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유인문학-12- 수원화성의 완공과 정조의 독살설
세종시 건설은 정치적 논리가 강했다. 말도 많았다. 수원 화성 역시 사도세자의 배후 도시로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정조는 정치적 의미를 뛰어 넘어 이상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10년을 계획한 수원성은 정조 20년(1796년)에 낙성식을 할 수 있었다. 가뭄으로 인해 쉬었던 달을 빼면 착공한지 28개월 만에 완공을 본 것이다. 획기적으로 공기를 단축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치밀한 계획, 채제공과 조삼태의 일사분란한 지도 감독뿐만 아니라 부역이 아닌 임금노동제로 인한 노동의 효율성, 다산의 기중기 개발의 기계 덕분 이었다 특히 정조는 다산이 개발한 기중기 덕분에 4만냥의 비용을 절감 할 수 있었다며 무척 기뻐하기도 하였다. 정조의 이상 도시의 계획은 우선 농업도시로서의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 시대에는 토지가 최고의 가치였다.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토를 넓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계획해 나갔다.이런 계획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황무지, 개척 농토가 “대유둔”이고 최초의 저수지가 “만석거”였다. 두곳 역시 도급제 임금노동제로 완성하였다. 화성 성을 축조 할 때도 임금을 지불하고 저수지 황무지를 개척하는데도 임금을 지불하게 되니까 전국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어 돈도 벌고 번 돈으로 소비를 하니 자연적으로 수원 화성근처는 시장이 형성 되고 활기찬 경제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성한 황무지 토지 2/3를 수원성을 쌓기 위하여 새로 만든 장용영(요즘의 군대)에 있는 서리, 군졸, 관예 등에 나누어 주고, 1/3은 농토가 없는 수원 백성에게 분배했다. 자연적으로 군용의 튼튼한 경제력을 갖추어 최고의 군영이 될 수 있었다. 그 이후 정조는 새로운 저수지 “축만제”를 조성하고 황해도 봉산에도 둔전을 설치하면서 화성을 모범으로 하여 전국에 이상 도시를 건설해 나갈 계획을 세워 나간다. 수원 화성은 농업에서 시작하여 상업도시 계획을 세워가면서, 서울의 상인들에게 무이자로 자금을 빌려 주어 화성에 장사를 하게 만들고 화성 인근에 우리나라 최초의 5일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도로도 십자로로 만들어 장사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고, 각 가게를 특화하니 서울 종로의 “육이전”처럼 많은 사람이 흥청거리는 상업도시가 되어갔다. 정조는 군주로서 아버지의 묘를 길지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만들어진 새로운 도시에서 백성들이 풍족한 경제 활동을 하면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에 얼마나 기뻐했을까? 정조는 수원화성에서 시작된 농업도시와 산업도시를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워 미래 조선의 설계도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정조는 조선이 변화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훤히 들여다보며,. 유학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대부들은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섬기면서 자기의 명분을 찾고자하고 청나라를 부인하는 폐쇄적 사고의 세계관에 글줄이나 읽었다는 말장난에 신물을 느끼며 서양과 청나라 등에서 불어오는 사회의 큰 흐름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을 정파의 이권 다툼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가슴에 숨긴 채 수원 화성을 통하여 그의 실천적 계획들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정조는 재위 19년(1795년)에 채제공과 함께 남인의 중심인물인 이가환을 충주 목사로 우승지 다산을 금정 찰방으로 좌천 시켰다. 전 평택 현감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 보냈다. 이는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하여 그가 총애하던 남인들을 천주교로 인한 속죄 시키는 방법으로 좌천 또는 귀양 보낸 것으로 보인다.일단 댓가를 치르게하고 훗날 중요 요직에 확실히 앉히고자한 정조만의 고도의 인사 포석이었다. 또한 충청 지방에 천주교의 신자가 대폭 늘어나고, 중인들은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밀입국 시킨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포도청에서 장사(고문으로 죽음)한 사건이 일어나 노론들은 조정 내 남인들을 주문모의 배후로 지목하여 정조는 남인들을 일시 퇴진 시킬 수밖에 없었다. 2년 후 정조 21년(1797년) 4월에 이가환, 정약용을 다시 조정 요직으로 불러들여서 정조가 남인에 대한 신뢰가 건재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노론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노론들의 집요한 반대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이가환과 정약용은 직을 사임하였다. 명을 받지 않는다고 이가환은 유배에 처하고 다산은 곡산부사로 나가게 된다. 그해 12월에 이가환을 한성부 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다시 불러들었다. 정조의 생각으로는 채제공이 나이가 많으므로 채제공 다음으로 이가환 또는 다산을 재상으로 앉히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인사 정책은 먼 미래를 보며 주도면밀한 장기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요즘 국가 요직의 인사를 정조에게 배워야 할 것 같다.
