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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스크랩 한국교회 영성신학 비판: 관상신학을 중심으로
황중원 추천 0 조회 21 11.05.24 17: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교회 영성신학 비판: 관상신학을 중심으로

 

라은성(국제신대)

   

1. 들어가는 말

 

1960년에 와서 ‘영성’과 관련된 주제가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에서는 1990년에 들어와 기독교인들에게 ‘영성’은 관심을 폭넓게 부추기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독교 서점가에서 ‘영성’에 관련된 서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 한국교회의 견해들을 수렴하고 주도하는 잡지들도 ‘영성’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으며 더욱이 각종 집회들과 훈련들까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행한다는 것은 동시에 ‘영성’ 개념에 관한 혼란의 시대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여러 신학자들은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에 대한 제작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성의 본질을 제대로 제시하고 있지 못한다든지 신학적 점검이 필요하다고 우려의 목소리도 들리기도 한다. 교파들 간에 추구하는 목적들에 따라 다양한 영성운동은 영성이라는 미명아래 정확한 개념 정리도 되지 않은 채로 한국교회의 삶속에 뿌리고 내리려고 한다. 아니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영성운동으로 인해 개신교적 정체성마저 흐려지고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본질적 이유로서 ‘영성’이라는 용어 정립에 관한 것, 즉 중립적 개념을 가졌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성’이라는 용어가 불교나 요가, 또는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에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영성’의 용어 정립을 분명히 하든지 아니면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움직임도 있기도 하다.

그리고 영성운동이 혼란을 빚는 또 다른 이유는 시대적 상황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상적 결과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사회 현실 상황,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물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그리고 역사적인 바른 대안을 내어놓기 보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무릎을 꿇고 성장위주의만을 일삼고 있는 상황이다. 양적 결과에만 치중하는 목회적 현장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신학적 점검도 채 이루어지지 전에 무턱대고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적 답변과 실천적 대안이 없는 상황이기에 과도기와 같은 시기에 비성경적이지도 않으면서도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영성운동을 따르고 있다 하겠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상적인 이유보다는 세 번째로 영성에 관련된 내면에는 신학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운동은 자발적으로 일어난 성령운동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의해 근간에 와서 세속적인 충동에 의해 자궁책으로 그리고 종합적으로 교묘하게 고안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러한 고안은 교회의 역사에서 늘 있어왔고 실패와 악영향을 끼쳤다. 대안으로 제시되다보니 이면에 있는 위험성을 제대로 걸러내지 않았다. 그 결과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늘 쇠퇴, 타락, 그리고 분열이 빚어졌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실적 근거들을 신학적으로 점검도 하지 않고 역사적인 점검도 없이 단순히 시대 흐름에 답변이나 목회 현장에서 갱신이나 성장의 프로그램으로 사용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회 갱신이나 성장을 위한 재반응들은 늘 바르지 못한 결과들을 빚어내었다. 영성운동이란 주제의 근저에는 수도원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신약성경시대에 시작된 혼합주의적 영지주의(Gnosticism)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영성운동은 로마 카톨릭 수도원 운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을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나온 뉴 에이지 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더욱이 신비주의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상신학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기 때문에 한국교회 영성운동을 가리켜 영지주의적이라는 대 가정을 이 소논문에서 세워본다.

복잡한 사회적 정황과 정신적 정황 속에서 빚어진 한국교회 영성운동은 초창기에는 기도운동과 말씀운동에 입각한 성령운동으로 시작되다가 점점 더 은사운동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적 영성의 영향을 받아 관상적 영성운동으로 기울이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먼저 복잡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의 현주소를 밝히기 위해 간략하게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의 역사적 발자취와 끼친 영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두 번째로 그 관상적 영성운동에 영향을 끼친 현대 시대적 상황들, 즉 포스트모더니즘, 뉴 에이지 운동, 그리고 심리학적 관상신학 등이 초대 교회에 혼란을 빚게 했던 영지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이런 면을 밝히기 위해 의사 제퍼리 새티노버(Jeffrey Satinover) 박사가 쓴 Homosexuality and the Politics of TruthThe Empty Self: Gnostic and Jungian Foundations of Modern Identity를 중심으로 비평하려고 한다. 한국교회 영성운동들의 현상적 근거들을 밝힌 뒤 그 대안으로 개혁적 입장에서 본 올바른 영성을 위해 용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대안으로 청교도적 묵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개혁적 입장의 용어 정의를 위해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살필 것이고, 청교도 묵상이라고 할 때, 교도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66)가 쓴 The Art of Divine Meditation과 청교도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1620-1677)이 쓴 The Works of Thomas Manton의 17권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지면상 교회사적으로 흘러온 영성운동의 역사를 밝히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있다. 교회사적 고찰을 원한다면 브래들리(P. Holt Bradley)가 쓴 『기독교 영성사』(Thirsty for God) 와 풀러 신학교의 교수인 라이스 박사(Howard L. Rice)가 쓴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을 추천하는 바이다. 본 논문 자체를 한국교회의 영성운동, 즉 근간에 있는 영성운동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2. 한국교회 영성운동

