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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무술의 기원 배경과 무술 유형에 대한 일고(一考)
박기동․김용수Key words : primitive society, Gin and Hahn periods, Chinese martial arts, origin background.
kimys1655@hanmail.net
(강원대학교) *한국스포츠사랑연구소(김택호)
The Origin Background and Types of Chinese martial arts
Park, Ki-Dong․Kim, Yong-Soo (Kangwon National Univ)
요 약
이 연구는 상고시대인 원시사회부터 진‧한(秦‧漢)시대까지 중국무술 기원의 배경과 무술 유형을 알아보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원시사회의 무술은 종(種)을 보존하고 개체의 생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 활동으로, 잘 싸우기 위한 인위적 노력의 결과였다. 둘째, 하‧은‧서주시대의 각저희, 간척무 등은 중국무술의 최초 형태로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 장수, 투지 배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무술의 기본 틀인 도수무술(徒手武術)과 격투 기술이 유행하였다. 셋째, 중국 역사에서 전쟁에서 개인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들던 시기로, 전장에서 개인기를 중시하면서 무술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무협 집단이 생겨났다. 넷째, 진‧한(秦‧漢)시대에는 도무, 월무, 검무, 쌍극무 등 투로 운동과 비슷한 무련 종목들이 출현하였으며, 수박, 각저, 격검 등이 격투 형식의 무술 활동으로 나타났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origin background and types of martial arts by studying how it was developed and soaked of Chines martial arts by arranging them according to time period from ancient times to before Gin and Hahn periods. The conclusions are as shown below. First, The martial arts of primitive society was the result of artificial endeavor to struggle hard as instinctive activities of animals to preserve species and survive individually. Second, in ancient times, martial arts like Gagjeohee and Gancheokmoo were the first form of Chinese martial arts and used as means of improving mental and physical strength, treating illnesses, living long and training a fighting spirit. Third, in the age of civil wars, groups training only martial arts professionally appeared because personal combat skill were regarded as important. Fouth, in Gin and Hahn periods, dancing sports similar to Torow exercise such as Domoo, wallmoo, Gummoo, Ssanggeukmoo and combative sports such as Soobak, Gakjeo, and Geokgum appeared.
Ⅰ. 서 언
무술 중국에서는 술(術)과 법(法)을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도(道)를 사용하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예(藝)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임동규, 1990: 9). 무술, 무예, 무도의 세 가지 개념들은 각 나라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나름의 의미를 축적해 왔고 그러한 의미의 총합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분야에 대한 이해를 더욱 확장해 주고 있다. 術, 藝, 道는 한‧중‧일 삼국에서 시대를 통하여 무적(武的) 활동 속에서 추구해 온 가치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기 위한 개념의 구성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들 개념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맥락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개념을 활용하는 것이 타당하다(양진방, 1999: 34).
의 역사는 인류 문명과 함께 맥을 같이 하면서 사냥, 대인 격투, 전투 수단이었던 것이 현대에 와서는 건강 증진과 정신 수양 그리고 철학, 교육, 종교, 예술적 가치로 전환되고 있다.
무술의 기원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활하면서 닥치는 주위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무술은 인간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술은 과거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생존을 위한 싸움 기술로 생활 수단의 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무술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 기술 무술과 싸움 간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 싸움과 무술의 차이는 동물과 인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류이지만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듯이 무술도 싸움의 한 종류이지만 싸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송형석, 2001: 47).
로 격투 기술은 당시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삶의 기술이자 교육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무술에 대한 개념을 일반적으로 생존을 위한 방어 또는 먹이사냥 과정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송형석(2001: 47)은 “무술이란 싸움을 보다 잘하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 과정과 그 결실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즉 싸움을 보다 잘 하기 위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수련하며, 정신을 담금질하는 일련의 연습 과정과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습득된 싸움의 경지, 그리고 그것이 행위로 표출된 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술은 철저한 인간학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임동규(1991: 7)는 “무예사는 곧 인류가 어떻게 싸워왔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무예와 혼용하여 사용되는 대표적인 용어는 무술(武術)이다.
무술의 기원에 관한 담론은 인류의 최초의 싸움의 기원이나 동기에 관한 시비로 귀착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보호 본능 또는 종족 보존 본능 등으로 결론이 난다. 그러나 기원에 관한 주장을 무술하는 사람들의 자기 보호적 논리가 아닌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결국 자기 보호, 종족 보존의 문제는 진화론적으로 이미 해결된 타 동물간의 문제였을 것이다. 무술 문화의 발달은 그 초기에서부터 싸움이나 신체적 안전과는 다른 인간의 다양한 원초적인 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건강과 장수를 추구하려는 도인 또는 양생술이라는 독특한 신체 문화로 발전하였고, 다음으로는 종교가 갖는 다양한 속성과 기능이 무술 문화의 한 축으로서 융합되어 발전해 왔다. 그리고 무용[舞], 공연 예술[劇], 교육[藝] 등의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다양하게 문화적 기능과 역할을 하면서 성장해 왔다(양진방, 2002: 45).
무술의 탄생은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자구 노력은 도구와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각종 신체 단련법과 여러 가지 맨손 무술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며, 싸움 방식과 도구의 결함은 다양한 무기술(武器術)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고, 맨손무술과 무기술을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병법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집단적인 싸움 전략이 고안되었을 것이다(송형석, 2001: 50). 따라서 부족은 항시 다른 부족의 전쟁에 대비하여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하여야 하였고, 전사(戰士) 수련의 무(武)적 능력은 인간 상대의 전쟁을 위한 차원에서 발전하였다(장재이, 2004: 133).
