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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눈꽃 (썬다 싱의 생애)
1. 그 때나 지금이나 내게 둘도 없는 신학교는 바로 십자가 밑에서 그의 발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지식을 다하여 신학을 만들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이들의 인식을 넘어서는 지혜의 근원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요셉이 말한대로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겠습니까?(창40:8) 마음과 뜻을 보시는 하나님, 겸비와 순종의 진리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지식을 붙잡고 있는 신학교는 이 깊은 지혜의 못을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2. 궁극적인 지혜는 무엇을 안다는데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썬다는 미련없이 신학교를 자퇴해 버리고 한없이 넓은 行의 세계로 나왔다. 나도 초월하고, 지식도 초월하고, 교단도 초월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을 삶으로써만 道에 선 나로 성숙시켜야 한다.
3. 어느 날 나는 산불이 난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산불은 점점 크게 불어서 내가 서 있는 언덕 아래의 큰 나무 가까이까지 번져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 꼭대기에는 새 둥지가 있어서 어미 새가 파닥거리는 아기 새들의 둥지 위를 빙빙 돌며 안타까이 짹짹거리고 있었습니다. 시뻘건 불길은 커다란 불 혀를 날름거리며 그 나무 밑둥에도 번져 이윽고는 거목의 꼭대기에 있는 둥지를 삼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이 돌던 그 어미 새는 불길이 둥지에 옮겨 붙는 순간 쏜살같이 내려와 양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덮쳐 안은 채 함께 타 죽는 것이었습니다.
4. 썬다에게 책이 두 권있다면 그것은 자연과 성경이었다. 성경이 수직적인 계시라면 자연은 그에게 있어서 수평적으로 오는 빛이었다. 하나님의 빛과 진리로 묘사되듯 그에게 있어서 빛은 진리이고 진리는 빛의 알레고리였다. 빛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면 진리는 자연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표상이었다.
5.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6. 묵상시간처럼 성경을 마주하고 있으면 썬다는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정관(靜觀)하고 내성(內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먼저 성경의 구절이 그에게 조용히 물어오면 그는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깊은 곳으로 나아가 닻을 내리라” 주님의 말씀은 갈릴리의 철석이는 물소리가 되어 그의 귀에까지 들여오는 듯하였고, 근심많던 심령이 평강의 물로 적셔지게 되었다.
7. 썬다는 한 송이의 들꽃, 한 마리 공중의 새로부터 수십억 광년의 성좌에 이르기까지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오의(奧義)를 묵상하며 기도를 드렸다. “자비하신 아버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마소서. 내가 전도 길에서 돌로 맞고 죽더라도 그와 함께 있기만을 원하나이다. 오직 주님의 사랑에 노예가 되고, 주님과 함께 못박히게만 하옵소서. 천막을 짜며 떠도는 바울처럼 주님만이 우리 삶의 푯대요, 종점이라고 전하면서 아버지의 말씀만 씨를 뿌리게 하옵소서. 주 안에 있는 내가 주님의 겸비와 순교만을 배우기 원하나이다”
8. 다음은 썬다와 老수도사 마하리시와의 대화 일부이다.
(썬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처럼 영원한 것입니까? 그렇지않으면 태어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까? 만약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영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작이 있으면 꼭 끝이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영혼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육체와 함께 입니까? 혹은 육체 이전입니까?
(마하리시) 사람의 영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상으로 말할 경우 하나님처럼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불멸해야 영원한 것이지 始終이 있고 生死가 있는 한계나 상대는 영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혜와 권능의 경우도 무한이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지요. 존재의 경우 확실히 인간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와 뜻하심을 덧입는 소수의 선택된 운명을 타고나는 사람의 경우 존재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뜻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므로 시작이 없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이 경우 그는 아직 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의지 안에 이미 있지 않았습니까? 존재치 않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선택받아 미리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론적으로 말할 때 영혼은 생명체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있기 전에는 나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시는 것입니다.(슥12:1)
9. 逆河적인 것, 모두들 휩쓸려 죽는데 어떤 송사리떼나 피라미들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던가. 생명의 앙양을 위한 逆河, 누가 뭐래도, 어떤 세찬 박해에도 나는 거슬러서 살리라. 죽지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리라. 길 위에만 늘 서 있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운명을 이기리라. 마치 죽음의 벽 이편에서 죽음의 벽 저편을 흔들며 ‘죽음아, 이제 네가 어디 있느냐? 네 쏘는 추악한 독침이 어디 있느냐?’하고 죽음조차 쥐고 흔드는 사도 바울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 되리라. 역하적인 자는 살고 역하적이지 못한 자는 죽는다. 하늘 나라에 드는 것과 영원한 멸망이 결국 극기- 이 하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고통없는 극기가 있을 수 있을까? 인생은 결국 자기를 눌러 이기기 위한 싸움이다. 한번 끊어 행해서 길(道)에 나를 세우고 그 길을 향하여서만 걸을 뿐이다. 산이 앞을 가로막아도 좋다. 오르고 오르는 한 못 오를 리가 있으랴.