 

2.1 영성운동 현황

20세기 물질문명 속에서 한국교회의 흐름은 성장위주에만 흐르고 있고, 동시에 성령운동은 상업적으로 악용되었고, 변화되는 자신의 정체성 회복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 성도들은 신학의 지침을 받지 못한 채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가운데 사이비 영성단체들이 흥행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이비들은 영성운동의 개념을 혼란시키는 원인들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현재 일어나는 영성운동은 이미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영성운동과 별다른 현상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영성운동을 네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는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로서 기도원이나 잠시 동안의 은둔을 통해 은사운동(Charismatic Renewal)을 맛보려고 하는 형태가 있다. 기도운동을 추구하는 은사운동이나 기도원 주의를 주도하는 영성운동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은사를 행하는 자들을 주도하는 엘리트 의식을 나타나는 현상도 있다. 직접 하나님을 접한 엘리트들에게 즉각적 효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이를 가리켜 “영성의 귀족과 영성 엘리트”라는 새로운 계급이 드러나 득도한 사람이라고 하며 물질을 횡령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이나 교주들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영성훈련을 행하면 무슨 능력을 체험하고 각종 은사들을 얻을 수 있거나 교회 성장을 맛보며 성도들의 모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여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요가나 기를 수련하는 것과 별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복잡하고 현혹적인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과도한 또는 광신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왜곡된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이 관련되면서 영성운동의 개념의 올바른 정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또 1990년대에 후부터 이미 주도적으로 역할 했던 성령운동은 미국에서의 ‘제 3의 물결’에 영향을 받아 ‘경배와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열린 예배가 한국교회 성령운동을 주도케 했다. 둘째로, 일상적인 삶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거나 아니면 교회에 충실하게 나가서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말씀 공부에 전념하는 성실한 성도들로서 기도로만 그치지 않고 보다 폭넓은 형태로서 일상생활에서 신앙에 활력을 주기 위해 단순한 종교적 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셋째로, 기도와 일상생활의 신앙에 활력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인적(holistic)이고 육체적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로서 육체적 모든 삶을 기독교적 삶으로 살기를 원하는 형태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교역자들과 같거나 아니면 선교사들처럼 전 삶을 기독교적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째로 기도로서 개인의 신앙생활을 제한시키지 않고 사회적이고 세상을 향한 헌신된 삶을 위해 영성을 추구하는 형태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흑인신학, 여성신학, 또는 민중 신학을 하는 사람들처럼 사회적 구원을 위해 직접 사회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영성의 형태를 말한다.

한국교회 영성운동은 극단적 신비주의적이라는 면을 갖고 있기에 영성운동이라 하면 성령운동과 같이 방언, 은사 정도로 국한 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근간에 요청하고 있는 신비주의적 영성운동은 로마 카톨릭의 명상과 기도를 따르는 정적인 현상을 선호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세워져 있는 기반과 수도원 운동을 이끌었던 로마 카톨릭의 기반은 구원, 교회, 그리고 인간론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는데 필요한 교육적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할 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깊이 고려해야만 한다. 그런데 올바른 영성운동의 개념을 파악하지도 않고 물질적,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고 영성훈련이라는 미명아래 영성을 추구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한국교회 영성운동은 개혁주의 은혜관을 근본적으로 부인한다. 한국교회 기독교이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사용치 않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를 찾기가 매우 드물다. 하지만 그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고 자신의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각종 선한 열매를 얻는다는 믿는다. 아니면 사회적 구원을 위해 행동주의자들처럼 행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자신의 탓으로 여기기보다는 배신감과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자세보다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고 잠재능력을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 선호하는 알미니안적 신앙을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의 배경에는 뉴 에이지 운동의 정신이 깔려 있으며 영지주의적 철학이 놓여 있다. 특히 신과학과 같은 것이며 영성훈련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자세이다. 이것은 지나친 은사주의를 지향하는 알미니안주의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2.2 세계 영성운동의 변화

한국교회 영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령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의 오순절 운동이 가져오게 된 3가지 물결이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신앙적으로 볼 때, 성령운동은 전국으로 퍼지면서 냉랭하고 무미건조했던 신앙생활에 불을 지폈다.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지성 일변도 시대에 환멸을 가진 서구인들이 동양 영성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한국교회에도 예외 없이 영향을 끼쳤고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만나고자 하는 신비주의적 영성운동으로 나아갔다. 사회적으로 볼 때 급속도로 발전하는 물질문명과 기술적 발전에 대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보다 자신의 개인적 영적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흐름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상실하고 상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사람들 가운데 아노미 현상이 일어나면서 영성운동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생존의 방법이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3의 물결’(Third Wave)과 같은 영성운동 외에도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심리학적 영성운동은 금세기 가장 유명한 로마 카톨릭 영성신학자이며 미국 트라피스트(Trappist)인 토머스 머턴(Thomas Merton, 1915-1968)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그는 수도원적 관상기도를 생활화하는데 노력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자기 인식에 너무 집착해 있고 동양철학을 접목시켰다는 비난을 결코 벗지 못할 것이다.

