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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서쪽 하늘에서 달을 건지다
김 기 현
초승달은 밤이 긴 겨울에 보기가 좋다.
저녁노을이 차츰 옅어지며 샛별을 친구삼아 함께 나타난 초승달은 낮이 긴 여름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달이기도 하지만, 겨울에 보는 초승달은 더욱 새초롬하여 좋다.
어스름이 찾아드는 초저녁 하늘의 푸른빛과 노을의 엷은 주홍빛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검정과 회색의 무채색이 함께 섞인 바탕색깔 위로 노란 띠를 두르고 나온 달은 이제 막 동화극 무대에 나서기 위하여 분장을 하면서 그린 여자 아이의 동그란 눈썹 같이 예쁘다.
초승달을 본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 말하는 문캘린더(음력)의 새 달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달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달력은 음력이 표기되어 있지 않은 달력이라 매년 고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주는 달력을 들여다보아야만 음력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음력의 날짜를 일 년에 한두 번 외에는 그리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의 생일도 양력으로 챙기니 추석이나 설 명절을 제외하면 음력은 계산할 필요도 없는 날짜가 되고 만다.
추석이 들어있는 달의 초승달은 다른 달의 초승달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어느 날 문득 초승달을 보고서 음력으로 몇 월이 되었겠구나, 계산을 하다 그 달에 추석이 있는 달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때부터 나는 달을 보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게 된다.
저 달이 점점 커져 만월이 되면 추석이 되는구나 하는 설렘에 달을 전 보다 더 자주 쳐다보고는 하나 정작 추석날이 되면 마음은 그리 허전할 수가 없다.
추석날 보게 되는 달은 나의 가장 쓸쓸한 달이고, 내가 왜 이곳에서 저 달을 보고 있어야 하나 하는 향수병에 젖어 며칠은 입맛을 잃고는 한다.
나는 초저녁에 뜨는 그믐달을 보는 나라에 살고 있다.
13시간이나 걸리는 오랜 시간을 비행기를 타고서 태평양을 건너온 나라의 농장에서 처음으로 초저녁달을 보았을 때였다.
온종일 허리를 구부려 온실에서 꺼낸 어린 모종을 밭에다 심고, 잡초를 긁어내느라 허리를 펴지 못하였는데, 일을 마치면서 구부러진 몸을 일으켜 뒤로 젖히던 순간 나는 “아! 달이다.”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때 나는 밀레의 만종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음력의 새달의 시작은 초승달부터 시작한다.
초승달은 달의 오른쪽부터 차기 시작하여 차츰 상현달이 되고 보름달이 되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믐달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북반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배운 내용일 뿐이라는 것을 이 나라에 와서 알게 된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여보, 이리 나와 저 달을 좀 봐. 무언가 이상하지 않아?”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하나도 이상한 곳이 없는데......”
“아니, 잘 좀 봐봐. 어딘가 이상한 곳이 있을 테니 말이야.”
아내는 한참동안 달을 쳐다보면서도 내가 말하려고 하는 달의 차이점을 찾아내지 못한 채 달이 너무 크다거나, 지금 월식 중인가? 하는 말만 하면서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을 잘 봐, 지금 달의 어느 쪽이 비추고 있어? 오른쪽이야? 왼쪽이야?”
“왼쪽인데요.”
“그렇지, 분명히 왼쪽이지. 그러면 저 달은 초승달이야? 그믐달이야?”
“글쎄? 초승달인가? 그믐달인가? 그런데 왜 그것이 중요한 거에요?”
“잘 생각해 봐. 우리는 분명히 달의 오른쪽이 밝게 빛나면 초승달이라고 배웠잖아, 그런데 저 달은 지금 왼쪽이 밝게 빛나고 있으니 우리가 배운대로 하자면 그믐달이 되어야 하잖아. 그런데 지금 저 달은 초승달이란 말이야, 신기하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것이 뭐 그리 신기하다고 추운데 사람을 불러내고는 그래요. 빨리 밥이나 먹으러 들어가요. 국 다 식었겠네.”
집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쳐다보며 나는, 이 정도면 신기한 것 아닌가? 하며 자꾸만 아내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이 나라의 계절이 북반구에 있는 나라와 정반대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쩌면 달의 모습까지도 거꾸로일까 생각하며 나는 마치 대단한 것을 발견이라도 한 듯 오랫동안 신기해하였다.