중국무술의 명칭을 각저, 권용, 무예, 기교, 장수, 수벽, 무희, 권예, 우슈, 공부, 무공, 권각, 권기, 권법, 금나 등 다양하며, 문파별로 가지는 명칭 또한 다수이다(박귀순, 2008: 78). 박귀순(2006: 53)은 중국 각종 서적에 보이는 1928년도 이전의 중국무술 명칭을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에서 ‘중국에서는 36개의 명칭이 혼용되고 있는 것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외에도 각 문파에 따라서 ’파 홍권’, ’파 북권’ 등과 같은 다른 명칭도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오늘날 무술의 중심 모습으로 맨손무술에서 찾으려 하고 있으나 명‧청시대 이전까지의 맨손무술은 무술 문화 전체에서 매우 빈약한, 제한적인, 주변적인 형태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무술(武術)은 술(術)의 자의(字意)에 바탕하여 기술의 중시, 그리고 기술의 실전적 측면을 강조하여 생사를 건 대인 격투 기술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강조하는 관점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으로서 무술은 정신적 측면에 대한 의식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거나 강조되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전재하는 경우가 많다(양진방, 1999: 32).
권법은 박수(搏獸), 권용(拳勇), 박살(搏殺), 비살(臂殺), 기격(技擊), 수박(手博), 수격(手格), 등의 이름으로 각저와 구분하였는데, 여러 사서(史書)에 각저와 무술이 혼동하여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무술의 형태가 화려한 기교나 섬세하고 미묘한 권법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존하는 사서(史書)들에서 종합해 보면 씨름이나 레슬링 같은 시합이었음이 틀림없다.
중국무술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동양무술과 관련한 부분적인 내용이거나 나영일(1997). 동양무술의 과거, 현재 미래; 송형석(2001). 東洋武術의 起源과 發達에 관한 一考; 허건식(2001). 동양무술의 문화적 해석; 김창룡・이병익・허건식(2002). 동양무도의 심층 구조에 관한 고찰; 양진방(2002). 근대 무술론; 백경화・지치한(2006). 동양무도에 나타난 심법의 형성과 특성에 관한 연구; 류병관(2006). 동양무도의 정신성 고찰; 이성곤(2007). 현대인의 생활에서 무예의 필요성; 송일훈・조충현・안진구(2008). 한‧중‧일 격투무술에 관한 연구; 이성동・김주화・김산(2008). 한‧중‧일 무예에 나타나는 流사상에 관한 연구.
중국무술이 가지고 있는 발달사 내지는 근원・발전적 해석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재이(2000). 근대 이후 중국무술 발달사 연구; 신수용(2007) 무측천의 무거제 연구; 박귀순(2008). 중국 무예사 연구.
중국무술과 우리나라 무예나 일본의 무도 등과의 연관성이나 보완 관계 면에서 볼 때, 더 넓은 동양 무술(武術)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에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 먼저 중국무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연구는 중국무술이 원시사회부터 진․한(秦‧漢)시대까지 중국무술의 기원 배경과 무술 유형을 알아봄으로써, 상고 시대의 중국무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중국무술 관련 서적과 국내 중국무술 관련 문헌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중심으로 원시사회, 하‧은‧서주시대, 춘추‧전국시대, 진‧한(秦‧漢)시대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Ⅱ. 원시(原始)사회의 중국무술
선사시대 인간들은 몸에서 생겨나는 힘을 가지고 동물이나 다른 인간과 싸웠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기라는 것도 생겨나고 ‘어떤 식으로 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어디를 때리면 빨리 죽일 수 있을까? 등에 대한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민의 결과 싸움의 방법이 보다 체계화되었을 것이며, 체계화된 싸움이 전승, 발전되면서 무술(武術)이라는 정형화된 싸움 형식이 생겨났을 것이다(송형석, 2001: 49). 이렇게 볼 때 무술은 보다 잘 싸우기 위한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선사시대에 중국 초기 민족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사회생활 중에는 무술을 익히는 습무(習武)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농경과 습무는 일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생활 내용으로, 백성들은 평상시에는 봄에 사냥을 하고 여름에는 농사를 지었다. 또 가을과 겨울에는 사냥을 하면서 틈틈이 무술을 연마하였다(姜鳳求, 2000: 11)
원시사회부터 인류는 열매 등을 채취하고 짐승을 사냥하며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무막대기나 돌맹이 등을 도구로 사용하며 생존을 유지하였고, 맹수와의 힘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점차 날카로운 병기를 만들어 자위(自衛)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날랜 짐승들을 사냥하는 가운데 그 짐승들의 여러 가지 장기(長技)를 모방하여 그 동작 등을 배워서 연마하고 익히며 체력을 증강하고 순발력을 키웠다(이성곤, 2007: 118). 즉 원시 격투술은 맨몸이나 돌, 막대기 등 무기를 단순한 기술로 사용하는 단계의 무술로, 이를 무술 수련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주위(周緯)의 『병기사기(兵器史記)』에는 원시 인류는 공구와 병기의 구별이 없었고 돌로 만든 공구가 무기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석편(石片)으로 물건을 찍으면 기구가 되고 싸울 때는 석편이 무기가 되었으며, 구석기 시대에 무기를 먼저 중히 여겨 맹수와 싸워 삶을 영위하게 되고, 인근 민족과 생존을 다투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의 수요였다(정삼현, 2007: 16).
중국무술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의 전통 운동으로, 그 기원은 원시 씨족 공동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시대 황제는 탁록(涿鹿)에서 우리 민족의 선조인 치우(蚩尤)와 싸웠으며, 의술을 창시하고, 배와 수fp와 옷을 처음 만들어 중국 민족인 ‘화하족(華夏族)’을 형성했다고 한다(한창수․김영구, 2005: 41).
개개인은 숙련된 사냥꾼이며 잠재적인 전사(戰士)였다. 따라서 전체 민족이 통합하게 되면 강력한 군사력으로 변모했다. 야수와 싸우는 것은 적과 대적하는 기교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으므로 한 번에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냥감을 제사에 바칠 수도 있으며, 군진의 변화를 연습할 수도 있고 또 심신의 오락으로 즐길 수도 있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당시의 농경생활을 반영하는 돌도끼, 돌호미, 조껍질 등과 수렵․어로 생활을 반영하는 활, 화살, 창, 화살촉, 작살, 낚시바늘, 그물 등이 있다(정차근․김덕환, 2009: 51).
