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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무인) 도총관공파 대동보서
序<文>
한 나라의 歷史가 있듯이 한 家門에도 역사가 儼存하는 것은 當然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 家門에도 悠久한 傳統으로 體系化하여 여러 차례 族譜를 編輯刊行한 것이 事實이다. 庚戌譜 丙子譜 丁酉譜 甲子譜 等 譜典이 繼續補完되어 왔기에 全國의 宗親들이 同根同源임을 確認하고 一族의 보람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훌륭한 일들을 하신 先祖들에게 재삼 머리숙여 感謝를 드리는 바이다.
앞에 敍述한 譜刊들이 모두 重大한 意義를 지닌 것은 事實이지만 今次 發行하는 戊寅譜의 意義를 論據하려면 名實共히 大同譜의 面貌로써 嶺湖兩域은 勿論 京鄕各地의 門中이 渾然一體가 되어 衆智를 모아 編纂公刊하게 되니 都摠管門中의 慶事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門中은 그 歷史와 傳統이 分明하고 燦然하였는데도 中祖의 遺蹟과 文獻이 不錄難得하여 痛恨의 情을 堪當키 어렵던 차에 宗務委員會가 앞장서서 周旋하고 各地方有司들의 熱誠으로 收單集成하여 八千쪽(頁)에 達하는 集大成刊한 것은 宗史上 처음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 譜錄이 子孫錄과 함께 吾門의 榮光된 傳統과 歷史를 「克明」하게 밝히고 族親들의 繁榮하는 現況을 示現하였기 때문이다. 如斯한 事業과 때를 같이하여 失傳된 中祖를 「追仰」하는 精誠으로 祭壇과 神道碑를 奉設하여 追遠之誠으로 情況을 빛내고자 周邊淨化의 必要性을 切感하여 宗有司 讚永이 實務를 擔當하고 各門의 任員들의 積極的인 支援으로 尨大한 作業을 必要한 時日內에 完遂하여 中祖의 頎偉之氣를 繼承하여 燦然한 宗史위에 貴重한 業蹟으로 世上에 내놓아 떳떳하고 자랑스런 事實을 綿綿히 이어갈 後孫에 遺傳하여 길이 龜鑑이 되리라 確信하는 바이다. 前述한 譜事가 훌륭히 刊行된 것은 各地域 任員들의 아낌없는 支援과 全宗人의 熱火같은 聲援은 勿論이요 오랜 其間동안 校正業務遂行에 徹底하게 配慮하신 出版社 金大虛專務任과 出版에 從事한 全職員들의 勞苦에 衷心으로 感謝를 드립니다. 우리 門中의 譜典刊行의 意義를 되새겨 慶祝하면서 爾後子孫萬代에 繁榮과 榮光이 함께 하기를 祈願하는 바이다.
戊寅(1998)年十月 日 宗孫 鍾碩 謹識
跋<文>
滄波之水도 流源인즉 한곳이요 萬枝長蒼도 根本은 하나이다. 吾族金氏도 駕洛太祖以來 十餘世紀에 裔孫은 東方의 巨閥이다. 敦睦之策을 講究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吾金都摠管公派도 熟考를 거듭하여 大同譜編纂을 敢謀主唱하여 大宗孫을 비롯하여 在昶 相元 諸氏와 元老宗親들의 共同發議로써 宗員들의 積極贊成으로 議決하여 戊寅에야 民族앞에 吾宗의 毅然함을 示現코자 編成告畢하였고 期於編成事由로는 中祖邇來 文武之爵이 五十餘人而 忠孝의 家門 淸白吏의 家門으로 이어져 不義에 抗拒하셨던 祖上님들의 自尊心과 偉大한 血統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를 繼承發展해야 할 必然的인 使命 때문이니라.
中祖生卒配位等不錄之因은 壬亂兵禍로 保存치 못한 痛恨을 抑制할 길이 없든 바 這間 區區한 個意를 綜合 中祖祭壇奉安議事를 設議함에 各門諸宗이 積極贊同하여 設壇에 損色이 없도록 周邊의 淨化事業을 畢役하고 不遠壇前에 裔孫들 외에도 儒林諸賢이 滿山參席裡에 嚴肅한 典禮로서 設壇告由祭를 敬虔하게 擧行할 것을 生覺하니 遲愋之過는 不免之事이나 惶愧之感을 덜게 되었고 門中의 宿願과 一族의 共榮의 참된 福祉를 成就했다고 하여도 過言은 아니라고 敢히 말하고 싶다. 삼가 回想하건대 今次 敍上諸事는 中祖以來 六百餘十年에 肇起之事로 歷代祖先의 偉勳蔭德과 英靈黙照의 所賜之矣라 眞實로 叩頭追遠에 不勝感慕以從此吾等後裔는 加一層 敦睦團結하여 報還之誠을 何敢忘却하리요 本譜를 刊行함에 있어서 編輯에 從事한 諸委員과 收單有司와 校正委員의 熱意에 찬 努力에 深謝不盡矣라 然而本譜編輯에 따른 宗支에 關하여는 各門의 感責收單之事라 如何한 異議도 不認할 것이요 正統保存策으로 如何한 複製도 不容할 것이다.
完刊後普及精勵하여 後孫들의 崇祖精神을 加一層 培養하고 門戶를 開放하여 賢祖의 子孫됨이 부끄럽지 않는 一門之榮의 寶鑑이 되기를 所望하며 組版에 들어갈 時点까지 區區한 平日의 心情을 冊 末尾에 남기고자 한다.
戊寅(서기1998년)仲秋 後孫 讚 永 謹識
金海金氏都摠管公派世譜序(김해김씨도총관공파세보서;1981년신유보)
解釋; 2006. 2. 28. 金順大
崇宗慕先의 遺德과 名功偉績은 國史及 昭載史文而且存昔載諸名賢의 舊譜序文에 顯著히 祥示도었나니라 吾東國之稱士大夫家에 必有正譜하나니 夫譜者는 所以上 明先系하고 下合諸族하며 所以叙昭穆修睦婣之義也라
종족을 존중하고 조상을 생각하는 이어져 온 덕과 이름을 날리고 공을 세운 위대한 업적은 나라의 역사와 고문에 소상하게 실려있고, 또 현존하는 옛날 명현들이 쓴 구보서문에 현저하게 상세히 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칭하는 사대부의 가문에는 반드시 공식적인 보첩이 있으니, 대체로 보첩이라는 것은 위로는 선조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아래로는 여러 종족을 합치기 위함이며 소목의 차례를 밝히고 화목을 갈고 닦기 위함에 있다.
故로 世之氏族이 皆是力焉하나니 今番吾譜가 殊曰都摠管公以下大同譜云 而子姓이 散在八域하니 孰能悉知리요 收族未全이 何不感惜가 嗚呼라 光陰이 如箭하야 往昔先代累次合譜는 次置하고 지난 壬戌合譜後로도 殆近 六十星霜이라 源源派派로 各自家乘은 擧皆保存이나 如此合譜는 是亦難이로다
따라서 세상의 여러 씨족들이 모두들 이를 위해 노력하니, 이번에 우리의 보첩이 다시 말하자면 도총관공 이하 대동보라 하나 자손들이 전국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어찌 능히 모두 다 알 수 있겠으며 종족을 전부 모으지 못한 것에 어찌 애석한 감정이 없겠는가. 아! 세월이 화살과 같아 지나간 옛 선조세대의 여러 번의 합보는 차치하고라도 지난 임술년의 합보 이후로 거의 지금까지 60여년이 흘러 여러 근원과 파들이 생겨나 각자의 가승은 모두들 보존하고 있으나 이 보첩과 같은 합보는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何幸庚申十月上旬修撰校理公先祖尊掃時各門僉議가 齋發하여 寔年翌月에 詢同이 如一이로다 雖然이나 世代가 寢遠하고 子姓이 繁衍하야 殆遍八域이므로 散單收合이 何無易難이리요 此亦不得已論而亦事勢之固然也라
다행스럽게도 경신(1980년)10월 상순에 수찬교리공인 선조의 묘소(?)를 손볼 때에 각 문중의 여러 논의가 발의되어 이해 다음달(11월)에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고 자손들이 번창하여 거의 전국각처에 흩어져 있으므로 흩어진 단자를 모우는 것에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이것 역시 부득이하였으나 일의 사정이 진실로 그러하였다.
至於辛酉하야 各者正單이 聯次續到함은 諸族의 合心同勞함이로다 幾個月內에 淨書告畢하고 其編次秩序則依例分爲五卷一秩로 命工鋟梓하여 未滿一個年에 刊役이 將訖할새
신유(1981년)에 이르러 각자의 올바른 단자가 연이어서 계속 도착한 것은 여러 종족이 합심하여 같이 노력한 결과이다. 몇 달내에 보첩을 작성하여 완료되었음을 알리고 편집의 순서는 옛날의 예에 따라서 5권으로 나누어 1질로 하여 제판소에 넘기니 1년이 안되어 보첩 간행의 사역이 장차 마치게 되었다.
僉族老가不肖로 命在任末하여 相互參訂이므로 俾記其實하야 弁于卷首케하니 自顧無文이 敢不承膺而猶恐違義로 累辭타가 始末數語로 篇尾에 切有奉告하니
여러 종친의 어른들이 불초에게 끝까지 일을 맡기고 서로가 수정을 본 후 그 사실을 보태 쓰고 수권의 서문도 쓰라고 하여 스스로 생각해 봐도 글이 짧은 내가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도리에 위배될까 근심하며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 일의 시말을 몇 마디 말로 책의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고 드린다.
續經傳者必得聖賢之心然後에 能致修齋之効하고 觀吾譜者必法先祖之訓然後에 能遂敦睦之誼리니 望須參譜僉族은 一致團結하야 崇宗하면 先蔭이 降化煇煌할것이요 愛族하면 孝悌忠信과 敦睦之義가 油然이 生할것이니 警而又勉哉어다
뒤를 이어 경서를 전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성현의 마음을 이해한 후라야만 마음을 닦고 공경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보첩을 보는 자는 반드시 선조의 유훈을 본받은 연후에 돈목의 정의를 이룰 수 있으니, 바라건대 모름지기 수보에 참여한 여러 종친은 일치단결하여 조상을 숭상하면 선조의 음덕이 내려와서 밝게 빛날 것이며, 종족을 사랑하면 효도와 우애와 충성과 믿음과 돈독한 도리가 자연히 생길 것이니 항상 경계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이다.
如此速修는 族弟玘洙甫篤勵와 아울러 任役員의 專力同苦함이로다 顚末은 具備凡例키로 玆奉于序하노라
이와 같이 짧은 기간 내에 수보하게 된 데는 족제인 기수씨의 독려와 임직원이 오로지 노력하며 고생을 함께한 결과이다. 전말은 범례에 적기로 하고 이에 받들어 서문에 대한다.
駕洛紀元一九四十年 辛酉 中秋節
가락기원1940(서기 1981)년 신유 음력 8월 15일
都摠管公 二十五代孫 丞浩 謹序(도총관공 25대손 승호 근서)
舊譜序(1669년 기유보)
※ 대부분 보첩에는 1668년 戊申年으로 기록되어 있음.
金海金氏 古駕洛國王 金首露之後也 首露有德 受天大祚 東漢建武 自天誕降爲 世作程建都金海爲王
김해김씨는 옛 가락국왕 김수로의 후손이고 수로<왕>는 덕이 있어서 하늘로부터 큰 복을 받아, 동한건무[1]년간에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세상을 위해 길잡이가 되었고, 김해에 도읍을 세워 왕이 되었다.
[1]東漢建武; 漢光武의 연호, 서기25∼56
十世國祚乃絶自是金氏貫仍分地天慳碩德慶存餘世世襲封君於此每歲冬至展掃陵墓不絶香火其德不厚能如是流光於千有餘載耶
<그 후> 10세에 나라의 복은 끊어졌으나, 이로부터 김씨는 이어졌고, 땅은 나뉘어 졌지만, 하늘이 훌륭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아끼고 경사를 보존하여 대대로 이 <고을에> 군장으로 봉하여, 해마다 동짓날이면 능묘를 소제하고 향화를 끊이지 않도록 했으니, 그 덕이 후한 분이 아니라면 어찌 이같이 1000여년동안 영광을 누릴 수가 있으랴.
盖宋朝文明而程夫子尙歎其無百年之家 况我東偏荒之地而金氏累十世祖孫相望係如貫珠此非他姓之所及而
대체로 송나라같이 문명한 나라에도 정부자[1]가 오히려 백년을 내려온 집이 없음을 탄식(難)했거늘, 하물며 우리나라 같이 비좁고(偏) 거친 땅에, 김씨는 수십세(十世)에 걸쳐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바라보고 이어져 구슬을 꾄 것 같으므로, 좀체로 타성에서는 따를 자가 없다.
[1]程夫子; 송나라 4현중 한사람인 程子
尤可卓然 者自羅麗迄于 本朝爲世華閥名公巨卿入相出將忠烈壯節累建大勳爲國柱石其鴻功偉蹟昭載史冊爲世推獎 文宗有言東國之金雖多金海之金獨高於世也大哉 斯言
더욱이 탁월한 것은, 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본조(조선)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빛나는 문벌[1]과 명공[2], 거경[3]이 되어, 들어가면 재상이 되고 나가면 장수가 되어 충렬과 장절로써 큰 공을 세워, 나라의 주석을 이룬 분들이 허다하니 그 크나큰 공훈과 위대한 자취들이 역사책에 소상히 실려 세상을 권장하는 지침이 되었으므로, 문종(재위;1450~1452)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동국의 김씨는 비록 많으나 김해김씨가 이 세상에 홀로 우뚝 하다" 했으니 우렁차다 이 말씀이여.
[1]門閥; 집안의 신분이나 지위
[2]名公; 유명한 재상(宰相). 또는 훌륭한 재상
[3]巨卿; 높은 벼슬을 한 사람
令德不朽級 冕袞袞爲時巨室則必有寶譜之壽於後而燼灰於兵燹世代闊遠雲仍蕃衍布居京野流派不振旣成路人爲世所輕間有憤慨之士營於收族而有志未就矣
이토록 덕행이 썩지 않고 벼슬이 대를 이어, 그 때에 큰집이 되었다면 반드시 보첩이 있어서 후세에 전할 법 하거늘, 병화에 모두 소실되었고, 세대가 멀어갈수록 번성하는 자손들이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살되, 계파가 분명치 못하고(派不振) 끝내는 서로가 길가는 사람처럼 되어, 세상에 관심이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이를 개탄하는 후손들이 종족의 수집을 도모하자는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今議政公之七代孫諱福龜甫胸藏片玉家風世德流在慕先袖一草譜要余文字非但義厚志氣愈嘉不避辭薄乃爲之記
이제 의정공(議政公)[1]의 7대손 복구(福龜)씨가 가슴속에 한조각의 옥과 같이 가풍과 세덕을 간직해 오며 선조를 추모해 오다가, 옷소매에서 족보의 초안을 내보이며,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니, 다만 의로움이 두텁고 그 지기(志氣)가 더욱 가상하므로 글이 짧다고 사양하지 않고, 이를 위해 적어 보았다.
[1]여기서의 議政公은 휘 세공(世恭)으로 보이고 복구(福龜)는 덕채(德埰)의 父임.
※참고사항
[가]議政公; 1802년 임술보,1824년 갑신보를 살펴본바, 諱世恭의 傍註에 字子述號月巖效忠秉義功臣資憲大夫戶曹判書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配(貞夫人)淸州韓氏父牧使嶔墓靈光月巖山西麓巽坐로,
1927년 派譜에는 諱世恭의 傍註에 字子述號月巖丙辰生通訓大夫承訓郞奉常主簿丁丑文科通政大夫行靈光郡守效忠秉義功臣資憲大夫戶曹判書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配貞敬夫人淸州韓氏父牧使嶔墓靈光大昌面月巖山西麓馬許洞巽坐炭灰封憤 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로왕(首露王), 2세 거등왕, 3세 마품왕, 4세 거질미왕, 5세 이시품왕, 6세 좌지왕, 7세 취희왕, 8세 질지왕, 9세 겸지왕, 10세 구형왕, 11세 무력, 12세 서현, 13세 유신의 駕洛國王世系의 13世를 13世孫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諱孝源公派의 世系中 1세世恭-2세孟孫-3세璋-4세孝鵬-5세豊壽-6세慶發-7세福龜-8세德埰-9세長澤 의 7세에 孫자를 붙이면 7世孫은 福龜에 해당되고 議政公은 諱世恭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임. 그리고 1824년 갑신보 서문에 나오는 輔國公도 諱世恭으로 봄이 타당하고, 1743년 正德譜 서문의 文簡公之後孫名德埰子<;字>汝玉甫는 임술보에 德埰의 字가 汝玉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들을 참고할 때 原文을 手寫하면서 字를 子로 오기한 것으로 보임.
