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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축제, 성탄절
누가복음 2:10~11
목차
1. 종교, 미래에 대하여 질문하다
2. 미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그림
3. 미래에 대한 성경의 그림
4. 예수님이 들려주신 미래
5. 진화하는 인류
설교 목적
성탄절을 맞이하여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종교의 본질은 미래를 미리 그려보고 준비하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종교는 과학과 통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결국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다.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그려주는 최종적인 그림은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인류가 바라는 목표인 진선미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인류가 다같이 축하하는 이유는 아마 인류의 목표를 가장 모범적으로 제시한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년 성탄절에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가장 선명한 빛을 비추시고 이끌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주님과 함께 그 세상에 동참할 것을 다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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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 미래에 대하여 질문하다
2021년이 저물고 이제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새해에는 코로나 걱정에서 벗어나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를 빌어본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기도 한다. 살림살이가 더 풍성해지기를 기대하고 바라기도 한다.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다. 기도하는 인간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라고 부른다고 한다(Mircea Eliade).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기도는 미래에 대한 바람이다. 인간은 기도를 통해 미래를 바라고 준비한다. 기도하는 인간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 기대는 기도하는 그 사람이 속한 종교의 세계관에 따라 달라진다. 각 종교는 세계와 시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세계관을 이야기 속에 담아 전달한다. 그 이야기는 경전에 기록되어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고 마음에 새겨진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기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도하고 미래를 소망한다.
인간에게 있는 종교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그 하나는 인류 공동체가 발전하면서 갖게 된 문화현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뇌 속에 종교적 자극을 받으면 활성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둘은 각각 사회문화적 입장과 생물학적 입장을 반영한다. 어떤 설명을 받아들이든지 상관없이 종교적인 인간은 미래에 대하여 질문하는 존재인 것은 확실하다. 그 질문을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무엇이 우리의 미래에 있는가?
둘째, 미래를 위한 최선의 준비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그 세상을 맡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경작하고 생명으로 충만한 땅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다. 성경에서 인간은 본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제사장과 같으며, 하나님의 세상을 관리하는 대리인이고, 피조세계에 대해서는 왕 같은 존재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 땅은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된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실 사람을 부르신다. 그 기나긴 역사가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과 세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하나님은 자기 세상인 땅과 하늘을 바로잡아 새롭게 만드시고 그 세상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그 세상을 누리게 하신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세상과 인간의 미래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롭게 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앞에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라는 촉구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가득한 세상을 누리라는 초청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새로운 교훈을 주시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떤 삶인지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고, 삶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 주위에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졌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배우며 순종하면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선언(宣言)이며 동시에 시연(試演)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그 복음을 온 세상 만민에게 전하고 그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드디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돌아오셨으며 새 일을 행하시며 장차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새롭게 하실 주님이 되셨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대대로 갈망하던 소원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그 영광이 온 세상에 발산하고 드날리게 되는 날이 드디어 왔다고 확신했다.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시 건지시고 불러모으셔서 교회가 되게 하셨다고 믿었다. 전에 모세가 애굽에 있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를 세웠다면, 이제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서 세상 만민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은 확신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한 성전을 이루게 하셨음을 깨달았다. 이제 교회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넘고 성전의 담벼락을 넘어 만인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함께 설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확증하신 일이라고 바울은 확신했다. 그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세상을 열어가는 공동상속자들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대인들은 미래에 대하여 다른 그림을 마음에 굳게 붙들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유대인들의 소망은 토라(율법)에 충실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과 교류하는 일은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이 희석되고 타협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리고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가르치는 사도 바울을 지극히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이 보기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전염병과 같은 존재였다.
이처럼 미래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것을 준비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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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그림
이천년 전 사도 바울과 다른 유대인들 사이에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미래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가족이 되고 한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으므로 모든 인간은 그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이 복된 자리에 동참하자는 초청을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도 바울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위험하게 여겼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율법에 충실하지 않게 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가르침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인과 타협하게 하고 안일에 빠지게 하는 바이러스와 같은 악한 교훈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전도를 하러 가는 동네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비방, 그리고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이천년이 지난 오늘 교회 안에는 미래에 대한 다른 그림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이다. 한편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사후에 천상에서 누리게 될 세상으로 그려져 있다. 다른 한편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이 새롭게 되는 세상으로 그려져 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고 여기 땅에서 완성될 것이냐 아니면, 나중에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서 만날 세상이냐 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이 두 가지 다른 그림은 성경 해석과 신앙생활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 그림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도 다른 결론에 이르게 한다. 하나는 이 땅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며, 다른 하나는 영혼이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될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이라고 여긴다. 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자비와 정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생각은 개방적이며 후자의 생각은 독선적이 될 여지가 많다. 전자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정신과 모범을 따르는 길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받아들이며, 후자는 기독교에 입교하여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이해한다.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섬기고 십자가를 붙들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고 주장하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종교선호도에서 다른 종교에 비하여 나쁜 평가를 받는 이유는 신자들이 미래에 대한 왜곡된 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를 택함 받은 사람들만 들어가는 천국이라고 여기느냐 아니면 만인이 더불어 정의와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여기느냐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 하나는 예수님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그 신앙을 갖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독선적이 되는 이유는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청년 시절에 나쁜 사람이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한 것이 아니며, 사도 바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특별히 윤리적으로 비열한 것은 아니었다. 그 둘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뜨거운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또한 자신을 박해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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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래에 대한 성경의 그림
그러면 성경은 미래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그림을 제시하는가? 성경을 배우는 우리가 미래에 대한 어떤 그림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지 알아보자. 그 그림은 곧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미래에 대한 바람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예언자들의 글에서 드러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암울하던 시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꿈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오래된 이야기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장차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를 세우실 것을 이야기했다. 다윗이 베들레헴의 목자로서 온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처럼 장차 오실 분이 그렇게 그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했다. 그분의 통치는 공의로우며 그분이 다스리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아니라 만민이 평화 가운데 상생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분이 세우는 나라는 만민들에게 모델이 되고 흠모할만한 대상이 되어 만민이 그리로 몰려올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했다(11장). 이것이 예언자 이사야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미래의 그림이다.