원시시대의 종교적 행사인 제천의식(祭天儀式), 교육과 오락 활동이 형성되고 발전되면서 원시 무술 활동의 계통적인 변화와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민족의 무술이 인류의 원시 문화와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원시사회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동과 농경 발달에 따른 생산물의 상호 쟁탈로 인한 전사적 수련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전 부족은 항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의 유지가 필요했다. 이와 함께 무(武)의 단련은 부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당시의 신체활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무(武)’적 능력은 인간의 전쟁 수단으로 발전하였다(장재이‧이재학, 2005: 95). 이 시대에는 전쟁으로 자주 격전에 임해야 했으므로 용맹한 민족성이 배양될 수밖에 없었다. 부락 중에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며 용감하게 무술에 임하는 사람들은 부락 구성원들의 추종과 신임을 받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姜鳳求, 2000: 10).
원시적 무도(舞蹈)에는 기쁨을 표시하는 예술성 짙은 동작이 있으며, 용맹과 위세를 표시하는 박격(搏擊) 동작도 있다. 이런 원시적 무도(舞蹈)가 그 이후의 모든 무도 예술의 모형이 되고 무술 발전의 내용과 형식이 되었다는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全國武術科學硏究會, 1990: 8). 따라서 무(舞)는 무술(武術)의 한 모습이고, 무(舞)는 무(武)와 같다 춤출 무(舞) 자는 무술의 武자와 발음과 의미가 상통한다. 진시황을 찌르다 실패한 진무양(秦舞陽)이란 力士의 이름을 秦武陽이라고도 쓰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舞란 글자가 두 발로 제자리에서 뛰면서 없는 것을 빌고 있는 형상에서 유래하였듯이 武란 글자 역시 창을 들고 꿍꿍거리면서 뛰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이렇게 볼 때 舞와 武는 의미상 매우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송형석, 2001: 55).
고 보는 것이다. 서주 연나라 묘에서 동제 창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 연후무과(燕侯舞戈)라 새겨져 있다. 호북(湖北) 형문(荊門)에서 대무개병(大武開兵)이란 명문이 새겨진 동제 창이 출토되었는데, 창 위에 도마뱀과 같은 춤도구를 손에 쥔 모습으로 화장한 무인(舞人)의 무늬가 있다. 이들은 모두 무(武)가 창춤의 무(舞)임을 증명하고 있다(洪熹, 2003: 417).
결국 무도(舞蹈)는 모든 예술의 원천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무도(舞蹈)로부터 춤[舞]과 무(武)는 차츰 분리되었고, 그 중 무(武)의 기능은 사람들의 민간 무술이나 전투 무술의 기능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사람들은 이 춤사위로부터 기격(技擊) 즉 치는 기술과 격투성 있는 동작을 발전시켜 무술로써의 기술을 추출해 낼 수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다(全國武術科學硏究會, 1990: 9).
원시사회에서 추장은 무인, 주술사, 의료사였다. 무술의 무(武)자와 무용의 무(舞), 무당의 무(巫), 그리고 의사의 의(醫)자는 매우 연관성이 있었다. 원시사회에서 의료행위(醫術)와 주술행위(巫)는 종종 동일시되었다. 초기의 인류의 최대 관심사는 자신의 생명을 위한 것이었다. 무당(巫)의 의식과 동작은 대부분 인간의 건강과 관련이 있었다. 질병과 사망에 대항하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하였다. 이로서 주술적 행위(巫)는 의료적 행위(醫術)와 밀접한 관련을 맺기에 이른다. 醫를 고대에는 의(毉)로 썼는데 글자 모양으로부터 巫와 醫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당시 사람의 관념 속에는 질병이란 역귀가 오는 것이며, 巫는 능히 귀신을 쫓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관자의 경언, 여씨춘추, 논어의 자로편을 보면 巫醫가 자주 등장한다(송형석, 2001: 54).
따라서 무술, 의술, 종교, 무용 간에 일련의 상관관계가 있었으며, 고적이나 유물에 의한 증거물로서 2세기경 서한시대 마왕퇴 3호분에서 출토된 서한시대 「도인원(導引圓)」의 건강 체조, 화타(華陀)의 「오금희(五禽戱)」, 달마대사의 『역근경(易筋經)』 등에서 근거를 찾고 있다. 그러나 양진방(1999: 86)은 “처음부터 싸움과는 상관없이 건강을 위한 운동 체계의 발전을 위해 일련의 운동 양식을 발달시켜 오다, 일정한 시점에 이르러 싸움의 기술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했으며, Draeger/Smith(1980: 16)는 “고대 중국의 도인사상과 양생 사상은 무술과는 별도로 발달되어 오다가 근대 이후에 비로소 권법에 도입되어 내가 체계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병기‧한병철(2008: 79)은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인마를 살상하는 기술이 연구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무술이다. 무술이란 처음부터 양생술이나 건강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이것은 가공할 만한 살인 기술이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무도(舞蹈)는 인간 자신들 문제로부터 출발하며 철학과 종교, 자연, 의학적 의미로부터 무술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원시인들은 각각의 씨족들이 동식물 혹은 자연계의 특정 사물과 친족이나 모종의 관계를 갖는다고 믿었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보호자나 상징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무술과 의료적 건강 체조는 오랫동안 별개의 활동 영역으로 발전해오다가 근대 이후에 결합되었을 것이다(송형석, 2001: 56). 따라서 무술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격투기술의 일환으로 발달해왔으며,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자구책에서 출발하여 보다 잘 싸우기 위한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또한 무(武)의 단련은 부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인 만큼 당시의 신체활동의 대부분은 무술수련이라 할 수 있다.
Ⅲ. 하․은․서주(夏․殷․西周)시대 중국무술(2070〜BC 771)
중국에서 무예는 고대 군사 훈련 및 군사 전쟁의 발전으로부터 온 군사 전투의 기능으로부터 진화된 것이다. 중국의 무술을 시대사별로 정리한 『中國武術史』에는 무예라는 용어는 군사적 목적으로써 전투에서 사용되는 기사(騎射) 또는 장단병기 등을 사용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온다(이성곤, 2007: 116).
