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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천행 원문보기 글쓴이: hch8421
차를 피하며 길 따라 산을넘고 물을 건너 도심을 피해 마냥 가는....
8코스중 서울 둘레길 2코스
현 천 행<연세대독수리산악대장>
연세대독수리산악대가 2018년 서울둘레길 8코스 157km에 도전장을 내고
1코스 수락산,불암산코스(14,3km)부터 여유 있게 출발~완주 하고
이제 2코스 망우산, 용마산(348m),아차산(287m) 용마산 구간에 들어선다
중랑구 광진구를 거치는 구간으로 묵동천,망우산,용마산,아차산을 연결하는
코스입니다.
산 능선을 따라 산책하는 코스로 서울둘레길중 전망이 가장 뛰어난 코스입니다.
애국지사가 잠들어 있는 망우묘지공원,아차산 보루등 역사,문화 자원이 풍부
합니다.
ㅡ서울둘레길 157km 8코스중 2코스-2018년2월24일 (토)
날센돌이 최성락교장님,낙오자 되기 싫다 죽어도 고 양정성교수님,
일년에 한번은 그래도 간다 김승문교수님,죽어도 3등 김용준국장님,
모든 사람들 한테 편견 없이 잘해주는 김진덕선생님,
원형바둑판하고 놀다 뒤늦게 빵 가지고 나타나는 박상영대표님,
목숨걸고 초반엔 토끼 후반엔 거북이가 되는 김용배원장님,
산에서는 남자들을 귀 죽이는 조정은선생님, 그리고 현천행 대장등 9명이
동행 하여 서울둘레길 2코스 용마, 아차산 구간 12.6km(중랑,광진구)~
무산히 통과 했다
***대중교통,등산코스~
전철6호선 화랑대역4번출구 길건너 그린공원 첫번째 스탬프찍고~묵동천따라~
신내역~양원역~중랑캠핑숲~망원묘지공원~망우산~갈림길~용마산
깔닥고개쉼터 2번째스탬프찍고~아차산4보루~3보르~5보르~
1보르~해맞이광장~아차산성~관리사무소 앞에서 세번째 스탬프찍고~
광나루역2번출구앞 2코스 끝
***서울둘레길 2코는 학생소풍 및 가족단위 피크닉을 주제로 한 체험형 공원,
인위적 시설 최소화,건강한 숲을 주제로 한 생테학습 공원,소규모 야외무대
설치 등 청소년 중심의 문화중심 공원으로 조성한 중랑 캠핑숲이 있다.
***한용운,방정환,이중섭 등 17인의 잠들어 있으며,산책과 조깅을 즐길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5.2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가
놓여 있는 망우산 일대에 조성된 망우묘지공원~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 유적
으로 보이며 분포지역으로 볼 때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특히 고구려 유적인 건물터,돌널무덤,온돌,토기,철기 등이 출토된
아차산 보루가 있다.
***용마산(348m)은 아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아차산과 함께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룬다.예전에는 아차산을 포함해
남행산이라고도 불렀다.
***아차산(287m)은 예전에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 이라고도 하였고,마을 사람들은 아키산,에께산,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확한 자료를 찾아보면~~~
아시아일보 조재현 (best8944@hanmail.net) 기자>
***아차산성 - 민병두 두레문화기행 연구간사
■ 용마산(348m)
면목동 동쪽에 있는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망우리공원과 중곡동 간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리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예로부터 중랑천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보루 유적이 있다.
용마산은 1961년부터 1988년까지 27년간 서울시의 도로 등 건설에 필요한 골재를 채취하던
곳으로 1993년 용마돌산공원으로 개장됐다가 인공폭포를 조성하면서 1997년 용마폭포공원으로
새롭게 개장했다.
***풍수로본 용마산
한북정맥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 하나가 수락산-불암산을 거쳐 용마산으로 솟았다.
이 산줄기는 앞으로는 한강이 있고 좌측으로는 중랑천 , 우측으로는 왕숙천이 있어
힘껏 솟은 기운은 구리시청자락과 동구릉자락으로 뻗어있다.
