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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9강
말씀/ 마가복음 6:1-29
요절/ 마가복음 6:7
둘씩 둘씩 보내시며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은택 형제는 휴가 내어 중건형제와 함께 강원도 속초까지 자전거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본래는 저랑 가려고 했는데, 제가 두려워 포기하는 바람이 중건형제가 대체 투입되었습니다. 가지 않고 나서 속으로 많이 후회했습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기에 둘씩 가는 것이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체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며 감당해줄 아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믿음의 여정에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까지 대략 30km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고 열두 해 혈루증 여자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환호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기대감은 부풀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보다 최소 두배 이상 환영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역시나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 권세는 회당에 모여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권능이 어찌됨이냐”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3)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흙수저 집안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평가입니다. 그 누이들이 함께 있음을 반문합니다. 우리와 동급인 사람이 무슨 선지자? 인정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면, 오히려 감탄해야 마땅했습니다. “얼마나 탁월했으면 흙수저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이런 지혜와 권능을...! 정말 놀랍습니다”, 말씀의 탁월함과 권능의 역사를 목격했고 친숙한 관계를 가졌는데도 배척했습니다.
익숙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학원 폭력의 무서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동료 학우에게 받는 따돌림과 비난과 폭력의 상처는 존재 의미 자체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세계관의 붕괴와 혐오와 냉소에 빠져 살아갈 의미를 잃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6절을 보면,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나운 광풍에도 놀라지 않던 분이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는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으로부터 오는 충격을 어떻게 소화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에 유행했던 격언입니다. 누군가를 신이 보낸 선지자로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관계설정을 해야 하는데, 이전의 관계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쉽지 않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가난한 목수집 아들, 꼬맹이 시절부터 봤던 인간 예수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 관계를 재설정해야 합니다. 이전의 기억에 갇혀 새로운 관계설정을 하지 않으면, 그를 통한 새 역사를 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리숙하고 여전히 부족한 모습 이상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잘 안다는 생각이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악기 레슨 선생님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나름 이론과 몸에 익힌 습관을 가진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어렵다’, 새로운 관계설정을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향에서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는 사람의 겸손한 마음과 공명이 되어 나타납니다. 결과적으로 어느 곳보다도 은혜와 축복이 넘쳐야 할 자리가 가장 썰렁한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체면이 상한 쪽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오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충분히 예상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다. 예수님의 배척당하심은 아무리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라 할지라도 배척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칭찬과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못하고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도 그러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 복음의 일군으로 살려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갈림길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그리스도의 길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만민구원역사를 이루는 길을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너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보고 믿게 할지어다”(15:31,32) ‘우리의 기대와 요구를 만족시켜보라! 그러면 믿겠다!’, 지극히 합리적인 소리입니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끝까지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이론으로 혹은 어느 날 불같은 한방으로 준비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한 예수님처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배척당하고 아픔을 겪는 과정을 거치고 또 거치면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훈련하신 후에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왜 둘씩 둘씩 보내셨을까요? 한 사람씩 보내면 더 많은 지역에 보낼 수 있고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도 있습입니다. 둘씩 보낸 첫 번째 목적은 동역입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만 세상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악의 세력은 강하고 세상은 치열하니, 서로서로 지혜를 모으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동역이 필요합니다. 믿음 있는 남편과 믿음 있는 아내가 만나는 가정교회의 중요성도 거기에 있습니다. 혼자 독처하는 것은 유혹에 약하고 시련에 흔들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둘씩 둘씩 동역의 역사입니다. 하나가 말이 막히면, 다른 하나가 말함으로써 복음 전도를 섬깁니다. 하나의 지혜가 막히면 다른 하나의 지혜가 새 길을 발견합니다. 하나가 연약함에 빠지면 다른 하나가 힘을 실어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그렇게 둘씩 동역하여 생명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물론 둘씩 둘씩 보내는 것이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둘씩 움직이다보면 서로 오해하고 서로 상처주고 서로 힘을 깎아먹을 수 있습니다. 기질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각자 서 있는 위치가 다르기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합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지라도 둘씩 둘씩 보내신 두 번째 목적은 성숙입니다. 둘씩 움직이며 만나는 관계의 위기는 자기를 발견하는 좋은 거울이 됩니다. 내가 어떤 인간이며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피드백 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됩니다. 2인3각 달리기처럼, 자기중심에서 상대방 중심 더 나아가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 이동하는 훈련이 됩니다. 교만이 깨어지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도 기울일 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둘씩 둘씩 보내신 것은 동역과 성숙을 이끌어 내는 예수님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둘씩 둘씩 사람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씀했는데, 더러운 귀신 따로 있고 깨끗한 귀신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귀신은 다 더럽습니다. 음란과 탐욕과 미움과 시기와 거짓과 폭력성을 갖고 있습니다. 굳이 더러운 귀신이라고 표현하신 이유는 귀신의 파괴적인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돈이 없음이 아니요 영적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축복된 결혼을 할지라도 음란의 영을 뿌리치지 못하면 가정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말입니다. 탐욕의 영이나 교만의 영 또한 그러합니다. 수없이 많은 은혜의 체험들을 다 잊어버리고 염려와 불평과 두려움에 갇혀 악수를 두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여 마귀의 세력을 물리쳐야 권능을 덧입게 됩니다. 