중국무술은 무예의 기초 위에 다른 문화 예술의 형성과 함께 발전되었다. 따라서 ‘무예’는 무술의 제일의 기원이며, 주요 원류라고 할 수 있다(박귀순, 2006: 64).
하나라 사회는 이미 내부적인 문화가 진행되고 병사를 동원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것은 더 선진적인 문화 유형인 하나라 문명을 위해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 시대는 궁전(弓箭; 화살)을 전쟁에 사용했으며, 갑옷이 나타났다(정삼현, 2007: 37). 하나라 유적지에서는 적지 않은 끌, 송솟, 칼, 낚시바늘, 구리 화살촉 등과 작은 동기(銅器) 등이 출토되었다(김지환 외, 2006: 69).
이 시대의 전쟁 모습은 어느 정도 정형화된 모습을 띄고 있다. 따라서 보병, 기병, 궁수 등으로 구성된 기본적인 형태의 전술‧전략‧무기들이 개발되고 발전되었을 것이고, 몸과 몸이 맞부딪쳐 결판을 내야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시대이므로 도수무술(徒手武術)과 개인 격투기술 또한 강조되었을 것이다.
은나라 시대에는 무기로 과(戈), 모(矛), 척(戚), 월(鉞), 도(刀), 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김지환 외, 2006: 75). 은대의 지배자들은 하나라를 멸망시킨 후 우, 중, 좌의 삼군을 두고 매 군마다 강력한 군사를 두었다. 이 시기에는 차전이 일어났는데, 부(斧), 월(鉞), 과(戈), 모(矛), 도(刀) 등 청동병기를 사용하여 병기 무술을 발전시켰다(정삼현, 2007: 37).
은나라 사람들은 호랑이를 잡는 일이 가장 무용을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원래 어떤 용사의 용감한 행동을 연출한 것이 뒤에 오면서 고정된 형식의 오락 종목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갑골문의 괵(虢)자는 두 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싸우는 모습이다(洪熹, 2003: 419). 이 시대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호랑이와 싸웠을 뿐만 아니라, 이 보다 훨씬 위험하게 맨손으로 호랑이와 싸우던 종목도 있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더욱 자극적이고, 더 많은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영웅의 위풍을 표현해낸 종목으로 볼 수 있다.
하‧은 시기에는 궁정 아악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문무는 군왕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을 표현하는 데 치중하였고, 무무는 주로 군사력의 강성함을 나타내었다(정차근․김덕환, 2009: 299).
서주 시대의 지배자들은 군사와 무술을 중시하여 문무로서 통치를 공고히 하였는데, 『국어(國語)』『주어상(周語上)』에서는 세 계절에는 농사짓고 한 겨울에는 무술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예기(禮記)』 「월령편(月令篇)」 『사서오경(四書五經)』,『예기(禮記)』「잡서(雜書)」에서는, 초가을 날씨에 천자는 령을 내려 장군들로 하여금 병사를 골라 호걸들을 간결하고 세련되게 훈련시키고 일심으로 공을 세우게 하였다(정삼현, 2007: 36-37).
이 시대 귀족과 자녀들의 교육으로 귀족들은 대개 육례(六藝)라 불렸던 여섯 가지 기예를 배웠다. 품행〔禮〕, 음악〔樂〕, 궁술〔射〕, 마차몰기〔御〕, 서예〔書〕, 산술〔數〕이 그것이다(김동규, 1999: 44.).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를 암송하며 무작(舞勺)을 배워야 했으며, 15세 이상이 되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다(정삼현, 2007: 41).
대사례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첫째, 제후 군신을 시험하는 것, 둘째, 제후가 추천한 선비를 시험하는 것, 셋째, 군신 상호간의 예와 악(樂)을 배우는 것 등이었다(하남길 외, 2007: 46). 주나라 시대의 사례(射禮)로는 대사(大射), 빈사(賓射), 연사(燕射), 향사(鄕射) 등이 있었다. 대사례는 종묘에 제사를 주관할 자와 참관할 자를 결정하기 위한 궁술 경기였고, 빈 사례는 제후들이 천자에게 입조하였을 때 예의 절차를 실시한 행사였다(하남길 외 2007: 47).
하․은․서주 시대는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서 군대와 민간에게 주로 수련된 무술, 즉 창, 도검, 활, 봉 등을 사용하는 기초적인 기술과 기초적 수준의 훈련법, 단련법을 중심으로 하는 단순한 형태지만 무술 발전이 향상되는 시기였다. 이 시대의 각저희(角抵戱), 간척무(干戚舞) 등은 중국무술의 최초 형태로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 장수(長壽), 투지(鬪志) 배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이 시기에 이미 무술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교육(武士敎育)’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옛날 석기시대에 인류가 발명한 몇 가지 원시 도구의 양식이 나중에 무술 기구가 된다. 그 사용법은 무술의 병과(兵戈)에 관련된 격투 기술의 요소를 만들어 냈다. 생산력의 발전과 사유제의 형성에 따라 일어난 원시 전쟁은 많은 무술기구의 진화와 병과(兵戈)의 전투 기술 진보를 가져오게 했다. 문명사회의 초기, 즉 중국 서주(西周)에 해당되는 시기에 무술의 기본 요소인 전용병기, 그 사용 기술, 도수 격투기술은 살상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경로에 따라서 발전해 왔는데, 자신의 형식, 공방법과 훈련의 수단을 형성해 중국무술의 기본 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장재이, 2000: 18). 이에 대해 신성대(2006: 43)는 무예를 자신의 방어와 적의 살상을 목적으로 병기를 가지고 법(法)・기(技)・술(術)에 따라 체계적으로 끊임없이 능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임동규(1994: 71)는 무예를 인간이 개체나 집단으로서, 특히 하나의 정치 단위로서 내외의 위협과 침략에 대항하여 자신의 안전과 독자적인 생활권, 문화권을 방어・유지하며, 주체적인 역사 전개를 보장한 직접적인 수단으로서의 전투 행위의 총괄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예’는 무술의 최초 기원이며, 주요 원류라고 할 수 있다. 무술은 유사시 실질적인 경험과 철학적 수련을 그 배경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러한 가운데 무술은 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상고시대의 형성과 함께 사회 경제의 진보와 공방 격투에 이용되는 군대의 창설은 병기의 종류를 다양화하게 해 그 사용법과 격투에 이용되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되고 축적하게 되었다. 동시에 도수무술(徒手武術)과 격투기술이 유행하게 되었다.