[나] 2000년 안경공파세보 원문에는 "麗朝相臣忠簡公十一代孫洪慶甫"로 역문에는 "十一世孫"으로 기록되어 있음. 홍경의 11대조는 忠簡公 휘보(普)에 해당함
또 다른 보첩에서는 ‘의정공의 12대손 홍경(洪慶,1621∼1691)으로 되어 있음. 홍경의 12대조는 금녕군 휘목경에 해당함.
夫爲譜者譜其族以爲明倫展親之道也 周禮所以敎民入德之化故自古望族之家取以爲例各盡同祖之義
무릇 보첩이라는 것은(爲譜) 그 종족을 한데 묶어(譜其族) 인륜을 밝히고 친분을 펼 수 있는 길이다. 주례(周禮)에도 "백성을 가르쳐 덕화에 들어가게 하는 길이라" 해서 옛부터 유망한 가문이라면 의례껏(以爲例) <족보를 만들어> 각기 한조상의 자손된 정의를 다하였다.
蘇氏之言曰觀吾之譜者孝悌之心可以油然而生盖人之於譜也 豈非重且美哉故長使後昆修守德行入而孝於親出而敬於長則其庶幾近乎人矣於是乎書
소씨(蘇氏; 소명윤)는 말하기를 "내 족보를 훑어보는 날엔(者)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어느새(油然) 생긴다" 하니 대개 사람의 보첩이 어찌 중하고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따라서 길이 후손으로 하여금 덕행을 닦고 지켜, 들어가서는 어버이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하면 누구라도 참다운 사람의 길에 가까워 질 것이므로 이에 소신을 피력하는 바이다
崇禎紀元後己酉至月下澣右議政恩津宋時烈序(顯宗十年西紀一六六九年)
숭정 기원후 기유(1669년) 11월 하순 우의정 은진 송시열 서
* 다른 보첩; 崇禎紀元後戊申十一月下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恩津宋時烈序
(숭정기원후 무신(1668년) 11월 하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은진 송시열 서)
舊譜序(1778년무술보)
解釋; 2006. 2. 28. 金順大
金氏之貫金海者皆首露之裔自國絶以後不知幾百年門闌昭炳圭組舃爀名公巨卿錯落相望爲東方甲乙族且其子孫寔蕃以衍殆偏八省此眞所謂源深而派遠根茂而葉盛者也
김씨로서 본관이 김해인 사람들은 모두 수로의 후예이다. 나라가 끊어진 후로 여러 수백년간 가문은 단절되었으나 빛나는 무리들과 이름을 날린 사람 훌륭한 재상이나 높은 벼슬은 한 사람들이 섞이고 흩어져 있어 서로가 우러러 보는 동방의 으뜸가는 종족이 되었다. 또 그 자손들도 참으로 번성하여 거의 전국각처에 퍼졌으니 이는 진실로 소위 근원이 깊어 파는 멀어지고 뿌리가 무성하여 잎이 울창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兩譜年久子孫多不入錄金氏之在嶺湖者鳩財收單入榟於天冠山中金君宇澤甫以余適守是邦要有弁卷之作謹按舊譜有尤菴宋先生一言可使斯譜增光永垂窮宙顧余何敢焉 然厠名伊川之足古人之所爲榮不揆僭猥略叙其槩
양 보첩[1]은 세월이 오래되어 자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등재가 되지 못하여, 영남과 호남에 사는 김씨들이 비용을 마련하고 단자를 모아 천관산(天冠山)에서 판각을 하게 되었다. 김우택씨가 나에게 때마침 수권의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삼가 구보를 보니 여기에 있는 우암 송선생의 한 말씀이 가히 이 보첩에도 적용할 수 있고 그 빛이 영원히 우주에 드리우고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천선생(程子)의 발에도 못미치는 나로서 옛 사람들을 영광을 위해 헤아릴 수 없이 참람되고 경외스러우나 간략하게 그 개요를 서문에 쓴다.
[1]兩譜; 기유보(1669)와 정축보(1756)
噫氏必有族族必有譜譜者所以明其倫而展其親盖自父而子自子而孫至於百千萬世之久鮮不以路人相看此周官譜牒之所以作而程子曰譜者管攝天下之人心老泉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生譜有關於世敎顧不重且大歟
아! 씨족은 반드시 종족이 있을 것이고 종족은 반드시 보첩이 있을 것이니 보첩이라는 것은 그 인륜을 밝히고 친분을 펴기 위한 것이다. 대개 아버지로부터 이들이 있고 아들로부터 손자가 있으니 수천만 세대가 흘러 오래되어도 이는 분명하여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를 쳐다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주례(?)에서 보첩을 만드는 이유이고 정자가 말하기를 보첩이라는 것은 천하를 지배하는 인심이라 하였고, 노천(소명윤)은 우리의 보첩을 보는 자는 효도와 우애심이 자연히 생긴다고 하였으니, 보첩은 세상을 가르치고 되돌아보게 하는데 관련이 있으니 중차대하지 않는가.
譜成之日無論遠近疏密知一本萬殊之義篤尊祖敬宗之誠孝友之行世修敦睦之風日興則將見首露神德遺烈可與天壤俱弊然則是譜也不但爲風化之一助豈不盛哉豈不休哉
보첩이 완성된 날에 가까이 살거나 멀리 떨어져 살거나, 관계가 가깝거나 멀거나에 관계없이, 하나의 근본인 만 가지의 도리를 알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고 종친을 공경하는 정성과 효도와 우애의 행실을 돈독히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돈목의 풍습을 갈고 닦아 날로 흥하게 될 것이다. 즉 장차 수로왕의 신령스런 덕과 전해주신 위엄은 가히 하늘이 주신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보첩이야말로 풍습을 화합하게 하는데 하나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으며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崇禎紀元後三戊戌復月上澣前司諫院大司諫昌原黃幹序(正祖二年西紀一七七八年)
숭정기원후 3무술(1778년) 11월 상순 전사간원 대사간 창원 황간 서
舊譜序(1848년 무신보)
解釋; 2006. 2. 28. 金順大
或有問於余曰新舊譜之不同何也曰余見主簿公諱俊所著草家乘序文則於壬辰兵火之後家牒盡失文獻無徵與靈山公諱希說諱慶淹纂輯記憶修成家乘故昭穆不能無舛錯派系不能無換誤而丁丑譜戊戌仍舊開刊矣
혹시 나에게 신, 구보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부공 휘준(俊)께서 쓰신 초보인 가승보의 서문을 보라고 대답하겠다. 즉 임진왜란의 병화후에 가첩은 모두 잃어버리고 문헌을 수집할 수가 없어 영산공 휘희설과 휘경엄과 같이 기억을 더듬고 모아서 가승보를 새로 만들었으니 소목에 착오가 없을 수가 없고, 파계에 고쳐야 될 오류가 없을 수 없으니 정축보(1756)와 무술보(1778)와 연이어서 구보들이 발간되었다.
其後金海德島僉議評理上護軍公築隱公淸道郡事公三代墓所碑文始見而正其中祖以下故壬戌譜之昭穆派系與丁戊二譜大相不同然而壬戌譜未能盡正尙有差訛考諸邑誌科榜參諸遺蹟輿覽正其中世未盡正者故今譜之昭穆派系又與丁戊二譜不同者此也
그 후 김해 덕도의 첨의평리 상호군공(諱元鉉), 축은공(諱方礪), 청도군사공(諱荀生)의 3대의 묘소의 비문이 처음으로 발견되어[1] 그 중조이하를 바로잡았다. 따라서 임술보(1802년)의 소목과 파계는 정축보와 무술보의 두 보첩과 크게 서로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임술보도 모든 것을 고치지 못하여 차이와 오류가 있어서 여러 읍지와 과방목과 여러 유적과 여지승람을 참고하여 중세 이하의 고치지 못한 것들을 바로 잡았다. 따라서 이번 보첩의 소목과 파계가 또한 정축보(1756)와 무술보(1778)의 두 보첩과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1]각 비문의 작성연대와 발견연대가 중요함
夫族譜之作何也曰人必有先世而世遠則易忘氏必有諸族而族多則難知然則講究世系推繹族誼者曷若族譜之有作乎
대체 족보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조세대가 있으나 세대가 멀어지면 쉽게 잊혀져 버리고, 씨족에게는 반드시 여러 종족이 있으나 종족이 많아지면 알기가 어려우니 세대의 계통을 연구하고 종족의 정의를 찾는 데에 어찌 족보가 만들어져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自支溯本統紀不紊自源至流脉絡相貫易忘者必難忘難知者必易知則堯典之九族周禮之六行其在是矣
지손에서 본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륜을 통합하는 것에 문란함이 없고, 근원에서 지류에 이르기까지 맥락이 서로 통하면 쉽게 잊혀져 버린 사람도 반드시 잊기가 어려울 것이고 알아내기 어려운 사람도 반드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니 요나라 법의 9족과 주례의 6행은 여기에 있다 하겠다.
程子曰譜者管攝天下之人心蘇老泉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生族譜之有關於世敎者顧不重且大歟
정자가 말하기를 보첩이라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인심이라 하였고, 소로천(소명윤)이 말하기를 우리의 보첩을 보는 자는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자연히 생길 것이라 하였으니, 족보는 세상을 가르치고 되돌아보게 하는데 있어서 중차대하지 않는가.
鳴呼吾金系出駕洛而自首露王十傳至仇衡王不忍以土地傷民讓國新羅三方大姓
아! 우리 김씨는 가락에서 나와서 수로왕으로부터 10세를 전하여 구형왕에 이르러 땅과 백성들이 다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신라에 나라를 넘겨준 3방[1]의 대성이다.
[1]三方; 중국의 입장에서 본 방위, 보통 중앙+동방+서방을 말하나 넓은 땅이라고 생각하면 됨.
而惟我築隱公之春秋大義退隱公之雷山高節淡軒公之道學淵源節翁公之孝行經學寔爲當世儒宗而尙爲後人之欽仰故千載之下公議不泯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의 축은공(方礪,1324~?)의 춘추대의와 퇴은공(係熙, 1400?~?)의 뇌산고절과 담헌공(克儉,1439~1499)의 도학연원과 절옹공(渾,1519~1562)의 효행경학은 진실로 당세의 유학자와 후세인들에게 흠모와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되어 천년이 지나도 공들의 의의는 없어지지 않는다.
去丙午春道通嚴切舘通鄭重而又有春曹關飭士林建祠兄於退隱而又有西岡公之淸節裔於淡軒而又有南湫公之卓行皆前此建祠中世聞望
지난 병오(1846)년 봄에 도에서 엄하게 통지하고 관청에서 정중하게 통지하였고, 또 예조(春曹)의 칙령이 있어서 사림에서 사당을 짓고, 퇴은공에게 형으로서 또 서강공(係錦,1405~1493)에게 청절이 있고, 담헌공에게 후예로서 또 남추공의 탁월한 행실이 있었으니 모두들 이전에 사당이 지어져 중세들의 명망이 들려오고 있다.
又有養眞齋之父子後代忠義又有寺正公之叔姪則文集開刊責在后孫而且都摠管公派尙無都譜則今日之鋟榟夫孰曰不可乎
또 양진재(?)의 부자가 있었고 후대의 충의로서 또 사정공의 숙질이 있었으며, 문집 간행의 책임은 후손에게 있으며 이들 또한 도총관공파이나 오히려 도총관 공파의 보첩이 없었으니 금일의 보첩간행을 대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文集分爲二卷族譜分爲五卷事實章章次序昭昭使爲後世雲仍觀其祖先之立朝事君居家養親家而爲孝子順孫國而爲忠臣義士
문집은 2권으로 나누었고 족보는 5권으로 나누어 사실을 장장마다 적고 순서가 분명하니, 후세의 여러 후손들로 하여금 그 선조들께서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을 모시고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보게 하면, 집에서는 효자와 착한 후손이 되고 나라에서는 충신과 의사(義士)가 될 것이다.
知其某枝之出於某本某源之連於某派各興敦睦之心庶不以路人相看則惟我後孫之責斯盡矣
어떤 가지는 어떤 근본에서 나왔고 어떤 근원은 어떤 파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알고, 각자가 돈목한 마음을 북돋우고 모두들 길가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쳐다보지 않도록 오로지 우리 후손들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此譜之所以作也問者唯唯而退姑擧問答之辭以記之爾
이 보첩을 만든 이유를 묻는 사람들은 이에 순종하고 물러갈 것이며 잠깐 문답의 말들로서 기록해 둘 따름이다.
上之十四年戊申十一月上澣后孫囿榮謹誌
현재 임금(헌종) 14년 무신(1848년) 11월 상순 후손 유영 근지
舊譜序(西紀1848年 무신보)
解釋; 2006. 2. 28. 金順大
金官之金異出于鷄林氏而同其蕃衍諸鉅族無得與二氏肩者上世毓慶之篤徵信不待氏族志金官有一支中祖麗季築隱先生而家聲久而不衰名德往往可述
금관(김해)의 김씨는 계림(경주)에서 나온 사람들과 다르나 다 같이 아주 번성하여 다른 여러 큰 종족들 중에 이 두 성씨에 어깨를 견줄 만 한 것은 없다. 상대의 조상들이 훌륭했다고 믿을 수 있으나 씨족의 기록(志)을 구비하지 못하였다. 금관(김해)에는 하나의 가지가 있으니 중조가 고려 말의 축은선생(諱方礪)이며 가문의 명성은 오래되었으나 이름과 덕망은 쇠퇴하지 않고 자주 거론되고 있다.
裔孫正澤甫以其家乘之將入梓也徵文於正鎭正鎭辭謝不獲卽問焉曰以子之家今日始有家乘之作乎曰否其文皆舊也先父兄之所嘗收拾於國乘野史家藏世傳而成帙者也入刊而將棄之亦有年矣冠以世系圖而名以家乘者今也病舊梓之字多訛因以備其或未備者以足成先父兄之志也
후손인 정택씨가 그 집의 가승을 장차 펴내고자 정진(필자)에게 글을 구하는바, 정진이 사양하였으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자네 집에 오늘 처음으로 가승을 만드는가?” 하고 물어보니 “아닙니다. 이 문서는 모두 오래 된 것으로 부친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이며, 일찍이 나라의 역사서와 야사들을 모아 집에 보관하던 것과 세상에 전해온 것들을 묶은 것으로서 간행은 되었으나 없어질 것 같으니 역시 조금 오래되었습니다. 첫머리에 세계도가 있고 이름은 가승이라 되어있으나 지금의 흠으로서는 오래전에 간행되어 글자에 틀린 것이 많아 혹시 미비한 것이 있다면 준비하여 충분하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부친의 의지였습니다.” 하였다.
舊所收錄類例若何曰畧於築隱公以 前衆支所同本亦歷代國牒所詳也築隱以不致詳焉一家之文獻也狀德之文有則載之誌碣全無載錄盖家規索下喜夸大或厄於燹而失之也大抵寧爲史之闕文不敢誣其先此舊錄之意也
“옛날에 수록된 것들은 어떠한가?” 하니 “축은공 이전이 너무 간략하여 여러 지손들이 본손에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역대의 나라의 역사책은 상세하겠지요. 축은공이 상세하지 못한 것은 일개 가문의 문헌이기 때문이지요. 편지(?)나 덕망에 관련된 글들은 있지만 묘지와 묘갈에 쓰인 글들에는 재록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대개 가문의 규약을 찾아보면 너무 자랑만 하거나 혹은 불에 타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대체 어찌 역사를 논하는 글에서 감히 그 선조를 거짓으로 꾸며 되겠습니까. 이것이 이전에 기록을 해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今所作世系圖若何曰略倣史家世表之法而外裔不書以嚴本統名下無註脚從簡也
“지금 만들 세계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대략 역사가들이 세표를 만드는 방법을 따를 것입니다. 외손의 후예는 쓰지 않을 것이고 엄밀하게 하여 본손에 통합하고 이름 밑에는 주석과 각주없이 간단히 할 것입니다.” 하였다.
正鎭謹復曰子家之爲乘也可謂網領好誠意到正鎭顧何辭以贊但有一說不墜先德子孫莫不有是心然而從知傳之以書不知傳之以心者在皆是也
정진이 삼가 다시 말하기를 “자네 가문의 가승은 가히 모범적이라 할 만하며 좋다. 성의가 이르렀는데 정진이 어찌 사양하겠는가. 찬성은 하지만 단 한 가지 말만 하고자 한다. 선조의 덕망을 추락시키지 않으면 자손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알고 있는 바는 글로서 전하고 모르는 것은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 모두 이곳에 있다.” 하였다.
金氏先德我聞其槩築隱公仗義守志壁立衰季而西岡退隱實嗣其德淡軒公礪操氷蘗立朝不苟而節翁南湫又以孝義名寺正兄弟生死雖殊而衛國之志均爲金氏者夙夜厥心思以諸賢之所以處家者處家需世者需世則此不墜先德之弟一義也
김씨들 선조의 덕망을 우리는 들어왔다. 대개 축은공의 의로움과 의지를 지켰고, 서강공과 퇴은공은 그 덕을 이어 받았고, 담헌공은 갈고 닦아 조정에 들어가서도 구차하지 않았으며, 절옹공과 남추공 또한 효의(孝義)에 이름을 날렸고, 사정공 형제의 생사는 비록 죽임을 당하였으나 나라를 위하는 뜻은 한결같았다. 김씨들은 새벽과 한 밤중에도 마음을 다하여 여러 선현들의 뜻을 생각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제할 일을 다하니 이것이 선조의 덕망을 추락시키지 않는 제일의 도리이다.
