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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晉․南北朝 시대의 군사무술과 민간무술에 대한 스포츠인류학적 탐색
* kimys1655@hanmail.net
김용수*(도계전산정보고등학교)․김용근(강릉원주대학교) *한국스포츠사랑연구소(김택호)
국문초록
이 연구는 魏晉․南北朝 시대를 중심으로 군사무술과 민간무술의 발달 배경과 무술의 유형을 탐색해 봄으로써 스포츠인류학적 지식 체계를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오랜 시간의 전쟁에서 요구되는 군사무술의 발달이 증진되었으며, 타민족과의 분합(分合)으로 인하여 무술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병역제도(兵役制度)는 병사 선발과 훈련 과정에서 군사무술의 높은 기량을 요구하였으며, 근접전에서 필요한 도수무술(徒手武術)이 더욱 더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로 병역제도(兵役制度)와 가병(家兵) 성향의 부곡(部曲) 등을 통하여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군사무술이 삶을 위한 방책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자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민간무술은 불교와 도교의 심신 수행에 필요한 건신법(建身法)과 도인술(導引術), 그리고 양생술(養生術)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불교의 발전 과정에서 무술과 관련 있는 연경단련법(軟硬鍛鍊法) 등이 상호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핵심어; 위진․남북조, 중국무술, 스포츠인류학, 불교, 도교
Ⅰ. 서론
동한(東漢) 말부터 할거(割據) 세력은 계속 발전하였다. 국가는 치세(治世)에서 난세(亂世)로, 난세에서 치세로, 소위 ‘합(合)이 길어지면, 반드시 분(分)하게 되고, 분이 길어지면 반드시 합이 된다.’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분합(分合)은 분위기가 조성되면 군사 행동으로 통일하려는 것이 魏晉․南北朝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삼국지(三國志)』는‘분열이 오래되면 합쳐지고, 합쳐진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하게 된다(分久必合, 合久必分).’는 통일과 분열의 변증적 진행을 보여주지만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통일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통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 통일’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강준영, 2007: 35).
한(漢) 제국을 다시 재건하고 왕망(王莽)시대의 후유증을 치유한 後漢(東漢) 역사가들은 장안을 수도로 한 시기를 前漢(혹은 西漢), 낙양을 수도로 하는 시기를 後漢(혹은 東漢)이라고 부른다.
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6) 이후 50-60년 동안 한(漢) 제국은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는다. 하지만 220년 후한은 마침내 위(魏)나라 문제(文帝)에게 나라를 넘기고 말았다. 조조(曺操, 155∼220)의 아들 조비(曺丕)가 후한의 헌제(獻帝)를 밀어내고 위(魏) 나라의 황제에 오른다.
이로써 대통일 제국인 한(漢)나라는 410년의 사직을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유비(劉備, 161∼223)의 촉한(蜀漢)은 263년 위(魏)에 병합되고, 265년 위(魏)의 원제(元帝)에게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된 사마염(司馬炎)의 진(晉)에 의해 손권(孫權, 182∼252)의 오(吳)는 280년 멸망하였다. ‘정립(鼎立)’의 ‘정이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발은 위(魏)·오(吳)·․촉(蜀)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흔히 부르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무대가 되었다.
이로부터 581년에 이르기 까지 남방은 네 왕조를 거쳤으며, 북방의 16개국은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 등의 다섯 정권으로 출현하였는데, 남북으로 나누어진 이때를 남북조(南北朝) 시기라 부른다. 이러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魏晉․南北朝 시대에는 경제적 발전 외에도 문학․철학․과학 기술․종교․예술 등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무술(武術) 무예(武藝) 용어는 한대(漢代, B.C 206∼A.D 220)의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며, 무술(武術)이라는 용어는 5∼6세기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간행된 문선(文選)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청대 이후 무예라는 용어는 거의 사라지고 무술이라는 용어가 지배적으로 사용되는데, 무예와 무술이라는 용어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아마도 시대적으로 선호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이성곤, 2007: 176).
은 이집트나 중국에서 격투기의 원형으로 발생하였고, 격투기술은 서양에서는 레슬링과 복싱 형태로, 동양에서는 유도, 검도, 태권도, 우슈 등 무술(무도, 무예) 형태로 존재해 왔다(김주훈, 김길평, 2001: 88). 동양의 격투기술인 무술은, 맨손무술인 권법(拳法)과 병장기 길이를 기준으로 창(槍), 곤(棍)을 위주로 하는 장병기(長兵器) 그리고 검(劍), 도(刀)를 위주로 하는 단병기인 병기술(兵器術)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무술의 종류를 맨손무술(권술; 拳術) 혹은 권법(拳法), 공수탈기(空手奪器), 금나술(擒拿術)과 병기술(장병; 長兵), 단병(短兵), 암기(暗技), 좌조기(佐助器)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데, 吳文忠(1969)은 옛날에는 수박(手搏), 각저(角抵), 도인(導引), 검술(劍術)네 가지가 함께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4대 병기라 함은 도술(刀術), 검술(劍術), 곤술(棍術; 棒術), 창술이다(장재이, 2000: 19 재인용).
김용옥(2003: 148)은 ‘병기술은 집단과 사회 제도를 전제로 한 것이고 사회의 원리(principle of society)에 의해 지배되며, 무술은 개인과 개인의 몸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인격의 원리(principle of personality)에 의해 지배된다.’고 무술과 병기술을 구별하고 있다. 병기술이란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에 대한 집단 싸움의 전술 전략에 필요한 기술이며, 무술은 전쟁이라는 집단적 행위의 생존 원리 이외에 원칙적으로 개체와 개체 간에 몸으로 대결하는 인격적 예술인 것이다. 무술은 전술의 역할 외에 개인의 건강, 취미, 인격 그리고 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등의 평화의 원리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동양 국가 모두가 전쟁의 역사를 겪으면서 무술의 실제 싸움의 형태에서 스포츠와 체육의 근대적 형태로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 전쟁 기술에서 자기 수련의 수단으로 형(型)과 본(本) 연습(pattern practice)의 수련 과정에서 스포츠화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유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이성진, 고연화, 2009: 245-246).
이 연구는 중국 군사무술과 민간무술이 魏晉․南北朝 시대에 어떤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는지 그 발달 배경과 무술의 유형을 스포츠인류학적으로 탐색하는 데 의의가 있다. 따라서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 전(紀元 前)과 기원 후(紀元 後)로 넘어가는 혼란의 시기인 魏晉․南北朝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연관시켜 중국무술의 스포츠인류학적 지식 체계를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魏晉․南北朝 시대의 관련 서적을 통하여 무술을 탐색해 봄으로써 시대적 배경에 따른 중국 군사무술과 민간무술 문화를 사실에 가깝도록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이해와 노력이 추후 魏晉․南北朝 시대의 중국무술(中國武術)에 대한 스포츠인류학적 연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면 한다.