Ⅳ. 춘추․전국(春秋․全國) 시대 중국무술(B.C 770∼B.C 221)
춘추시대(春秋時代) 까지 전투는 귀족층의 특권이었다. ‘유위(有爲)’를 주장한 공자는 20세에 노나라 귀족 계씨(季氏)의 가신이 되어 창고와 가축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는 양질의 전통적인 무사교육을 받았고,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등 육예(六藝)에 능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어렸을 때 제사지내는 것을 좋아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활쏘기나 말 타기를 잘하였고 용맹스러우며 힘이 넘쳤다(김지환 외, 2006: 118).
이 시기에 군대는 규모가 작았고 전투는 하루를 단위로 하였다. 전투를 치르는 당사자들은 군례를 대단히 중시하여, 전쟁은 예술화된 조련이 되었고 강렬한 기사도 정신을 보여 주었다. 서로 교전했던 국가들 간에 계급 서열은 전투를 통해서 결정되었으며, 보병 대신 마차부대가 이용되어 졌고, 패전국은 승전국에 곡물을 보냈다(송형석, 2001: 51). 무술의 형태는 몇몇 사서(史書)의 기록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데 『시경(詩經)』을 들 수 있다. 『시경』은 기원 전 479년에 기술(記述)한 것으로, 문왕(文王) 시대에는 검술(劍術)에 해당하는 격자(擊刺)의 법이 있었다고 한다. 『사기(史記)』의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에서도 봄과 여름은 무(武)를 배우고 가을과 겨울에 문(文)을 배웠다고 서술되어 있다(김동규, 1999: 44). 동시에 군왕(君王)은 문무를 겸비해야 했고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이상적인 인간형이 제시되었다.
춘추시대 전차전에 낫과 같이 구부러진 날로 상대를 걸거나 찍어서 살상하는 데 사용한 과(戈)와 기병을 상대하는 보병들이 말 위에 있는 병사를 끌어내릴 때 사용하는 갈고리가 달린 창과 상대를 주로 찌르는 데 사용하는 모(矛)와 자루에 큰 도(刀)나 검을 물려 찌르고 베는 기능을 높인 장병기인 도(刀)가 있었다. 병기로서의 검은 처음에 군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짧은 무기로 위력을 떨쳤지만, 말싸움을 위주로 한 실전에서는 활이나 창과 같은 길이가 긴 병기가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대신 검은 보조 무기로 격하되었다.
춘추시대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백성들의 피해와 희생을 수반하는 시대로,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진(晉)나라와 격전에서 승자가 된 초(楚)나라 장황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무(武) 무(武)라는 글자는 창 또는 전쟁을 의미하는 과(戈)자와 그친다는 의미를 지닌 지(止)자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무(武)자는 본디 전쟁을 그친다는 평화로운 의미를 갖기 때문에 무술의 윤리적 요소와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김동규, 1999: 263).
의 절제를 통해 덕(德)을 보이려는 의지가 엿 보인다.
‘대저 무(武)란 지(止)와 과(戈)가 모여 무(武)자가 되었다.…… 무릇 무력은 횡포함을 막기 위하여 군대를 모으고, 큰 약정을 보호하며, 공을 정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재물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군대를 정돈하고 사열하여 제후의 위세를 보이면 전쟁이 그치지 않겠는가’(夫武, 止戈爲武……夫武禁暴, 戢兵‧保大‧定功‧安民‧和衆‧豊財者也, 觀兵以威諸侯, 兵不戢矣).
초(楚)나라 왕은 무(武)의 개념을 무기를 그친다는 의미로, 무에 대한 포악함을 막고, 대의를 유지하며, 백성을 살피고 잘살게 해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이성은(李成銀, 1993: 61)은 ‘무(武)는 회의 문자로서 ’止(멈추다) ‘와 ’戈(창)‘으로 이루어져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성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戈(창)‘은 전쟁 혹은 무력을 사용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止戈(지과)‘는 무력활동을 제지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박귀순, 2006: 51, 2009: 71).
춘추시대에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백성들의 피해와 희생을 수반하는 시대로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승자가 된 장황이 무의 절제를 통해 덕을 보이려는 의지가 무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심승구, 2001: 237).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초장왕의 해석은 그의 무(武)자에 대한 해석이 맞다고 할 수는 없어도 패주(霸主)조차도 전쟁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으니, 하물며 직접 재난을 당하는 백성들은 말 할 것도 없었다(洪熹, 2003: 503). 후에 진시황이 자신의 공덕을 과시하면서 전쟁을 끝낸 것이 으뜸가는 업적이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위정자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자기 신하로 복종시키고 나서야 화평을 허락하므로 세상은 끝내 평화롭기가 어려웠다. ‘무(武)’는 창(戈)을 들고 이동, 전진(止)하는 의미가 있으며, 국가에 있어서의 ‘무(武)’는 매섭고 거칠게 전진하는 즉, 혁명이나 전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박귀순, 2006: 52).