사람 안에 감추어진 더러운 영과 싸우게 되고 환난과 고난 너머에 있는 연단의 손길을 발견하고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여행을 위하여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도록 했습니다. 오로지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돈도 찔러 주고 이것저것 물품도 챙겨줍니다. 예수님은 지팡이만 가져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라면 VIP 신용카드만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왜 빈털터리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의지의 대상이 된다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재산에 민감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안에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주목하지 않는 경향을 가졌습니다. 무엇을 살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주목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적으로 가진 것들이 바닥이 나면, 하나님을 의식하는 감각이 있을 때보다 훨씬 발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3) 복음 전도는 지식 싸움이 아니라 확신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실제적인 믿음을 복음에 담을 때, 능력있는 복음으로 역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2,13절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본주의 시대를 향한 위대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감사하면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자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해야 합니다. 집구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이집 저집 옮겨 다닐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제자들을 배척하는 거친 마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11) 제자들은 그런 불상사를 당할지라도 슬퍼하거나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마을에서 나가 다른 마을로 옮겨갈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릴 때, 배척하는 사람들은 이미 문 닫고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 스스로에게 증거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배척당하는 자가 불쌍한 자가 아니라 배척하는 자가 불쌍한 자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티끌만큼도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자들, 하나님의 축복에서 영영히 떨어져나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것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첫째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숨겨진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기 원합니다. 회개 없이 구원받기 원하고 회개 없이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으면 구원도 없고 성령의 열매도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종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로 말하면 고발당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가 갈수록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그림입니다. 세상은 회개의 메시지를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도록, 숨겨진 어둠을 드러내고 죄사함을 얻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둘째는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고 병들게 합니다. 복음의 일군은 영혼의 의사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위로와 섬김과 사랑의 기름을 발라 힘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씨름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씩 둘씩 나가서 회개와 회복의 사역을 감당하자, 예수님의 이름 권세가 드러났습니다. 헤롯이 두려워 떨게 된 사건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의 고백이 특이합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어떤 이는 예수님을 엘리야, 어떤 이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15) 16절을 보십시오. 헤롯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난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헤롯의 모습은 2가지를 생각게 합니다. 첫째, 의인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적으로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자의 심장으로 담대하게 헤롯의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도록 도전했습니다. 헤롯은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화가 나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18) 헤롯은 그나마 양심이 조금 남아있어 더 이상 세례 요한을 어찌하지 않았는데, 영부인 헤로디아는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21-27절을 보면, 패악무도한 인간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춤추게 한 후에 딸의 춤값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청합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시키는 엄마나 그대로 구하는 딸이나, 거기에 말려들어 실제 명령을 내리는 헤롯이나, 완전 막장집안입니다. 세례 요한은 악인들의 장난감 취급을 받아 죽었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은데..., 돌아온 탕자, 부자 삭개오, 사마리아 여자..., 자세히 기록할수록 은혜로운 이야기들을 놔두고 마가는 왜 끔찍하고 억울한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는 것입니까! 의인이 고난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메시지입니다. 요한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의인이 순수하고 용기를 가질수록 고난의 강도는 커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러합니다. 의인의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미움을 당하는 길이며 아픔과 죽임을 당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순전하게 살았는데 손해 보는 것, 희생하며 살았는데 아픔을 겪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의인의 고난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헤롯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은 세례 요한의 고난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메아리처럼 보였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다시 부활했습니다. 그와 같이 지금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배척과 아픔은 헛된 고난이 아닙니다. 다음에 오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 고난받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음에 오는 사람의 메시지가 힘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상관없이 살았던 누군가가 회개했다면, 혹은 고민하고 갈등하게 되었다면, 그를 위한 고난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난 받은 것들이 쌓여 생명구원역사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 여정을 살펴보면, 누군가의 고난과 희생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숨같이 소중한 자존심을 내려놓은 사람, 생명처럼 소중한 시간을 희생한 사람, 주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내어 도전한 사람, 믿음의 울타리가 되고자 묵묵히 인내하며 지켜봐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의 고난은 바보처럼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위대한 복음의 일군입니다. 생명의 징검다리입니다. 생명과 영광의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역사를 섬기기에 쉽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의인으로 세상 살기가 힘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마가가 섬겼던 초대교회는 200여년동안 로마제국의 지속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극심한 박해와 시련은 교회를 끝장낼 것처럼 보였는데, 교회는 끝장나지 아니하고 다음 세대를 향해 생명구원역사의 바통을 넘겼습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처럼, 헤롯에게 죽임당한 세례 요한처럼 자기 시대의 고난을 감당해내었던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들도 신앙의 여정에서 찾아오는 고난들을 담대한 마음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견디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씩 둘씩 보냄받은 것처럼, 서로 격려하고 서로 힘을 실어주며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