밤에 달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일은 내게는 좋은 일이다.
밤에 일하는 나에게 그만큼 일거리가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달은 한 곳에서 일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동안 잠시나마 피곤함을 풀어주며 나와 가족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의 여유를 가져다준다.
가능하면 더 자주 달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사는 동안 내가 하여야 할 나의 숙제다.
명상을 하기 위하여 바라보는 달도 아니고, 시상을 떠올리거나, 임의 얼굴, 고향 생각을 하기 위하여 바라보는 달은 아니다.
이 먼 나라까지 내가 데리고 온 나의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하여 쳐다보아야만 하는 달이기에 달을 자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동생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위독하다고 한다.
심부전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갑자기 상태가 안 좋다며 나보고 나올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간다고도, 못 간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동생이, “오빠가 알아서 해.” 하며 먼저 전화를 끊는다.
그 목소리에 섭섭함이 배어있다.
슬펐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나의 일기 중에서)
3년 전 8월의 겨울 저녁이었다.
나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서 정말 난감하였다.
어머니께서 당뇨병으로 병원에 다니느라 가끔 서울에 올라가는 것은 알았지만 갑자기 이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면서 나는 집안에만 계시지 말고 매일 하루에 1시간 이상씩은 걷기를 하라고 말하였다.
동생들도 엄마가 엄살이 좀 심한 것 같다고만 하였기에 그런가보다 생각하였지 설마 병원에 입원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난데없이 위독하다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내게는 돌발상황이라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나에게는 통장의 잔고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처지였다.
나와 아내의 비행기 표를 끊고 나면 정말 통장은 바닥을 드러내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난감함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답답함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 날도 하늘에는 음력 7월의 달이 떠있었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남들이 들으면 저런 불효막심한 일이 어디 있나? 라며 손가락질 받을 일을 고민하여야 하는 처지가 서글펐다.
남들에게 이를 어떻게 이해 받을 수 있을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형편이 어렵지만 그래도 갔다가 옵시다. 어머니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실 텐데 마지막 얼굴이라도 뵙고 와야지요? 우리 갔다 옵시다.”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어머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밤 사이에 세 통의 전화메세지가 남겨졌다.
모두 다 “어, 뭐라고 하는데.....”,“뭐라고 그러지......”하다가 끊긴 내용들이었다.
메시지를 남기라는 내용이 영어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모두 중간에 끊었다.
전화기에 한국말로 “지금은 부재 중이오니 전하실 내용을 남겨주세요.” 라고 녹음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가 전화기를 구입할 때 미리 녹음되어 있던 유창한 영어 발음에 놀라 메시지를 남기지 못한 모양이다.
짐작으로 어머니께서 정말 위독한 모양이라 생각되어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엄마가 오빠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오빠가 왔다가 갔으면 좋겠어, 오빠의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알지만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한 번 왔다가 가.” 하는 동생의 목소리에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혹하였다.
비행기표도 가장 비싼 성수기 요금이 적용되었고, 대한항공으로 연결되는 오클랜드까지의 국내선 요금도 비쌌다.
고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하루에 한 편 밖에 없으니 아무리 급해도 오늘은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행사에서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나오면서 시내에 나가 친지들에게 나누어줄 프로폴리스와 건강식품 들 몇 가지를 샀다.
어머니의 상을 치르게 되면 문상을 다녀간 이들에게 답례라도 할 수 있게끔 가져다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우리는 1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서 태평양을 건너 처음으로 인천공항을 통하여 고국 땅을 밟았다.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에 가보는 고국의 풍경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영종대교를 건너 경인고속도로로 들어서는 인천의 풍경도 낯설었고, 자주 다니던 잠실 터미널에서도 방향이 구별되지 않았다. 더구나 공중전화 박스를 찾을 수 없어 동생네 집에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학생에게 핸드폰을 잠시 빌려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는 가까스로 동전을 바꿔 지하철 구내에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줄 몰랐다.
오전과 오후 1시간씩 주어진 면회시간이 아니면 가족의 면회도 안 되는 곳이 중환자실이었다.