10. 누구에겐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썬다는 주님을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빚지고 있음으로 해서 행복했다.
11. 썬다는 어머니의 생전 말씀을 기억하였다.
“썬다야, 신은 저렇게 만물을 덮어주고 잠이 들게 해 주신단다. 눈보라가 치는 것 같지만 눈보라가 아니고, 어둠 뿐인 것 같지만 어둠이 아니란다. 마치 큰 파도 밑에 고요한 수면이 있고, 가장 깊은 어둠의 시간 뒤에 새벽이 있듯이 신은 私가 없으셔서 만물을 키우고 돌보신단다. 눈과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을 가지 뻗고 꽃필 수 있게 준비를 하신단다”
“흐르는 물이 썩을 수 없듯이 타기만 하면 꺼지지 않는거야. 나를 밝히고, 이웃에게 타고, 거룩한 이의 품안에서 타는 것, 우리 썬다는 앞으로 장성하게 되면 늘 타는 삶, 불꽃같은 믿음을 가꾸기를 어머니는 믿어요”
12. 깊은 방이나 이른 새벽에도 습관을 좇아 산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신 예수님. 새벽을 깨우면서 산 삶, 영원도 순간처럼, 순간도 영원처럼 산 삶, 걸림없이 사신 것이다. 깨끗한 생사, 삶에도 깨끗하고, 죽음에도 깨끗했던 예수, 예수처럼 통옷을 입은 채로(요19:23) 살 수는 없을까? 앞뒤도 없는 통옷, 온전한 하나. 말씀이 삶이 되고 삶이 말씀이 되어 사는 경기, 天衣無縫. 하늘 아래 어느 시인이 산상설교와 같은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으며, 어느 의인이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道成人身 예수, 참으로 단 하나의 실존이 있었다면 길을 이룬 예수, 길이 된 예수 뿐이다. 그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13. 은혜를 알아야 할 일이다.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은혜를 갚아가는 것 외에 다른 일일 수 있으랴. 生老病死가 인생의전부가 아니다. 매일 씻어내고, 매일 내 인생의 밭에 감사와 사랑의 씨를 뿌리며 살자. 그리하여 내 인생이 향기날리는 주님의 동산이 되게하며 살자.
14. 그의 기도는 고통 중에 있는 자, 병든 자, 집이 없이 방황하는 자, 가난한 자, 위기에 처해있는 자, 또 그가 전도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 후 온 땅의 교회들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했다.
15. 썬다는 눈에 보이지않는 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하나님의 존재에 회의를 표하던 사람들을 떠 올렸다.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하늘의 뜻은 도덕적으로 양심이란 법을 통하여 인간에게 내면화되어 있고, 외재적 자연질서를 보아도 우주의 근본적인 힘이 그 보이지않는 활동력 위에다가 정신(성신)까지 兼有하여서 日月星辰의 운행을 주재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섭리로 나타나지 않는가? 물론 자연이 하나님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는 자연계를 통하여도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창조하신 자연만물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면(롬1:19~20) 자연질서는 하나님 의지의 顯現이고 삶의 규범인 것이다.
16. 성경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햘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한 의지가 산재되어 그것은 차라리 암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첩첩이 막힌 험곡닽은 성경의 골짜기들, 그럴수록 썬다는 성경을 성경으로 풀고, 주님께 기도로 풀리라 하고 결심하였다. 사실 묵상 중에 깨달아가는 성경공부란 외로운 전도의 싸움보다 더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17. 사실 기도의 힘이 없었으면 썬다는 벌써 티벳 전도를 포기하였을 것이다. 기도만 드리면 주께서는 그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여 주셨고, 무너져않던 신심을 되살아나게 하셨다. 그의 멍에를 메고 그의 겸비를 배우겠다고만 하면 주님은 언제나 산성처럼 확고하게 그의 영혼깊이 거하여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18. 그에게 있어서 복음전파랄 기도가 피어낸 영성의 꽃 이외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기도로 깨어있지 않으면 진리도 영성을 가꾸어내지 못했다. 깨어있는 혼으로부터 피는 꽃, 그 마음의 꽃이 아니고는 생명의 열매를 수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정께까지 그의 곁에 있다 흩어지는 경우에도 그는 기도생활을 잊지않았다.