Ⅱ. 魏晉․南北朝 시대의 중국무술
1. 군사무술(軍士武術)
병가(兵家)의 연원은 전쟁과 함께 하므로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 기술과 관련되어 역사상 많은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사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받지는 못하였다. 후한 반고(班固)의『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제자략(諸子略) 외에 각 경전과 관련한 육예략(六藝略) 및 병서략(兵書略) 등을 따로 떼어 수많은 사상가들 및 그 저작들을 설명하고 있다. 작품 대부분은 유실되었지만 이들도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순자(荀子)의 의병편(議兵篇)에는(최대림, 2009: 230-231),
‘제(齊)나라의 기격(技擊) 기격(技擊)은 병가사류(兵家四類: 권모·형세·음양·기교) 가운데에서 기교(技巧)에 속하는 것으로서 훈련된 군사의 박투·격자(搏鬪·擊刺)의 기술이다(朴淸正, 2007: 605).
은 위(魏)나라의 군졸을 당할 수 없고 위(魏)나라의 군졸은 진(秦)나라의 정예 군사를 당할 수 없으며, 진(秦)나라의 정예 군사는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나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절도와 제도가 있는 군대를 당할 수 없고 환공(桓公)이나 문공(文公)의 절도와 제도(制度)가 있는 군대도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의 인의(仁義)의 군대는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대적하는 자가 있다면 타버린 재로 바위로 치는 것과 같다(故齊之技擊不可以 遇魏氏之武卒 魏氏之武卒不可以遇秦地銳士 秦之說士不可以當桓文之節制 桓文之節制不可以敵湯武之仁義 有遇之者 苦以 若以焦熬投石焉).’
라는 내용이 보인다. 연병(練兵)의 목적은 만인일심(萬人一心)할 수 있는 정예군사(精銳軍士)의 양성에 있으며, 그 방법은 연심(練心)과 절제(節制)로 한다.‘ 제(齊)는 기격(技擊)을 숭상하여 개개의 무술은 뛰어났어도 위(魏)의 무졸(武卒: 일정한 기준으로 선발〔度取〕하여 무장한 군사)을 당하지 못하며 위(魏)의 무졸(武卒)은 진(秦)의 예사(銳士: 은상(恩賞)과 형벌(刑罰)로서 단련시킨 군사)를 당하지 못하며 진(秦)의 예사(銳士)는 환문(桓文 :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晉)의 문공(文公)의 절제(節制: 절도가 통제가 되어 있는 군사)를 당하지 못하며 환문(桓文)의 절제(節制)는 탕무(湯武: 은(殷)의 탕왕(湯王)과 주(周)의 무왕(武王)의 인의(仁義: 예교(禮敎)와 충절(忠節)로서 단결된 군사)에는 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체득하여 실천할 수 있는 지휘관이다(朴淸正, 2007: 605-606).
결국, 인재〔人〕란 『병학지남연의』에서 이르는 ‘권병(權柄)을 장악하는 방법은 오직 사랑〔愛〕과 위엄〔威〕일 뿐이다. 덕(德)으로서 인도하고 예(禮)로서 통일시킨다.’라고 순자(荀子)는 말하고 있다(朴淸正, 2007: 606).
중국에서 문헌상으로 무술이라는 용어(用語)가 처음 보이게 되는 것은 중국 남조(南朝) 양무제(梁武帝)의 장자(長子)인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지은 문선(文選)에 ‘무술을 폐하고 문(文)법령을 널리 들어내다〈언폐무술 천양문령(偃閉武術 闡揚文令)〉’라고 문과 법령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군사 기술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張燿庭 外, 2006: 3). 이에 대하여 박귀순(2009: 73)은 현재까지 무예와 관련된 대다수의 연구를 보면, 무술의 유래 및 정의를 『문선(文選)』에서 찾고 있다. 특히 『문선(文選)』의 내용 중에 안연지(顔延之)의「황태자석존회작(皇太子釋奠會作)」시의 일부인 ‘언폐무술 천양문령(偃閉武術 闡揚文令)’에 ‘무술’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기록되어 있는데, 즉 문선(文選)은 중국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진, 한 이후 제, 양의 대표적 시문을 엮은 책으로서 ‘偃閉武術, 闡揚文令’은 ‘전쟁을 멈추고 문교에 힘쓰라.’는 의미로 자주 인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효명(2000: 35-37)에 의하면, 『문선(文選)』에 무술 용어가 보이긴 하지만,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의 무술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공극(1990: 9)은 무술이라는 용어가 신해혁명 전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朴貴順, 2005, 박귀순, 2009: 73 재인용). 중국의 무술을 시대별로 정리한 『중국무술사(中國武術史)』에 무예라는 용어는 군사적 목적으로써 전투에서 사용되는 기사(騎射) 또는 장․단병기 등을 사용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민간에서 자치 단체적 성격을 나타내는 향촌 방어체 향촌에서 무술은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향촌의 민중이 민간 종교 결사를 접촉하게 되는 계기는 실제로 기공 수련과 질병치료, 무술 훈련 등 실용적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이은자, 2005: 56).
가 무예를 통해 힘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온다(이성곤, 2007: 116).
무술(武術)은 본질적으로 신변 보호의 필요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으며, 사회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도모하는 활동에서 더 나아가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역할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무술이 인간 개체나 집단, 특히 하나의 정치 단위에 대한 내외의 위협과 침략에 대항하는 바탕이 되어 자신의 안전과 독자적인 생활권, 문화권을 방어 및 유지케 하며, 주체적인 역사 전개를 보장한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전투 행위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다(임동규, 1991, 이민형, 2009: 358 재인용).
기원 전(紀元 前) 2세기부터 기원 후(紀元 後) 후한(後漢) 시기까지 초기의 부(部)와 곡(曲)은 각각 단순히 정규 군대의 편제상 단위를 의미했는데, 오늘날의 연대나 중대 또는 대대에 해당하는 군대 내의 편제 단위였고, 부(部)가 곡(曲)의 상급 단위였다. 이와 같이 부곡(部曲) 문헌 자료에서 부곡(部曲)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기(史記)』권 10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과『한서(漢書)』권 69, 「조충국전(趙充國傳)」이다. 시기적으로는 기원 전 2세기경의 漢武帝 시대에 해당된다(신성곤, 2005: 32).