재위 24년 5월30인 그믐날 정조는 경연에서 중대한 발언을 통해 노론을 긴장하게 한다. 자신을 향한 노론의 못마땅한 행위가 사도세자를 살해한 원죄의 결과라 판단하고 작심하고 경연에서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방해하고 심지어 자객을 시켜 국왕(정조 본인)을 암살하려한 신하는 모두 노론 벽파였다. 이런 행태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들이 반성하고 옳은 길을 걷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곧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시사하였다. 정조의 생각으론 영의정은 이가환이었고 다산(우의정, 또는 좌의정)도 중용 될 가능성이 높았다. 노론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묘도 길지로 이장하였고, 수원의 계획도시를 완성하여 백성의 여론도 좋은 편이었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설하려는 미래의 청사진을 남인의 훌륭한 인재 등용을 시작으로 개혁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많은 고민을 오랜 세월 기다리며 했을 것으로 보인다.
6월12일 밤 정조는 다산의 고향 마재에 낙향해 있는 다산에게 규장각 아전을 10권의 책과 함께 보내어, 5권은 집에 가보로 두고, 5권은 교정을 봐서 궁으로 가져오라고하였다. 이 책이 정조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달 그믐께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전해 주었다. 6월 말이면 경연에 참석 할 수 있는 중요 벼슬자리를 내릴 것이라는 암시였다. 이 말을 전하면서 아전은 다산에게 “정조께서 저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서 안색과 말씀하시는 어조가 매우 온화하고 그리워하는 듯 했습니다”라는 말고 전했다.
정조는 5월 20일경 등 쪽에 종기가 나서 약을 붙이고 있었고 종기는 가슴의 화기가 맺혀서 생긴 것이라고 정조가 말했다. 인사 개혁을 목전에 두고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6월15일에 어의 백성일이 “고름은 거의 사라졌고 뿌리도 없어졌습니다. 가슴의 화기가 사라지면 저절로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정조의 병은 크게 호전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6월15일 거의 나았다는 병세가 갑자기 악화 되었다. 6월24일 심환지의 친척 “신인”이 어의로 바뀌고 수은성분이 있는 경면주사 “연훈방”을 처방한 것이 주목되며 정조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 된다. 6월27일 사망 하루 전에 혹시 백성에 관한 사항이 있으면 비록 어려운 사항이라도 자주 여쭈어 조치하도록 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6월28일 정조실록에는 “영춘헌”에 거동해 신하들을 접견했다고 기록 되어 있기도 하였다. 신하 접견후 갑자기 말을 못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순왕후”가 직접 약을 올리고 싶다며 모든 신하를 밖으로 물리쳤다. 방안엔 위독한 정조와 정순왕후만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고 잠시후 정순왕후가 통곡으로 정조가 승하하였다고 알렸다.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정조의 최대의 정적인 “정순왕후” 김씨뿐이었다. 순조실록에 보면 정조가 죽기 전에 정순왕후가 불법적으로 승지(비서실장) “윤행임”을 임명했다고 되어 있다. 정순왕후는 열네살 소녀의 몸으로 예순 세 살인 영조의 계비로 궁궐에 들어오게 된다.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여러 가지 흉계와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특히 사도세자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 김한구의 큰 아들이자. 정순앙후의 오빠인 김구주와 사촌 오빠 김관주 등은 벽파의 중심 인물로 김구주는 정조 초년에 혹독한 형벌로 이미 세상을 떠나 집안은 사실상 파탄이 나있었다. 특히 오빠 김구주는 정조의 미움을 사 사형 언도를 받고 가까서로 감형 되어 흑산도에서 9년이나 귀양을 살았고 감형되어 나주로 이배 되어 얼마지 않아서 죽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다산과 일곱 살 차이였지만 영조의 계비라 궁궐에서는 가장 어른이었다. 정조 제위 24년간 항상 시파에 대해 오빠와 집안의 보복에 대한 기회를 노리고 있엇다. 그러던 차에 국가의 권력이 그녀의 손안에 들어가서니 시파(다산과 주변)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정조의 승하는 최대의 정적인 정순왕후와 노론벽파의 전면 부활을 의미했다. 정순왕후는 만10세의 순조를 수렴청정 했고.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승진시키는 동시에 노론벽파에게 전권을 주었다. 정조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노론벽파는 24년 전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역사의 퇴행 작업을 서슴지 않았다. 개혁군주이면서 학자군주인 정조는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고 조선은 24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정조 독살설에 의미를 두는 이유는 그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조선은 일본에 멸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인식과 정조가 각종 사회적 갈등을 정치로 풀기 위해 노력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1800년 7월 순조 즉위 당일 사원부와 사간원에서 정조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며 어의 심인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사간 “유한녕”은 逆醫(역의)(역적어의)라는 표현을 쓰면서 흉적 심인의 죄는 신가귀보다 더하다고 공격하였다. “신가귀”는 효종에게 침을 잘못 놓아 효종을 사망하게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유일한 어의이다. 