19. 모든 크리스챤들은 중세의 수도사적인 영적 경건을 가져야하고, 그 영적 경건은 주님의 전을 향한 열정으로 전도를 불태워야 하는 것이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되, 온 대중과 함께 삶의 아픔의 자리를 같이하며, 예수와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성소를 밝히되 역사의 비탈에 무너져 앉아 가난하고 낮은 동포들과 어깨춤을 같이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20. 크리스챤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의를 사모하기를 목말라하고, 청결하게 사는 일일 뿐이다. 淸貧, 청빈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든다. 예수의 삶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무소유, 무거운 錢帶를 차고서 어떻게 갈바리아 고개를 넘을 수 있으랴. 다 내다 팔아야 한다. 퍼 내 주어야 한다.
21. 일체를 내어놓아야 일체를 받는다. 교리도 내어놓고, 직분도 내어놓아야 한다. 기독교는 교리도 직분도 아니다. 존재의 회복이다. 진리로 해방된 자들이 겸손히 무너져 앉은 자들의 낮은 자리, 질퍽질퍽한 그 자리에서 곰배팔이, 소경, 절름발이, 애통하는 자, 학대받는 자들과 함께 자아선언을 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법을 오금을 밟듯 두려워하는 자, 누구라도 병들고 허기진 자들의 눈물에서 예수를 보는 자는 모두 거룩한 이들이다. 기독교란 이 거룩의 불덩어리를 지니고 전체로 타는 삶이다. 이 불덩어리를 떨어뜨리면 믿는 자는 죽는다. 그러므로 영성은 타는 긴장이요 불이다. 썬다는 빈민굴들을 볼 때마다 엉엉 울었다.
22. 썬다가 큰 무리를 대하자 기쁘면서도 겁이 났다. 가르치는 자가 더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큰 무리를 이끌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였어도 그의 심중에 교만이 있거나 법도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주님으로부터 내쫓김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신하기로 마음먹은 썬다는 추호도 自高의 순간이 들까봐 자중하였다.
23. 낡은 교회의 전통 안에 갇혀 있으면서 교리를 안으로 걸어 잠그고, 역사의 유물로써만 교회의 벽을 안고 있는 교회는 마치 전도없는 교회처럼 앞날이 죽은 교회가 아닌가. 교회는 교리로 둘러처진 담벼락이 아니다. 진실로 생명의 물꼬를 트는 도랑이어야 한다. 안으로 걸러잠근 교리의 체계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 정신을 실천하는 것과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가 중요한 것이다.
24. 썬다는 극심한 카스트 제도를 방관하는 인도교회의 몰인정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은 만 인간을 다 사랑하십니다.… 이 천민제도를 사랑의 불로 태우십시오. 여러분이 화석화된 전통 안에 이 비리의 제도를 그냥 수수방관하는 것도 타락입니다. 기독교는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추악한 인간 전통의 찌꺼기, 사탄으로부터 청부업처럼 물려받은 온갖 역사의 배설물에다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산불처럼 다 태워버리고, 남은 자리 그 잿더미 위에다 새로운 싹을 가꾸어내는 일입니다. 말석에 앉으시고 낮아지십시오. 낮아져보지 않은 사람, 고난에 동참해 보지 않은 사람은 어딘가 천박해 보입니다. 때묻은 동포와 먼지 속에서 함께 뒹굴어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겉꾸미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회칠한 선민 공동체로, 귀족공동체로 만들지 마십시오. 큼직한 집에서, 노예와 천민들 위에서 으시대는 여러분이 바로 거짓말하고 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정직하십시오. 먼저 인간으로 순수하십시오. 예배 드리러 오기 전에 배고파 우는 이웃들과 손을 잡고, 그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고 오십시오. 예수님께서도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않노라“(마12:7)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이 없고,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사랑이 없는 바리새인들같은 선민의식은 버리십시오. 참회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죄많은 교인 여러분의 머리 위에서부터 내릴 것입니다”
