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토막 土幕〉(문예월간, 1931. 12~1932. 1)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어 3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의 문학세계는 작품이 씌어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
초기는 1930년대 중반까지이며,
주로 일제에 수탈당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썼다
. 〈토막〉·〈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소〉·〈마의태자〉등이 이에 속한다.
〈마의태자〉를 제외한 세 작품은 일제시대에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씌어졌으며,
특히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소〉는
1935년 도쿄학생예술좌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내용이 불온하다고 해서
박동근·이해랑 등과 종로경찰서에 3개월 정도 구금되었다.
〈마의태자〉는 〈소〉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쓴 작품이며,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등장시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중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진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이며,
이 시기에 그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친일을 내세우는 희곡을 쓰거나 연출했다.
희곡 〈흑룡강〉·〈북진대〉·〈대추나무〉 등이 이에 속하며,
〈흑룡강〉은 일제의 군국주의를 합리화하고 홍보하는 내용이고
〈대추나무〉는 조선 농민에게 만주로 이민갈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후기는 해방 이후부터 활동한 시기이며
민족분단과 전쟁의 참혹상을 드러낸 사실주의극을 주로 썼다.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1950년 4월 국립극장 창립공연으로 올려진
〈원술랑〉을 비롯해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자명고〉·〈별〉·〈사육신〉 등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연극의 대중성〉(신흥영화, 1932. 6)·
〈신극수립의 전망〉(동아일보, 1934. 1. 6~12)·
〈조선연극운동의 당면과제〉(동아일보, 1938. 4. 22~24) 등을 발표했고,
저서로 〈유치진 역사극집〉·〈유치진 희곡전집〉과 〈동랑자서전〉이 있다.
195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사후
유치진은 일제 강점기 당시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한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었기 때문에
반공주의가 다른 이념이나 논리에 앞서던 1950년대에 극예술연구회 시절부터의 동료인 김광섭과 희곡 〈왜 싸워〉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등 이미 연극계 친일 논란의 중심이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 부문에 포함되었다.
총 12편의 친일 저작물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시인 유치환의 친형이며, 자녀들은 모두 연극계에서 활동했다.
맏딸 유인형은 서울예대 연극과 교수를 지냈고,
맏아들 유덕형은 서울예대 학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루마 / maybe
카페 게시글
토 영 시인
한국연극계의 초석...........유치진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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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0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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