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기」는 대부분의 한국어 성서에서는 「사사기」로 되어 있습니다.
‘사사’라고 하거나 ‘판관’이라고 하거나
우리에게 낯설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저 애매한 직함의 ‘일시적 지도자’ 또는 ‘영웅’들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쉽게 입에 와 닿을 용어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판관기」는 성서 중에 잘 읽히지 않는
몇 안 되는 문서입니다.
그렇지만 판관들 중 한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그가 바로 ‘삼손’이라는 인물입니다.
신에게 바쳐진 거룩한 사람이기도 했던 삼손은
자신이 머리를 깎지 않았을 때만 힘을 쓴다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영웅이었는데
신에게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과는 달리
그리 정결하게 살지도 않았고
힘은 좋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판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겨를은 없습니다.
문제는 「판관기」라는 문서가 지니고 있는 성격인데
모두 12명의 판관이 있고, 그 사이 삽화 같은 내용이 있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혼란스럽고 어수선하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사실 이 독특한 문서는 떠돌이로 살다가 이집트에 잡혀가 종살이를 하던
‘하비루’ 무리가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간 직후부터
대략 몇 백 년 정도의 기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새로운 땅, 그렇지만 낯선 땅에 들어갔다는 것과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 이들을 어쩔 수 없이 맞아들여야 했다는 점만 헤아려도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문제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간단히 정리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들은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적응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그것이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런 저런 일들을 거쳐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겨진
성서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그 땅을 지배하는 국가들이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 거기서 다시 마케도니아로
그리고 마침내 로마로 바뀌는 동안
살던 땅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돌이로 살아갔고
그런 이들인 ‘유태인’이 마침내 나치의 학살을 경험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이들은 다시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려는 의지를 키웠고
거기에 음흉한 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른 계락이 작용하면서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은
예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2천 년이 넘은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 혼란과 비극, 거듭해서 불행을 생산하는 역사가 펼쳐지는데
이전 적응과 정착의 문제가 일단락되지 않아서 거듭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판관기」적 상황과, 오늘날 팔레스타인 문제를
재조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번 ‘이야기 성서’는 그것을 중심으로 내용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아직은 야만적 질서가 가득한 이 세상에
오늘의 저 비극이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숭고한 일로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