간룡은 용마산에서 망우 산으로 뻗어 있고 용마산에서 제2헬기장을 거쳐 아차 산으로
내려오는 줄기는 지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한강으로 떨어지는 이 끝자락에는
세라톤 워커힐 호텔이 자리하고 있다.(아차산(峨嵯山)은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 구리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높이는 285m이다)
***용마산 전설***
여기 산 밑에 살던 사람이 한 번은 아이를 낳아서 보니까, 사내아이였는데.
그 어머니가 첫국밥을 얻어먹고, 잠깐 방을 나갔다 오니까, 갓난애가 온데간데없더랍니다.
"이 아이가 어디 갔을까? 참 이상하다!" 하고 그 어머니가 혼자 두리번거리며 방을 둘러보니까,
무슨 수로 올라갔는지 방안 선반에 어린애가 올라가서 놀고 있더랍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래 보니까,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더래요. 그래서 남편을 불러서,
"얘가 날아서 선반에 올라갔으니, 이거 어쩐다지요?" 그러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이 애는 우리 집이 말할 징조요, 역적이 나면 다 죽을 것이니."
그리고 부부가 의논한 끝에 죽이자고 결론을 보고,
그 어린것을 볏섬이나 맷돌 같은 것으로 눌러서 죽였다는 겁니다.
이렇게 부모가 장사 자식을 찍어 눌러 죽이고 나니,
아차산 상봉에서 용마가 나와 가지고 날아갔다고 해서 이 산을 용마산이라고 한답니다.
***형기풍수***
1). 용(龍)
용마산(龍馬山)은 서울 중랑구(中浪區)와 광진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높이는 해발 348m로 그리 높지도 않지만 오르고 내려오는 길이
바위로 이루어고 구리시를 대표하는 망우산보다 높기에 망우 산의
뿌리라 할 수 있어 태조산(太祖山)이라 정했다
-제일성(弟一星)
처음 만나는 봉우리를 제일성이라 했는데 제1헬기장으로 가는 길에는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바위가 많고 변화가 활발했다. 산은 좌우로
개장하여 용의 균형을 유지하였고 기복을 몇 번을 하여 험한 기를 탈살하고 있었다.
-중조산
제2헬기장으로 용마산에서 30분을 왔는데도 바위산이었고 간룡을 따라 바위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가정역과 구리 한다리 마을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곡으로 이어졌다가
오르막을 오르면 능선으로 이어지는 망우산 가는 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아차산이 갈라져 있었다.
-소조산
망우산(忘憂山)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 구리시(九里市)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 높이는 해발 281 m이다. 앞에서 기복을 크게 한 탓인지 과협처가
길게 유지되고 있었으며 바람이 거센곳을 지나 기복을 한번 하고나니 망우 산이었다.
망우산은 서울근교의 공동묘지로 유명하며 독립 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험한 기는 탈살된 순한 생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현무봉
망우 산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여기저기에 묘지들이 있었다.
능선은 삼육고등학교 옆으로 이어져 구리시청으로 접근하는데 등산로는
구리시청에 접근하기 전에 정각사 방향으로 우회하게 되어있었다.
난 구리시청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깠는데 우뚝 솟은 봉우리 밑으로 구리시청이
보이는데 숲이 우거져있어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안산
시청에 올라 안산을 찾아보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구리시립체육관이 위치한
자그마한 봉우리가 안산일까? 아니면 나의 집을 지나 남양주 지금동에 있는
봉우리를 안산으로 하는 건지 궁금하였다.
2). 혈(穴)
용이 북두칠성이라면 혈은 북극성에 비유한다고 한다. 망우 산에서 내려오는 용은 힘차 보였다.
능선 끝자락에 구리시청이 나오는데 소나무 숲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진으로 보는 구리시청은 두꺼비 형국을 하고 있었다.
구리시청 앞으로 도로를 건너면 이문안저수지가 나온다.
3). 사(砂)
-섬구형(蟾口形)두꺼비 형상
시청을 바라보고 있으니 꼭 두꺼비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청을 두꺼비의 입이라 보면 두꺼비는 물이 있어야 하기에 시청 앞에
저수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청 앞의 이문안저수지 말고,
정각사절 앞쪽에 샛아리 저수지란 작은 연못이 있고 길 건너편에는
지금은 이름이 호수공원인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호수가 있었을 것이라 보여 이물들이 진응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약 이 물이 없다면 두꺼비 입인 구리시청의 지형리 구리시민을 해할 수 있는 형국 일 것이다.