선진시대부터 중국문화를 꿰뚫고 있는 두 개의 흐름을 상류층의 문인인 유(儒)와 하류층의 무인인 협(俠)으로 대별하고 있다. 여기서 협 또는 무협(武俠)은 무술 전문 집단으로 그 구체적인 형성이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문명사회의 형성에 따라 사회 경제의 진보와 공방격투에 이용되는 전문 군대의 창설은 병기의 종류를 다양화하게 해 그 사용법과 격투에 이용되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되고 축적되게 되었다(姜鳳求, 2000: 2). 이와 같이 중국 역사에서 전쟁에서 개인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귀족과 자녀들에게 여섯 가지 기예인 육례(六藝)가 더욱더 강화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매우 살벌한 성격을 띠게 된다. 수십만 군대가 대치하면서 여러 달 동안 들판에서 포위 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일부 제후국은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서 15세 이상의 모든 남자를 징벌하고 전선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전사자와 포로들의 숫자는 전례 없이 많아졌다(김지환 외, 2006: 111).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목 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胡服騎射) 방식을 도입하여 군제를 개혁하였고, 기병을 양성하였다(김지환 외, 2006: 125). 전쟁터에서 마차 군단이 보병에 의해 대치되었고, 패한 적군은 그 자리에서 살육되었으며, 전쟁은 생사가 달린 사건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보병의 수가 증가하면서 전쟁에서 귀족들에게만 부여되었던 자리가 평민들에 의해 초잠식지(稍蠶食之)되었다. 이와 같이 전쟁에서 개인기를 중시하면서 무술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무협(武俠)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의 전투 기술은 주로 칼과 창, 활 등이었지만 권법도 중요한 수단이었다. 진산(陳山)의 『중국무협사』에 의하면 무협의 초기 형태는 국사(國士)이며, 민간 무사로 출현한 새로운 형태의 그것은 유협(游俠), 일반적으로는 협객이라고 하는 전문 자객이다. 춘추 초기에 등장한 국사는 주군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국사들은 순수한 전쟁 행위에만 몰두했으며, 유객(遊客)은 유(遊)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구에게 매이지 않고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존재였다(姜鳳求, 2000: 21-22). 따라서 문아한 유사(儒士)들은 양지 바른쪽으로 끌어내고, 피로 물든 무도한 역사와 그 주인공인 협사(俠士)들은 그늘 뒤에 감추었다(문현선, 2005: 9). ‘유(儒)’가 문사(文士)를 대표한다면, ‘협(俠)’은 무사(武士)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전장에서 기격술(技擊術) 사용을 중시하였는데, 사병 선발을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각시(角試)’를 실시하였으며, ‘격검(擊劍)’이 성행하였다. 검론(劍論)에 대한 이론들이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기재되어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주나라의 무왕이 즉위하여 주공에게 「대무(大武)」를 짓게 하였는데, 「대무(大武)」라는 악무(樂舞)는 바로 『시경․주송(周頌)』편의 일부이다. 『시경․주송(周頌)편은 제사에 쓰이는 악무(樂舞)이면서 역사시로 주공이 지은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의례를 제정하고 음악을 만든’ 주공의 뛰어난 업적이었다.
첫째 마당은 무왕이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는 것을 상징하였다. 둘째 마당은 상나라를 정벌한 것을 상징하였다. 셋째 마당은 남국(南國)에 대한 정벌을 상징하였다. 넷째 마당은 남국을 복종하게 만든 것을 상징하였다. 다섯째 마당은 주공이 동쪽을 통치하고 소공(召公)이 서족을 통치한 것을 상징하였다. 여섯째 마당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것을 상징하였다 夫樂者象成者也. 總于而山立, 武王之事也, 發揚蹈厲, 大公之志也, 武亂皆坐, 周召之志也, 且夫武, 始而北出, 再成而滅商, 三成而南, 四成而南國是疆, 五成而分周公左, 召公右, 六成復綴 以崇.
는 내용이 보인다(김지환 외, 2006: 95-96).
전국시대(全國時代)의 한 국가였던 위(魏)나라에서는 ‘매우 혹독한 자격에 따라 보병을 선발했다’고 순자(荀子)는 말하고 있다.
"위(魏)나라에서는 병졸들을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선발합니다. 가슴‧허리‧정강이를 감싸는 갑옷을 입게 하고 12석짜리 쇠뇌를 들리며, 50개의 화살이 든 화살통을 지게 한 다음, 그 위에 창을 들고 투구를 쓰고 칼을 차고는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아침부터 한낮까지 백 리를 달리게 합니다."(魏氏之武卒 以度取之 衣三屬之甲 操十二石之弩 貧服矢五十個 置戈其上 冠冑帶劍 嬴三日之糧 日中而趨百里)
이런 시험을 거쳐서 합격이 되면 백성으로서의 부역을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밭과 가옥의 세금도 줄여 주었다(中試則復其戶 利其田宅).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병법가는 순서대로 1백 82가(家)에 이르며, 이 중에서 유용한 저술을 산정하면 35가에 이른다고 한다(洪熹, 2003: 503). 이와 같은 내용은 병가(兵家)의 시대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고 무기의 상상력이 진보되어 전쟁은 더욱더 처참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목숨을 걸어야 하고, 자기의 집도 항상 재난을 당하여 폐허가 되었다.
이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는 육례(六藝)가 강화되고, 군사적 활동으로 주(走), 도(跳), 투(投) 등을 비롯하여 무술(武術)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국시대의 위나라, 제나라에서는 귀족들만의 특권이었던 전투가 평민에 의해 대체되면서 보병이 등장하였고, 보병 개개인에게 강한 체력과 전투력이 요구되었다. 이런 가운데 무협과 전투만을 전담하는 군사 집단이 생겨났을 것이며, 군사 집단의 군사 개개인에게 보다 강한 체력과 우수한 싸움 기량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Ⅴ. 진(秦)․한(漢) 시대 중국무술(B.C 221∼A.D 220)
기원전 90년경 저술한 사기(史記)에 보면 무술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자객열전(刺客烈傳)」에서 형가(刑軻)가 진시황 암살 기도에 실패하자 그의 친구가 격자술(擊刺術)을 가르치지 못한 것을 원통해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 검술이 이미 특별한 기술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기(史記)』 의 「이사열전(二斯列傳)」 중에 ‘진이세(秦二世)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각저(角抵) 배우의 놀이(戱)를 보고……’라는 글이 실려 있다. 秦二世在甘泉宮作釆, 角抵俳优之戱. 其后汶武好此戱, 卽今相扑也
이로써 기원 전 209년경에 각저라는 무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맨손으로 싸우는 일도 전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므로 배워야 할 무술 중 하나였다. 이 종목은 지금의 레슬링과 같으며 진대에는 각저라 하였다. 진시황은 중국 통일 이후 6국의 잡기(雜技), 가무 등의 예인들을 함양(咸陽)에 모아두고 ‘각저배우지희(角抵俳優之戱)’라 통칭하였다(정차근‧김덕환, 2009: 316).
