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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중국대륙의 동쪽 만주주변 한민족의 부족국가에서는 영고, 무천, 동맹 등으로 불리운 제례에서 하늘을 숭상하는 가무, 유희오락을 통해 부족 단합과 많은 수확을 기원했다. 이런 큰 잔치 중의 가무, 유희는 자연스럽게 경쟁 의식을 갖게 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전제례행사인 올림피아 제전처럼 경기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부족의 방어와 세력확대를 위해서는 전투능력향상을 도모해야 했으며, 자연스럽게 숭천제례의 신체활동은 투기를 중심으로 경기화 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태권도는 이런 가운데 한민족 고유의 투기형태로 생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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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신체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운동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그 활동을 통해서 성장 발달한다. 이러한 신체 활동은 옛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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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의 '선배'와 택견 |
고구려는 원래 주위의 적과의 투쟁 과정에서 성장 · 발전한 관계로 신라나 백제보다 기력이 있고 호전적인 국민이었다. 고구려는 초기에 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2세기경 태조대왕과차대왕의 2대에 걸쳐 '선배'라는 강력한 무사단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강성과 중앙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창설된 것으로 풀이된다. '선배'가 된 자는 각각 무리를 지어 한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해강습(講習)하거나 일신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을 사양치 않았다. 고구려 당시에는 각종 지위가 출신에 의한 세습제였으나 오직'선배'만은 출신의 미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까닭에 인물된 사람이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이로써 고구려에서는 문과 대등한 무의 위치를 엿볼 수 있고, 오히려 무예를 중요시 하는 진취적인 상무정신이 더욱 두드러져 있음을 불 수 있다. 무(武)를 중시한 고구려에서 무예의 근간인 택견이 으뜸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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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라의 화랑과 택견 |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신라는 건국초기에는 외적의 침입이 없어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백제의 건국, 고구려의 침입 등 세력팽창과 영토확장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무예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신라의 무예라면 먼저 화랑도의 수련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제도를 모방하여 당 12년에 이르러 풍류도, 풍월도란 민간청년 단체를 재정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랑도는 무사도의 용맹과 충(忠), 효(孝)를 기초로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이 강하였으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삼아 인격도야와 심신단련에 힘써 국가를 이어 갈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김춘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수박이란 손기술의 명칭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이나 상류층에 치중된 기술이 검술이나 다른 무술의 기초 수련으로 실시되었고, 일반 평민들은 몸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었으므로 위력이 강한 발을 중심으로 술(術)을 발전시켰다. 이는 '태견'이란 말이 이두(吏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후일 이말이 탁견(托肩)이란 글자로 표기되었음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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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의 택견의 신라 전승 |
택견은 시대의 진전에 따라 발전되어 있으며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가 있다. 첫째, 언원으로 볼 때 화랑은 선랑(仙郞)이라고도 했으며 선랑의 '선'은 음이요, '랑'은 선인(仙人), 선배의 사람이라는 뜻을 취한 이두문으로 선배의 배와 같으며 화랑의 연원사를 선사라 함을 보아도 선랑, 화랑, 선배(선인)가 다 같은 청년 무사단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둘째, 화랑과는 선배의 조직과 상하 구분이 같다. 세째, 신수두 경기에서 선배가 택견을 하였듯이 팔관회나 한가위 같은 모임에서 화랑이 겨룬 경기에 택견(수박, 덕견디, 택건이)이 포함되었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2세기경에는 옛부터 내려오던 투기가 택견으로 체계화되어 선배를 무예의 기본으로 행하고, 4세기부터는 태학과 경당에서 체계적인 무예를 교육함으로써 더욱 발전하여 무용총 벽화에 나타날 정도로 일반인에게까지 보급되었다고 한다. 또, 택견은 신라에 전해져 더욱 발전하였으며 손기술과 발기술이 나누어져 조직적으로 체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조각이나 불상에 있는 인물의 동작에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다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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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기본동작, 손기술 그리고 발기술로 분화 발전된 택견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승, 발전되었다. 특히 고려는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457년간 존속하면서 우리역사상 상고시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삼국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는 삼국을 거친 택견이 기초 단계를 넘어서 무예적 가치를 인정받아 벼슬과 직결될 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으며 기술과 위력도 인명을 살상할 정도로 무기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수련 형태 또한 오병수박회라 하여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집단 대견으로 발전하였다. 그 당시는 사회가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을 필요로 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재(武才)만 있으면 군사로서 특별 채용될 수 있었다. 