그런 곳에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며칠 전만 하여도 병원에 정기검진하러 서울에 올라가신다고 동생 집에 가신 어머니가 아무 때나 면회도 할 수 없는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다니. 그리고 내가 그리고 와보고 싶었던 조국을 어머니의 임종을 맞이하러 와 있다는 이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고, 야들아. 애 오라고 했노, 아이고 야들아. ..가자, 나를 좀 일으켜 세워라. 얼른 집에 가자. 내가 콩나물밥 무쳐 밥 해 주께. 야들아. 나 좀 일으켜 세워라.....”
어머니는 동생들이 “엄마, 오빠가 왔어. 엄마가 기다리던 오빠가 왔으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눈 좀 떠 봐.” 하는 소리에 정말 기적처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나를 확인하고는 여기가 어디냐면서 묻더니 동생들에게 나를 왜 오라고 했느냐고 나무랐다.
어머니는 지금 당장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나에게 콩나물밥 무쳐서 밥을 해주겠다면서.
사람들은 나의 이 말을 믿을 수 있으런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어제까지만 하여도 의식이 전혀 없이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생들로부터 오빠가 온다는 말을 듣고(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어머니가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는 상태가 호전되어 어제 오후부터 산소호흡기를 떼어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왔다는 소리에 중환자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눈을 뜨고 거기다 말까지 한 것이었다.
담당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동생들 모두가 눈이 동그라지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정말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손과 아내의 손을 힘주어 붙잡으면서 연신 “이곳이 어디로?”하며 집으로 가자고 조르셨다.
중환자실에 누워서도 아들에게 콩나물밥을 무쳐 밥을 해주겠다는 어머니는, 아들이 돈이 없다는 핑계로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만나러 오기를 주저하였다는 것을 알면 무어라 하였을까?
그래도 어머니는 ‘괜찮다, 너희들이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라고 말하였겠지 생각하니 서러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열흘이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왔던 일정이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아 일정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면회를 하는 날 오전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저녁에 다시 면회 오겠다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이 모습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꾸만 뒤가 돌아다 보이는데 어머니가 눈치를 챌 것 같아 뒤를 돌아다 볼 수가 없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오던 날, 비행기에서 달을 보았다.
열흘 동안의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가 새벽이 오는 여명에 서쪽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며 우리가 떠난 것을 알면 어머니는 어쩌면 명줄을 놓아버릴 지도 모르는데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휴가를 얻어서 오는 직장이 있는 처지가 아닌 나로서는 마냥 고국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클랜드에 내려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집으로 오는 하늘에서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보았다.
어머니가 무지개를 타고서 가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정말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었다.
어머니가 떠나가시려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방정맞은 소리가 될까 봐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의 차를 타고서 집에 도착하여 방에 앉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오빠, 엄마가 방금 하늘나라로 떠났다. 오빠가 힘들까 봐 오빠가 가고나서 엄마가 눈을 감았다. 오빠......”
동생 말마따나 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서야 눈을 감은 어머니는 어쩌면 그리도 아들을 사랑하였을까?
하루를 더 머물렀으면 어머니는 하루를 더 살고, 열흘을 더 머물렀으면 열흘을 더 사셨을까?
그렇다면 나는 결국 내가 살기 위하여 어머니의 명줄을 끊은 불효자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서리쳐졌다.
중환자실에서 조금씩 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한 어머니는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호사는 물을 주면 세균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절대로 물을 주지 말라고 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화를 내시면서까지 물을 찾았건만 나는 끝내 물 한 방울 입에 넣어드리지 못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이라도 시원스럽게 마시다 가시게 할 걸 하는 죄스러움에 “어머니!” 하고 소리쳐 불렀다.
이제 나 또한 자식을 새로운 가정을 꾸미려 떠나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식을 내보내면서 마음이 애틋한 것은 이제부터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에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마음도 이러하였을 것이다.
얼마나 아들이 보고 싶었으면 눈을 감지 못하고 아들을 그토록 기다렸을까?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달을 다시 건져 올리며 달 속에 계신 어머니를 보았다. 이렇게 쉽게 가실 줄 알았으면, 간호원 몰래 물이라도 실컷 마시게 해들릴 걸 하며 오늘도 아내는 어머니가 마실 물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식탁 한쪽에 올려놓는다. 그 물그릇 속에 달과 함께 어머니의 얼굴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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