다행히 시청 바로 앞에는 저수지가 있고 시 외곽엔 물이 풍부하여
해할 수 있는 형국은 면하였으니 두꺼비가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중국 전설에 따라 시민 모두가 부자 되는 날을 기약해본다.
***두꺼비 전설***
중국 신화에서 달에 산다는 여신이다. 상아(嫦娥), 소아(素娥)라고도 한다.
원래 하늘나라 여신이었는데 후예와 결혼하여 땅에 내려왔다.
이 이름을 따서 달에 2010년까지 유인 우주선을 착륙시키려는
중국의 계획을 창어 계획(상아 계획)이라 창어(嫦娥)라는 명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창어는 중국 신화 속의 하늘나라여신이다. 아주 오래전, 하늘에는 열개의 태양이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너무 뜨거워 도저히 살 수 없게 되자,
천신이었던 후예는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왔고,
아홉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세상을 구하고 영웅이 되자 하늘에 가기를 포기하고
그만 땅에 눌러 않아 사는데 그의 아내 창어가 자꾸 하늘로 가자고 보채어
서왕모(西王母)에게 빌어 승천 불사약을 2개 구했으나 후예가 하늘로
가기로 한 약속을 저 버리고 하늘로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의 아내 항아(姮娥가 2 개의 불사약을 혼자 먹고 하늘로 올라가자 ,
이를 그리워한 후예의 미움을 받아 달로 쫓겨 가 두꺼비로 변했다는 것이다.
달에서 항아가 두꺼비로 변신해 양(陽)세계에 대치되는 음(陰)세계를 지배,
지상의 비를 관장하기에 이른답니다. 기우제 때 버들가지로 땅을 치며 두껍아 두껍아… 하고
노래 부르며 비를 비는 것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랍니다.
두꺼비는 행운, 부자, 집을 지키며, 건강, 아들 낳게..를 상징한다.
***峨嵯山(아차산)과 阿且山城(아차산성)
-광진구 아차산 입구 ‘한자표기 안내표지판’설치
광진구는 27일 아차산 입구에 아차산(峨嵯山)과 아차산성(阿且山城)의
한자 표기에 대한 안내표지판을 설치했다.
아차산이 도심속 쉼터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면서
아차산(峨嵯山)과 아차산성(阿且山城)의 한자표기가 다른 데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표기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안내표지판을 아차산을 찾는 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등산로 입구에 세웠다.
아차산 입구의 정덕훈 시비 옆에 설치된 세로 60×가로 40×높이 110㎝
크기의 안내표지에는 삼국사기 같은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한자표기가 다른 이유를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안내표지판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아차산성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인
‘광개토왕비’(414년)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阿旦’은 한자의 소리(音)을 빌어 표기한 것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아차성(阿且城)’으로도 표기되면서
이후 ‘阿旦’보다는 ‘阿且’가 쓰였으며, 고려시대 후기부터는
본래의 ‘아차’에 뜻(訓)을 부여한 ‘峨嵯山’이 쓰이면서
현재까지도‘峨嵯山’,‘峨嵯山城’으로 표기해왔다.
그러나, 아차산성의 경우 1973년 국가사적 제234호로 지정·고시할 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삼아
공식 안내문 등에서는‘阿且山城’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것.
정송학 광진구청장은 “아차산(성) 한자표기가 바뀌어온 과정을 살피는 것 자체도
역사공부이자 스토리텔링”이라며 “안내표지판이 설치됨에 따라
아차산성 한자표기에 대해 궁금해하던 구민과 아차산을 찾는
많은 이들의 궁금증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9년07월28일 13시58분 아시아일보 조재현 (best8944@hanmail.net) 기자>
***아차산성 - 민병두 두레문화기행 연구간사
한눈에 한강을 훤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아차산(峨嵯山,
혹은 阿且山)을 권하고 싶다. 아차산하면 그 이름의 어감 때문에 왕이나 장군 혹은
유명한 문인 등의 어떤 일화(이곳을 지나다가 무릎을 칠 정도의 후회를
하게되었다는 등의 일화)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묘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지만 막상 그 연원을 들어보면 거리가 영 멀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아단(阿旦)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조에 태조 이성계의 이름에 단(旦)자가 들어있어 비슷한 차(且)로
변경(피휘라고 한다)해서 아차가 되었다는 유래도 있고,
혹은 《삼국사기》에서 보듯 차와 단이 서로 섞여 쓰이다가 어느틈엔가
차로 정착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이곳 아차산의 위치를 물어보면 서울에 오래 살았던 사람조차도 어디라고
금방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오늘날에는 그 존재가 미미해진 것이 아차산이다.