의종은 이의민이 수박을 잘하여 대정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켰다든지, 최충헌이 손님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설하고 중방의 힘샌지로 하여금 수박회를 가지고 이긴자에게 교위(校尉)난 대정의벼슬을 주었다거나 변안렬이 임견미, 염홍방 등과 수박을 하여 이긴 결과로 밀직부사에서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함은 직위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수박만 잘 하면 벼슬을 얻거나 승진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며 택견의 승부로 벼슬을 주거나 진급을 시켰다함은 승부를 가리는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이 있었음을 뜻한다고 할 때 태권의 경기화 내지 스포츠로서의 기반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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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무예를 중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으나 화약 발명에 따른 새로운 무기의 사용도가 높아지고 군대조직이 정비되자 태권과 같은 맨손무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유교의 이념을 국시로 삼고, 배불숭유의 정책을 지항함에 따라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인 행사가 폐지된 후 무예의 진흥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나라의 기틀이 잡혀 안정을 찾게되고 군대 조직이 정비되면서 화약의 발명과 새로운 무기의 사용으로 수박희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무예도 경시되었으며 위정자들은 문치와 당쟁에 휘말리고 선비들은 무예를 무시하고 무관심하다가 임진왜란은 겪은 조선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군제를 재정비하고 창, 활, 검 등의 고대적 무기 외에 화포, 재통, 창술, 택견등 무예를 일정한 방침 밑에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훈련도감을 두고 5부 의장정을 뽑아 무예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호관 또는 속오군이란 것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택견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일제의 주재소(파출소)에 수차례 불려다니며 감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자연히 쇠퇴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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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더불어 민족문화와 전통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정리가 되어감에 따라 옛부터 내려오던 민속경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옛부터 '태껸'을 수련하던 분들이 나타났고 그 중 송덕기같은 사람은 전 대통령인 이승만의 생일날 우리의 태권도(택견)시범을 보여 한국 태껸과 가라데의 다른 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 전문인들에 의해 태권도장이 개설되었고 그 후 6· 25동란까지 초보적 발전단계를 거치다 6· 25후에 시국의 안정과 더불어 점차로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점차 수련생이 늘고 도장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자 1954년에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고 그 후 1961년 9월 16일에는 태권도협회의 명칭을 대한 태수도협회로 개칭하였다가 1965년 8월 5일 다시 대한 태권도 협회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2년 6월 20일 대한체육대회의 경기단체로 대한태권도협회가 가입승인을 받았으며 1963년 10월 24일 제 44회 전국체육대회에는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참가한 후 1964년 9월 3일 제 45회 전국체육대회부터는 정식경기종목이 되었다. 1966년부터는 대통경기쟁탈 전국단체대항태권도대회가 1968년부터는 주한외국인 개인선수권대회, 1970년부터는 전국 초등학교 태권도 개인선수권대회와 함께 여자부 태권도개인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63년부터 협회의 종별선수권대회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부를 1974년부터 대학 태권도 연맹과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여 정식 수련종목으로 선정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응용, 실전에서 적을 제압함으로써 한국 군인과 태권도는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발전되어 온 태권도는 점차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래에 이르러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부의 국민 체력 향상 정책과 체육인구의 저변 확대에 발맞추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태권도 기술의 우월성은 물론 심신수련, 인격도야, 체력향상이라는 목적이 높이 평가되어 1971년에는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태권도는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와 경찰뿐만 아니라 학업에 전념하는 우리의 학생들까지 실시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국내에 200년만의 수련생과 50여만의 유단자를 배출하였고 해외에 수많은 사범을 파견하여 지도하고 있어 민간 외교와 국위 선양에 큰 몫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태권도 중앙도장 겸 시합장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고 1973년 5월 28일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고 회원국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또 1973년에는 제1회 세계선수권대외를 창설하여 매 2년마다 대회를 열고 있다. 또한 1975년에는 태권도가 미국체육회(A.A.U)과 국제경기연맹연합회(G.A.I.S.F)에 1976년에는 국제군인체육회(C.I.S.M)에서도 정식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 1979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의 김운용 총재가 세계 비 올림픽 종목 연합회의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이 IOC의 정식 승인 단체가 되는 동시 태권도 종목이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81년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게임에서는 태권도가 9개의 메달을 획득, 한국이 종합 2위를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아시아 제2의 스포츠 강국이 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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