은 군대 편제의 중핵을 이루는 단위로서 대략 200∼400명으로 구성했고, 부(部)는 사마라는 장교가 곡(曲)은 후(候)라는 장교가 통솔했다(신성곤, 2005: 35). 이를 통하여 군사무술이 더욱 더 조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후한 시대 말기에 관료 제도로서의 품계 제도가 있었는데, 魏武帝(曹操: 155-220)에 의해 구품제(九品制)가 시행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 구품(九品)이란 중국에서 토양과 토질(土質)과 공부(貢賦)에 구급(九級)으로 구분하여 上上, 上中, 上下, 中上, 中中, 中下, 下上, 下中, 下下로 한 데서 연유한다. 이 시기가 ‘구품논인(九品論人)’에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의 본의는 사람을 품행과 재간에 의해 구별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가세와 혈족으로 세습되는 것은 아니었다(김이수, 2009: 37).
로 정착되는 시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때부터 구품제는 관직명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조생균, 1995, 김이수, 2009: 37 재인용). 또한 ‘위기구품(圍棋九品)’에서의 품계제도는 ‘기경(棋經)’ 기경 (棋經)은 산문 형식으로 바둑과 관련된 내용을 총 13편으로 구성한 글로 ‘손자병법’ 13편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김이수, 2009: 37).
제 12편인 ‘품격론(品格論)’에 “夫團棋之品有九, 一曰入神, 二曰坐照, 三曰具體, 四曰通幽, 五曰用智, 六曰小巧, 七曰鬪力, 八曰若愚, 九曰守拙, 九品之外不可勝計, 未能入格, 今不復云”라 하여 품격을 일품에서 구품까지 9단계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유원, 김이수(2005)는 ‘단급제도를 중심으로 살펴본 수련 체계’에게 단급제도를 중심으로 품계 제도와 칭호제도를 비교하고, 더불어 암묵적 개념인 수, 파, 리(守, 破, 離)를 절차탁마(切磋琢磨)와 함께 분류하여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입신(入神), 좌조(坐照), 구체(具體), 통유(通幽), 용지(用智), 소교(小巧), 투력(鬪力), 약우(若愚), 수졸(守拙)이 그것이다(김이수, 2009: 37).
이와 관련하여 김이수(2009)는 ‘위기구품(圍棋九品)’을 무술과 관련시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용복(1995)은 택견의 단급제도에 대해 ‘단급제도는 바둑에서 비롯되어 무술에 적용한 것으로 일본에서 발달되어 왔다. 이 제도의 연원은 송나라 장의(張疑)가 저술한 기경(棋經)의 위기구품(圍棋九品)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김이수, 2009: 42 재인용).
수졸(守拙)과 약우(若愚)는 무술에서 초단과 2단 과정에 속한다. 즉, 이 과정은 몸을 채근하고, 단련하는 과정이며, 옥돌을 가리는 출발점이라 하겠다. 두 번째로, 투력(鬪力) 또는 소교(小巧)는 성공과 실수를 반복하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준비하며, 사범으로서 자세를 가다듬는 단계라고 하겠다. 이 과정은 본격적으로 행위를 배우고, 유파의 이념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탁(琢)이다. 琢은 깊이를 알아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용지(用智), 통유(通幽), 구체(具體)는 신중함과 모험, 도전, 박자(리듬)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조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과정은 5단에서 7단의 과정에 속한다고 하겠다. 네 번째로 좌조(坐照)와 입신(入神)은 일반적인 사람과 구분함으로서 한 분야에 뛰어난 능력과 조화로움을 강조하는 단계라고 하겠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아를 성찰함으로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명인의 경지에 오른 상태로서 8단과 9단이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김이수, 2009: 44-45).
북주(北周) 건덕 6년(577)에 전쟁 포로 출신의 사노비를 모두 방면하여 일반민으로 편성하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 조치에 따라 법률적으로는 노비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주인과 예속 관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민간의 예속인, 즉 남성으로서 부곡(部曲)과 여성으로서 객녀가 제도적으로 탄생했다. 부곡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인 예속 관계망의 일부로 편입된 시기는 2세기 후반인 후한 말기 삼국시대(220∼280) 바로 전 시기였다(신성곤, 2005: 31). 초기에는 부와 곡은 각각 단순히 정규 군대의 편제상 단위를 의미했는데, 부(部)와 곡(曲)은 부곡(部曲)으로 연칭되어 특정 집단이나 구성원 혹은 예속민의 대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후한(後漢)시대에 오면서 부곡(部曲)은 군대 편제의 의미보다는 무장력을 갖춘 집단이나 무리, 즉 농민 출신의 도적 집단 혹은 반(反) 왕조적인 무장 세력으로서 오히려 부중(部衆)의 의미로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런 성격의 부곡(部曲)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정부에는 위협적일 수 있었고, 이들이 보유한 무장력을 둘러싸고 부곡을 통솔하던 지휘관이었던 부곡 주와 황제 중심의 집권 세력이 군사적․정치적으로 갈등할 가능성이 높았다. 부곡에 대한 통설권이 부곡 주의 혈연을 통해 계승된다면 이들 부곡(部曲)은 정규군에 편제된 병사라기보다 특정 가문에 대대로 복무하던 가병(家兵)으로서 성격이 더 강했다.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위(魏)는 병역제도를 장정 개인이 아닌 그 가족 전체에 맡겨 버리는 오늘날 ‘국가상비군(國家常備軍)’ 같은 병호제(兵戶制)를 시행하였다. 그 전까지의 전통적인 병역 제도는 백성을 징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전란이 잦아 백성들의 이동이 심한 데다 호족들이 마음대로 유민들을 흡수해버리니 병력 충원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부병제(府兵制)인 병역 의무제를 유지하게 힘들게 되자 상비군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병역 제도는 점차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募兵制)와 직업 군인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후일 모병인 병사들은 자신을 고용한 주인과 절도사의 사병(私兵)이 되면서 더 큰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리하여 서위(西魏) 대통(大統) 십육년(十六年)에 세병제(世兵制) 위진(魏晋)·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대부분 군사제도는 漢과 魏의 군사 제도를 이어 받았는데 그것은‘세병제(世兵制)’이다. 이것은 군적(軍籍)에 속한 ‘사병지가(士兵之家)’에서 세습되는 직업 군인을 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습영병제(世襲領兵制)는 국가가 군대의 지휘관인 장령들에게 휘하 병사들을 세습적으로 통솔할 권한을 인정해주는 통솔권 내지 지휘권의 계승·상속은 무술이 가문에서 전승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2).
