을..
21.09.02. 05:35
마지막 담임했던 고3시절의 女제자들이
쉰 살 무렵 부산에 찾아왔다.
광안리 횟집에서 뒤늦은 졸업 32년
사은회(?)가 열렸는데
넥타이와 손목시계 선물을 받았다.
옛 그 시절 수학을 아주 잘했던 아이가
폐암으로 먼저 떠났다.
울산에 있는 암환자 요양시설에 있을 때
찾아가 본 마지막 모습..
조금이라도 더 자주 찾지 못했던 것..
후회스럽고 미안했다.
21.10.29. 09:48
부산은 나이들어 살기 좋은 곳이다.
여름에 덜 덥고 겨울엔 덜 춥기 때문이며
자동차로 15분이면
가슴 트이게하는 바다를 볼 수 있다.
부산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게 될지
젊어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나뭇잎이 시냇물에 떠내려가다
강물로 바다로 흘러가듯 부산에 다달았다.
34년간의 부산생활 -
인생의 전성기도 침체기도 겪었다.
가끔은 향수를 느끼지만
다시 고향에서 살고픈 생각은 없다.
희노애락이 서려있는 부산..
이제는 완전한 부산사람이 되었으나
아직도 부산사람들의 성향이
생경스러울 때도 적지 않다.
21.12.21. 02:55
세상이 허무하고 허망하다는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대개는 잊고 살려
굳이 깊이 몰입하지 않는다.
나이들어 혹독한 중병이 찾아와
임종을 카운트다운할 즈음에는
혹독한 공포에 시달리며 죽음을 맞는다.
전방사단 신병교육대장이던 옛 지인은
죽음이 오면 그대로 순응하면 됐지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겠느냐라 했는데
그후 1년 반만에 암으로 떠났다.
투병기간은 고작 4~5개월..
이러한 싱거운 종말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죽음은 홀로 가는 길이며
주변 사람들이 고통스럽지 않게
본인도 편히 가야 복이다.
삶의 일상에서 기대하는 죽음은
요원할지 모르나
죽음에서 바라보는 일상의 삶은
바로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