惟金氏勉旃哉遂書此以贐其歸或以弁卷亦金氏意也
오로지 김씨들은 노력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쓰니 되돌려 주든지 서문으로 쓰든지 하는 것도 역시 김씨들의 뜻에 맡긴다.
幸州奇正鎭謹書
행주 기정진(1798~1876) 근서
舊譜序 (丙子,西紀1876年)
譯者 金希元 2004. 6. .
夫譜所以著代而收族也上以窮先世之所由始下以至後昆之所自出旁以及宗族之疎且遠
대체로 족보는 대수를 분명히 하고 씨족을 모우기 위함이다. 위로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조와 아래로는 이에서 출생한 후손들을, 종족이 가깝고 또 소원함에 이르는 것을 수록한 것이다.
父之父爲祖祖之祖爲高祖推以上之雖百世乃父之父祖之祖也 子之子爲孫孫之孫爲玄孫推以下之雖百世亦子之子孫之孫也
아버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고조가 되니, 그 이상의 위로 비록 백세대가 흐르더라도 곧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다. 아들의 아들은 손자이며 손자의 손자는 현손이 되니, 현손 이하는 비록 백세대가 흐르더라도 역시 아들의 아들과 손자의 손자일 것이다.
一身分而爲兄弟 兄弟分而爲族 兄弟推以反之雖百分乃兄之弟 弟之兄也 然而世級遠而子姓繁宗支別而昭穆序矣若其五世而澤斬親盡服盡情愛衰 則易至於路人可不懼哉
한 몸이 나누어져 형제가 되고 형제가 나뉘어져 씨족이 되니 형제를 미루어 돌이켜 비록 백 번 나뉘어도 곧 형의 아우이며 아우의 형이니라.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고 자손들이 번창하면 종지의 구별과 소목의 차례가 생기게 되나니, 만약 5세에 이르러서 그 윤택함이 끊어지고 친함이 다되고 복이 끝나고 애정이 쇠약해지면 바뀌어서 길가는 사람처럼 될까 두렵지 아니한가?
程子曰 管攝天下人心莫如明譜系無是譜 則無以述家風而陳世德且生卒配墓 若內外族戚 亦無得以記焉 此譜所以作也
정자 가로되 천하를 지배하더라도 인심은 족보를 분명히 하는 것만 못하며 계통은 이 족보가 아니면 따질 수가 없다. 족보에 기술하지 않으면 가풍과 베푼 세덕과 또 생, 졸, 배위, 묘소, 내외 친척과 인척 같은 것도 역시 기억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족보를 만드는 이유이다.
金之氏金海者 皆以駕洛國首露王爲鼻祖歷王十世至仇衡王國除有曾孫諡興武諱庾信出將入相爲東京之名臣 又至曾孫諱長淸以下世系無傳焉
김해 김씨는 모두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역대 왕으로서 10세를 거쳐 구형왕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고, 그 증손이 계셨으니 시호가 흥무이며 휘는 유신으로 나가서는 장수이고 그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으로서 동경의 이름난 신하였다. 또 그 증손 휘 장청의 이하로는 세대의 계통이 전하지 않는다.
各派自麗季別立中祖 分門分族 各別宗支各序疎穆 有以名公巨卿而踪武者 以文章德行而著世者 以忠孝節義而傳者 以武略勳勞 而封者雲仍克昌 散在八域
각파에서는 고려말부터 중조를 따로 세우고 문중이 나뉘어지고 종족이 나누어져서 각기 따로 종손과 지손의 소목의 차례를 세웠고, 명공거경이 있음은 흥무왕의 자취일 것이며 문장과 덕행은 세상에 드러나고 충효의 절의는 대를 이어 전하여 졌으며 군사 책략에도 힘써 공훈을 세워서 봉작을 받은 자손이 구름처럼 매우 성하여 팔도에 흩어져 살고 있다.
其麗不億先系雖中絶後屬雖疏遠旣是同祖 則亦天叙之親也 斯譜之合乃理所固然故忠靖公五世孫龍植慨然有意於廣修敦睦之義與諸宗收議爲此大譜之擧而屬余爲文以弁之
그 아름다움을 다 헤아릴 수 는 없으나 선계가 비록 중간에 끊기고 후세가 비록 소원하다하나 이는 같은 조상으로서 역시 하늘이 매겨놓은 차례의 친함이니라. 이로서 족보를 합치는 것은 진실된 이치인 바이며 그러한 고로 충정공의 5세손인 용식은 분연히 넓게 돈독하고 화목한 뜻을 가지고 여러 종문과 더불어 의논을 수합해서 이에 대보를 일으키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噫 斯譜團圓永修敦睦 則實得蘇氏所謂孝悌油然之意也 其有補於世敎也 亦大矣 惟金氏勉旃哉是爲序
아! 이 족보에 수록된 모든 단원은 영원토록 돈독하고 화목함에 힘쓰면 진실로 소씨(소명윤)가 말한 효도와 우애의 도가 자연히 일어난다는 뜻일 것이며 그것은 세상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역시 큰 것이다. 오직 김씨들은 여기에 힘쓰기를 격려하면서 이에 서 하노라.
崇禎紀元五丙子孟冬下澣 資憲大夫吏曹判書兼經筵日講官 嘉林趙基應撰
승정 기원 오 병자(서기 1876)년 10월 하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일강관 가림 조기응 짓다.
舊 譜 序 (西紀1922年 임술보)
解釋; 2006. 2. 28. 金順大
譜者何爲而作也欲其不忘本而收宗族也孝悌由是而生忠義由是而立焉
보첩은 무엇을 위하여 만드는 것일까. 그 근본을 잊지 말고 종족을 모우기 위한 것이다. 효도와 우애는 이로부터 연유하여 생기고 충의가 이로부터 연유하여 세워진다.
則譜之關於世敎顧不重且大歟盖惰唐以來氏族莫不有譜而往往文獻無徵於久遠所以程夫子嘗歎無百年之家者也
즉 보첩은 세상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중차대하다. 대개 수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씨족에게 보첩이 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때때로 오래되어 문헌을 모울 수 없었으니 정부자가 일찍이 백년을 지내오는 가문이 없다고 탄식한 것이다.
我東金氏之籍金海者肇自駕洛王閱數千載至今子姓極其蕃衍所謂根固而枝茂源深而流長者理之必然也
우리나라의 김씨의 본적을 가진 김해인은 가락왕에서 시작되어 수천 년이 지나 지금에 이르러 자손들이 아주 번성하여 소위 뿌리가 견고하여 가지가 무성하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긴 것이 이치 상 필연인 것이다.
然其諸宗分派散在四方不能統合一譜高麗判宗簿寺事諱方礪以下派譜之作厥又舊矣
그러나 그 여러 종족이 파가 나누어지고 사방에 퍼져있어 하나의 보첩으로 통합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고려 때 판종부시사를 지낸 휘방려 이하만 파보를 만들었으나 이 또한 오래되었다.
今其族黨發議增修昭穆有序井井不紊生卒事行傍註詳焉則自當各知來處以統骨肉不亦善乎
지금 족당에서 증보하여 수보하자고 발의하여, 소목에 차례가 있게 하고 정연하게 하여 문란함이 없게 하고, 생졸과 사적과 행적과 방주를 상세하게 하여 당시부터 각자가 알고 찾아 와서(?) 골육을 통합하니 이 역시 아름답지 아니한가.
役將竣寺事公後裔善有琫基遠來問序於愚愚乃辭之固而請益堅
이 일이 장차 끝나서 판종부시사공의 후예인 봉기(琫基)씨가 먼 곳에서 찾아와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나는 이에 강하게 사양하였으나 요청이 더더욱 간절하였다.
噫人家譜牒可觀之蹟誠在於爵秩勳業之赫赫忠孝文學之彬彬而惟玆譜中可指而言者盡出於蘆沙奇公之舊序而盛稱前徽則人孰敢以近代之不振而少之也
아! 사람들 가문의 보첩에서 선조의 자취가 정성스레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벼슬과 업적이 혁혁하고 충효와 문학이 빛나고 빛나니, 이에 보첩 중에서 지적하여 말할 수 있는 것 들은 노사 기정진공의 구보 서문에 다 나와 있어 성대히 칭송되고 표기되었으니 누가 감히 근대에 와서 부진하다거나 작다고 할 것인가.
凡譜於斯者苟能承先裕後保族宜家以致仁深而德厚則安知其雲仍之奕葉發舒不及於先世盛時也每於花樹之會益致敦睦而交相勉勵哉
무릇 보첩은 이런 것에 있어서 진실로 능히 선조의 뜻을 계승하여, 후손들이 종족을 보존하고 마땅히 가문에서는 어짐을 다하여 깊어지고 덕이 도타와 질 것이니, 그 후손들의 아름다운 잎들이 생겨나서 퍼지는 것이 선조들의 성대한 시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화수회가 열릴 때마다 돈목을 다하고 교제하기를 서로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時玄黓閹茂穀雨節德恩宋曾憲序
때; 현익엄무(1922년) 곡우절(양력 4월 20일 경) 덕은 송증헌 서
舊譜序 (西紀1976年 정미보)
2006. 2. 28. 金順大 譯
金氏東表著姓其貫不一而貫於金海者肇自駕洛王閱數千載分派甚衆殆遍國中譜不可總一故麗朝都摠管公諱敬臣后本 朝端廟二節臣西岡諱係錦退隱諱係熙從昆季分派修潽凡三刊歲月滋久矣今以都摠管公爲始合譜所以大同者固甚善矣
김씨는 동방을 대표하는 드러난 성씨이고 그 본관은 하나가 아니나 본관을 김해에 둔 사람들은 가락국왕으로부터 시작되어 수천년을 지나 파가 나누어져 진실로 사람들은 거의 나라 안의 구석구석까지 파졌으니 보첩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도총관을 지내신 휘경신 이후 조선의 두 절개있는 신하인 서강 휘계금과 퇴은 휘계희의 후손들이 분파되어 보첩을 만들어 무릇 3번이나 간행하였으니 세월은 이에 오래되었다. 지금 도총관공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동보로서 합보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아주 아름다운 일이다.
退隱公裔孫瑛洙以其宗議踵余門願以一言貫之余欽衽而應曰夫譜者欲其明昭穆而收宗支以管攝天下人心者也昭穆之序宗支之別具載譜中世德源流己備於蘆沙奇文簡公舊序揄揚至矣又我生考後庵先生序于再刊譜所以表章者纖悉無遺餘余復何有贅述哉
퇴은공의 후손인 영수(瑛洙)가 종중의 의견을 따라서 내 집에 찾아와 한마디의 말을 해 줄 것을 일관되게 요청하니, 나는 흠모하며 옷깃을 여미면서 말하기를 “대체로 보첩이라는 것은 소목을 분명히 하고 종손과 지손을 모우기 위한 것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인심이라 하겠다. 소목의 순서와 종손과 지손의 구별이 보첩중에 구비되어 기재되어야 하고, 세덕과 원류는 이미 노사 기정진 문간공이 쓴 구보의 서문에 잘 나타내어져 있다. 또 나의 부친이신 후암 선생[1]이 서문을 지어 재간한 보첩에 나타난 것들이 자세하고 전부 써져 있어 더 이상 쓸 것이 없으니 내가 다시 또 무엇을 쓸 것인가.” 하였다.
[1]後庵先生; 1922년 보의 송증헌?
噫歐陽子嘗書其譜曰傳於家者以忠事君以孝事親以廉爲吏以學立身凡譜於斯者苟能知此義而共勖焉
아! 구양자[1]는 일찍이 그의 보첩에 쓰기를 가문에 전하여 오기를 충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효도로서 부모를 모시고, 청렴으로 관리직을 수행하며, 학문으로 자신을 세운다고 하였으니, 무릇 보첩은 이러한 것에서 진실로 능히 이런 도리를 알고 다 같이 힘써야 할 것이다.
[1]歐陽子; 본명 歐陽脩, 1007~1072,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유학자(儒學者)·문장가(文章家)·사학자(史學者)·경학가(經學家).
則安知其後裔之奕葉發舒不及於先世盛時也哉然則斯譜也不但爲各知其來處而編摩也金海氏之蕃昌亦將兆於此乎請以是弁于卷端龍集
즉 어찌 그 후손들의 아름다운 잎들이 생겨나서 퍼지더라도 선조의 성대한 시대에는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니 이 보첩은 단지 각자가 알고 있는 것(?)은 책으로 펴내는 것만이 아니다. 김해의 씨족이 번창하는 것도 역시 장차 지금보다도 더할 것이다. 서문의 요청에 이와 같이 쓰고자 한다.
丁未流頭節恩津宋在晟序
정미(1976년) 유두절(음력 6월 15일) 은진 송재성 서
金海金氏摠管公八世孫淡軒公派族譜
丙寅(1986년)譜序
人類가 이 地上에서 文化를 建設하고 萬物을 支配함은 아득한 옛날부터 다른 生物에 앞선 社會組織을 이룩하였음이나 그 社會組織의 가장 基礎單位는 바로 家庭이다. 한 家庭의 來歷을 적은 것이 家乘이고 그 家乘을 擴大한 것이 卽 族譜다. 族譜를 다 모으면 한나라의 國史가 되고 여러 나라의 國史를 다 모으면 世界史가 되니 하물며 내 祖上의 行蹟과 얼이 담긴 族譜를 어찌 疎忽히 하겠는가?
그러나 萬民平等의 民主主義時代 人類平和를 追求하는 國際社會속에 사는 現代人이 오로지 내 祖上의 業績만 살펴 이를 宣揚하려는 復古的 思考로 族譜를 對 하랴. 오히려 지난날 祖上들의 참다운 얼을 되새겨 現實社會에 再照明하는데 그 力点을 두어야 할 것이다.
고요히 生覺하면 우리의 옛 先祖는 지금으로부터 二千餘年前 國際海上 交通의 要衝이요 韓國의 南端인 金海에서 일어나 駕洛國을 세우시고 洛東江流域을 支配하여 이땅에 처음으로 燦爛한 鐵器文化를 이룩하였으나 戰爭의 時代를 만나 나라는 新羅에 맡기고 몸은 鷄林에 依託되는바 되었다.
그러나 萬古英傑 興武王이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몸과 마음을 「救國統一 」 一念으로 갈고닦아 온 家門을 한마음 한뜻으로 모우시고 弱小國 新羅의 朝野을 一致團結시켜 莫强한 百濟 强大한 高句麗를 征伐하시고 더 나아가 天下制覇를 자랑하던 唐帝國의 말발굽도 이 땅에 한치도 容納치 않고 果敢히 몰아내시어 三韓을 처음으로 統一시켜 戰爭을 없애고 外勢를 몰아내셨던 興武大王의 「統一獨立」精神!을 後孫된 者 어찌 銘心하지 않으리요. 또한 新羅末 高麗初 비로소 金官城에 돌아온 먼 先祖들께서는 옛 伽倻의 風俗을 綿綿히 이어가면서 그 숱한 戰亂과 饑饉 政變과 官弊를 겪어오면서도 남들은 못살아서 떠나가고 더 잘살기 爲하여 떠나갔지만 오직 우리 門中의 先祖들은 어려운 世波를 슬기롭게 對處하면서 華麗한 松都 繁華한 漢陽에 어렵게 벼슬길에 나아가셔도 끝내는 故土로 돌아 오셨으니 그래서 마을 이름도 退隱이라 하였던가.
特히 築隱 退隱 淡軒 松齋先祖께서는 王政時代 農耕時代에 千里길을 걸어서 宦路에 나아가셨건만 近侍臣으로서 임금을 뫼실때나 守令. 方伯으로 地方에 나아가 百姓을 다스리실 때나 使臣으로 水陸萬里 他國에 가시어 外交를 하실 때나 天稟이 「剛直」하시어 어떠한 不正과 不義와도 妥協하시지 않고 奸臣들의 어떠한 謀害에도 毅然히 「淸廉直節」로 一貫하신 精神! 後孫된 者 또한 銘心하지 않으리요. 이 모두가 列先代 先祖님들의 참된 「얼」이요 우리 「家訓」이다.
그러나 現實은 어떤가. 國土는 또다시 分斷된채 外勢는 君臨하고 倫理는 顚倒되고 舊道德은 무너지고 新道德은 서지 않아 金權萬能의 誤導된 産業社會가 아닌가. 이런때일수록 우리의 後孫들은 祖上님의 「얼」과 「統一獨立 」 「淸廉直節 」의 精神을 몸소 修行하는 것이 내 自身을 爲하는 길이요 나아가서는 國家와 이 社會를 爲하는 길임을 깊이 되새겨야할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爲先이요 이 族譜를 刊行하는 참뜻임을 敢히 宣言하는 바이다.