심인의 죄가 더 크다는 말은 심인이 정조를 독살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심인을 비호 한다는 비난이 들끓자 정순왕후는 심인을 경흥으로 유배 보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여 연일 시끄럽고 사인에 대한 의혹이 팽배하여 심인은 순조 즉위년 8월10일 유배지에서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사인 규명을 위한 국문은 끝내 거부해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순조 실록의 사관은 “대신 심환지는 심인의 소원한 친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비호하려 했다고 기록하여 심인의 배후가 심환지라는 사실의 의혹을 기록하고 있다”. 심환지가 어의로 진출 시켜 정조를 치료케 한 어의가 심인이고 그를 지휘한 내의원 직계 상관이 심환지 였으므로 의문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정조가 죽고난후 바로 심환지는 영의정이란 최고의 벼슬에 올랐으니 충분히 의심 받을 만하나 심인은 죽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정조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역사에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이후 정조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민란과 많은 선비들이 정조 독살의 배후가 심환지라고 폭로하였으며 후일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기고금도장씨여자사’ 의 글에서 심환지가 역의(역적 의원) 심인을 천거해 독약을 올리게 했다”라고 썼다. 요즘 보험금 때문에 딸, 전남편, 재혼 남편에게 “크라목손”이란 제초제를 먹여서 죽인 사건이 뜨오른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은 일본에게 멸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에 정조 사후 200년 이상의 세월 속에서도 정조의 개혁정치를 되새기며 독살설의 의문을 갖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일제 식민지의 치욕과 6.25전쟁도 겪지 않았고 남과 북도 갈리지 않는 통일된 민족으로 지구상에서 우뚝 선 선진국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라 후세의 우리로서는 안타까움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아버지를 뒤주에 가두어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정조,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왕권. 온통 주변은 노론벽파의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때를 기다리며 학자군주로서 끝없는 공부로 인재를 길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한 군주.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개척해나간 개혁의 군주, 그의 개인적 아픔과 슬픔과 애환은 한 인간으로 어떻게 치유하였을까?
오직 백성을 위한 꾸준한 학문에 정성을 쏟으며 독서로 치유했다고 보여 진다. 곧 학문, 즉 문학으로 치료받았던 것이다.
한 인간의 인생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본다. 부모와 자식 간 처럼 가족 간의 만남은 나의 의지로 되는 만남이아니라 필연적 핏줄에 의해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장 숙명적인 만남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외의 만남은 나에게 1차적인 선택권이 있다. 좋은 만남은 좋은 일이 만들어 질 수 있고, 나쁜 만남은 악연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한다. 누가 좋고 나쁜지는 생각의 관점과 만나는 목적에 따라서 항상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변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더더구나 판단해서 만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상대의 말을 보고,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생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이라고 보아진다. 생각 또한 너무나 추상적이다. 상황에 따라서 항상 생각은 변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근본이 중요 한 것 같다. 그 사람의 자라온 가정과 환경, 부모의 교육관, 형제간의 우애, 주변 친구들, 이런 것들을 잘 살펴서 사람을 판단하고 가까운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나 이해 관계에서 만난 사람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해 관계가 멀어지면 사람 관계도 멀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 상정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소원한 것은 만나지 않으면 되지만 때대로 비수를 등에 꽂는 일도 허다하니까. 항상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 나의 기준으로 이해관계가 놓였을 때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래서 성현들은 인간은 20년은 시귀어 봐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정조가 심환지를 정확히 알았드라면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악연도 운명의 만남으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나. 운명적인 만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2015년3월3일 새벽에 정조를 정리하다 여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