 

2.3.1 포스트모더니즘

17-18세기부터 시작된 계몽주의에 기초한 모더니즘(modernism) 사상은 경제, 과학, 그리고 문화에 크나 큰 영향을 안겨다 주었고 기독교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다시 말하면, 비기독교인들과 비정통적 기독교인들의 범람과 같은 것, 즉 종교적 개념 역시 과거의 교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을 맞이했다. 종교개혁 이후, 서구를 지배했던 계몽주의는 인류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고, 부분적으로는 인간 타락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강조를 무시하였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죄로 태어났다든지 사악하다는 표현을 계몽주의 윤리학자들은 경멸한다. 한마디로 자율적 인간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몽주의적 자율성, 교의와 신앙을 경멸했던 자율성은 회의주의, 삶의 의미 상실, 그리고 허무주의를 빚고 말았다. 그래서 물질적이고 상업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보다 지식적이고 양심적인 세계관으로, 보다 분산되고 보다 전체적인 세계관을 추구했다. 이러한 변화의 세계관은 특별히 비밀적(esoteric)이고 영적인 방법으로 변해갔다. 마치 중세인들이 계몽주의를 직면했던 것처럼 20세기에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를 맞이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물질적 가치관은 자본주의로 인해 가속화되면서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회 내에서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그것으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으로 나아갔다. 물질적 가치관은 상대방의 내면적 실체를 무시하고 외면적 조건으로만 판단하게 되어 인간의 참된 가치관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더 나아가서 다원화되므로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판단하기 보다는 상대적 가치를 더 우선하게 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 시대에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에 좇아가지 못하는 아노미(anomie)현상을 맞이하여 기독교인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것처럼 보이고 소외감을 느꼈다. 급변하는 기술주의는 사람 자신을 기계화로 만들고 비인격적이고 비영적인 자로 만들고 있다. 소외된 자신의 모습을 사회적 삶에서 찾으려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종교의 역할은 자신의 개인 영성과 종교적 제도들 간에 깊은 골짜기를 형성시켰다. 그래서 자신의 권위에 벗어난 어떤 것보다 자신 내적 면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회, 회중, 성직자들,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느끼고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와 같은 개인주의로 흐르는 새로운 영성의 흐름은 어울리지 않는(mix and match)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는 사회의 올바른 정체성을 바로 잡는데 기여하거나, 악을 치유하고 선도하는 지도권을 발휘하는데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를 상업식 형태로 나아가게 해서 경영체제로 그리고 성도들을 소비자로 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말았다. 각 개인들의 취향에 맞는 형태로 바꾸어 간다. 그 취향의 만족을 위해 현대 음악이 들어오고, 교회적 상징들을 피하고, 적응성을 선호하고,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고, 개인 간의 관계 형성을 강조하고, 그리고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2.3.2 뉴 에이지 운동

포스트모더니즘은 산업주의, 과학적 물질주의, 사신신학으로 특징짓는 모더니즘을 포기하고 만다. 이 시기를 가리켜 자기중심적인 비인격적 개인주의(Depersonalizational Individualism)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도덕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라 부른다. 이를 뉴 에이지 운동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60년대 말부터 시작된다. 뉴 에이지 운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지난 세기 동안 이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고 뉴 에이지의 ‘샤먼’이라고 불리는 스팡글러(David Spangler)에 의하면:

 

과학과 신비주의의 문화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의 시대란 영적 길을 말하고 영의 시대란 과학적 길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로 볼 때 두 문화는 진리로 나아가게 하고, 생명을 향상시키고, 그리고 보다 우수한 것을 얻도록 이끈다. . . .

. . . 어떤 이들은 세상에 있는 사건들, 기회들, 도전들, 그리고 과정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다른 이들은 내적 변화와 비밀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교도나 이단적 종교가 서구인들에게 받을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제공해 주었으므로 다시금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성주의와 과학적인 방법은 인생의 중요한 진리들을 무시하였다. 영적인 질문들과 답변들에 관해 개인들은 관심을 가졌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연합하거나 스스로 계몽될 수 있는 혼합적인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시대, 즉 뉴 에이지 운동이 시작된 셈이다. 뉴 에이지 운동에서 말하는 인류의 근본적인 이슈는 완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우리가 잊어버렸던 참된 자연을 알지 못한 채로 고통을 받았다. 우주적 정신인 하나님과 우리는 그동안 무조건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기동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인식, 즉 새롭게 변화된 생각이다. 계몽되었을 때 자신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 세계도 변화시킬 수 있다. 기독교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반으로 인해 관계가 끊어졌다고 여기지만 뉴 에이지 운동은 우리와 신적 절대자 간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다고 가르친다. 거룩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들의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구속주가 필요하다는 사상은 뉴 에이지 운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뉴 에이지 운동에서는 절대자를 경험하기 위해서 명상(contemplation)이 요청되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삶을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모든 만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므로 우리의 관점은 삶의 모든 것을 신적 존재가 명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명상의 목적은 우리의 능력의 완전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뉴 에이지 운동은 환생을 탈출과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완전을 향한 영적 진화라고 여긴다. 뉴 에이지 운동에서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해 동양의 신비 철학을 따른다. 죄는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의 문제라고 한다. 카르마(karma, 업보)로 인한 범죄는 그것의 형벌이다. 인류는 죄로 인해 타락하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2.3.3 동양 종교