끝으로 舊譜誤錄중 興武王庾信公의 妹氏寶姬 및 文熙(文明王后)의 序를 이번에 바로 잡았고 星州龍岩谷祖의 十六世 衡과衍, 顧母門中의 十七世 鎰兆 鎰綱 龜尾新浮洞門中의 十九世 七應 斗應等 諸位를 前記序대로 바로 잡았으며 또한 이번 族譜刊行을 契機로 一八九八年 戊戌五月에 湖南宗人等 이 倫祖奸計로 淡軒公(諱克儉)의 子孫이라 稱하면서 麻谷山公의 墓舊碑와 一九三六年 丙子十月에 黃山 松齋公(諱 寬) 洛園公(諱有信)의 墓舊碑를 暗碎(암쇄)하여 短碣을 세워둔 것을 一九八四年 甲子에 宗議에 依하여 墓碑를 다시 세웠고 이해 同墓域內 觀圃亭(諱善元)의 墓碑도 새로 세우면서 月波亭重建은 물론 先人들이 노닐던 東湖까지 再造成하는데 銘과 序. 記를 撰書하여 주신 淵民 李家源博士를 비롯하여 友松 龍田 玄谷 華齋 隱樵 西菴諸先生과 行狀文 및 墓碣銘飜譯에 힘쓴 漢英族弟에게 衷心으로 感謝를 表하고 物心兩面으로 誠力을 表示하여주신 江湖의 諸宗에게도 再三 感謝를 드리면서 本序를 代하고자 하나이다.
檀紀四千三百十九年(1986) 丙寅 春 後孫 漢奎(奉石) 謹書
<구보 서문>
戊戌大同譜序(1778년무술보)
< 담헌공파보 역문>
金氏之貫金海者皆首露之裔自國絶以後不知幾百年門闌昭炳圭組舃爀名公巨卿錯落相望爲東方甲乙族且其子孫寔繁以衍殆偏八省此眞所謂源深而孤遠近根茂而葉盛者也
김씨의 관을 김해로 하는 이는 모두 수로왕의 후손이니 나라가 망한 후 그 세월이 기백년인지 모르나 집안이 벼슬하여 명공. 거경으로 문중을 빛냈지만 자손이 뒤섞이어 서로 남보듯 바라보게 되었음은 우리나라의 갑족 을족으로 그 자손이 진실로 번영하여 거의 팔도에 두루 퍼진 까닭이다. 이는 참으로 근원이 너무 깊음으로 오히려 외롭고 먼 때문이며 이는 마치 뿌리가 무성하면 그 잎이 또한 무성함과 같은 것이다.
兩譜年久子孫多不入錄金氏之在嶺湖者鳩財收單入榟於天冠山中金君奎燁得弼甫以余適守是邦要有弁卷之作謹按舊譜有尤菴宋先生序文先生一言可使斯譜增光永垂窮宙顧余何敢焉 然厠名伊川之足古人之所爲榮不揆僭猥略叙其槩
두 족보{己酉(1668)譜와 丁丑譜(1756)}를 한지가 오래되어 자손이 빠진 것이 많다. 김씨중 영호(嶺湖)에 있는 자가 재물을 모으고 단자를 모아서 천관(天冠;全南長興)산 중에서 간행하니 김군규엽{金奎燁;1718-1784字用晦寶城出身南湫公(諱銑)傍玄孫}득필{1736-?長興出身翰林公(諱王寬)派 松汀公(諱景湫)七代孫}이 내가 그 땅에 있을 때 서문(序文)을 요구함이 있어 구보를 상고해 보니 우암 송시열(1607-1689字는英甫恩津人諡文正左議政)선생 서문이 있으니 선생의 한 말씀(一言)이 족보로 하여금 빛을 더해서 길이 무궁하도록 기념이 되니 내가 어찌 감히 서문을 하리요마는 그러나 이 일에 감히 참여함은 고인의 영광을 위함이니라. 외람되고 참람(僭濫)됨을 혜아리지 않고 대개를 서한다.
噫氏必有族族必有譜譜者所以明其倫而展其親盖自父而子自子而孫至於百千萬世之允則鮮不以路人相看此周官譜牒之所由作而程子曰譜者管攝天下之人心老泉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生譜有關於世敎顧不重且大歟
희(噫)라! 씨(氏)는 반드시 족이 있고 족은 반드시 보(譜)가 있으니 족보란 것은 인륜(人倫)을 밝히고 그 친(親)함을 펴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가고 아들이 손자로 가서 백천만대를 오래 이르면 길가는 사람같이 무관하게 된다. 고(故)로 주(周)나라 관(官)가의 보첩을 짓는 원인이 된다. 정자(程子;1032-1085 北宋의 大學者字伯淳諡號純公世稱明道先生)가 가로되 족보란 것은 천하의 인심을 통괄하여 끌어 잡게하는 것이라 하고 노천(老泉;蘇洵1008-1065 宋의 文人字明允號老泉四川眉山縣人六經百家說通達)은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의 마음이 유연(油然)하게 난다 하니 보(譜)가 세교(世敎)에 관계가 있으니 중차대(重且大)하지 않으리요.
譜成之日金氏諸宗無論遠近疏密知一本萬殊之義篤尊祖敬宗之誠孝友之行世修敦睦之風日興則將見首露神德遺烈可與天壤俱弊然則是譜也不但爲風化之一助豈不盛哉豈不休哉
보가 되는 날에 김씨 제종(諸宗)이 원근소밀(遠近疏密)을 논할 것 없이, 한 뿌리가 일만가지로 달라지는 일을 알아서 조상을 높이고 종문을 공경하는 정성을 돈독히 하여 효우(孝友)하고 행실을 대대로 닦고 돈목(敦睦)한 풍속이 날로 일어나게 되면 수로왕의 신덕(神德)과 후세에 길이 남는 공적이 가히 천지와 같게 된다. 그런즉 이 족보가 아름다운 풍속의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어찌 이 일을 성히 하지 않으며 쉴 수 있으리오.
崇禎紀元後三戊戌復月上澣前司諫院大司諫昌原黃幹序(正祖二年西紀一七七八年)
숭정기원후 3무술(1778년) 11월 상순 전사간원 대사간 창원 황간(昌原黃幹;1713-? 字士直英祖己卯文科大司諫)
戊戌大同譜序(1778년무술보)
<김순대 역문>
金氏之貫金海者皆首露之裔自國絶以後不知幾百年門闌昭炳圭組舃爀名公巨卿錯落相望爲東方甲乙族且其子孫寔繁以衍殆偏八省此眞所謂源深而孤遠近根茂而葉盛者也
김씨로서 본관이 김해인 사람들은 모두 수로의 후예이다. 나라가 끊어진 후로 여러 수백년간 가문은 단절되었으나 빛나는 무리들과 이름을 날린 사람 훌륭한 재상이나 높은 벼슬은 한 사람들이 섞이고 흩어져 있어 서로가 우러러 보는 동방의 으뜸가는 종족이 되었다. 또 그 자손들도 참으로 번성하여 거의 전국각처에 퍼졌으니 이는 진실로 소위 근원이 깊어 외롭고 멀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뿌리가 무성하여 잎이 무성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兩譜年久子孫多不入錄金氏之在嶺湖者鳩財收單入榟於天冠山中金君奎燁得弼甫以余適守是邦要有弁卷之作謹按舊譜有尤菴宋先生序文先生一言可使斯譜增光永垂窮宙顧余何敢焉 然厠名伊川之足古人之所爲榮不揆僭猥略叙其槩
양 보첩은 세월이 오래되어 자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등재가 되지 못하여, 영남과 호남에 사는 김씨들이 비용을 마련하고 단자를 모아 천관산(天冠山)에서 판각을 하게 되었다. 김규엽군과 김득필이 내가 때마침 그곳을 다스리고 있을 때 수권의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삼가 구보를 보니 우암 송선생의 서문이 있었고, 선생의 한 말씀이 가히 이 보첩에 빛을 더하고 영원무궁토록 드리우고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천선생(程子)의 발에도 못미치는 나 이지만 옛 사람들을 영광을 위해 헤아릴 수 없이 참람되고 경외스러우나 간략하게 그 개요를 서문에 쓴다.
噫氏必有族族必有譜譜者所以明其倫而展其親盖自父而子自子而孫至於百千萬世之允則鮮不以路人相看此周官譜牒之所由作而程子曰譜者管攝天下之人心老泉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生譜有關於世敎顧不重且大歟
아! 씨족은 반드시 종족이 있을 것이고 종족은 반드시 보첩이 있을 것이니 보첩이라는 것은 그 인륜을 밝히고 친분을 펴기 위한 것이다. 대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있고 아들로부터 손자가 있으니 수천만 세대가 흘러 오래되어도 이는 진실이니, 즉 분명히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를 쳐다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주나라의 관청에서 보첩을 만드는 이유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보첩이라는 것은 천하를 지배하는 인심이라 하였고, 노천(소명윤)은 우리의 보첩을 보는 자는 효도와 우애심이 자연히 생긴다고 하였으니, 보첩은 세상을 가르치고 되돌아보게 하는데 관련이 있으니 중차대하지 않는가.
譜成之日金氏諸宗無論遠近疏密知一本萬殊之義篤尊祖敬宗之誠孝友之行世修敦睦之風日興則將見首露神德遺烈可與天壤俱弊然則是譜也不但爲風化之一助豈不盛哉豈不休哉
보첩이 완성된 날에 가까이 살거나 멀리 떨어져 살거나, 관계가 가깝거나 멀거나에 관계없이, 하나의 근본인 만 가지의 도리를 알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고 종친을 공경하는 정성과 효도와 우애의 행실을 돈독히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돈목의 풍습을 갈고 닦아 날로 흥하게 될 것이다. 즉 장차 수로왕의 신령스런 덕과 전해주신 위엄은 가히 하늘이 주신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보첩이야말로 풍습을 화합하게 하는데 하나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으며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崇禎紀元後三戊戌復月上澣前司諫院大司諫昌原黃幹序(正祖二年西紀一七七八年)
숭정기원후 3무술(1778년) 11월 상순 전사간원 대사간 창원 황간(昌原黃幹;1713-? 大司諫)
壬戌大同譜序(임술대동보서;純祖二年(1802)에 金顯道公等이 山淸王山에서 刊行98派가 參加全31卷임)
<담헌공파보 역문>
夫族以宗別宗以祖顯祖以孫傳孫 故保族者必敬宗 敬宗者必自尊祖始
대체로 일가(族)는 종(宗)으로써 구별하게 되고 종(宗)은 조상을 받들어 나타나게 되며 조상은 자손을 두어 전하는 까닭에 일가(族)을 보호하는 이가 반드시 종(宗)을 공경하게 되는 것이며 종(宗)을 공경하는 이는 반드시 조상을 숭앙(崇仰)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金海之金以首露王爲祖越十世至仇衡王以德讓國於新羅 遂避地入智異山 宅于王山之下其終也葬于王山
김해 김씨는 수로왕을 시조로 삼고 십세 구형왕에 이르러서 겸덕(謙德)으로 나라를 신라에 넘기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왕산(王山) 아래에 살 땅을 가려 거기서 한 평생을 마치고 왕산에 장사하였던 것이다.
其孫大角干諱庾信 追慕厥祖之盛德 築室崇岡之側 晨昏灑掃至于七年之勤
그 증손 태대각간 휘유신(庾信)이 그 증조부의 위덕(威德)을 추모하여 높은 언덕 옆에 집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쓸고 닦으며 사모함이 7년에 이르렀으나,
伊後羅麗之亂失其陵所 子孫又中替不顯于世 逮入我 朝圭組蟬聯 貞忠姱節歷世炳朗 亦有文章德業踵武而作世之以金爲氏者殆遍於國中
그 뒤 신라와 고려의 여러 난(亂)에 그 능소(陵所)를 실전(失傳)하고 또한 자손이 영성(零星)하여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더니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함이 이어지고 충절이 대대로 빛났으며 문장과 덕업(德業)이 또한 잇달아 나오니 세상에 김(金)으로 성을 가진 이가 나라안에 널리 찼던 것이다.
今有顯道者濯纓之孫也 早業家學性又嗜古篤於向先
탁영(濯纓;金馹孫 1464~1498朝鮮燕山때 學者字季雲號濯纓諡文愍 成宗丙午文科吏曺正郞戊午被禍)의 후손인 지금의 김현도(金顯道;1755~1815字性之號月菴南原月谷出身濯纓의九代孫 )란 이는 일찍 가학(家學)을 업으로 하였고 천성이 고도(古道)를 즐겼으며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두터워.
歲戊午入山陰登縣之換鵝亭 搜覽扁楣得其失傳之陵於千有餘載之後 鳴呼 苟非至誠能若是乎金氏 其可謂有孫矣
정조22년(戊午1798)에 산청(山淸)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현판(懸板) 등을 찾아 상고하여 천 여년(千餘年)을 실전한 능을 찾아내었으니 아! 진실로 지성이 아니면 어찌 이러한 일을 감히(敢) 해 내었으랴. 김씨에게 자손이 있다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本記錄은 事實과 다름, 仇衡陵은 山淸儒生閔 景元이 찾음. 仇衡尋 陵記參照)
顯晦理也 固自有時者存而旣顯矣 不可以復晦 又不可不收其族以顯 其祖顯其祖以延其世遂乃謀之同人鳩如干財創譜牒之役顧其意 豈淺淺乎哉
모든 사물이 드러나고 묻힘은 세상의 이치이다. 한번 묻히어 세상이 모르다가 드러날 때가 되어 드러나면 다시 묻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또한 그 일가들을 거두어 드러난 조상을 나타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조상을 나타나게 함으로써 그 자손의 대를 연속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김씨들이 모이어 의논하여 성금을 모아 보첩(譜牒;族譜)의 큰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 뜻이 어찌 깊다하지 않으리오.
夫王山金氏之門戶也 王山高則金與之俱尊 王山不毁則金與之相終 始而金海之納陵慶州之西岳于 光有耀矣要余一言而叙之遂次其意如此云
무릇 왕산은 김씨의 문호이니 왕산이 우뚝하면 김씨의 가문이 또한 높이질 것이며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 또한 영원히 이어져 김해의 납능(納陵;首露王陵)과 경주의 서악(西岳;興武王陵)이 더욱 빛나고 빛날 것이다. 나에게 한마디의 서(叙)를 요청함으로 그 뜻을 따라 이렇게 적는다.
壬戌十月下澣嘉義大夫行吏曹參判兼同知經筵實錄事安東金羲淳序
임술(1802)년 10월 하순 가선대부 행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실록사 안동 김희순 서 (1757-1821字太初號山木諡文簡正祖己酉文科判義禁)
壬戌大同譜序(1802년 임술대동보서)
<김순대 역문>
夫族以宗別宗以祖顯祖以孫傳孫 故保族者必敬宗 敬宗者必自尊祖始
무릇 종족은 종친으로서 다른 종친과 구별되고, 할아버지로서 또 그 조상이 나타나고, 손자로서 그 후손에 전해진다. 따라서 씨족을 보존하려면 반드시 종친을 존경해야 하며 종친을 존경하려는 자는 반드시 조상을 숭배한데서부터 시작된다.
金海之金以首露王爲祖越十世至仇衡王以德讓國於新羅 遂避地入智異山 宅于王山之下其終也葬于王山
김해 김씨의 시작은 수로왕이 시조가 되어, 10세(世)를 지나 구형왕에 이르러, 덕으로서 신라에 나라를 양도하고 마침내 그 곳을 피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왕산 밑에 터를 잡고 평생을 마치고 임종하여 왕산에 장사를 지냈다.
其孫大角干諱庾信 追慕厥祖之盛德 築室崇岡之側 晨昏灑掃至于七年之勤
그 후손<증손자> 대각간(大角干) 휘 유신(庾信)이 그 조상<증조>의 성덕을 추모하고, 숭강(崇岡;숭고한 언덕=묘를 지칭)의 곁에 집을 짓고,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청소하기를 7년간이나 열심히 계속하였다.
伊後羅麗之亂失其陵所 子孫又中替不顯于世 逮入我 朝圭組蟬聯 貞忠姱節歷世炳朗 亦有文章德業踵武而作世之以金爲氏者殆遍於國中
이후 신라와 고려의 난리에 그 능소를 잃어버렸고, 자손들이 중간에 바뀌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다가, 조선조에 와서 <변두리의 미미한>관직이 연속되었고, 충신과 절의가 대대로 빛을 냈으며, 또한 문장과 덕업을 닦은 분들이 뒤를 이어 배출되었고 세상에서 김씨 가진 사람들이 나라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今有顯道者濯纓之孫也 早業家學性又嗜古篤於向先
이제 현도(顯道, 김현도,1755~1815)란 사람이 있으니 탁영(濯纓, 김일손, 1464~1498)의 후손이다.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하였고 성품 또한 옛것을 좋아하여 선조를 위하는데 독실하였다.