와 부병제(府兵制)가 개정되었다. 부병(俯兵)은 병농합일(兵農合一)의 군대였다. 전국에 이십 사개 부를 열고, 부병제 아래에 사병을 두었는데 사병은 원래 농민이었다. 그래서 무술을 익히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2). 서위 우문태(宇文泰)가 팔주국(八柱國)에서 십이군 선비금려(十二軍鮮卑禁旅)를 6군으로 바꾸고, 육주국(六柱國)이 6군을 나누어 인솔하였다. 우문태(宇文泰) 본인과 서위 종실 원혼도 명의상 주국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육주국(六柱國)은 모두 팔주국(八柱國)이 되었다.
이것은 예전 팔부군장대인(八部君長大人)이 통솔한 선비족의 부락병제에서 연용된 것으로(김지환, 이병인, 이영옥, 이호현 옮김, 2008: 273), 이전의 부병은 일반적으로 군영에 따라 군호에 속하였다. 이후, 군인은 민호로 편제되어 주현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정부는 수시로 민호를 징발하여 종군시켰다. 이와 같이 魏晉․南北朝 時代에는 각 나라 별로 병호제(兵戶制), 세병제(世兵制), 부병제(府兵制) 등을 실시함으로써 병사를 선발하는 기준을 강화하였고, 무술의 기량을 중요시하여 아주 높은 기법(技法)이 요구되었다. 특히 이 시대는 병사들이 전쟁에서 근접전의 필수 요건이 되는 도수무술(徒手武術)인 권술(拳術), 금나술(擒拿術)과 산수(散手) 권법(拳法)에서 권(拳)의 글자는 옛날에는 쇠뇌(弩弓))의 활을 쏜다는 ‘穹’의 글자와 통하여 사용하였다. 글자에서 나타나듯이 도수무술(徒手武術)의 모든 권(拳)은 활을 쏘듯이 주먹을 질러야 한다. 권(拳)의 운용은 내경(內勁)을 튕기어 질러내는 발경(發勁)과 그 경(勁)이 상대의 방어에 부딪치면 바로 금나·착골(擒拿·錯骨)로 이어지니 발경(發勁)과 금나(擒拿)는 용권(用拳)의 2대 요소가 된다.
에 능숙하고, 병기술에서 장․단병기를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체력에서는 나는 듯이 달릴 수 있어야 했으며, 무거운 물건을 지고 장거리를 행군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은 무술의 기교와 속도, 힘 등의 여러 방면에서 엄격하게 요구하였으며, 병사들은 평상시에 전문적으로 무술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병사들은 평상시에는 가업 및 농업에 종사하였고, 병역제도의 기반 조성에서 나타난 모순된 상황으로 전시에 국가보다는 주인을 위해 싸웠으며, 진(晉)나라 시대에는 효과 높은 훈련을 위해 외우기 쉽도록 요점만을 정리한 구결을 암기하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지배 계급의 ‘중문경무(重文輕武)’의 정책으로 무인(武人)이 낮은 사회적 신분의 위치였으며, 문치(文治), 덕치(德治)로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였다. 또한 민간에서 무술교육에 종사하는 무사(武士)들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어서 경제적인 이유로 학문교육을 받아들였다. 즉 주된 것이 학문적인 것이고, 그 다음이 무술적 기량이었다. 이러한 민간 무술교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무사 육성의 일환으로 많은 지역의 무술교육장에서 시행되었다(장재이, 2000: 21).
이와 같이, 魏晉․南北朝 시대에는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오랜 시간을 전쟁에서 필요한 군사무술의 발달이 증진되었다. 또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오호(五胡)는 중원의 동한(東漢) 때부터 남북조시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중원에서 새로이 세력을 키운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의 다섯 종족을 말하는데, 이들 종족은 남북조가 일어날 무렵까지 13국으로 세력을 형성하였고, 지나족(支那族)이 3국을 세워 이를 모두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시대라고 한다.
의 침략 등과 같은 타민족과의 교류 역시 중국무술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각국은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썼고, 오랜 시간의 전쟁에서 요구되는 군사무술의 발달이 증진되었으며, 타민족과의 분합(分合)으로 인하여 군사무술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궁술, 검술, 승마, 권법 등이 발달되었다.
그림 1. 魏晉·南北朝 시대의 군사무술 훈련
순자(荀子)의 의병편(議兵篇)에는 魏나라에서는 ‘매우 혹독한 자격에 따라 보병을 선발했다.’고 말하고 있다(최대림, 2009: 229-230).
“魏나라는 무졸(武卒)이라고 하여, 일정한 시험에 무용(武勇)이 있는 병졸(兵卒)을 뽑습니다. 그 시험을 보면 몸의 윗부분에 한 장, 허리 부분에 한 장, 정강이에 한 장, 이렇게 세 가지 갑옷을 입고, 십이 석짜리 무겁고 강한 쇠뇌(弩)를 잡은 위에, 화살 쉰 자루가 든 살통(箭筒)을 등에 지고 그 위에다 창을 꽂고 여기에 또 투구를 쓰고 긴 칼을 옆에 차고, 그리고 사흘 먹을 양식을 꾸려 짊어지고는, 한낮까지 백리 길을 냅다 달리는 것입니다(魏氏之武卒 以度取之 衣三屬之甲 操十二石之弩 貧服矢五十個 置戈其上 冠冑帶劍 嬴三日之糧 日中而趨百里).”