더욱이 그곳에 산성(아차산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찾기 힘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워커힐이 어디있는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어렵지 않게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음 그 유명한(?) 워커힐이 등을 기대고 있는 산이 바로 아차산이라고 하면 "아! 그래요(?)"다.
만일 똑같은 질문을 한성백제 때의 서울 사람들에게 물어봤다면 아마,
혹시 간첩아니야 하는 의구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거의 정설이 되다시피한 한성 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한강 맞은편에 이 성이 위치해있고, 위치상 고구려침입에 대한 최후의 보루가
이곳일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아차산성의 수비를 강화한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을 정도이다.
건국 초부터 고구려와 끊임없는 경쟁 관계를 견지해온 백제로 보면
자신의 도읍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과 같은 아차산성을 잘 정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결국 475년에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도읍을 옮기게 된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이 장수왕의 파상 공격에 그만 붙잡히게 되었고,
이곳 아단성에 끌려와 끝내 비운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침입하자 신라에 원병을 구하러 갔던 아들 문주왕은
원병 일만을 이끌고 돌아오던 중에 왕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고구려와의 일전을 도모하지만, 당시의 여건과 주위의 만류에 밀려 그만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백제의 한성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이었던 아차산성과 그 주위의 유적들을 둘러보자.
우선 아차산성은 아차산 공원 관리사무실의 왼쪽으로 난 아차산 공원길로 접어들어
그 길을 따라 쭉 한 20분 정도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아차산성이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곳의 소유권이 워커힐에 속해 있어 접근을 금지하는 철조망을 먼저 만나게 된다.
철조망너머로 산성을 확인해도 되고,
군대에서 하듯 철조망 타기를 통해 고지(?)를 탈환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어쨌든 아차산성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6각형에 가까운 약간 길쭉한 평면에
전체 길이가 1,125m이고, 내부면적은 약 2만 5천평 크기의 성으로 밝혀졌다.
동벽과 서벽은 지형적인 여건을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가며 축조되었고,
북벽과 남벽은 경사면에 기대어 쌓은 석성이다. 특히 북벽의
경우는 8~10m 높이에 70~80°나 되는 급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임에도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성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산성의 북쪽 끝 해발 205.5m 지점에는 장대지가 있다. 흙과 돌을 섞어 주변보다 높게 돋궈 올렸고,
긴 쪽은 12m, 짧은 쪽은 9.4m 가량 되는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하고 있다.
여기 외에도 굽어지는 지점마다 돌출된 각루가 있고 또 평탄하게 조성된 점으로
미루어 소규모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아차산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또 하나의 보루를 살펴볼 수 있는데, 그곳은 아차산 공원 관리사무실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동산에 있다.
그 동산에 오르는 길을 따라 숨이 약간 차 오를 정도 산길을 걷다보면 몇 군데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산등성이에 패인 조금 넓은 웅덩이 정도로만 여겨져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공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참호보다는 훨씬 큰 데,
삼국 전쟁이 한창일 때 만들어졌던 토루라고 한다.
아차산 전역에 있는 유구들은 크게 아차산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이 다르다고 한다.
이곳이 백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북에서 쳐내려오는 고구려를 방비하기 위한 전방 기지였고,
고구려가 이곳을 쟁취한 후에는 남쪽에서 쳐 올라오는 백제를 방어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방어 대상을 달리하는 까닭에 수비 위치도 달라졌고,
그 결과 서로 상이한 양식의 유구가 남아있게 된 셈이다.
***장성
그냥 산으로 오르는 평범한 산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왼편과 오른편 보다
높게 솟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좀더 오르면 이 길이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이어진다.
한편, 아차산 공원으로 들어서면 그 왼쪽으로 영화사가 눈에 띈다.