歲戊午入山陰登縣之換鵝亭 搜覽扁楣得其失傳之陵於千有餘載之後 鳴呼 苟非至誠能若是乎金氏 其可謂有孫矣
무오년(1798년)에는 산음현에 들어가 그 고을에 있는 환아정에 올라가 현판과 글(편미)을 찾아 살펴보고 그 실전된 능(구형왕 능)을 천여년에 찾아냈다. 아! 참으로 그 지극한 정성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김씨 집안은 참으로 훌륭한 후손을 두었다 할 것이다.
顯晦理也 固自有時者存而旣顯矣 不可以復晦 又不可不收其族以顯 其祖顯其祖以延其世遂乃謀之同人鳩如干財創譜牒之役顧其意 豈淺淺乎哉
나타나고 감추어짐은 세상의 이치이다. 진실로 다 그때가 있는 것인데 이미 나타난 것을 다시 감춰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또 종족을 수합하여 그 조상을 나타내고 조상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그 세(世)를 연장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마침내 이에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상의하여 약간의 재정을 모아 가지고 보첩(족보)의 일을 시작하였으니, 그 뜻을 생각하건데 어찌 얕다고 하랴(깊고 크다)
夫王山金氏之門戶也 王山高則金與之俱尊 王山不毁則金與之相終 始而金海之納陵慶州之西岳于 光有耀矣要余一言而叙之遂次其意如此云
무릇 왕산은 김씨의 문호(門戶)이다. 왕산이 높으면 김씨가 더불어 높아질 것이고 왕산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김씨도 더불어 서로 종시(終始)를 같이 하리라. 그러니 김해의 납릉(納陵)과 경주의 서악(西岳)은 선대가 남긴 빛나는 영광(榮光)이라 하겠다. 나에게 한 말씀 서(序)해 주기를 요청함으로 곧 그 뜻을 펴기를 이와 같이 한다.
壬戌十月下澣嘉義大夫行吏曹參判兼同知經筵實錄事安東金羲淳序
임술(1802)년 10월 하순 가선대부 행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실록사 안동 김희순 서 (1757-1821)
丙子大同譜序(병자대동보서; 高宗13년(1876)에 金昌潤 金鍾燮 金在瓘公等이 星州에서 刊行한 總四派가 參加全十一卷) <담헌공 파보 역문>
陶唐氏克明峻德以親九族周家宰宗繼別爲大宗修族大凡人之氏族本一而支分族至於九而明其德而親焉宗之於大而繼其別而修族
제요 도당(帝堯陶唐)[1]씨는 높은 덕을 깊이 밝힘으로써 9족(九族;高祖以下卽 八寸까지父系親族의 總稱)을 친히 하고, 주(周)나라의 재상 주공(周公 ;周의 政治家文王의 아들이며 武王의 동생 이름은 旦 武王을 도와 殷을 멸망시킴)은 종가의 계통을 나누어 한 겨레 붙이의 차례를 밝혔다. 무릇 사람의 씨족이란 근본은 하나이나 가지가 나누어져 구족(九族)에 이르렀으니 그 덕을 밝힘으로써 구족이 친하고 겨레붙이가 커지면 계통을 나누어 그 가계(家系)를 정리하는 것이다.
[1]帝堯陶唐; 요임금
雖孤子之家人無不本支所分昭穆有序 况以金海之氏金者上自首路王式至于今歲之相距常數千載其子孫之綿綿羅列殆同商孫之不億周後之百世也
비록 외로운 집안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그 근본과 가지로 나누어지지 않는 바 없으며 그 소목(昭穆;祠堂에 祖上의 神主를 모시는 차례)에는 차례가 있는 것이다. 항차 김해로써 본을 하는 김씨는 위로 수로왕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니 그 사이의 세월이 수천년이나 그 자손의 면면히 이어짐은 상(商;中國古代殷 나라의 처음 이름)나라 자손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음과 주나라 자손의 오랜 세대로 이어짐과 같은 것이다.
族以親焉敬唐堯五敎之敷宗以修族襲周禮九兩之誼支分本一之理尊祖敬宗之道於是乎明焉而彛倫惟叙五品相遜譜系之義豈不重且大歟
한 겨레붙이가 서로 친히하여 당요(唐堯) 5교(五敎;五常 書經의 敬敷五敎를 말함 左傳에서는 父의 義, 母의 慈, 兄의 友, 弟의 恭, 子의 孝를 말함)를 공경하여 폄으로써 한 집안을 다스리게 함은 주례 9양(周禮九陽;周禮에 백성을 다스리는 九種의 사람으로 卽 牧.長.師.儒.宗,主,吏.友,藪을 말함)의 다스림을 이어받아 한 근본에서 많은 겨레붙이가 나누어진 이치와 조상을 존중하고 종중(宗中)을 공경하는 도리임을 이에 밝힌 것이다.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베풀고 5품(五品;五典 五常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의 品類 또는 父.母 ,兄 ,弟,子를 말함)을 지켜 서로 사양하니 집안의 계통과 혈통의 바른 길이 어찌 무겁고 또한 크지 않으리오.
粤乙丑弁首之文惟余族兄故判書參鉉之所制而頃當嶠館按節之時顧余莅玆星山而刊是譜於玆州之古寺又請余文余雖不文事不偶然於是乎書
을축보(乙丑譜 ;高宗2年 1865年刊 )서문은 나의 족형 고(故)판서 삼현(李參鉉;1807-? 字台卿號鍾山龍仁人 哲宗庚戌文科官至禮判)이 지는 바이며 그때 마침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였다. 돌이보건데 내가 이 성산(星山)에 임함에 이 고을 옛절(雙溪寺 星州甑山坊에 있었으나 6.25때 불타 없어짐)에서 이 족보를 간행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내가 비록 서투른 문장이나 우연한 일이 아니므로 이에 서문을 쓴다.
崇禎紀之後五丙子(1876)至月上澣 通訓大夫行星州牧使 용인李稷鉉謹序
甲子(石藏)大同譜序(갑자,1924,석장대동보서)
(1924年 金明在 金堯賢公等이 서울에서 刊行,總十三派가 參加.全五十二卷임)
<담헌공파보 역문>
金海氏九十餘派同一譜焉 金君明在而其門中長老之命謁余冠其首曰世級降矣邪僞盛矣往往有假冒先系潛印譜牒以致紊昭穆而亂倫常焉 於是乎擧宗慨然發論正其訛謬刪其淆濫釐以爲幾十규(弓+二)
김해 김씨는 90여파가 동일보이다. 김명재(金明在)군이 그 문중 어른의 명으로 의관을 갖추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세상의 위계(位階)는 점점 떨어져 간사한 속임이 성하고 왕왕 거짓으로 선계(先系)를 범하여 남몰래 족보를 인쇄함으로써 소목(昭穆)을 문란케 하고 윤상(倫常)을 어지럽게 함에 이르렀으니 이제야 온 종중이 분개하여 그 잘못을 바루어야 한다는 의논으로 그 어지러움을 없이 하고 몇 십권의 책을 바로 잡게 되었다 했다.
藏諸 王山石室爲百世之龜鑑 公其一言相之余惟金海氏乃神明之冑也
왕산 석실에 간직한 여러 보책은 백세의 귀감으로 공변됨은 그 한마디로 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니 이것은 내가 김해 김씨를 밝은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인 것이다.
積蔭餘慶枝葉繁茂不萬不億殆遍八域而攷其所以傳世者則課忠責孝敦尙文學父以詔子兄以勗<=勖>弟賢哲名碩項背相望式至于今繩繩也 烏虖曷不盛歟
쌓여진 조상의 공덕으로 많은 복을 받은 자손은 나뭇가지나 잎처럼 무성하여 그 수는 만(萬)도 억(億)도 넘어 거의 팔도에 두루 퍼졌으니 그 전세(傳世)하는 까닭을 생각하니 이는 충효에 힘을 쓰고 학문을 숭상하고 아버지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에게 힘이 되어주며 밝고 큰 선비는 계속 뒤를 이어 그 법도는 끊이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아 이 어찌 장하다 하지 아니 하리오
雖然溟渤之廣焉而涇渭同注崑崙之大焉而玉石幷混 其勢然矣而澄淸者羞與渾濁同流溫潤者恥與麤頑爲伍其理固然矣
그러나 바다가 넓으니 경위(涇渭;경수와 위수 중국 섬서성에 있음. 경수는 흐리게 흐르고 위수는 밝게 흐름)가 함께 흘러 쏟아지고 곤륜산(崑崙山 ;중국 서쪽에 있다는 영산으로 아름다운 옥이 난다함)이 크기에 옥과 돌이 아울러 덩어리져 섞이는 것이 그 형세이니 세상의 어지러움을 맑게 다스리는 이는 흐리고 탁함이 함께 흐름을 부끄러워함이요 마음씨가 따뜻하고 화기가 있는 이는 거칠고 완고함이 서로 섞이게 됨을 부끄러워함이니 그 이치가 원래 그러함 이니라
金海氏今日之擧乃所以黜石而陟玉導渭而障涇允爲一門之信史孰敢曰不可也
김해 김씨가 오늘날 족보를 만드는 일은 곧 돌을 가려내고 옥을 거주어 들이며 위수(渭水)를 이끌어 경수(涇水)를 막는 거와 같이 진실로 한 문중의 믿을 만한 역사가 되게 함이니 누가 감히 옳지 않다고 말하리오
余於是竊有感焉 盖人之臧否身致之耳無 于於其先故禹以鯀爲父而不害於聖朱均以堯舜爲父而終於不肖古之人明乎此理自修其身能有所樹立
내가 이에 약간의 느낀바가 있으니 대개 사람의 선하고 약한 것은 자신이 이룰 따름이요. 그 선조에게는 관계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임금은 곤(鯀)으로써 아버지를 두었으나 그가 성인됨에 영향받지 않았으며 주(朱)는 요임금으로서 균(均)은 순임금으로써 아버지로 두었으나 끝내 아버지의 덕망이나 유업을 대받지 못하고 마치니 옛 사람이 이 이치에 밝아서 스스로 그 몸을 닦고 능히 몸을 세우는 바가 있었다.
春秋世卿之風膏盲於我東其先一有名世者依靠于斯號於衆曰我某之子某之孫也 雖{門+易}冗頑鈍百無一善喙喙推薦以爲名門華閥不可與編伍視之靑紫珪組囊探而芥拾
춘추시대 대대로 벼슬 세습의 풍습이 우리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누습이 되어 그 선조중 세상에 한 사람의 이름난 이가 있으면 이에 의지하여 웃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의 이들이요 손자라고 말하고 있으나 다만 용렬하고 우둔하여 백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지마는 사람마다 입을 놀려 말끝마다 추천함으로써 훌륭한 가문으로 삼으나 세상에 드러난 문벌과는 서로 섞여 있질 못할 것이니 이를 보건대 공경(公卿)의 구슬끈 주머니 속에서 먼지라도 주어 찾으려는 것이리라 하겠다.
此習日長歲月己久烏得無郭崇鞱輩趨拜汾陽之墓乎但以忠孝文學父詔而兄勗<=勖>雖不欲爲名族不可得矣 何必假冒先系潛印譜牒棼焉殽亂也哉
이러한 풍습이 날로 깊어져서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어찌 곽숭도(郭崇韜)의 무리가 달려가 분양(汾陽;中國山西省의地名)의 무덤에 절함이 없으리오(郭崇韜 中國吳代때 後唐의 宰相으로 그 根本을 알 수 없는데 唐나라의 名相郭子儀가 그의 祖上이라고 自稱하고 그 무덤에 절을 하니 世上사람이 비웃었다는 古事) 다만 충효와 문학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치고 형은 아우를 도우면 비록 명문거족이 되지 않으려 해도 되고야 말 것이니 하필이면 거짓으로 선조의 계보를 범하면서 남몰래 인쇄하여 분분히 어지럽게 하는 것인가.
此非特金海氏之相戒也 冠帶而環東土者皆當鑑于玆
이는 다만 김해김씨만이 서로 경계할 일이 아니고 관을 쓰고 뛰를 띠고서 동토(東土)에 둘러있는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모두 마땅히 이점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閼逢困敦(甲子)徂夏小盡前承旨安東金寗漢 序
갑자(1924)七月二十九日 前承旨安東 金寗漢 序)
1924년 갑자보(金海金氏王山世家石藏大同譜)序
解釋 : 2004. 12. 金順大
(2006. 3. 30.일부 수정)
金海氏九十餘派同一譜焉 金君明在而其門中長老之命謁余冠其首曰世級降矣邪僞盛矣往往有假冒先系潛印譜牒以致紊昭穆而亂倫常焉 於是乎擧宗慨然發論正其訛謬刪其淆濫釐以爲幾十규(弓+二)藏諸王山石室爲百世之龜鑑
김해<김씨>는 90여개의 파가 같이 하나의 보첩으로 되어 있다. 김명재가 그 문중의 어른의 명령으로 나를 찾아와 머리에 의관을 갖추고 말하기를, “세상의 위계질서가 떨어지고 간사함과 허위가 성행하고 때때로 선계를 거짓으로 꾸며, 몰래 보첩을 인쇄하여 소목을 문란하게하고 윤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이것으로 온 종족의 분개심이 자연히 발생하여, 거짓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논으로 오류는 깎아버리고 뒤섞여 어지럽게 퍼진 것을 고쳐, 10여권의 책으로 만들어 왕산의 석실에 보존하여 오랜 세대에 걸쳐 모범이 되게 하려고 한다.”고 했다.
公其一言相之余惟金海氏乃神明之冑也
공(김명재)의 그 한마디 말로서 나는 김해<김씨>가 천지신명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
積蔭餘慶枝葉繁茂不萬不億殆遍八域而攷其所以傳世者則課忠責孝敦尙文學父以詔子兄以勗<=勖>弟賢哲名碩項背相望式至于今繩繩也
음덕을 쌓고 경사가 넘치니, 자손(枝葉)이 번창하고 무성하여, 셀 수 없이 많은(不萬不億) 후손들이 거의 팔도에 퍼졌다. 세상에 전해지는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성과 효성을 쌓아 <충효가> 돈독하고 글과 배움을 숭상하고, 아버지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동생을 힘써 도와주니, 어질고 사리에 밝고 똑똑하여, 목과 등어리를 우러러 보고 따름을 받는 것이(존경받는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烏虖曷不盛歟雖然溟渤之廣焉而涇渭同注崑崙之大焉而玉石幷混其勢然矣而澄淸者羞與渾濁同流溫潤者恥與麤頑爲伍其理固然矣
오호라. 어찌 성하다 하지 않겠는가. 비록 어둡고 안개가 자욱하여 넓게 퍼진다 해도, 경위강[1]이 서로 통하여 흐르고, 곤륜산이 커서 옥석이 서로 섞이어도 그 형세가 자연스럽다고 하나, 맑고 선명한 사람은 혼탁한 것이 보태져 같이 흐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마음씨가) 따뜻하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은 거칠고 둔한 것이 섞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이 이치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1]涇渭;경수와 위수 중국의 섬서섬에 있음 경수는 흐리게 흐르고 위수는 맑게 흐름
金海氏今日之擧乃所以黜石而陟玉導渭而障涇允爲一門之信史孰敢曰不可也 余於是竊有感焉
김해<김씨>는 오늘 들고 일어나, 이에 돌을 가려내고 옥석을 거두어 들이는 것은 위수(渭水)를 끌어들여 경수(涇水)를 막는 것과 같이 진실로 한 문중의 믿을 수 있는 역사를 만들었다. 누가 감히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 나는 이것에 약간의 느낀바가 있다.
盖人之臧否身致之耳無 于於其先故禹以鯀爲父而不害於聖朱均以堯舜爲父而終於不肖古之人明乎此理自修其身能有所樹立
대개 사람들이 착하거나 악한 것은 그 자신이 이룰 따름이고 선조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우왕에게는 곤(鯀)이 아버지로서 <우왕이 성인이 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고, 주(朱)는 요임금을 균(均)은 순임금을 아버지로 두었으나 끝내 아버지를 닮지 못했으니, 옛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에 아주 밝아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능히 세우는 바가 있었다.
春秋世卿之風膏盲於我東其先一有名世者依靠于斯號於衆曰我某之子某之孫也
춘추시대 대대로 벼슬을 이어가는(세습하는) 풍습이 우리나라(我東)에서는 번창하고 맹목적이어서, 그 선조 중에 한사람의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이 명성에 기대고 의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손자다.” 라고 하였다.
雖{門+易}冗頑鈍百無一善喙喙推薦以爲名門華閥不可與編伍視之靑紫珪組囊探而芥拾
비록 쓸모없고 우둔하며 백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입을 놀려 말끝마다 추천하여 명문의 덕망있는 집안으로 삼는데, 세상의 알려진 문벌(編伍)과는 서로 섞이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니 청색, 자색, 녹색 구슬의 주머니에서 먼지라도 줍기를 바라는 것이다.