예언자 요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혼돈과 암흑 가운데 살아가는 것 같은 세상에서 장차 올 미래를 예언했다. 그것은 이사야가 그려준 것과 비슷한 그림이었다. 이사야는 그 날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데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만인이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는 세상이 온다는 뜻이었다. 요엘은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자녀들은 예언을 하며,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만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모든 사람이 마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에 정통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이었다(욜 2:28~29).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율법 없는 사람처럼 방종할 때 다가올 심판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이 끝난 후에 하나님이 그 백성을 다시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새 언약을 맺으실 때가 오리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31:33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하실 새로운 일에 대하여 들려주었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라고 말했다(사 65:17). 미래에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이사야의 설명은 요한계시록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밧모섬의 요한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새 창조 선언을 들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I am making everything new!’
요한계시록 21:5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장차 만드실 새로운 세상을 묘사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에덴동산의 확장판과 같았다. 그리고 땅 위에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었다고 그려준다. 그것은 성전의 확장판이었다. 그 날에는 만인이 예언자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며, 또한 모든 곳이 거룩한 땅이 되며 하나님의 성전처럼 될 것이라는 의미다. 성경이 그려주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 소원을 기도문에 다음과 같이 담았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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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이 들려주신 미래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삶이며,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삶이다. 이에 대하여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진실한 언행과 자비로운 삶,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삶이라고 이야기했다(미가 6:8).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도 이와 같았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셨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
(마 7:12)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사는 진실한 삶이며, 그것은 동시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비로운 삶이다. 사도 바울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처럼 하면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을 압축하여 설명했다(갈 5:14).
이렇게 보면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과 세상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실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예언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기 백성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실되고 따뜻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 모습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을 우리가 기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세상이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긴박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예언자들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으니 낡은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삶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다. 그것은 진실되고 따뜻하며 겸손한 삶이었다. 예수님의 진실된 삶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폭로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예수님의 따뜻한 삶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환영의 메시지가 되어 자주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셨다. 또한 예수님의 겸손한 삶은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김으로 십자가라는 쓴 잔을 마시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의 삶이 진실되고 따뜻하며 겸손한 삶임을 증언하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늘에 올리심으로 모든 이들의 주가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 투명하고 더 포용적이며 더 부드러운 세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교회는 예언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마침내 모든 것이 새롭게 되며 하나님의 새 창조가 완성될 것을 소망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라고 희망을 담아 격려했다.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그림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하는 공동체다. 이것이 교회가 창조 이야기와 재림 이야기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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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진화하는 인류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진화는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인간도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진화라는 말이 기독교인에게는 거슬릴 수도 있지만 종교 그 자체도 계속 진화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시대에 족장들은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예언자들의 시대에 오면 피의 제사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이웃을 배려하는 삶이 더욱 중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종교가 제의의 활동에서 윤리적인 차원으로 발전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에는 예언자와 제사장의 직무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었지만 점차 만인이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뜻에 정통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제사장적 소임을 받아 세상에 복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 역시 종교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유일하게 거룩한 장소였으며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그 백성이 있는 어디에나 함께 하시며 장차 세상 모든 곳이 성전처럼 될 것이다. 아니, 성전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신앙인으로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메시아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는다고 가르쳤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혈통과 성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만인이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메시지였으나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상식이 되었다.
지난 이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많은 지역을 지나며 많은 민족을 감화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와 정신, 그리고 철학과 학문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들려주었다. 각 나라와 민족은 자기들의 전통과 비교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적용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복음은 새로운 색채를 띠게 되었고 더 다채로워졌다. 하지만 복음 그 자체에 대한 왜곡도 발생했다. 그때마다 교회는 다시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 그 왜곡을 바로잡았다. 그것이 개혁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종교의 진화를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전에는 부족이나 민족 중심의 사회에서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를 초월하여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들이 인류에게 다가왔다. 지금 인류는 자국우선주의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인류애를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시험대 앞에 서 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가장 최고의 가치가 진선미(眞善美)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핵심인 신망애(信望愛)와 색깔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성탄절을 기억하고 축하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온 인류가 지향하는 인류애의 목표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초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체벌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체벌은 아동학대나 학교폭력으로 처벌을 받는다. 부모의 체벌도 마찬가지다. 요새 사랑의 매는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인간이 발전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변해야 하는 까닭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진화는 필수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성탄절에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외친 메시지는 오늘 우리 시대에 더 멀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지구촌의 축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 2:10~11
우리가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이 세상의 미래인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고 동참한다면, 성탄의 소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