20세기 현대인들은 서구문화, 즉 포스터모더니즘 시대에서 볼 수 없고 찾을 수 없었던 본질적인 것, 개인을 신격화 시키는 것, 즉 견신론(theosophy)을 지향하는 동양에서 찾으려고 시도했다. 동양의 사상들 중 먼저 인도의 종교, 즉 힌두교에서 말하는 인간론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자기실현’(self-realization)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임무를 행하는 동시에 외적 세계로부터 내적 영역에 이르는 진리와 실체를 찾는 운동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의 죄성을 필연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을 우리가 인식해야하고 자라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나그네로서 공간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놓이는 것이 아니라 외적 실체의 세계로부터 내적 실체의 세계로 놓여진다. 이러한 세계의 진행 방향은 외적으로부터 내적으로 향한다. 생명은 물질이 이르는 내적 세계이며, 마음은 생명이 우리가 사모하는 세계의 진행으로 이르는 내적 세계이다. 인간 존재는 이런 과정에 속해 있으며 인간은 이런 진행에 속해있다. 삶의 성공은 자신이 추구하고 이르게 되는 내적 세계에 달려있다.

 

위에서 말하는 외적 실체로부터 내적 실체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인성에 신성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사상은 동양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인간이 곧 신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해탈, 즉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롭지만 귀신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는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화가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하든 악하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초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다루는 죄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완전에 이르는 특별한 일을 즐겨야만 한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존재의 모든 활동의 근원인 그 분을 경배하므로 완전에 이를 수 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집중하게 되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 즉 사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러 사랑 가운데 하나에 이를 때 개인은 하나님 안에서 승화 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거룩하시고 도덕적이신 인격적 하나님을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진 죄를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개인들에게 범하는 죄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환각의 감각적 세계를 떠나는, 즉 브라만(Brahman)과 완전히 동일시하거나 자기실현으로 완전에 이르는데 관심을 더욱 갖는다.

인도와 같이 중국에서도 구원은 인간성의 완전 실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본다. 그래서 “원죄에 대한 기독교 교리는 중국 지성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성의 선함의 중요함은 도덕성의 발전이 완전으로 나아간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선을 발전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상실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도덕적 발전을 전 인생을 걸쳐 요구하게 된다. 중국인들에게도 인간이 죄성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조건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구 문명에 대하여 불만족하던 서구인들은 영성을 추구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적인 존재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보다 자신을 확언하고 실현하는 일이나 신적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깨끗케 하고 정화하는 길을 찾는 영성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불교를 영지주의와 흡사한 점들, 즉, 인간의 타락, 선, 절대자에 대한 추구 등이 있다.

 

3. 관상신학

 

포스트모더니즘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한 가지는 개인적 관상(contemplation)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 명상, 즉 동양철학이나 종교에서 행하는 명상을 통해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려고 한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동양철학의 명상을 따르기 보다는 기독교 중에 하나인 중세 로마 카톨릭이 행했던 관상이나 동양의 종교에서 행해지는 명상의 유사한 점을 들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고, 더욱이 자신들의 삶을 성장시키기 위해 관상적 기도와 삶을 도구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양철학, 특별히 힌두교, 불교, 그리고 도교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 신학자들은 동양의 영성훈련과 서양의 영성 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한 요청 속에 빚어진 관상은 정확하게 해석하기가 쉽지 않지만 생애 끝까지라도 행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상적 행위는 대체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관상적 태도는 자각, 계몽, 집중 또는 관상이라고 불리어지는 행위들이다. 이러한 태도가 현대인들에게 적중한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보다 높은 하늘에 있는 분을 관상하는 것으로 실제적 삶의 의미를 또 다른 세상까지 연장하므로 가끔 만족하려는 전통적인 종교적 삶에 도전한다.

 

3.1 영성운동의 형태

관상적인 영성운동은 첫째로, 수도원적이고 사막 교부들과 같이 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갖고 있으며, 현실도피성과 신비주의적이고 은둔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참 존재나 우아경(ecstatic) 말을 위한 내적 추구나 숙고하는 명상을 개인이 경험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의 신자가 신비적 연합이고 하나님의 현존을 내적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늘 명상하는 것이다. 가시적이고 명백한 세계 이면에 있는 불가시적 하나님을 보고자 추구한다. 그래서 믿음의 경험적인 면들과 감성적인 면들에 의존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러한 영성의 형태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사막의 교부들이나 수도원 운동을 일삼았던 수도사들이 행했던 것으로 작금에 이루어지는 한국교회의 수도원적 수덕이나 관상적 영성형태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 이전부터 행하고 있던 형태였다.