此習日長歲月己久烏得無郭崇鞱輩趨拜汾陽之墓乎但以忠孝文學父詔而兄勗<=勖>雖不欲爲名族不可得矣
이러한 풍습이 날로 깊어져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다. 곽숭도의 무리가 달려와서 분양[1]의 묘를 참배하지 않았다면 어찌 얻었겠는가[2]. 다만 충효문학을 아버지가 가르치고 형이 힘써 준다면, 비록 유명한 종족이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그리되지 못할 것이다.(즉 유명한 종족이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유명한 종족이 될 것이다.)
[1]汾陽(697∼781); 곽분양은 본명의 곽자의(郭子儀)로 중국 당나라의 명장이다. 현종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토벌하였으며, 그밖에도 많은 공을 세워 사도(司徒), 중서령(中書令) 등의 벼슬을 거쳐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함을 받았다. 곽자의가 살아 생전에 부귀공명등 오복(五福)을 다 누렸다
[2]글의 내용으로 보아 곽숭도는 원래 곽자의의 친족이 아닌 것 같으나 곽자의의 묘를 참배하며 자기 선조라 하여 곽자의의 부귀와 영화를 물러 받아 누린 것 같음.
何必假冒先系潛印譜牒棼焉殽亂也哉此非特金海氏之相戒也 冠帶而環東土者皆當鑑于玆
어찌하여 하필이면 선조의 계통을 거짓으로 가장하여, 몰래 보첩을 간행하고 얽히고 뒤섞이고 어지럽게 하는가. 이는 특히 김해<김씨>만이 서로 경계할 일이 아니고 관복을 입고 띠를 매고 이 동쪽 땅에 둘려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
閼逢困敦(甲子)徂夏小盡前承旨安東金寗漢 序
1924년 초여름이 조금 지났을 때(4월), 전승지 안동 김녕한 서
乙未派譜序(都摠管公派譜序) (1956년 若本에서 刊行한 淡軒公派譜.全五卷)
<담헌공 파보 역문>
猗惟我金氏之本肇自駕洛國 始祖王創業之後繁茂昌衍東方大姓中居甲而千枝萬葉其麗不億矣
아아 생각하건대 우리 김씨의 뿌리는 처음 가락국에서부터 시조왕 창업후 번창하고 무성하게 퍼져 우리나라 대성(大姓)중 으뜸으로 많은 자손과 그 빛남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然源深流活根固葉華上自明公巨卿道學文章忠孝節義繼繼承承燦然若貫珠豈非我 始祖王垂統之後種德仁澤愈久而愈深枝葉兆億受天之佑也
그리하여 깊은 근원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은 뿌리를 굳게 하고 잎을 무성하게 하였으니 위로는 이름난 재상 높은 벼슬아치로부터 도학 문장 충효 절의로서 계계승승하여 찬연함이 관주(貫珠)와 같으니 어찌 우리 시조왕의 통서(統緖)를 자손에게 전한 그 후손이라 하지 않으리오. 은덕이 될 일은 어질게 행하여 세월이 아득하고 깊어도 자손이 무한 번창하였음이 하늘의 도움인 것이다.
聖朝以後公私書籍非不至矣盡矣屢經兵燹文獻幾乎蕩殘而更不修輯如杞宋世代猶范蔣不辨殷商之改號於祖先魯衛之初公於兄弟不知同祖之血脈亦不識兄弟之同根親盡情疎視若路人矣
성조(聖祖)이후 공사(公私) 서적이 전해졌으나 누차의 병화를 겪음으로써 없어진 문헌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없어진 문헌을 다시 모아 닦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기송세대(杞宋世代)의 오히려 범장(范蔣)이 분변하지 못함과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이름이 조상 때에 바뀜과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처음엔 한 형제이면서 같은 할아버지의 혈맥임을 알지 못하고 또한 한 뿌리의 형제임을 몰라서 친진(親盡;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됨, 왕은 5대조, 평민은 고조까지 지냄)으로 정이 성기면 마치 길가는 사람 보듯 하기 때문이다.
正廟己未八域諸宗設板刻大同譜所于山淸王山 陵寢壬戌完成然上系難辨各立中祖凡爲九十餘派
지난 정조 기미년(正祖23년己未1799)에 팔도 제종(諸宗)이 판각 대동보소(板刻大同譜所)를 산청 왕산능침(王山陵寢;仇衡王陵)에 설치하여 임술(壬戌1802)년에 완상하였으나(本文은 事實과 若干 다름, 王山板刻 譜는 壬戌年에 始作하여 丙寅年에 마침) 상계(上系;羅末乃至麗末世系)를 분변하기 어려워 각립 중조(各立中祖)하여 무릇 90여파로 나누어졌다.
而其後丙子甲子大譜修之然各處散居諸宗尙多漏譜之家只識貫鄕未知其分派祖系爲同宗者不無痛恨而再昨甲午秋先祖淡軒公墓奠時世鍊再鍊漢奎漢鳳漢喆從來言譜事而一紀後修譜雖是適期事巨力微
그 후 병자(丙子1876) 갑자(甲子1924)년에 대보를 엮을 때 각처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중에는 많은 누보(漏譜)된 집이 있어 다만 관향만 알고 그 분파의 조계(祖系)를 알지 못하니 같은 종중을 위해 통탄되는바 없지 않아 재작년 갑오(甲午1954) 가을 선조 담헌공묘전시(淡軒公墓奠時)에 세련(世鍊) 재련(再鍊) 한규(漢奎) 한봉(漢鳳) 한철(漢喆)등이 종래 말하던 족보간행의 일을 일기(一紀;本文에서 말한 一紀는 族譜刊行의 時期卽 三十年)후에 수보(修譜)케 되었으니 비록 시기는 적절하나 일은 큰데 힘은 약하였다.
都摠管公後孫合同各派譜于金海寶城機張固城各處云族從漢泰甫素是祖先向上之誠孝極矣乃聞此設發誼忘食不眠不休未計道路之曠遠不嫌簟匏之空虛過年收單始乃登榟爲計而請記顚末不肖之蔑學無聞豈敢生意泚筆然霄旴間常懷慕先睦族之誠而深感漢泰從之誠孝僭陳其顚末如右爾
총관공(摠管公) 후손이 김해(金海) 보성(寶城) 기장(機張) 고성(固城) 각처에서 각 파보를 동시에 한다함에 족종 한태(族從漢泰)가 원래 선조를 향한 효성이 지극하드니 이에 보소 설치의 발의를 듣고 먹고 자고 쉬는 것도 잊으면서 길의 멀고 아득함도 헤아리지 않고 굶주림마저도 돌보지 않으면서 지난해 수단(收單)을 하여 비로소 이의 출판 계획을 하여 전말(顚末)의 기록을 청하니 불초 학문이 미약하고 견문도 없이 어찌 감히 뜻을 내어 글을 쓸 수 있겠는가마는 아침 저녁으로 언제나 선조를 사모하는 회포와 일가끼리의 화목하는 정성과 한태 족종(漢泰族從)의 효성에 깊이 느껴 참란하나마 그 전말을 위(우)와 같이 적는다.
檀君紀元四二九十年丁酉孟春裔孫鍾漢謹序
단기4290년(丁酉1957) 정월 일(檀君紀元四二九十年丁酉孟春)
예손 종한 근서(裔孫 鍾漢 謹序)
1782年壬寅譜(참고보)
2006. 3. 30. 金順大 譯
□ <서문 1>
玄源分派不記於家則後世無以考其實偉功碩德不鋟於梓 則後世無以壽其傳噫記曰先祖無美而秤之是証也有善而 不知非明也知而不傳非仁也斯非特一家之私抑爲國家之 公故厥
아득한 근원과 분파의 기록이 없는 집안은 후세에 있어서 (그 가문의) 위대한 공덕과 넓은 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고, 인쇄된 자료가 없으면 후세들에게 그 전함이 오래갈 수 없다. 아! 기록되어 있기를 선조들에 아름다움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그 증거이다. 선함이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짐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사적으로는 특별히 한 집안만의 일이 아니고 공적으로는 국가를 억누르는 일이다. 그래서 문서로 인쇄하여 남겨야 한다.
或德優斯文勳存社稷文登翰苑者有所記籍比如周 之世本漢之年表閱千載而無泯然不世執厥功繼載 國乘則必有私門遺蹟如潘陸歐蘇之所陳斑斑可考爲光修譜者 顧不愼玆旃哉
혹시 덕망이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글이 존재하고 사직문(공문서)에 벼슬을 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으면 이는 주나라의 족보와 한나라의 연표와 같이 천년이 지나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공적이 인쇄되지 않았더라도 나라의 역사책에 실려 있으면 반드시 개인 가문의 유적에도 있을 것이니, 이는 소씨가 말한 것과 같이 조금씩 옛일을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이를 밝히기 위해서 수보를 하는 것은 옛일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
盖金州之金鼻祖鷄林玉璽之有傳職帖之相 承誠是千古美事但恨其數屈時晦未及見其榮光也
대개 금주(지금 김해) 김씨의 조상은 계림(지금 경주)의 임금으로서 남아 있는 그 직첩(벼슬을 기록한 책)이 계속 전해져 왔으니 그 정성이 천년의 아름다운 일이다. 다만 그 숫자가 발견된 것이 적으나 그 영광은 볼 수 있다.
官高麗 恭愍之際有贊成事恭靖公諱庾入相出將倚國安危以功名 言則平紅賊賡歐北樓也討釋器仗鍼西海也忠節言則在 燕時不附德興也朝天日直斥仁任也于時洪彦博田祿生李 公遂鄭圃隱登皆其儕流也
관직이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를 지낸 공정공 휘유는 조정에 들어가서는 재상을 지냈고 나와서는 장군이라. 나라의 평안과 위험이 있을 때 공을 쌓아 이름을 날렸으니 말하자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고 북쪽 오랑캐를 쳐서 원수를 갚았으며 석기를 토벌하고 서해를 지켰다. 충절을 말하자면 연경에 있을 때 덕흥[1]을 따르지 않았다. 대궐에 들어가서 이인임을 꾸짖어 물리쳤고 이 시기에 홍언박[2], 전록생[3] 이공(?)이 포은 정몽주를 따랐으니 이들이 함께 유배를 당하였다.
[2]홍언박(洪彦博) ; 1309(충선왕 1)∼1363(공민왕 12). 고려 후기의 문관.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용(仲容), 호는 양파(陽坡).
고려의 명필인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관(灌)의 7세손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규(奎)의 손자이며, 삼사사(三司使) 융(戎)의 둘째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 장인은 찬성사 권준(權準)이며,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이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1348년(충목왕 4) 밀직제학에 제수되고, 1352년(공민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으며, 추성양절좌리공신(推誠亮節佐理功臣)이 되어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
1353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이색(李穡) 등 33인을 뽑았고, 그해 11월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정승을 거쳐 우정승이 되었으며, 1356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단성양절보리안사공신(端誠亮節輔理安社功臣)의 호를 받고 남양후(南陽侯)에 봉해졌다. 기철(奇轍)일파를 숙청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1361년에는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홍건적이 침입하자 피난하자는 여러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고 개경을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서경이 함락되자 안동파천에 호종하여 개경수복의 방략(方略)을 건의하였다. 피난중 왕에게 절제생활을 권하고, 왕이 환도를 지연시키자 민폐를 줄이기 위하여 농한기에 환도할 것을 주장하여 왕이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1362년에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 유숙(柳淑)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박실(朴實) 등 33인을 뽑았다.
이듬해 김용(金鏞)이 주모한 흥왕사의 난 때 피살되었다.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추록되고 정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양파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 전녹생(田祿生) ; 1318(충숙왕 5)∼1375(우왕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野隱).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제주사록(濟州司錄)에 임명되었다가 들어와 전교(典校)·교감(校勘)이 되었고,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교감으로서 좌랑 서호(徐浩)와 함께 기황후(奇皇后)의 친척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의 죄를 다스리다가 그가 옥사하였으므로 잠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1357년(공민왕 6)에 왕이 염철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니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서 우간의 이색(李穡), 우사간 이보림(李寶林), 좌사간 정추(鄭樞) 등과 함께 그 폐단을 논하여 염철별감을 파견하지 말도록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343년 전라안찰사로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왕이 남행하자, 왕을 호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좌상시(左常侍)가 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거쳐 대사헌·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러 추충찬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1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지공거(知貢擧)이색과 함께 진사를 선발하였다.
1373년에 서북면도순문사로서 충혜왕의 얼자(孽子)라고 칭하던 석기(釋器) 가 이안(李安)·정보(鄭寶) 등과 어울려 반역을 꾀하였다는 명목으로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1375년(우왕 1)에 간관 이첨(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을 벨 것을 청하니 왕이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이들의 말이 박상충(朴尙衷)과 전녹생에게 관련되므로 최영이 이들을 심하게 국문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모두 가던 도중에 죽었다.
저서로 《무은집》이 있다.
雖三仁之於殷武穆之於宋未足 以逾矣逮夫 本朝有禮曺判書恭簡公拙齋先生諱銚早擢 重榜伊後四世繼登館閣蔭及華裔眞所謂翰林文章第一家 者也微敬順王之積德金寧君之遺澤曷又使之然哉
비록 세사람의 어진이가 송나라(?)에서는 굳세고 화목하였으나 이를 넘어가기에는 부족하여 체포되었다. 본조(조선)에서는 예조판서를 지낸 공간공 졸재선생 휘요가 계셨으니 일찍이 중방에 발탁되었고, 이후 4 세대에 걸쳐 계속해서 과거에 등제하거나 음사로 벼슬에 나갔으며 또 후손들이 훌륭하여 소위 한림의 문장으로서 제일가는 가문이라 일컬었다. 경순왕이 쌓은 덕을 숨기고 금녕군의 후세에 까지 전하는 은혜는 어찌 또 그러하지 않겠는가.
余棄棄 且死猶喜談古人名德䪸点功有懲焉不敢復治筆硯乃今金 君濩氏來示家史一通謁余一言至再徵良勤
나는 버릴 것은 버리고 또 없앤 것은 오히려 기쁜 말들과 옛 사람의 명성과 덕망과 공덕에 대한 것이라 잘못이 있으니 감히 다시는 붓과 먹을 잡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지금 김호씨[1]가 찾아와 집안의 역사를 한 통 내어 보이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1]옛 사람의 이름뒤에 氏의 호칭은 처음 봄.
噫鍾鼎之表誌 集家之記實非不炳烺礌硠而於余有通家之誼安敢終黙而 息乎言告訖跋之尾如此
아! 종정의 표와 지와 집은 가문의 기록이니 실로 빛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나에게는 가문을 통해 내려오는 정의가 있으니 어찌 감히 침묵으로 끝내겠는가. 한마디 말을 알리고 발문의 뒷부분에 이와 같이 마친다.
歲舍辛未(1751?)暮春上澣前翰林昌城黃仁儉序
(황인검(黃仁儉) 1711(숙종 37)∼1765(영조 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득(敬得).
호조참판 자(梓)의 아들이며, 창성위(昌城尉:영조의 10女壻) 인점(仁點)의 형이다.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이다. 유학(幼學)으로 반제(泮製)에 수석하여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춘추관의 한림에 적합한 자로 뽑히고 설서가 된 뒤 겸설서·정언을 거쳐, 1753년에는 문학에 이어 지평·겸문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도당록회권(都堂錄會圈)에 수석하고 헌납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실록청찬집낭청(實錄廳纂輯郎廳)을 거쳐 1756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1758년에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이조참의를 거쳐 1760년 대사헌이 된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1762년 우유선(右諭善)·대사간·이조참판·유선·좌부빈객에 이어 빈객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좌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예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왕세자 책봉칙지(冊封勅旨)를 가져오는 사행을 맞기 위하여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서 한성부판윤·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65년 병조판서·홍문관제학에 이어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병사하였다. 청렴결백한 관료생활로 가정이 몹시 빈한하였으므로 영조는 매우 애석하게 여기고 부의를 후히 내리도록 명하는 한편, 치제문(致祭文)과 함께 정효(貞孝)의 시호를 내렸다.}
□<서문 2>
譜牒之作盖古也陸機陳世德潘岳述家風於是乎譜牒之事 興矣以此辨氏族以此敦宗恤親之意根本追遠之道皆係焉
보첩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오래되었다. 돈목이 퍼지고 세덕이 넘치는 가풍은 여기에 있다. 보첩에 대한 일이 흥해지는 것은 이것으로서 씨족을 분별하고, 이것으로서 종친간의 돈목과 규휼의 뜻을 지키고, 근본과 조상의 덕을 생각하는 도리는 모두 이것에 관계한다.
雖茅布寒微之族苟有孝悌婣睦之心則是牒不可不作矧喬木世臣之家以名冑華裔稱者孚
비록 풀로 만든 이불을 덮고 추운 겨울을 나는 보잘것없는 종족이라도 진실로 효도와 우애가 있고 돈목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보첩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하물며 뼈대있는 벼슬을 한 집안에서 이름난 후손과 빛나는 후예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지 않겠는가.