이러한 시험을 거쳐서 합격이 되면 백성으로서의 부역을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밭과 가옥의 세금도 줄여주었다(中試則復其戶 利其田宅)는 기록이 보인다(박기동, 김용수, 2010: 49). 이와 같이 무술활동을 바탕으로 한 무술 실력의 고하에 따라 신분의 위상이 달라질 수 있었으며, 무술을 통한 정치적 성장은 그 고용주인 부곡 주의 영향에 따라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왕권 강화의 기반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이 약화되어 상당수의 국가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魏晉․南北朝 시대는 장기간의 분열 시기로서 전란과 그에 다른 유민(流民)의 발생, 전쟁 포로의 분배와 노비의 충원, 호족의 대토지 소유와 그로 인한 농민층의 분해, 주가(主家)에 몸을 의탁한 호구(戶口)의 증대 등으로 노비 이외의 다양한 예속민이 존재했다(신성곤, 2005: 12).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는 무술 실력이 뛰어난 무인들이 정국의 주도자로 활약했던 시기이며, 이전과는 달리 개인의 무술 실력만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고, 나아가 정치적 진출까지도 가능했던 시기였다. 국가 간의 쟁탈과 유지에 무술이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 만큼 무술 실력을 겸비한 인적 자원이 대단히 많이 필요했던 시기이며, 이러한 무력의 수요를 충족시켜 줄 무력 공급자 또한 광범위 하게 존재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러한 무력 공급자들은 부곡(部曲)이라고 하는 조직으로 흡수되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신분 차이를 해소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각 지역의 세가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세력을 갖고 있는 호강지주(豪强地主)가 있었는데, ‘두벽(䲧壁)’이라는 자기들을 보호할 무장과 거점을 만들었다. 이러한 자치 단체적인 향촌방어체(鄕村防禦體)는 호강지주에 속한 상급 천민인 ‘부곡(部曲)’은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작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였다. 부곡은 부중(部衆)이나 병사라는 무장력을 갖춘 일반적인 병력의 의미보다는 그들을 통솔한 지휘관의 사적인 유대관계가 강화된 개인에 대한 인격적 예속성을 강하게 띠는 무장 집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이러한 두벽과 부곡과 같은 제도는 무술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촉진제가 되었다.
또한, 부곡으로 충원되는 인원은 개인적인 유대감이 강했던 것으로 보아 부곡 주와 사적인 유대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컸던, 혈연관계의 종족(種族)이나 지연관계의 향당(鄕黨), 혹은 이들을 병사로 모집하는 행위인 초모(招募) 서위의 경우 향병(鄕兵)을 초모할 때 향리에서 용맹이 뛰어난 인재를 의미하는 향곡(鄕曲), 웅용(雄勇), 효용(驍勇), 향려(鄕閭)나 부곡, 망명(亡命) 또는 협객성 성향이 강한 의중(義衆), 용감소년(勇敢少年)을 대상으로 했다. 향당, 용맹자, 망명자, 부곡, 의중은 남조의 부곡 초모 대상과 차이가 없다.
에 의해 구성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신성곤, 2005: 41). 개인 집단, 국가 간의 폭력이 난무했던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부곡은 시대를 헤쳐 가는 하나의 생존 방식으로서 자발적으로 부곡 주의 ‘초모(招募)’에 응하여 예속 관계망에 뛰어들었다. 양민이라는 신분보다는 주인과의 인격적 유대가 실제 삶에 훨씬 유리했고, 이점은 부곡 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림 2. 魏晉·南北朝 시대의 활쏘기
군비(軍備)는 국가 생존의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생산 노동 외에도 군사적 활동에 참여하는 일이 생활의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훈련도 점차 오락으로 변하게 되었다. 군사 훈련은 활쏘기, 무기를 잡기를 잡고 겨루는 격투와 맨손으로 겨루는 것 등의 여러 종류를 포함하였으며, 모두 육체를 단련하고 기교를 증진시키는 일 이었다(洪喜 譯, 2003: 418).
이상에서 살펴보면, 魏晉․南北朝 시대는 세습병적인 성격의 병호제(兵戶制)가 근간이었고, 부곡은 사적인 무장력의 일부를 구성하던 비공식적인 병력 원이었다. 따라서 남북조(南北朝) 시대는 부곡을 거느렸던 사인, 즉 귀족이 정치적․사회적 우위를 유지한 채 왕조의 흥망성쇠에도 변함없이 사회적 중추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전쟁이 빈번했던 魏晉․南北朝 時代에는 병역제도(兵役制度)『周書』권 29, 「侯植傳」을 보면, 모병의 주체와 그에 응모하는 병사들 사이에 상호 시혜와 충성이라는 고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모병의 경우에는 ‘가재경진(家財傾盡)’, ‘분산가재(分散家財)’, ‘산재시혜(散財施惠)’가 매개가 되고 있다(신성곤, 2005: 170).
와 가병(家兵) 성향의 부곡(部曲) 등을 통하여 무술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삶을 위한 방책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자 교육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의해 그 대상자가 누구이든 활동 면에서 공격자로부터 방어 및 대적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근접 방어 기술로서 대인 격투술(格鬪術)인 도수무술(徒手武術)과 병역 선발 및 훈련으로서의 검술(劍術), 궁술(弓術), 기마술(騎馬術)이 핵심적인 무술 수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무술은 한대(漢代)에서 이용하기 시작한 도(刀)는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남북조에 이르러 더욱더 정밀하게 제작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보도(寶刀) 기술로 발전하였다. 장모(長矛)는 당시 군사들이 상용하던 長兵器였는데, 『晉書·劉曜傳』에 ‘勇士의 陳安은 왼손엔 七尺 大刀를 오른 손에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능히 잡고 사용하였다(左手膚七尺大刀, 左手執丈八蛇矛)’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한대(漢代)의 大射, 燕射, 系射 등의 射藝가 南北朝 시대에 계승된 것으로 보아 당시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았고, 활쏘기가 중요한 武藝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2).
또한, 사회 경제의 진보와 공방 격투에 이용되는 전문 군대의 창설은 병기의 종류를 다양화하게 해 그 사용법과 격투에 이용되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되고 축적되었다. 서주(西周)에 해당되는 시기에 무술의 기본 요소인 전용 병기, 그 사용 기술, 도수 격투기술은 격투 살상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경로에 따라서 발전해 왔는데, 자신의 형식, 공방법과 훈련의 수단을 형성해 중국무술의 기본 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2. 민간무술(民間武術)
1) 불교(佛敎)와 무술(武術)
불교는 한대(漢代) 초기에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문명의 유입된 시기와 수용된 시기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한대(漢代) 초기에는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었을 뿐, 그것이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 후 위진(魏晉)․남북조(南北朝) 시기에 중국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불교는 민간에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말한다(강진식, 2009: 75).
이 시기에 중국인들은 인도의 불경을 어떻게 한자로 번역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매우 고심하던 중에 중국 고전에 나오는 용어를 빌어다가 번역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격의불교(格義佛敎) 시기의 불경은 『노자(老子)』나 『장자(長子)』에 나오는 ‘유(有)’와 ‘무(無)’등과 같은 용어들을 그대로 번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동한(東漢)이래 불교가 전해진 후 북위 태연(太延) 4년(438)에는 장안(長安)의 어느 사원(寺院)에서 대량의 무기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國家體委武術硏究員 編, 1997: 206). 이는 당시 도적들이 빈번하게 사원을 강탈하는 상황에서 승려들이 절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측면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불교 사원에서 건신(健身)을 위한 무술 수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이성곤, 2007: 121).