25. 그가 랑게트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티벳인 한 사람과 동행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으나 동행이 있으니 힘이 되었다. 한참동안 사력을 다해 산길을 전진해 가니 둘의 시야에 웅크리고 있는 동사체 하나가 나타났다. 얼어죽은 모양이었다. 시체는 길에서 약 10미터나 떨어진 가파른 비탈 쪽에 있었다. 썬다는 동행에게 구조하여 업고 가자고 제의하였다. 그랬더니 그 동행은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죽소. 나는 살아야겠소”하면서 매정하게 계속 나아가 버렸다. 썬다는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내려가서 그의 생사를 확인했다. 아직 살아있긴 했으나 넘어져 다친데다 몸이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썬다는 죽은 목숨같은 그를 끌어올려 들쳐 업었다. 그를 업고 눈보라 길을 뚫어 랑게트까지 가야한다. 어떡하든 움직여야 했다. 업었다가 붙안았다가 하면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뗀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고갯마루에 거의 다다른 썬다의 시야에 또 하나의 동사체가 나타났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는 바로 몇 시간 전 혼자 살겠다고 가버렸던 동행, 그 사람이었다. 눈 속에 파묻히다시피 웅크려 쓰러진 그는 이미 꽁꽁 얼어 죽어있었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둘은 서로의 밀착한 체온이 내는 열기로 해서 살아났는데 목숨을 건지겠다고 하던 그는 혼자의 체온이 식어내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26. 그는 신앙이란 지식의 탐구가 아니요, 생명인 지혜의 붙잡음인 것을 깨달았다. 학문은 무릇 삶이 되어야하고, 삶은 생명의 말씀 위에 선다는 그의 설교는 옥스퍼드 대학인들의 실존 자세를 다시 점검케 하였다.
27. 썬다의 에딘베러 집회 때 키네러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이 주교와 신학자들에게 경성을 촉구하였다. “우리가 이루어 온 목회, 신학 연구행위란 무엇에 소용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인도인은 신학이 없이도 지금 온 영국인의 정신을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신학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들이 영성생활을 위해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28. 그는 한 신학교 강연에서 회의하는 자유신학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복음의 밀크를 먹어야 합니다. 그 밀크를 분석만 하고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못쓰게 만들 것입니다”
29. 그는 서구의 심각한 교회분열을 다음과 같은 말로 詰責했다. “지상에서 뭉쳐 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나라에서 살겠다고 소망을 두는가? 하늘나라는 지상에서부터 건설되는 것이다. 심판 날에는 차라리 비크리스챤으로서 더 평화의 공의를 지키는 동양인들이 당신들 서양인들보다 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지만 당신들은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내던져 버렸지 않은가?”
30. 썬다는 얼어가는 서방의 마음을 향해 “오직 기도, 기도만이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하고 기도와 회개로 주를 다시 찾을 것을 애원했다.
31. 썬다는 자신은 날로 날로 작아지고, 오직 예수만 날로 날로 커지게 내세웠다. 그는 아무 것도 되지않고, 오직 주님만 모든 것이 되게 했다.
32. 썬다는 차도가 없는 건강 속에서도 몇 권의 소책자를 더 내었다. 입으로 전도를 못한다면 이제는 붓으로라도 쉬지않고 전도를 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고 죽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33. 跋文 (발문) 이석현
만년설이고 하늘과 마주하여 久遠의 명상에 잠긴 영봉 히말라야! 그 아래 석상으로 앉아 호흡 한 번에 천년을 점치는 하나님의 사람 썬다 싱, 눈에 어리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 영성과 청빈익히며 한 권 성경과 도포가 전 재산인 홀홀 단신. 부절히 타오르는 열정은 잊혀진 구석 구석 가난 속에 소외된 양들에게 온으로 쏠리는 불꽃으로 선교와 이웃사랑에 철하였어라. 이름하여 히말라야의 눈꽃! 신비의 사람답게 그 한뉘의 종장 또한 병중인 몸을 채질하여 구령의 길 나서서 히말라야 얼믐벽에 도전한 채 어느 기슭 눈안개 속에 사라졌어라.
대자연을 또 하나의 성서로 삼아 호흡나누며, 몸 전체로 말씀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펴다가 산화한 작은 형제 썬다 싱. 예수의 전사로서의 충성, 순교자로서의 용기,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모험을 하나로 구현한 불멸의 인간상을 그리스도의 초상 옆에 그려본다.
“주여, 나를 나무 아래 서 있게 해 주시고, 내 기도소는 바위 밑이 되게만 하옵소서”
터번과 홍포에, 손에는 등불인 양 오직 성경 한 권을 들고 히말라야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유연히 세계를 걸은 영성의 전도자!
이 같은 기념스런 영적 양서를 엮어낸 저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하늘의 손길이 늘 함께이기를 손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