둘째로, 20세기에 와서 급속하게 성장하는 제 1~3의 물결 속에 드러난 오순절 운동 및 은사주의, 즉 카리스마적 운동은 성도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요구를 충족시키는 듯하다. 자유롭고 생동력 있는 예배를 지향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찬양이나 찬양대의 찬양보다는 육체적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을 자유스럽게 찬양 드린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임재하시는 성령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직접 체험하기를 바란다. 또 이러한 예들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여기서의 영성은 개인성이 매우 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내적 인격 가운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만남이다. 세상 삶의 걱정과 염려로부터 도피하므로 현실 도피적 영성을 추구한다. 신비적인 동시에 행동적인 형태를 띠는 이 영성형태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영적이라 할 때에는 성령의 사역들에 늘 깨어있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받게 되는 은사들, 즉 방언, 영분별 하는 은사 등을 강조한다. 종교적 경험이 이 형태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세례와 같은 것이고 방언의 은사로서 그것이 증명된다. 모든 이들에게 요구하는 일방적 모습을 띄곤 한다.

셋째로, 이성주의적 영성이라고도 볼 수 있고 은둔적이면서 이성적인 형태로 볼 수 있는 영성운동의 강조점은 성경적 지식과 신학적 형식에 있다. 그 이유는 영적 경험에 적용하고 이해하기 위해 지적 능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이고 사회적 관심보다는 신학적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적 지식과 성경적 믿음을 올바로 이해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이성과 분석을 가지고 인식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성경공부에 전념하므로 자칫하면 개인적 엘리트주의로 전락할 수 있는 형태이지만 균형 잡힌 신앙의 형태로서 보기 어렵다. 교리적일 수도 있고 냉정할 수도 있는 영성운동의 형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중요시 한다. 대체적으로 개인적 구원에 주력하는 한국교회의 보수적 계열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로, 행동주의적 영성이면서 이성적이고 행동적인 형태는 부정이 자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회를 자유 시키려는 행동적인 투쟁을 선호하고 직접적인 참여를 원한다. 현실도피성과는 달리 현 상황을 좌시하지 않고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ㆍ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행동한다. 이러한 영성을 추구하는 대표자들은 흑인신학과 해방신학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카톨릭 선교사인 도널 도르(Donal Dorr)는 “우리의 영성은 반드시 ‘종교적’,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이며 이 세 가지가 모두 통합되는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것”라는 그의 주장을 들을 수 있다. 한국교회의 행동주의적 영성 형태는 사회적 구원에 주력하는 민중 신학에서 잘 엿볼 수 있다.

 

3.2 심리학

위의 네 가지 영성운동의 형태들 중 기독교 학자들에게 관심 있는 분야로서의 영성, 특히 관상적 영성을 심리학적으로 살펴보면 더 정확하게 그 성격을 분석할 수 있다. 관상적 기도는 심리학적인 면과 매우 흡사한 점들을 많이 갖고 있다. Why I Am Not a Christian and Other Essays를 쓴 회의주의 영국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어느 편지에서 말하기를, “나의 중심에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끔찍한 고통-호기심 많은 격한 고통-, 즉 세상이 담고 있지 않는 어떤 것, 즉 신화되고 무한한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고통이 있다.” 신비주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 Jung, 1875-1961)은 기독교를 크게 상처를 내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자서전, Memories, Dream, and Reflections 에서 말하기를 “나는 태양 주위에 있는 혹성들처럼 하나님 주위에 나의 사상들이 둘러 싸여 있고, 그로부터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힘에 저항하는 것을 거부하게 될 때 말할 수 없는 죄책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했다. 또 “그들은 중세에 이단자로서 나를 여기고 화형을 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의사 쟌 볼런(Jean Bolen)은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을 논하면서 하는 말이 “내[융]가 자젠(Zazen)에 앉아 있거나 별들 아래 누워 명상할 대 또는 평화롭게 기도할 때 유형화된 우주, 모든 경험에 의미를 주는 것, 또는 근원적인 것, 즉 ‘내가 연관이 되어 있구나’라는 존경스러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보다도 무엇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명하는 모든 단어들은 무의미할 뿐이다.” 또 그가 “자신을 신적이고, 역동적이고, 서로 연관을 가진 우주의 부분으로 느끼게”한다고 했다.