소림사(少林寺)는 인도 고승 발타가 창건하였는데, 즉 사적에서는 발타가 무술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제자인 僧稠, 慧光, 却會 등이 무술을 하였다는 『고승전(高僧傳)』의 문헌에 보인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3). 소림사는 북위 효문제 태화 19년(495)에 건립되었다. 절간에는 아주 많은 재산이 있었으므로 일부 승려들이 무술을 닦아 재산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웠다(정삼현 譯, 2007: 335)
또한 6세기 초 인도에서 화북으로 건너와 낙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종래에는 11세기에 정리된 전승 설화 외에 그의 전기나 사상 등이 불분명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 둔황에서 발견된 어록에 의해 벽관(壁觀)으로 일컬어지는 독자적인 선법과 제자들과의 선법이 확인되어 그 실상이 밝혀졌다(우봉규, 2008: 17).
중국 불교 선종(禪宗) 선종(禪宗)이란 좌선을 주요한 수행 방법으로 삼아 깨침을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종파이다.
의 초조(初組)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좌선(壁觀婆羅門)은 정진(精進)에 필요한 내공과 체력을 다지는 건신법인 요병 체조술(yoga) 이진수(2003: 321)는 ‘나는 달마가 창시했다고 체육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던 쿵푸(工夫)란 중국의 의료체조가 사실은 도인법이었다는 것을 밝혔다.’고 적고 있다.
로 소림사에서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김용수, 2010: 101). 달마대사(達磨大師)가 하남성(河南省) 소림사(少林寺)에서 법(法)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소림사권법을 창안하였다. 그 이후 여러 세대를 지나 소림사의 나한지권(羅漢之拳)은 점차 수학(修學)을 기본으로 하는 북방선의 사람들에게 계승하였다(하남길 외, 2009: 57-58).
요가(yoga) 인도에서는 승려들이 수련활동의 일환으로 정좌호흡법(正坐呼吸法)을 발전시켜왔으며 요가(yoga)는 그 예의 하나이다(하남길 외, 2009: 17).
는 인도 종교의 가장 중요한 의례적 장치 가운데 하나로, 금욕과 명상과 호흡의 테크닉을 위주로 하여 신체를 제어함으로서 의식을 변화시키는 인도의 종교적인 수련법이다. 이는 상승 요가에서 발원한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魗經)』을 전하고 ‘18 나한장법(羅漢掌法)’을 전수한 것은 심신을 동시에 수련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박기동, 김용수, 강종학, 2011: 65). 『역근경(易筋經)』은 달마대사가 승려들이 좌선을 위주로 하다 보니 몸이 많이 쇠약해지므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기공법(氣功法)을 기록한 것이고, 『세수경(洗隨經)』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 들어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역근(易筋)은 조신(調身), 즉 삼밀(三密: 身․口․意)을 말하는 것이며, 세수(洗魗)는 조식(調息)과 조심(調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김이수, 2008: 195-196).
소림사에는 ‘권선일여(拳禪一如)’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권법 수련과 선(禪) 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로서 권법 수련을 통해서도 해탈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이성곤, 2007: 121).
그림 3. 역근경(易筋經) 중 위타현저
중국 불교 선종(禪宗)의 좌선(坐禪)은 수행이면서 동시에 깨침이다. 바로 이 좌선의 형식은 가부좌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가부좌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기를 조절할 줄 아는 호흡이 수반된다. 건강한 몸과 목표 의식을 구비한 마음과 일정한 호흡이야 말로 자신이 살아 있는 근본 방식이다. 호흡이 바탕이 된 가부좌야 말로 여법한 몸의 자세이다(김호귀, 2008: 48-49). 그래서 올바른 수행은 올바른 가부좌이고, 올바른 가부좌는 올바른 깨침이다. 이것을 가리켜 一時坐禪은 一時佛이고, 一日坐禪은 一日佛이라 한다.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작용이므로 앉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부처가 된다. 곧 좌선이 곧 불(坐禪卽佛)이요, 불은 곧 좌선(佛卽坐禪)이다. 이것이 지관타좌(只管打坐)로서의 가부좌가 나타나는 본래 의의이다(김호귀, 2008: 40). 소림내경일지선(少林內勁一指禪)에서는 참선 수련의 보조 운동으로 만들어졌던 참장공에 불가적 요소를 가미하여 마보참장공(馬步站樁功)을 만들었으며, 그 시원이 달마대사(達磨大師)라고 한다(王端亭, 鐵云 編著, 1992, 2009: 83, 정용하 재인용). 1973년 말 장사(長沙)의 마왕퇴 3호 묘에서 출토된 서한(西漢) 시대의 ‘도인도(導引圖)’에 그려진 입식 도인과 보식 도인 등의 모양은 어깨 넓이만큼 벌린 체 몸통을 곧게 세우고 두 팔을 잘 움직이게 서 있는 모습은 참장의 역사가 적어도 황로학(黃老學)의 성립 시기 이전부터 행해져 왔음을 의미한다(정용하, 2009: 83).
본래 참선은 부동의 상태에서 스스로 마음을 닦아가는 신앙 행위이므로 수행자들은 단연히 운동 부족에 걸려 건강의 균형이 깨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달마대사(達磨大師)는 자신을 따르는 선승들을 위한 건강 증진과 정신 수양, 그리고 몸을 지키고 간담을 키우기 위한 호신연담을 개발하였다.
불교에서의 몸은 정신이 배제된 불순물이 아니다. ‘몸’은 육체뿐 아니라 내면의 정신을 아우르는 정신과 육체가 일체화된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몸’의 개념은 몸의 구체적인 운용이 그에 적합한 내면의 덕성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불교의 지향을 함의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의 몸과 마음은 그 기능과 실체가 다르지만, 양자는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어서 서로 영향을 미친다(이계영, 2010: 9). 따라서 수행(修行) 중에 선종(禪宗) 사상과 습무(習武) 활동의 완숙한 결합을 얻게 된다. 불교의 선종(禪宗) 사상이 소림 공부(功夫)의 기격(技擊) 사상과 수련 방식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소림 공부(功夫)는 하나의 종합적인 무술 체계인바 그 중 선(禪)자는 공부(功夫)를 제고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는데, ‘禪’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리를 깨닫게 한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소림무술은 선식합일(禪式合一)을 중시하고 있다(장민, 김동규, 2010: 29-30). 이는 무술 수련의 삼대 원칙인 조신법(調身法)인 자세의 조정(調整)과 이완(弛緩), 조식법(調息法)인 호흡과 기(氣)의 흐름, 그리고 조심법(調心法)인 무념무상의 수련과 의식의 집중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 무술은 불교 수행에 필요한 건신법(建身法)과 기공술(氣功術) 등을 통하여 심신을 동시에 수련했던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발전 과정에서 무술과 관련 있는 연경단련법(軟硬鍛鍊法) 등이 상호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2) 도교(道敎)와 무술(武術)
도교 인들은 인간의 몸은 사후의 세계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신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몸을 키워 신체를 건강하게 하고 신(身)을 키워 정신이 강화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즉 물질적인 노화와 죽음의 원인을 실천적인 ‘몸 기르기’와 ‘호흡법’으로 단련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을 내면에 다지려고 했던 것이다(윤찬원, 1998, 김은영, 이정식, 2008: 87 재인용).