역대 많은 황제들이 각저의 유희를 보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는 점으로 봐 각저의 무술 기법을 군사훈련과 유희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대에 각저는 상당히 환영을 받았던 무술 겸 오락의 한 종목이었던 듯하다. 비단 민간에게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외국의 사신을 위하여 베풀던 연회의 오락 종목이기도 하였다. 한대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제압하는 종목을 연출한 것이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와 『포박자(抱朴子)』 변문편(辨問篇) 등에 보인다(洪熹, 2003: 419).
중국무술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은 후한(後漢, 25~220. AD) 사가(史家)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수박육편(手搏六編)」이 가장 오래된 무예서이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중에 병기교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서』에 기술된 병기교는 무술을 칭하는 말로서, 수박, 검도, 활 쏘는 기술이 주로「수박육편(手搏6篇)」「검도38편(劍道38篇)」 등의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수박(手搏)은 무술을 칭하는 말이고, 검도(劍道)는 칼 쓰는 방법을 총칭한 말이다. 반고가 자술한 『漢書』전백권 중 제삼십권인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 병서(兵書)부가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당시 존재한 병서를 병권모(兵權謀), 병형세(兵形勢), 병음양(兵陰陽), 병기교(兵技巧) 로 분류한 목록서이다. 이중에서 병기교는 무술을 말하고 있다. 그 십삼가 백구십구편의 대부분은 射法(궁술)에 관한 책을 열거하고 있지만 사법을 제외한 무술로서 柔術(手搏) 육편, 劍道 삼십팔편, 포저자(捕苴子), 의법 사편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송일훈․김재우, 2005: 24).
『한서』「애제기찬(哀帝紀贊)」에 ‘격투와 활쏘기의 희를 보았다’(時覽卞射武戱)라는 구절이 있는데, ‘수박이 변이다(手搏爲卞)’라 하였으니 수박은 격투 형식의 무술로 보여진다.모원의의 『무비지(武備志)』에도 ‘권은 옛날의 수박이다(拳者卽古之手搏也)’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명말까지만 해도 ‘권법’이라는 말보다는 ‘수박’이 격투 기술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한병철‧한병기, 2008: 27).
진‧한(秦·漢) 시대에는 도무(刀舞), 월무(鉞舞), 검무(劍舞), 쌍극무(雙戟舞) 등 투로(套路)운동과 비슷한 무련(舞鍊) 종목들이 계속하여 출현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근래의 산타, 레슬링, 검술과 유사한 수박(手搏), 각저(角抵), 격검(擊劍) 등 격투 형식의 무술 활동으로 나타났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무제기(漢書‧武帝記)』에 기록되어 있다.
“한무제 원봉 3년(BC, 108) 각저희를 하였는데, 3백리 안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와서 구경하였다”(元封三年春, 作角抵戱, 三百里內皆來觀).
‘무예’가 처음 등장한 때는 한대(漢代)이다. 서진(西晉) 시대 사람인 진수(陳壽)의『三國志』 「蜀志‧劉封傳」에 ‘劉封은 武藝를 할 줄 알며 氣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劉封有武藝, 氣力過人)라는 ‘무예’의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의 ‘무예’는 무기를 들고 있든 없든 상관없는 수박‧말타기‧활쏘기‧刀‧劍‧槍‧棒 등과 같은 치고 찌르고 베는 무기를 다루는 기술의 공격과 방어의 격투 기술과 투로 기술의 총칭을 의미한다(國家体育武術硏究院編, 1997: 107).
무예에서 ‘무(武)’라는 글자는 그칠 ‘지(止)’와. ‘과(戈)’가 합쳐진 문자로, 중국 후한의 『설문해자(設文解字)』에 따르면 ‘창(戈)을 멈추는 것이 무(武)이다’(止戈爲武)라고 하였다.『한서(漢書)』 권 63 「무오자전(武五子傳)」에는 ’무(武)는 포악함을 억제하고 난동을 다스려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이며, 잔혹한 행위를 삼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창(戈)은 폭력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힘을 무력화(無力化)할 수 있는 힘이 무(武)가 되는 것이다(이성곤, 2007: 114).
한편, 入江康平(2003: 1)은 ‘무(武)는 본래 창(戈)과 다리(止)의 문자를 상형(象形)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람이 창을 들고 강하고 거칠게 전진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무(武)는 동적이며 활동적이고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박귀순, 2006: 51). 무예라는 글자에는 힘(武)과 재주(藝)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타고나면서 생겨난 원초적인 힘이 아니라,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 획득되어진 조직화된 힘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이성곤, 2007: 114).
이와 관련하여 간성오(干省吾)의 『석무(釋武)』에 나오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武는 戈와 止로 이루어졌다. 본래 뜻은 정벌하며 위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정벌은 반드시 실제로 행함이 있다. ‘止’는 곧 행하여 보인다는 것이다. 정벌은 반드시 무기로써 한다. ‘戈’는 곧 무기이다‘(武從戈, 從止, 本義爲征伐示威, 征伐者必有行, ‘止’ 卽時行也, 征伐者必以武器, ‘戈’卽武器也).
박귀순(2009: 73)은 ‘중국은 무예 용어를 통일하기 이전까지 각양각색의 용어가 존재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시기에 같은 무예 용어가 보인다고 해도 다른 의미로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며, 다양한 무예 용어가 혼용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국 고대 무술의 변증(辨證) 사상에 대한 기본 규범인 天人, 陰陽, 形神, 動靜, 情氣神 등과 무술의 윤리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 규범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건강 장수를 목표로 하는 양생사상(養生思想)에서도 정신적 정감(情感)을 중시하였다.