然惟我 國僻處海表文獻 無徵羅麗以來氏族不齋傳世有頃久分派有濶狹其能綿遠 而保有舊牒者盖尠矣此豈非物盛而衰數極而止之理歟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나라에서 외따로 떨어진 바닷가에 있어 문헌을 모울 수 없고, 신라와 고려 이래로 씨족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며 한쪽으로 편중되었다. 파가 나누어진 것은 시원스럽게 잘 되어(濶狹) 오래전의 사실들과 이어져 있으나(綿遠) 이를 보존하여 구 보첩을 가진 자는 대개 드물다 하겠으니 이 어찌 성하지 않겠으며 멈출 수 있겠는가.
今 觀金州之譜有二異焉有三美焉敬順王玉璽之傳授也金四 職帖之相承也今雖無寶蹟之可徵斑斑遺牒若是可攷信乎 其不誣也此所謂二異也
지금 금주(현 김해)의 보첩을 보니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있고 세가지의 아름다운 것이 있다. 경순왕의 옥쇄를 전하여 준 것과 금으로 된 4개의 직첩(관직을 적어 놓은 책?)이 서로 전해진 것이다. 지금 비록 이것에 대한 근거는 없으나 전해지는 보첩을 보면 믿을만하고 거짓이 아니니 이것이 소위 2개의 다른 점이다.
道德以褆之者文章以表之者節義 以樹之者有如麗之恭靖公 本朝之恭簡公其後華裔之施 靑紫躋顯要者並萃於一門信乎其榮且貴也此所謂三美也
도덕이 단정하고 문장이 뛰어나고 절의가 세워진 것은 고려시대의 공정공(諱庾)이었고, 조선시대의 공간공(諱銚)과 그 후예들이 지낸 벼슬?(靑紫)은 높이 드러나고 요직에 올라 이 가문에 모여 있으니 그 영광과 부귀를 믿을 수 있다. 이것이 3가지(도덕, 문장, 절의)의 아름다움이다.
噫是豈無自而然哉意者其先世積累有以培壅啓佐而後之 人續紹發揚之美足使人竦動而절敬者也抑余於是좌有所 得焉
아! 이것은 어찌 시작이 없었으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뜻이 있는 자들은 그 선조들이 쌓은 업적을 더 늘리고 북돋아 인도하고 보좌하여, 후세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어받고 아름다움을 일으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황송하여 떨려서 공경하게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더욱더 소득이 있다고 하겠다.
盖以敬順王爲始祖者明其鷄林之所自出也以金寧君 爲中祖者以麗以前久遠難祥也外派之以四世限者別內外 有輕重也
대개 경순왕이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고 그들은 계림(현 경주)에서 나왔다. 금녕군이 중조가 되었으나 고려시대 이전은 옛날로서 오래되어 상세하게 알기가 어렵다. 외파는 4세로 한정한 것은 내외에 경중을 두어 구별하기 위함이다.
雖久遠而苟有名臣則必書某後者其記實之備也 收族之勤也向之略者祥訛者正其綱條凡例좌加密焉吁相 龜氏之繼其志述其事卒乃底于有成者其点本之孝悌而可 謂能世其家者也
비록 오래되었어도 진실로 유명한 신하였던 사람은 반드시 그 후손을 쓰고 실제 내용을 갖추어 기록하였다. 종족을 모은다는 것은 고생스런 일이다. 간략하게 되어 있는 것은 상세하게 하고, 틀린 것은 그 대강의 조목을 바로 잡았으며 범례에는 더욱더 세밀하게 썼다. 아! 상구(1752~ )씨가 한결같은 뜻으로 그 사실들을 말해주고 끝내는 돌아가셨으니(?), 이 이루어 놓은 것은 효도와 우애의 기본이 되니 이는 능히 그 가문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할 것이다.
今者乃以書來要不佞一言以弁卷不佞衰 且病其於觚翰家事甚荒落無以應是請之勤顧相龜氏居吾 先之外裔於不佞甚熱且也屬以序引而義有不獲辭者
지금 이 사람이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에 쓸 한마디 말을 요청하여 나는 쇠약하고 또 병중에 있으나, 가문의 일이 아주 거칠고 쓸쓸하여 이에 응해줄 것을 삼가 청하였고, 상구씨를 생각해 보니 나의 선조의 외손이었다. 나는 심한 열이 있어 서문을 쓴다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玄黓攝提格(壬寅;1782?)孟春下澣生員江陵金啓淳謹識
임인(1782?)년 1월 하순 생원 강릉 김계순 근지
□金海府在嶺南 盆城 金州 金官
(김해부는 영남에 있다. 분성 금주 금관이라고 하였다.)
金海金氏有二一則駕洛國王金首露後 一則金海君金濂後
김해김씨는 두개가 있으니 하나는 가락국왕 김수로의 후손이고 하나는 김해군 김렴의 후손이다.
○駕洛 首露王 誕降龜旨峰漢光武壬寅開國建安己卯薨在位百五十一年陵在打鼓山下壽百五十八后許氏天笁王女 居登王 庚辰立戊辰薨 馬品王 己巳立乙巳薨 乾彌王 辛亥立乙巳薨 伊品王 丙午立 丙午薨 坐智王 丁未立 庚申薨 吹希王 辛酉立壬寅薨 銍智王 癸卯立 辛未薨 鉗知王 壬申立 庚子薨 仇衡王 辛丑立壬子薨 子武力 新州都摠管 子舒玄 蘇判大梁州都督 子庾信 大太角干文烈公
○가락 수로왕 구지봉에서 탄생하셨다. 한나라 광무 임인(42)년에 개국하였다. 건안 기묘(199)년 돌아가셨고 재위는 151년이다. 능은 타고산 아래에 있다. 나이 158세에 천축나라의 왕녀인 허씨를 왕후로 맞이하였다. 거등왕 경진(200)년에 왕위에 올라 무진(248)년에 돌아가셨다. 마품왕 기사(249)년에 왕위에 올라 을사(285)년에 돌아가셨다. 건미왕 신해(291)년에 왕위에 올라 을사(345)년에 돌아가셨다. 이품왕 병오(346)년에 왕위에 올라 병오(406)년에 돌아가셨다. 좌지왕 정미(407)년에 왕위에 올라 경신(420)년에 돌아가셨다. 취희왕 신유(421)년에 왕위에 올라 임인(462)년에 돌아가셨다. 질지왕 계묘(463)년에 왕위에 올라 신미(491)년에 돌아가셨다. 겸지왕 임신(492)년에 왕위에 올라 경자(520)년에 돌아가셨다. 구형왕 신축(521)년에 왕위에 올라 임자(532)년에 돌아가셨다. 자무력 신주도총관을 지냈다. 자서현 소판으로 대양주도독을 지냈다. 자유신 대태각간 문열공이다.
○新羅 敬順王 閼智孫丁亥卽位乙未薨陵在長湍 子殷說 工部侍郞 子濂 金海君 子稟言 小保 子順輔 中書令 子世翊 左承宣 子鳳기 同正 子時興 金州伯
○신라 경순왕 알지의 후손이다. 정해(927)년에 왕위에 올라 을미(935)년에 돌아가셨다[1]. 능은 장단에 있다. 자은열 공부시랑을 지냈다. 자렴 김해군이다. 자품언 소보를 지냈다. 자순보 중서령을 지냈다. 자세익 좌승선을 지냈다. 자봉기 동정을 지냈다. 자시흥 금주백을 지냈다.
[1]935년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연도이고 경순왕이 돌아가신 연도는 978년임.
□金海金氏世譜舊序(김해김씨세보구서)
鳴呼惟予未弱冠之年値壬丁倭虜之變挈家奔避萬死生還 則故里蕭條親戚零替豈不慟哉
아! 생각해 보면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맞아 왜놈 오랑캐가 침범한 변고가 있어 가족을 이끌고 도망하여 피하였다가 많은 죽을 고비를 넘고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옛 마을은 쑥밭이 되고 친척들은 거의 없어졌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한가.
噫吾家有 王傳授玉璽 而兒時聞之則過客金澄請見摩挲新若昨日又有金四職帖 而闊厚黃紙書金 爲王者其上又有 尙書公以下先代 敎旨及 世譜一卷而亂離急迫之際不遑將之歸則家藏蕩然 己化泰經之灰
아! 우리 집에는 왕이 전해준 옥쇄가 있는데 어릴 때 들었으며 지나가던 손님인 김징청이 손으로 (옥쇄를) 만져보고는 어제 것 인 것처럼 새롭다고 하였다. 또 금으로 된 4개의 직첩(직분을 적은 책?)은 화려하고 두꺼운 노란색 종이로 되어 있는데 김씨가 왕이었다고 그 위에 적혀있다. 또 상서공(누구?) 이하의 선대의 교지와 세보 1권이 있었는데 난리를 당하여 급박할 때 시간이 없어 (챙기지 못하여) 집에 돌아오니 없어져 버리고 이미 대부분이 재로 변해버렸다.
鳴呼家運之衰替一何至此先人之澤己斬而 然耶和淚濡筆謹識所記憶中祖以下十二代世係而配墓則 未得祥只俟有孔0?藏焉
아! 집안의 운이 쇠퇴하여 하나라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조들의 은혜가 끊어져 버리고 그렇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어 기억하고 있는 바를 쓰니 중조이하 12대 세계와 그 부인들과 묘소 등이다. 상세하지 못한 것은 다만 (누군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萬曆己亥(1599)元月三日 金寧府院君十二代孫瑊謹書以示于來許
1599년 1월 3일 금녕부원군 12대손 감 근서
□ 恭靖公(諱庾)北樓詩失傳
공정공(휘유) 북루시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음
□拙齋公(諱銚)遺詩
졸재공(휘요)유시
按烟村崔先生德之集中有公詩四韻一首長篇一首一則讚參議霮烟炯父詩也一則炯村以 景泰辛未致仕歸靈巖故公作詩以送別之也
고찰해 보면 연촌 최덕지 선생의 문집중에 공(휘요)에 대한 시가 있는데, 4운으로 된 것 1편과 장편으로 된 것이 1편이며 그 하나는 참의를 지낸 담(연촌의 부친)에 대한 시이고 나머지 하나는 연촌에 대한 시이다. 1451년 연촌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인 영암으로 돌아갔으니 공(휘요)이 (최덕지를) 송별하며 지은 시이다.
[1]최덕지(崔德之), 1384(우왕 10)∼1455(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참의 담(霮)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제:참의공(최담)을 찬양함>
聯翩四子摠才賢 人道高門福慶全 走筆成編看俊邁 忘形對客見天然 公卿公薦微遺逸 出處誰云味蹇連 豈但一身亨眉壽 定知傳世子孫千
네 형제가 나란히 모두 출세하여 인간 도리 높은 문에 복록이 온전하네
한 번 쓰면 준매한 문장으로 나타나고 틀을 깨고 손님을 대할 때면 천연하게 나타나도다. 공경대부가 추천하여 유일을 불러들일 때 나가는 것을 누가 막혔다고 이르리 어찌 한 몸의 장수를 누릴 뿐이겠는가? 수천의 자손에게 전해지기를 족히 알리라.
<시제; 아름다운 글로 최선생(최덕지)을 보낸다.>
伊昔涑水子 獨樂名其園 匪爲宴安設 寓物有所存 安宅戒或曠 反身思道原 未曾貧賤屈 寧受富貴呑 玆樓扁存養 豈玩花木繁 登臨浩佳興 可與知己論 誓將終白首 莫意于靑雲 蘭臺忽被召 談吐追淵源 二載入秘閣 編靡窮日昏 孤鴻性難馴 遽辭天闕閽 回眄白雲外 掉頭俗物喧 三逕自依舊 稚子應候門 何夕一往訪 上樓共琴樽 去去白駒客 休哂世人醺
옛날에 사마광은 홀로 즐겨서 그 이름을 남겼으니 잔치나 편안함을 피하여 물건을 위해 남긴 것이네 편안한 집에서 공허함을 경계하고 몸을 돌이켜 도의 근원을 생각한다. 가난하고 천박함과의 다툼에서 한번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부귀함을 얻었도다. 누각위에 존양이란 두 글자 걸어 놓으니 어찌 꽃밭에서 즐겁지 않으리
누각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흥취가 일어나고 스스로를 아는 일을 논 하였네 벼슬에 나가 끝까지 충성을 맹세하고 청운의 뜻을 펼쳤으나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도의 근원을 찾아서 2년간 비밀스런 집에 들어가 하루 종일 진리를 궁리 하도다 외로운 기러기는 길 드리기 어려워서 어전에서 물러 나 백운을 밖에서 돌아볼 때 배 머리에는 속물들의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도다. 세 번이나 벼슬을 바꾸어도 예전과 같고 어린 아이들이 문에서 기다리네 언젠가 한번은 선생을 찾아가 누각 위에서 거문고와 술잔을 함께 하리라 흰 망아지 타고 가는 나그네는 세상 사람들이 취하는 것을 비웃지 마시오.
□恭靖公事蹟畧(公諱庾)
공정공 사적 략(공 휘유)
高麗恭愍王辛丑紅巾賊沙劉關先生朱元帥等卒兵二十萬渡江朝廷遣安祐等禦之祐等爲賊所敗賊長驅東下
고려 공민왕 신축(1361)년에 홍건적인 사유, 관선생, 주원장등이 졸병 20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침범해오자 조정에서는 안우 등을 파견하여 막게 하였으나 안우 등이 적들에게 패하게 되고 적들은 동쪽 아래로 쳐내려갔다.
王知事急奉太后南奔福州今安東都民躪籍號哭震天公與洪彦博等扈從終始不離壬寅賊陷京城進聚於崇仁問外
왕(공민왕)이 사태의 위급함을 알아차리고 태후를 모시고 남쪽인 복주(지금의 안동)로 도망가자 서울(현 개성)사람들이 적들에게 짓밟혀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다. 공은 홍언박(우정승) 등과 같이 왕을 모시고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임인(1362)년 적들이 경성(현 서울)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숭인문 밖에 모여 있었다.
我 太祖與安祐鄭世雲等擊斬賊魁沙劉關先生等斬首十餘萬獲元玉璽等物夜半賊潰圍出遁王還次西京拜表北樓 今淸州拱北樓 公及洪彦博等和詩製進取負絏及賡歌及帶礪同盟之義
우리 태조(이성계)는 안우, 정세운 등과 같이 진격하여 적의 우두머리인 사유, 관선생 등을 죽이고 적 십여만명을 베었으며 원나라의 옥쇄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밤에 적들을 포위하여 무너뜨리니 그들은 도망갔다. 왕이 서경으로 돌아와 지금의 청주인 북루의 벼슬을 내렸다. 공(휘유)과 홍언박 등은 시를 지어 올리면서 화답하였고 동맹의 의를 맺었다.
□ 凡例
一 諸譜皆以始祖初起而吾家乘綿遠自始祖以下昭穆失傳故以金寧君別起中祖以爲源派相傳之也
-. 모든 보첩은 모두 시조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가문의 가승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으나 시조로부터 그 이하의 소목이 전해지지 않아 금녕군을 별도로 중조로 세우고 이를 근원으로 하여 파가 서로 전해지게 한다.
一 自金寧君至相字行己十八世代數旣遠乘無徵官位履歷及配室某氏擧皆未詳而卽今修牒只憑舊係他無可尋之路此後子孫幾於它姓譜中得見吾先世有女壻入錄處毋論直派旁親雖印板之後亦當隨得隨記以爲傳後之也
-. 금녕군으로부터 상자(相字)항렬에 이르기까지 이미 18세가 되어 대수가 이미 멀어지고 전해지는 자료를 모울 수가 없어 관직과 이력과 부인이 누구인지를 열거하는 것이 모두 상세하지 않다. 따라서 지금 가첩을 만드는 것은 다만 옛날의 계통과 다른데서는 찾을 수 없는 길을 증빙하는 것이다. 이 이후에 자손들이 다른 성씨의 보첩중에 우리 선조 세대의 사위들이 입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직계파이거나 방친인 것을 따지지 말고 비록 인쇄된 이후라 하더라도 당연히 이를 쫓아가 얻어서 이를 따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다.
<以下省略>
□跋文
鳴呼明德之00?-------
※본 발문은 초서체로 되어 있어 판독 볼가
上之二十三年己未(1799)殷春十七代孫不肖相龜謹跋
□金海金氏世譜卷之中 <참고 사항>
□김해김씨세보 중 권
初起 一世 金晋
忠惠王朝官侍中重大匡金寧府院君
처음 1세 김진(普,보?)
충혜왕 때 관직은 시중/중대광을 지냈고 금녕부원군이었다.
二世 子 庾(유)
諡恭靖 恭愍王朝歷西海道都巡問使樞密院密直官至贊成事後奉使 南朝及歸爲凶人李仁任所害事蹟備載麗史及勝覽又見卷首
시호는 공정이다. 공민왕 때 서해도 도순문사/추밀원밀직/을 지내고 관직은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후에 사신을 따라 남조에 갔다가 돌아왔고 역적 이인임에 의해서 화를 입었다. 그의 사적이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또 수권에서 볼 수 있다.