도교는 고대 무술(巫術)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한(漢) 시대 이전의 무속신앙과 신선사상,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한대(漢代)에 황로신앙(黃老信御) 황로사상(黃老思想)은 1973년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백서(帛書) ‘노자(老子) 갑본(甲本)과 을본(乙本) 그리고 4편의 고일서(古佚書)가 발견되었다. 이 사상은 전국시대에 제(濟)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중심으로 중국 고대의 여러 사상과 신앙을 황제(皇帝)와 노자(老子)의 이름으로 융합하고 발전시켜 온 한 대(漢代) 초기에 융성했던 사상이다(정용하, 2009: 77).
이 가미되고, 대체적으로 후한 말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걸쳐서 형성되었다(백경화, 지치환, 2006: 70). 한대(漢代) 이후에 정립된 도교는 고래의 점복(占卜)과 음양오행설, 참위설(讖緯設), 의술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모습을 이루었으며, 양생사상의 불로장생술은 심신(心身)의 수련법으로 발달되었다. 진나라(秦朝) 때 신선방사(神仙方士)들에 의해 전파된 무술(巫術)이 민간에서 보편적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수련법은 노자와 장자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연단(煉丹)․장생(長生)을 중시하고 개인적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추구하였다(김지환, 이병인, 이영옥, 이호현 옮김, 2008: 219). 이와 같이 도교 사상은 중국 전통 양생학(養生學)의 주요 가르침으로, 전통무술 양생술(養生術)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전통무술 양생학의 기초를 다졌다.
혼란이 극에 달했던 魏晉․南北朝 時代에 들어와 도교는 더욱 더 중국인들의 정신세계 깊숙이 영역을 확장하였다. 위백양(魏伯陽)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와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는 신비화와 현실 도피의 방향으로 나아갔던 魏晉․南北朝 時代 도교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경전들이었다. 위백양(魏伯陽)은『주역(周易)』을 위시한 고대의 점복서들에 나오는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표현들을 점복과 연단술, 도참설 등을 원용하여 양생의 도술로서 풀이하였다(한창수, 김영구, 2005: 173). 갈홍(葛洪)은 신선술과 방중술을 통하여 인간이 신선과 같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했는데, 『포박자(抱朴子)』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갖가지 약초와 약재, 희귀한 물질, 의학품 제조법 등을 열거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고대 중국의 자연과학의 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손꼽히기도 하다(한창수, 김영구, 2005: 173).
갈홍(葛洪)의『포박자(抱朴子)』에서 기공(氣功)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정병석, 2006: 25).
모든 사람은 기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데, 기는 사람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천지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생존하는 데 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 기를 잘 운행하는 사람은 안으로는 신체를 잘 기르고 바깥으로는 사악한 것을 배척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매일 이를 쓰면서도 이것에 대해 잘 모른다(夫人在氣中, 氣在人中, 自天地至於萬物, 無不須氣以生者也, 善行氣者, 內以養身, 外以卻惡, 然百姓日用而不知焉).
진대(晉代) 저명한 도인(導引)인 한의사 갈홍(葛洪) 역시 武藝에 정통하였다.
포박자(抱朴子)의 본명은 동진(東晉)의 갈홍(葛洪, 283-343)이다. 성씨는 葛이고, 이름은 洪이며, 자는 중천이다. 그는 중국의 東晉시대 사람으로 남경 근처에 있는 丹陽郡 句容縣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葛悌의 자손이라고 전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을 여의고 어렵게 살았으나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만 여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포박지사라고 하였다. 그래서 포박자가 갈홍의 저서명과 호가되었다(이재승, 이재홍, 2002, 조성균, 2006: 10-11 재인용).
그가 저술한 ‘抱朴子’ 自序를 보면, 그는 젊은 시절 활쏘기를 배웠고, 군인으로 있을 적에 “曾手射追騎, 應弦二倒, 殺二賊一馬”라는 글 표현에서 그의 활쏘기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그는 ‘刀, 棍, 戟 등의 여러 무술에 정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남조(南朝)의 저명한 도인(導引: 道人)인 한의사 陶弘京 역시 ‘文武兩道’가 겸비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家乘 武藝를 익혀 騎射와 병법에도 능하였다고 한다(송일훈, 조충현, 안진규, 2008: 13). 이처럼 도교의 도인(導引)인 기공과 양생술(陽生術) 등이 무술(武術)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신선이 사는 곳이 있는 불사약(不死藥)을 구해서 복용하는 방법. 둘째, 불사약을 직접 제조하여 복용하는 방법. 셋째, 호흡이나 특수한 운동 또는 정신의 수련을 통하여 신선이 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것을 다시 두 가지로 분석해 보면 약(藥)을 복용하는 인간 외적 방법과 호흡이나 정신 수련의 인간 내적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김부찬, 2009: 85). 도교에서 무술은 외형적 규범과 정신적 표현을 중시하는 내외합일(內外合一)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內’는 心, 神, 意, 情 등의 심리활동이고, ‘外’는 手, 眼, 身, 法, 步 등의 외형적 활동을 표현이다. ‘合一’은 내와 외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 것이고, 정신과 신체의 조화를 의미한다(장민, 김동규, 2010: 33).
순자(荀子)는 ‘천론(天論)’에서 ‘하늘과 사람의 구분에 밝을 것(明種天人之分)’을 요구하여 천과 인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임옥균, 1996: 6). 그러나 천과 인을 대등하게 자리매김하고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최고로 올려놓고 있는 표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나 능참(能參)이다. 주역(周易)에서는 천, 지, 인(天, 地, 人)이라는 삼재(三才) 사상이 ‘道’ 형상(形象) 이전의 것을 도(道)라 하고, 형상 이후의 것을 기(器)다. 형이상은 인간의 감각 기관을 초원한 정신, 즉 ‘道’를 가리키고 형이하는 형상을 가진 물질을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 또는 그 속성 자체를 지칭한다.