관상적 영성에 늘 언급되는 현재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은 토머스 머턴, 앤터니 드멜로(Anthony DeMello, b. 1931), 윌리엄 샤농(William Henry Shannon, b. 1917),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 피터 판 브리멘(Peter Van Breemen), 윌리엄 라이저(William Reiser), 데이빗 스테인들-래스트(David Steindl-Rast, b.1926), 그리고 바실 페닝턴(Basil Pennington) 등이다. 신신학을 따르는 신 수도사들은 사회적 활동가들이었고, 수도원에만 거하면서 관상을 즐기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전적으로 다른 초월하신 분이시기에 교리의 체제로서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현 상황을 비판한다. 서양의 이성주의는 하나님의 지식을 어둡게 했기 때문에 반드시 직감적으로 받는 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성을 넘어서, 교리를 넘어서, 그리고 말씀을 넘어서 하나님과 심오한 연합을 위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에서는 보편의 공통 주제들과 존재의 본성에 대해서 그리고 관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 사회적 정의, 그리고 비폭력 등을 논의 한다. 신 수도사들은 모든 종교들이 “총체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안에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통의 신비들 속으로 자신들을 잠거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수도사들에게 칼 융의 영향은 지대했다. 신비주의 심리학자 융은 프로이드의 제자로서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과정에서 무의식의 어두움을 수용해야만 한다고 한다. 융은 기독교 교리를 신비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종교적 신화와 상징은 인류의 “총체적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신신학을 따르는 신 수도사들은 자아와 존재 간에 있는 이원성(duality)에서 인간이 태어났다고 믿는다. 자아는 죽음과 소원이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고 모든 고통과 상처의 근원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타락은 신비적 이야기로서 존재와 낙원의 조화로부터 소원과 분리의 개념으로 타락했다고 본다. 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죄성을 가진’ 인간성을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괴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과 하나였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가리킨다. 머턴은 융의 신비적 관점에서 성경적 교리들을 해석하고 영적 치유에 관한 자신의 작품들에서 융의 심리적 치유를 대중화 시킨 자였다. 그는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을 아시아로 다니면서 배웠다. 마침내 수도원적 관상과 동양 명상 간에 매우 유사점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이 동일한 신비적 근원에 두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리보다도 경험과 내적 변화에 강조하면서 동ㆍ서양 간의 접촉점을 찾는 에큐메니칼 모임을 개최하곤 했다.

이러한 자세를 행하는 신 수도사들이 말하는 영성의 핵심은 관상적이거나 집중적이다: “관상적 기도의 임무는 내 안에 거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다.” 관상적 기도에서 자아는 부서져야만 하고 이러한 부서짐을 통해 자아는 어두움 속으로 들어간다. 이 안에서 갈등과 고통을 당하는데 이러한 것이 없이는 사랑 안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두움의 공판을 지나 자아는 청결해지고 마음은 깨끗해진다. 그리하여 인증 받은 제자의 삶은 감추어진 것이고 불가시적 일이다. 하나님은 정상적인 기독교인들을 상실과 얻음의 리듬 속에서 부르신다. 침묵과 고독을 위해 들판을 건너고 집중하는 기도는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움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집중된 기도에서 죄라는 단어는 심리학적 치료를 위한 방법에 덧붙여진 것이고, 도덕적 범죄에 대한 성경적 표현은 생략되고 만다.

또 관상적 영성에 편중된 몇몇 현대 철학들은 윌리엄 샤농(William H. Shanon)의 실존주의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신비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모든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 신비의 핵심에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말씀들이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 신적 실체를 경험한데서 나온다는 것이 있다.” 현대주의 철학들에 덧붙여진 관상적 영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것과 여러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따르면 진리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복수적이고 우주적인 이성에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 자체는 해체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궁극적 진리가 “단어 이면에” “교리 이면에” 있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으며” “말하지 않는 기도”를 통해서만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 하면서 관상적 영성을 주장한다. 이것이 카톨릭 신비주의의 새로운 면모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최종적 단계로서 진리의 합법적 운반자로서 언어 자체를 떨쳐버린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종류의 궁극적 실체를 결코 지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리의 해체를 논의한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본문 외의 의미를 찾고자하여 본문보다 해석자를 높이 둔다. 해석가가 듣는 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신의 음성이다. 이것을 모든 해석가가 실제로 듣기를 바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 위에 있는 권위에 성경을 둔다는 것보다 성경 위에 있는 권위에 인간을 두려고 시도한다.

관상적 기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성경적 표현들의 개념들은 실제적으로 동양 철학 묵상의 테크닉, 즉 집중적 기도를 통해 전체에 대한 희미한 개념들을 대신하여 사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관상적 기도를 일삼는 자들은 이것이 영적 여행을 하도록 인도하며 융의 심리학에 의해 묘사된 무의식과 같은 것에 의식을 결합시킨 것과 동일할 뿐이라고 한다. 관성적 영성은 매우 위험하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것에 관해 양들에게 경고해야만 할 것이다. 참된 성경적 영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경적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관상적 기도가 전혀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된다.