三世 子 銚(조)
初鑌今按文榜及重榜作古名玉堂案作今名始仕本朝諡恭簡永樂辛卯文科丙申重試 恭定大王親臨卽拜府丞厯集賢殿提學官至禮曺判書晩年致仕號拙齋載勝覽 ○今按烟村集中有公詩二首見卷首
처음 이름은 빈이다. 지금 고찰해 보면 문방(초시?)과 중방(복시?)시험에는 옛 이름을 사용하였고 옥당(홍문관)에서는 지금 이름을 사용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벼슬을 시작하였고 시호는 공간이다. 영락신묘(1411)년 문과에, 병신(1416)년 중시 에 합격하였다. 공정대왕(태종)이 친히 오셔서 부승에 임명하고 집현전제학을 거쳐 관직은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늙도록 까지 벼슬을 하였다. 호는 졸재라고 승람에 실려있다. ○지금 고찰해보니 연촌집중에 공의 시가 2편이 있고 이는 수권에서 볼 수 있다.
四世 子 係熙(계희)
字晦叔 正統辛酉文科翰林官知吏曺參議 光廟朝爲羅州牧有惠政大興學校民有去思如喪親及卒爲寶每年忌日0?入咸集設祭于明倫堂載勝覽○今按奮係官至漢城府院君
자(字)는 회숙이다. 정통 신유(1441)년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을 지내고 관직은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광묘조(어느 임금?) 나주목사가 되어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었고 학교를 크게 부흥시켰다. 백성들이 그가 돌아가시자 부모가 돌아가신 것 처럼 슬퍼했으며 매년 기일에는 모두 다 모여들어 명윤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여지승람에 실려있다. ○지금 고찰해보니 관직이 한성부원군에 이르렀다고 한다.
五世 子 行瓊(행경)
蔭官至佐郞
음사로 관직은 좌랑을 지냈다.
六世 子 克劍(극검)
字士廉天順己卯以生員登文科金佔畢宗直同榜成化丙戌以待敎擢重試--이하생략
자(字)는 사렴이고 천순 기묘(1459)년 생원으로서 점필재 김종직과 같은 시험의 문과에 합격하였다. 성화 병술(1466)년 공부를 더하여 중시에 합격하고--이하생략
七世 子 寬(관)
字景饒弘治丁巳以生員登別試文科歷翰林官至司僕寺正 文榜云監正 室順興安氏父判書璋 舊係夫人姓氏失傳而今按公文榜云妻父安某云而姓苑亦云公之室順興安氏判書某女云故知其必然也
자(字)는 경요이고 홍치 정사(1497)년 생원으로 별시의 문과에 합격하고 한림을 거쳐 관직은 사복사정에 이르렀다. 문과방목에서는 감정을 지냈다고 되어있다. 부인은 순흥안씨이고 그의 부친은 판서를 지낸 안장이다. 옛 계통에는 부인의 성씨가 전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 공을 고찰해 보면 문과방목에 기록되어 있기를 처부(장인)은 안 누구라고 되어 있어 성이 그러하고 공의 부인은 순흥안씨인 판서 모씨의 따님이라고 되어 있으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八世 子 庾信(유신)
字興老(一元)正德丙子以進士登文科壯元官至弘文館校理 文榜云修撰 室全州崔氏父判官邦貴良都公左贊成士康玄孫
자(字)는 흥노(또는 흥원)이다. 정덕 병자(1516)년 진사로서 문과에 장원합격하고 관직은 홍문관교리에 이르렀다. 문과방목에 이르기를 수찬을 지냈다고 되어있다. 부인은 전주최씨이고 그의 부친은 판관을 지낸 최방귀이며 양도공 좌찬성을 지낸 최사강의 현손이다.
九世 子 선원(善元)
正德戊寅與宗人恭巖被薦官至正郞 ...<이하 생략>
정덕 무인(1518)년 종친인 공암이 추천하여 관직은 정랑에 이르렀다.
十世 子 允亨(윤형)
蔭參奉室南陽洪氏父茂長縣監尙儉 墓咸平平陵面可食洞戌座雙墳
음사로 참봉을 지냈다. 부인은 남양홍씨로서 그의 부친은 무장현감을 지낸 홍상검이다. 묘소는 함평 평릉면 가식동 술좌에 쌍분으로 되어있다.
<이하 생략>
金海金氏家乘序
김해김씨가승서
原文 ; 1830년간 家乘
解釋 ; 2005. 9.29.金順大
或問曰旣有族譜則何必更修家乘乎 余曰丁丑譜戊戌譜皆刊於金海邑誌德島碑文考證之前故位次間或有舛壬戌譜亦刊於淡軒公墓誌得見之前故位次猶未盡正又况三譜派流混濁涇渭難辨故已中世欲修家乘而拘於財力有議未就則其在今日後孫庸詎無肯搆之心乎
혹시 누군가가 이미 족보가 있는데 왜 하필 가승<보>를 다시 만드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정축보(1757년)와 무술보(1778년)[1]는 모두 김해읍지에 있는 덕도의 비문(德島碑文)[2]이 고증되기 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선조의 순서(位次)에 간혹 잘못된 것이 있고, 임술보(1802년)도 역시 담헌공(克儉, 1439~ 1499)의 묘지(墓誌)[3]가 발견되기 전에 간행되어 선조들의 순서가 역시 올바르지 않다고 대답한다. 또 하물며 세(정축, 무술, 임술보) 보첩에 기록된 파의 분류가 뒤섞이고 혼동되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涇渭)을 확실히 하기가 어려워, 이미 <이전에> 중세기에 살았던 선조들이 가승보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비용에 구애받아 의논만 하고 이루지 못하여 현재까지 왔다. 금일에 후손들로서 어찌 이를 알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1]戊戌譜; 1778년 장흥지방에서 간행한 당시로서는 大譜임
[2]德島碑文; 덕도는 1929년에 간행된 김해읍지에 김해의 남쪽 12리(5km정도) 떨어진 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고 되어있으나, 점차 낙동강의 토사에 의해 주변의 하천이 매립되어 현재는 부산시 강서구 강동동에 있는 낮은 야산으로 변해 있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현재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아마 아래 [3]에 설명한 2개의 묘지 중 처음 것이 아닌가 싶으나 1569년도에 간행된 책을 참고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 이 비문에 나오는 휘극검의 世系와 정축보, 무술보에 기재된 휘극검의 세계가 서로 달라 고증을 하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것 같다).
[3]담헌공의 墓誌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김해읍지(표제는 김해여지승람, 1569년 간행)에 있는 ‘公諱克儉字士廉金海人~중략~其自視如草野云’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며 撰者는 알 수 없고, 또 하나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쓴 ‘先生諱克儉字士廉號淡軒金海人~중략~不能盡記槩陳於此’를 말한다(金海金氏先世實記라는 책에 실려 있으며 이 책은 도총관공휘경신파에서 발간한 책인 것 같음). 내용으로 보아 앞에 것이 더 오래 되었고 지봉 이수광이 이를 참고로 보완하여 작성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위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김극검묘는 실전되어 있다가 임술보가 간행된 후 즉 1802년에서 1830년 사이에 발견된 것 같다.
참고로 지봉집에서 위 墓誌文을 찾지 못하였고, 지봉집에 삼현파의 남창공 휘현성의 實記가 실려 있음을 확인하였다.
余乃上述先志下循門議當 宁庚寅始得修正家乘而較定于高墻黙齋印出于大原西浮屠則惟我後孫之責於斯盡矣 夫家乘亦譜也
나는 이에 위에서 말한 선조의 의지를 받들어 여러 문중을 돌며 의논하여, <지금 임금의> 경인(1830)년에 가승보를 수정하기 시작하여 교정하고, 고장묵재[1]로 가서 간행(印出)하여 대원(마을 이름?)의 서쪽에 보존?(浮屠[2])하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후손으로서의 책임을 다 했다 할 것이며, <이것이> 무릇 가승으로서 보첩이다.
[1]고장묵재, 또는 고장지방의 묵재라는 재실로서 여기서 보첩을 간행한 것 같지만 고장묵재인지 고장지방의 묵재인지 또는 ‘높은 장묵재’로 해석해야 하는 지 확인이 필요함
[2]浮屠; 원래 뜻은 부처, 또는 고승(高僧)의 사리를 안치한 탑
人必有先世而世遠則易忘氏必有諸族而族多則難記此譜之所以作而譜者乃明其倫而展其親也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조세대가 있으나 세대가 멀어지면 잊어버리기 쉽다. 씨족은 반드시 여러 종족에 속하고 있으나, 그 종족이 많아지면 전부 기억하는 것은 어렵다. 이것이 보첩을 만드는 이유이며 보첩이라는 것은 그 윤리를 분명히 함으로서 그 친함을 펼쳐야 한다.
由父而祖由祖而高曾至于百代之祖自子而孫自孫而曾玄及乎萬世之孫分於同姓而派族有序合於異姓而姻戚有統則雖踈支末裔庶不以路人相看幸?典之九族周禮之六行其在是矣
아버지는 조부로부터 유래하고, 조부는 그 위의 증조로부터 유래하여 수백 대의 조상에 이른다. 아들로부터 손자가 있고, 손자로부터 증손과 현손에 미친다. 수만 세대의 후손들은 같은 성에서 나누어지니 파의 종족은 순서가 있으며, 다른 성씨와 합쳐져 인척이 되어 뭉치게 된다. 비록 지손들의 사이는 멀어지나 후손(末裔)들이 모두 길가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보지 말고, 9족[1]에 까지 행복을 펼치는 것이 주례에서 말하는 6행[2]이며 그것이 이(보첩)속에 있다.
[1]九族; 고조에서 현손까지
[2]六行; 효도, 형제 우애, 친족 화목, 외척 친목, 친구 간의 믿음, 구휼을 말함.
程子曰譜者管攝天下之人心蘇老泉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生譜之有關於世敎者顧不重且大歟
정자[1]가 말하기를 보첩이라는 것은 천하를 지배하는 인심이라 하였고, 소로천[2]은 자신의 보첩을 보면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자연히 생겨난다고 하였으니, 보첩이 세상을 살면서 얻는 교훈(世敎)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程子; 程子라 하면 송나라의 6현 중 두 사람인 형인 程顥(시호는 明道,1032 - 1085)와 동생인 정이(정伊川,1033 - 1107)중 동생을 지칭한다.
[2]蘇老泉; 소순, 송나라의 미산(尾山)사람으로서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이며 당송 명문장 8대가의 한사람으로서 소식과 소철의 부친이다.
鳴呼吾金系出駕洛今金海也 自鼻祖 首露十傳至 仇衡不忍土地傷民而讓國新羅三傳至 興武建不世之功而垂輝靑史國絶以降門闌{閥?}炳熙圭組舃爀至今爲我東方甲乙大姓而兵燹相尋文獻無徵此非吾家一大欠事耶
아! 우리 김씨는 지금의 김해인 가락에서 나왔다. 먼 조상이신 수로에서 시작하여 10세를 전하여 구형에 이르러 땅과 백성들이 다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었다. 3세를 지나 흥무(유신)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공로를 세워 역사에 빛나게 드리우고 있다. 나라가 끊어진 이후 문벌[1]이 빛나고 개인이나 무리(단체)가 빛나 지금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대성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서로 찾을 수 있는 문헌이 거의 없으니 이것이 우리 가문의 큰 흠이 아니겠는가.
[1]원래 한자인 闌이라면 ‘가문이 쇠퇴하고’의 의미이나 전후의 뜻이 이상하게 됨.
於是乎博採東史國乘輿地勝覽及科榜目邑誌諸賢文集參考折衝分爲二卷上卷錄其行蹟下卷錄其派系昭穆班班事實章章使爲後世雲仍者看其祖先立朝事君之道居家養親之節家而爲孝子順孫朝而爲忠臣烈士
이래서 두루 우리나라 역사자료를 구하여, 나라에서 전해오는 여지승람과 과방목과 읍지와 여러 현인들의 문집을 참고하고 절충하여 2권으로 나누었다. 상권에는 그 행적을 기록하고, 하권에는 그 파의 계통과 소목(昭穆)을 구별하고 사실(事實)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후세의 후손들로 하여금 그 조상들이 조정에 들어가면 임금을 섬기는 도리와 집에 있을 때는 부모를 모시는 절개를 세워, 가정에서는 효자(孝子順孫)가 되고 조정에서는 충신열사가 된 것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知其某派之分於某源某支之連於某本各興敦睦之心復續踈絶之誼則不但爲風化之一助而庶免其肯曰子有後孫之責豈不幸哉豈不美哉問者准准而退略擧其說特記之云爾
어떤 파는 어떤 근원에서 나누어 졌고 어떤 가지(支)는 어떤 근본(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각각이 돈독한 화목의 마음을 흥하게 하고 멀어지고 끊어진 정의(情誼)를 다시 잇게 하여, 단지 풍습을 따르게 하는 것에 도움을 준 것 만이 아니다. 모두들 이를 옳게 여겨 말하기를 “자네는 후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어찌 불행이라 하겠으며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할 것인가.”하며 의문을 가졌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물러났다. 대략적으로 <있었던 일들을> 들추어서 설명하고 특별히 기록할 따름이다.
上之三十一年庚寅閏四月下澣後孫邦榮謹誌
임금(순조)31년 경인(1830)년 윤4월 하순 후손 방영 삼가 쓰다.
<별지 면주> 解釋; 2006. 2. 28. 金順大
壬辰兵火後家牒盡失文獻無徵王世系以下不?能承繼而靈山公諱希說與?主簿公諱俊諱慶淹誌其所嘗記憶自都摠管公以承世系
임진왜란 이후 가첩은 전부 잃어버리고 문헌을 모울 수가 없어 왕세계이하를 계속 잇기가 불가능하여, 영산공 휘희설께서 주부공 휘준과 휘경엄공과 같이 그들이 일찍이 기억한 것을 적어둔 것이 도총관공 이후를 잇는 세계이다.
故丁丑譜戊戌譜壬戌譜仍舊印出矣其後金海德島評理上護軍公築隱公淸道郡事公三代墓所碑文始得而又考金海邑誌然後以科榜輿地勝覽諸賢文集互相參證始正世系故今譜與三舊譜昭穆不同觀?者詳之
따라서 정축보(1756년), 무술보(1778년), 임술보(1802년)등 연이어 구보가 출간되었다. 그 후 김해 덕도에서 평리상호군공, 축은공, 청도군사공의 3대의 묘비문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또 김해읍지를 검토한 연후에 과방목과 여지승람과 여러 선현들의 문집을 서로 참고하고 증거로 삼아 처음으로 세계를 바로 잡았다. 따라서 지금의 보첩은 3개의 구보와는 소목이 같지 않으니 이를 보는 자는 이점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中祖 敬臣(경신)
麗朝都摠管
고려조에서 도총관을 지냈다.
二世 子元鉉(원현)
字元升官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領府事兼判府事 文宗朝爲梁州大都督大破倭賊梁民歌思之立勝戰碑事載梁山邑誌及權梁山誌?封山疏
配臨海郡夫人裵氏 墓金海德島東麓酉坐
자(字)는 원승이고 벼슬은 광정대부/첨의평리/상호군/영부사겸판부사를 지냈다. 문종 때에 양주의 대도독이 되어 왜적을 대파하니 양주의 백성들이 그를 추모하는 노래를 부르고 승전비를 세웠다고 양산읍지와 양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산소(山疏?)에 봉해졌다.
부인은 임해군 부인 배씨이고 묘소는 김해 덕도의 동쪽기슭 유좌에 있다.
三世 子台淳(태순)
版圖判書
판도판서를 지냈다.
四世 子安己(안기)
判事
판사를 지냈다.
五世 子墩(돈)
早捷司馬官承議卽登文科行縣令至判書 墓在金海府北獐項山庚坐原
일찍이 사마에 올라 관직은 승의가 되었다가 문과에 합격하여 행현령을 지내고 판서에 이르렀다. 묘소는 김해부의 북쪽 장항산의 경좌언덕에 있다.
六世 子係錦(계금.金海)
乙酉生號西崗端宗朝甲戌以司馬登文科官司憲府持平行義城縣令乙亥以後退歸金海生林洞士林建祠按金海邑誌與?科榜有曰係熙係錦之弟云而德島碑文係熙之兄兄有係引無係錦似以係熙之兄出系于宗家墩之後
을유(1405)생으로서 호는 서강이다. 단종조 갑술(1454)년에 사마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은 사헌부지평/행의성현령을 지냈다. 을해(1455)년 이후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여[1] 김해의 생림동에 사림의 사당을 세웠다. 김해읍지와 과방목을 살펴보면 계희는 계금의 동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덕도의 비문에는 계희의 형으로서 계인은 있으나 계금은 없다.이는 계희의 형이 종가인 돈의 양자로 간 것으로 생각된다.
[1] 50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51세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렇다면 1년간의 짧은 기간에 사헌부 지평과 의성현령을 지낸 것으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