불교가 한대(漢代)에 전해왔고, 당시에는 사찰도 많고 승려도 많았다. 그리고 승려들이 무술을 익히는 것도 많이 확대되었다. 이는 당시 도적들이 빈번하게 사원을 강탈하는 상황에서 승려들이 절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불교 사원에서 건신(健身)을 위한 무술 수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이성곤, 2007: 121). 그 중 무술 수준이 높은 승려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적고승전(積高僧傳)』에 명공화상(明恭和尙)의 비력이 다른 이와 달라서 큰 돌을 능히 들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원에는 반조정(反朝廷) 운동을 하는 승려도 있었다. 『위서․석노지(魏書․釋老志)』에서는 장안의 한 절에서 많은 무기가 발견되었는데(國家体育武術硏究院編, 1997: 206), 이것은 반란의 무리와 관련이 있었다는 의심을 갖게 하였다(송일훈‧조충현‧안진규, 2008: 13).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승려들의 무술 수련은 소림사에서 무술을 익히는 승려가 있기 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군사제도는 징병제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는 무무(武舞)와 축국(蹴鞠)을 채택하여 활용하였다고 한다. 무무(武舞)란 무술 춤으로 무기를 들고 뛰고 돌며 춤추는 형태처럼 움직이는 것을 말하기도 하며, 현대의 무술의 형(型)처럼 전체가 통일되어 연무를 했다고 하기도 한다. 축국(蹴鞠) 본래의 형태는 10여명이 한 팀으로 구성되어 2개의 골문을 설치하고 행하던 다분히 경쟁적이며 공수에 관한 세부적인 규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스포츠였다. 한나라(206 BC〜220AD)와 당나라(618〜907AD)때 군인들의 기초체력과 전의(戰意)의 향상을 위해 행해졌고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대중화되었던 경기였다(옥광‧하웅용, 2005: 35).
은 발로 차는 것이며, 후에 공을 차는 놀이로 발전되었는데, 무술의 효과로는 발의 힘을 기르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검기무(劍器武)가 행해졌는데, 이것은 고대의 검술 기법을 연결하여 행하는 고급 기법이므로 장수들 사이에서 성행했다. 기원전 108년 봄에 한무제가 서역의 각국 사신들을 초대하여 장안에서 ‘백희’ 공연을 열었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다. 당시의 공연 종목으로는 각저(角抵: 씨름), 파간(爬竿: 장대오르기), 주대승(走大繩: 밧줄타기), 제기차기, 농환(弄丸: 공 묘기), 찬화권(鑽火圈: 불 굴렁쇠 빠져나가기), 도립(倒立: 물구나무서기), 거희(車戱: 자전거 묘기), 마희(馬戱), 환술(幻術: 마술) 등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였다(정차근‧김덕환, 2009: 317). 서한 후기에 이르러 조정의 정치가 날로 부패해짐에 따라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녹림군(綠林軍)․적미군(赤眉軍) 등에 의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면, 과(戈)와 지(止)와 의 의미 해석에서 보듯이 진‧한(秦‧漢)시기에는 무(武)에 대한 가치관의 혼동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유, 불, 선의 영향을 받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문무겸전(文武兼全) 등을 목표(박귀순, 2006: 68)로 둔 점에 영향이 있는 듯하다.
진‧한(秦‧漢)시대에는 도무, 월무, 검무, 쌍극무 등 투로 운동과 비슷한 무련 종목들이 출현하였으며, 수박, 각저, 격검 등이 격투 형식의 무술 활동으로 나타났으며, 군사훈련 목적으로 무술과 격구, 유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Ⅵ. 결 언
각 시대의 모든 민족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격투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도 격투 기술은 존재하였다. 따라서 격투는 인류의 시원(始原) 문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격투는 단순히 집단생활의 필요적 행위였다. 즉, 종(種)을 보존하고 개체의 생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 활동이었다. 이러한 격투 기술은 무술 형태로 발전하여 왔기 때문에 어떤 종목의 격투 기술이고, 그 기술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 하는 등의 역사를 정확하게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또한 각 시대마다 기술의 형태와 운동의 특색,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공동의 목적인 격투 방법이 여러 가지의 운동 형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환경 조건과 문화의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원시사회부터 진‧한(秦‧漢)시대까지 중국무술을 정리하여 봄으로써 상고시대 중국무술의 기원 배경과 유형에 대한 史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원시사회는 종(種)을 보존하고 개체의 생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 활동으로, 잘 싸우기 위한 인위적 노력의 결과였다.
둘째, 하‧은‧서주(夏‧殷‧西周)시대의 각저희(角抵戱), 간척무(干戚舞) 등은 중국무술의 최초 형태로 강건한 체력과 정신력,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 장수(長壽), 투지(鬪志) 배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무술의 기본 틀인 도수무술(徒手武術)과 격투 기술이 유행하였다.
셋째, 중국 역사에서 전쟁에서 개인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춘추(春秋)시대에서 전국(全國)시대로 접어들던 시기로, 전장(戰場)에서 개인기를 중시하면서 무술만을 전문적으로 수련하는 무협(武俠) 집단이 생겨났다.
넷째, 진‧한(秦·韓) 시대에는 도무(刀舞), 월무(鉞舞), 검무(劍舞), 쌍극무(雙戟舞)등 투로(套路)운동과 비슷한 무련(舞鍊) 종목들이 출현하였으며, 수박(手搏), 각저(角抵), 격검(擊劍) 등이 격투 형식의 무술 활동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결론에서, 무술은 처음부터 양생술이나 건강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격투기술의 일환으로 발달해왔으며,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자구책에서 출발하여 보다 잘 싸우기 위한 인위적 노력의 결과라 볼 수 있다. 군대의 창설은 병기의 종류를 다양화하게 해 그 사용법과 격투에 이용되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되고 축적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무협과 전투만을 전담하는 군사 집단이 생겨났으며, 군사 집단의 군사 개개인에게 보다 강한 체력과 우수한 싸움 기량이 요구되었다. 또한 유, 불, 선의 영향을 받아 무(武)에 대한 가치관이 혼동되는 진‧한(秦·漢) 시대도 엿볼 수 있었다.
이 연구를 토대로 차후에는 魏晉․南北朝 시대부터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가 형성되는 송(宋)나라 시대까지 中國武術의 發展過程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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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체육사학회지
논문투고일 : 2010년 1월 11일
심사완료일 : 2010년 1월 23일
게재확정일 : 2010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