 

3.3 영지주의

신비주의 심리학자인 칼 융에 대한 전문 비평가인 의사 제퍼리 새티노버(Jeffrey Satinover) 박사는 말하기를, “교회들과 회당에 끼친 그의 영지주의적 철학과 도덕성은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에 융을 면밀히 검토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성적 혁명을 알렸던 도덕적 상대주의는 융이 최고의 현대 설명자라는 견해에 근거한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융은 신 영지주의와 뉴 에이지 운동의 아버지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영지주의의 가장 능력 있는 현대 형식들 중 하나는 융의 심리학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자신이 악의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사도적 전통을 잇는 후예로서 심오한 심리학을 밝혔다”고 하며 “고대에 영지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심리학적 경험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교회교부들보다 폭넓은 기초 위에서 악의 문제를 맞붙어 싸웠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새티노버 박사는 “그 체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고 어떤 다른 상황이든지 간에 모든 영지주의적 체계들의 가장 내적 요소, 즉 궁극적 목적은 선과 악의 연합의 신비적 비전이다”라고 평했다. 또 평하기를, “자신의 성년기를 연단술(alchemy) 연구에 헌신했던 그는 고대 은자주의(hermeticism)와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을 역시 상술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강신술에 대한 것이었다.” 융 자신도 하는 말이 “연단술과 비교하거나 영지주의에까지 이르는 지성적 연결고리는 나의 심리학에 본질성을 심어 주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럽 대륙에 기초한 수많은 강신적 작품들 중에 하나를 수집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취리히에서 융학파 연구소 소장이었던 힐만(James Hillman)박사에 의하면, “[그는] 선불교에 대한 최초의 입문서를 썼고, 그는 (헬라 신화), 즉 잡신들과 여신들, 신화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천문학에도 흥미를 가졌다.” 1929년 융은 Secret of the Golden Flower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중국 요가와 관련 있는 도교 본문만 아니라 연단술 소논문을” 썼다고 했다. 또 “Golden Flower의 본문은 나에게 올바른 길을 걷도록 했다. 중세 연단술에서 우리는 영지(영지주의)와 현대인들을 조명할 수 있는 종합적 무의식 과정 간의 기나 긴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이 한참일 때 Rock Opera Hair 에서 물병자리(Aquarius) 시대가 도래 했다고 주장했는데 융은 이미 1940년에 이러한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예시했으며 이것은 바로 뉴에이지 운동의 예고였던 것이다. 그의 책 Aion 에서도 융이 하는 말이 “그리스도의 임재는 고기들의 새로운 이온의 시작과 일치한다. 동시성은 그리스도의 삶과 객관적인 천문적 사건, 즉 물고기자리(Pisces)의 사인의 시작 간에 존재한다.” 심리학자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드 프로이드 (Sigmund Freud, 1856-1939)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매일 저녁마다 나는 천문학에 심취한다. 심리적 진리의 핵심에 실마리가 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점성술을 연구한다. . . 직관적으로 천체들을 바라보게 되면 수많은 지식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분법으로 인간의 영을 치유하고 다스리려는 융의 심리학적 주장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자도 있지만 그의 주장은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영과 육체를 분리시켜 해결하려는 심각한 이단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뉴 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를 기반하고 있다. 영지주의에서는 물질에 묻혀있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신비한 영적 진리가 필요하며, 창조는 신격으로부터 발산되거나 이온들(aeons)로부터 발산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모습을 뉴 에이지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또 뉴 에이지 운동은 펠라기안과 흡사하다. 펠라기안들은 인류가 본질적으로 선하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함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겉으로는 펠라기안을 반대한다고 표명하지만 실제상으로는 펠라기안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 영성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로마 카톨릭 영성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영성운동을 분리시키는 크나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죄에 대한 인식은 영성신학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은 죄가 의지에서 발견되고 죄는 행동 자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현재에 와서도 그들의 죄관이 조금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선택’(fundamental option)이라는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덕신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정화, 단계, 그리고 연합이라는 세 단계로 기독교인의 영성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 단계는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가 쓴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에서 4주의 과정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로마 카톨릭 영성신학은 단순히 덕행을 증진시키는데 강조하고 있고 죄는 금욕 혹은 정화의 과정으로 취급하고 있다.

더욱이 이것은 뉴 에이지 영성에서 가르치는 것과 동일하다. 더욱이 뉴 에이지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의 본질적인 것은 영과 물질, 영혼과 몸, 정신과 본체 간의 존재론적 관계를 인식하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회복하는 것, 즉 헬라 교부들과 동방 정교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고대적 기독교 정신에서 답변을 찾는 것이다. 이 답변을 위해 켈틱 기독교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켈틱 기독교인들은 보다 명상적이었고, 타인들, 자신들, 자연,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듣는 훈련에 익숙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 무엇임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켈틱 영성신학은 펠라기안적이다. 만일 이러한 명상적 영성운동이 성경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즉 펠라기안 죄관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선택이나 자신의 능력을 우선순위 한다면 곧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의 대표자들로 불리는 앤터니(St. Anthony)와 파코미안들(Pachomians) 간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별히 영지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많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등장한 영성신학, 즉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는 영성신학은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 신비주의자 칼 융과 동양철학이 그 바탕을 깔고 있고 그 위에 진행되고 있는 이 관상신학인 것이다. 작금에 유행하고 있는 현대 한국교회에서의 영성신학, 특별히 관상신학에 잘 반영되고 있다.