그 뒷쪽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면 장성(장한성)의 유구를 만날 수 있다.
주변보다 돌무더기가 좀더 눈에 띈다는 점외에는 별다른 느낌도 없는
등산로에 불과하지만 주위보다 약간 높게 턱을 이루고 있고 사람의
손에 의해 쌓인 것임이 확인 가능하다. 한때 뚝섬을 중심으로 하는
살곶이목장의 담으로도 알려졌던 곳이다.
살곶이목장은 조선 태조 때부터 태종 때까지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국립목장이다.
그 둘레가 약 20㎞에 이르는 것으로 아차산 줄기를 동쪽 경계로 하고,
배봉산에서 한양대가 자리잡은 구릉까지를 서쪽 경계로 하고 있다.
북쪽 경계는 중랑교 아랫쪽에서 면목동 위쪽의 아차산 줄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선 말을 놓아 기르는 한편 왕이 참관하는 시위대의 군사 훈련과 열병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장성은 아차산 보루를 연결하는 형식으로 길게 축조되어 한강 하구를 비롯하여
서·북 방향에서의 적을 방어하는 목적에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근처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는 백제 토기편은 장성의
존재가 바로 도성의 외곽에 대한 강화된 방어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그 능선에 올라보면 한강 상류뿐만 아니라 63빌딩이 있는 하류까지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전략적 요충으로서 이보다 훌륭한 곳이 있을까 싶다.
***고분
아차산 전역에는 많은 고분이 산재해 있다. 지금은 거의 다 훼손되어 쉽게 찾을 수 없다.
장성의 정상 부근에서 아차산 쪽으로 내려오는 중턱에 방치되어 있는
이 고분은 그래서 매우 아쉬운 느낌을 준다.
더욱이 이 지역에는 당시의 고분이 여기 저기 산재해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50여기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 확인된 70여기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수혈식 석곽묘인데,
풍화 암반 지대를 파고 그 위에 20~30㎝ 정도 크기의 다듬어진 돌을 7~8단 쌓아 네 벽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얇게 점토를 깔고 그 위에 얇은 돌을 이용하여 시신 받침대를 놓았다.
대략 석곽묘의 크기는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2.4×1.5m 내외이다.
또한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의 적석총 부근에서나 볼 수 있는
수인묘(守人墓) 형태의 횡혈식 고분도 우미내 마을 서편 바위산
정상부(대성사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 중간 부근)에서 발견된 바 있다.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조성되었는데, 길이 240㎝, 폭 80㎝, 높이 90㎝ 가량의 규모를 갖는다.
원래 위에 덮였을 봉토는 지금은 거의 유실되고 남아있지 않다.
고구려와 관련해서는 이곳 아차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의동 유적을 통해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구의동의 유적은
한때 무덤자리로 파악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출토물의 성격 규명을 통해 서울대 조사팀은 최근 발간한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1997년)」에서 고구려의 요새지로 최종 확인한 바 있다.
어쨌거나 이곳 구의동을 포함한 아차산 전역에서 고구려의
유적이 새롭게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강을 놓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삼국의 쟁패를 오늘에 되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이런 현장은 그냥 스쳐 지났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재삼 돌이켜보도록 하는 마력을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저 아래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한강에게로 달려가면
그 날의 역사를 속 시원히 말해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다음 호엔 3코스가 산행기듣 기대 하세요~^^
서울둘레길 SEOUL TRAIL
서울둘레길은 서울의 아름다운 역사,문화,자연생태 체험을
스토리로역어 국내외 탐방객들이
느끼고 배우고 체험할수있는
도보길.서울시의 숲길 마을길
하천길 을 연결한
서울둘레길 8코스
157km를 따라
누구나 천천히 산책하며
여유와 사색을즐길 수
있도록 구성 되어있다
서울 둘레길 157km
1코스-수락.불암산코스-14.3km
2코스-용마.아차산코스-12.6km
3코스-고덕.일자산코스-26.1km
4코스-대모.우면산코스-17.9km
5코스-관악산코스-12.7km
6코스-안양천코스-18km
7코스-봉산.앵봉산코스-16.6km
8코스-북한산코스-34.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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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천행 원문보기 글쓴이: hch8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