 

5. 나가는 말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성운동은 본래 성령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령운동은 사회적 상황과 정신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적 상황이란 포스트모더니즘과 뉴 에이지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정신적 상황이란 동양철학과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심리학적 영지주의적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여러 영성운동의 형태들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물결 운동으로 인해 빚어진 지나친 기도운동과 은사운동이고 감성적 찬양과 경배의 영성들의 모습이다. 외적 교회 성장에만 눈이 먼 한국교회는 비만에만 급급하고 있다. 일방통행적 영성운동은 한국교회를 조금씩 좀먹고 있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과도하게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영성에 이를 수 있다고 밀어붙이는 것은 더욱 심각한 현상이지 않을 수 없고, 유혹과 억지까지 부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개인의 성장만 아니라 교회의 외적 성장에 기도운동과 은사운동은 만병통치약으로 대치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사회적 현실 도피적이고 무시하는 경향을 갖는 부정적 측면을 갖고 있다. 이와는 달리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은 ‘제 4의 물결’이라는 관상신학, 즉 명상신학이다. 이 신학은 심리학적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한국교회 영성운동 중 명상, 즉 관상신학을 따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이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적 경향을 가진 것으로 한국교회를 좀 먹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관상신학이라는 영성신학을 통해 “진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보다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헌신적인 행위를 수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을 깨닫는데” 보다 집중한다. 관상적 영성은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지식으로 이끌고 “하나님, 대상들, 자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즉 자각의 변화를 위한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체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냉정하고 냉랭한 교리적 전통과 지겨운 의식주의에 짜증을 내고 있든지 아니면 보다 자유스럽고, 새롭고, 감성적이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매력적인 것을 느끼려고 하든지 한다. 일상적 헌신을 위해 성경공부, 묵상, 암송, 그리고 판에 박힌 기도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필요한 것은 마음을 집중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관상적 영성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영성은 영적 성장과 참된 영성을 성경이나 성경적 주제들을 관상하기 보다는 마음을 비우므로 하나님을 관상하는 데서 일어나게 된다.

관상적 영성은 로마 카톨릭의 신학이 배여 있고 스며있는 영적 훈련 방법이다. 이 방법은 사회의 흐름의 답변으로 부활되어 다시금 요청되었다. 신학적으로 다른 기반을 갖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한국교회가 카톨릭 신학을 가진 관상적 영성을 요청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하에서 뉴 에이지 운동에 따른 것이라 믿어진다. 세상에서는 뉴 에이지 운동에 대한 답변으로 동양철학을 채택하여 현대인들의 구미를 맞추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성장위주에만 있는 한국교회가 바른 신학 없는 실천만을 앞세워서 제 방법들을 채택한다면 그 결과는 교회사에서 배우다시피 더 큰 어려움을 직면할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교황제의 왼 팔로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수도원 운동이라도 한 세대를 지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역사를 통해 누구든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말씀을 경시하고 감성과 심리에만 치닫던 중세교회는 결국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물론 수도원 운동에도 장점이 있는 것을 인정한다. 타락한 교회에 정화를 주었던 것은 사실이고 교회에 귀감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수도원 운동은 종교재판과 끔찍한 십자군 운동에 앞장서서 잔혹함을 동시에 행했다. 수도원 운동에서 실시되었던 신앙 훈련 방법인 관상신학을 한국교회가 채택하여 나간다면 그 결과는 로마 카톨릭이 빚었던 교회의 타락을 부채질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확신한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개혁적 신앙에 입각한 청교도들의 경건 훈련 방법 가운데서도 훌륭한 묵상의 방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것, 즉 종교개혁자들의 경건을 몸소 배우고 익히고 행하는 것이 요청되는 것이지 영지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는 관상신학을 채택하고 선호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을 거슬리는 역사적 역행이라고 감히 여겨진다. 초대교회를 보면서 그렇게 연구하고 고민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시각에서 보고난 후에 재검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무시하고 다시금 객관적이라는 시각으로 초대교회를 보는 양 시각이 있다. 전자를 띠게 되면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의 자세에서 개혁을 하는 것이지만 후자를 선택하게 되면 범교회적이라는 자세를 띠기가 쉬울 것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시각을 가지고 초대교회를 비롯한 중세교회를 보아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후예로서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고민하고 연구하여 내어 놓았던 청교도들의 신앙훈련 방법들 중 하나인 묵상법을 채택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 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반열에 서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할 것이고, 한국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올바른 신학적 시각과 자세를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진정한 영성운동을 원한다면, 즉 경건을 원한다면 또는 참된 기독교인의 삶을 원한다면, 군인들에게 필요한 제식 훈련처럼 무의식 속에 빚어지는 외형적 훈련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을 따라 스스로가 행할 수 있는 삶을 몸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체험해야하며, 몸소 보여야 하며, 그리고 제시하여야 한다. 외적 훈련을 통해 영적 갈구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사에서 시행착오를 빚었던 것이다. 영적 갈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모두가 순종하고 겸손을 행할 때 채워지는 것이지 외침을 통해 의식과 예식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영적 해갈은 영원한 진리인 말씀을 신학과 더불어 묵상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이웃을 살피고 행할 때 비로소 영적 해갈은 이루어진다. 이러한 모든 일은 성령의 역사, 즉 하나님의 역사에 겸손히 의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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