로 귀결된다고 보았는데, 노자의 道를 따로 떼어서 도, 천, 지, 인(道, 天, 地, 人)을 사대(四大)라고 하였다(원영호, 2007, 정용하, 2009: 재인용).
도인법(導引法) 중국에서 내공법이라 하는 것은 도인법을 말한다. 도인(導引)이란,‘기혈을 끌어내어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라는 의미이며, 내가권은 무술과 도인법을 혼합시키는 것이 큰 특색이다(김용수, 2010: 90).
은 기공(氣功) 요법으로, 기(氣)라고 하는 생체 에너지를 사용하는 수양 방법이며, 무술(武術)의 기초적인 건신법으로 볼 수 있다. 즉, 형(形; 자세)과 의(意; 생각) 또한 수련의 근본 가운데 하나이고 상호간 작용하고 제약하는 관계이다. 이는 형․의․기․력(形․意․氣․力)이 서로 연결되고, 제약됨으로써 음양의 평형이 조정되는 정체활동이다. 이형취의(以形取意), 이의상형(以意象形), 의자형생(意自形生), 형수의전(形隨意轉)이라 하여 수련 시에 자세와 생각이 원활하게 배합하여 ‘기’를 운행시키게 된다. ‘기(氣)’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물질의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철학적, 정신적, 의학적, 우주와 물리적인 측면 등에서 모두 그러하다. ‘공(功)’은 수련하는 노력과 시간을 말하며, 꽁푸(功夫), gongfu, 공부)라고도 한다. ‘기공(氣功)이란 우주 전체에 흐르는 대자연의 氣를 운동과 호흡과 의식의 조절을 통해 받아들여 심신의 氣를 보충함으로써 정신적, 육체적으로 좀 더 완벽해지려고 하는 수련이다(한창수, 김영구, 2005: 141).
그림 3. 도인술(導引術)의 동작과 의복
양생(養生) 무술 선술(仙術)의 수련은 삼조법(三調法)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는데, 조신(調身)으로 전신(全身)의 긴장을 풀고, 조식(調息)으로 올바른 호흡법을 익혀 호흡을 단련하고, 조심(調心)으로 신체의 특정 부위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결합함으로써 심신의 조화로움을 이루어 정기신(精氣神)을 다스리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개선시키는 것이다. 특히 삼조(三調)를 바탕으로 고대 선인들에게서 전해져 온 수련법 중 체위법(體位法: 자세 조정법), 방송법(放送法: 신체를 느슨히 이완시키는 늦추기 법), 호흡법(呼吸法), 행기법(行氣法), 입정법(入靜法), 의수법(意守法)은 선술의 대표적인 기본 훈련법이다(김지선, 허일웅, 2010: 80).
격투 기능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며, 양생 기능은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격투 기능을 익히기 위한 구체적 활동 없이는 양생 기능을 강화할 수 없고, 양생이라는 내적인 생명력의 강화 없이는 격투 기능을 향상시킬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술은 투기술(鬪技術)과 양생술(養生術)을 같이 수련하는 종합적인 무술로 발전하였다(박기동, 김용수, 2009: 117).
이처럼 魏晉․南北朝 時代에는 불교와 도교가 심신 수행을 위한 건신법과 도인술, 그리고 양생술 등이 중국무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불교의 발전 과정에서 연경단련법(軟硬鍛鍊法) 등이 상호간에 많은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술이 처음부터 도인술(導引術), 양생술(養生術), 건신술(健身術) 등이 건강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격투기술의 일환으로 발달해 왔으며(김용수, 박기동, 강종학, 2010: 100), 무술이 단지 싸움의 형식에만 그치지 않고 예절, 예의, 도덕 등과 같은 윤리적인 요인과 결합하면서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의 생산 활동 전쟁, 종교, 오락, 교육 등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김용수, 2010: 101).
무술은 하나의 의도적인 문화 구조를 일관되게 진행시키면서 오늘 날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흘러갈수록 각기의 독창의 심신 문화로 구체화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무술의 모습들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조명되고 해석하기도 하고 실제로 같은 무술 안에서도 상반된 기법과 정신의 변화들이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무술은 인류학적으로 건신, 정신교육, 군사국방, 경제보급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철학과 종교, 민족정신과 민족풍습, 민족예술, 민족과학, 윤리 도덕관 등에 영향을 주고 있는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스포츠인류학적으로 살펴보면, 중국 무술의 목적과 가치의 문화적 변용은 오랜 역사 속에서 중국인들이 무술 수련에 유(儒), 불(佛), 도(道) 등과 같은 전통 사상을 접목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동양 무술에서 중국무술과 우리나라 무예나 일본의 무도 등과의 연관성이나 보완 관계 면에서 볼 때, 더 넓은 동양 武術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에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 먼저 중국무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연구는 魏晉․南北朝 시대에 중국 군사무술과 민간무술이 어떤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는지 그 발달 배경과 무술의 유형을 알아보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따라서 중국무술을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 전과 후로 넘어가는 혼란의 시기인 魏晉․南北朝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연관시켜 중국 군사무술과 민간무술의 스포츠인류학적 지식 체계를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오랜 시간의 전쟁에서 요구되는 군사무술의 발달이 증진되었으며, 타민족과의 분합(分合)으로 인하여 군사무술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둘째, 병역제도(兵役制度)는 병사 선발 과정과 훈련에서 군사무술의 높은 기량을 요구하였으며, 근접전에서 필요한 격투무술이 더욱 더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로 병역제도(兵役制度)와 사병(私兵) 성향의 부곡(部曲) 등을 통하여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무술이 삶을 위한 방책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기술이자 교육이었다.
셋째, 중국 민간무술은 불교와 도교의 심신 수행에 필요한 건신법(建身法)과 도인술(導引術), 그리고 양생술(養生術)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불교의 발전 과정에서 무술과 관련 있는 연경단련법(軟硬鍛鍊法) 등이 상호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문을 중시하고 무를 가벼이 여김〈중문경무(重文輕武)〉’ 이나 ‘급히 하지 않아도 될 말단의 학〈불급지미학(不急之末學)〉’으로 문장가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기예이며, 무술에 정통한 자는 대개 학식이 없다‘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무술가들이 무술을 전승할 때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무술의 학적 체계를 세우는 이론화의 작업은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80년대를 기점으로 무술의 이론화 작업이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무술에 대한 연구들에 비하여 국내에서는 아직 양적으로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아직 국내에는 중국무술에 관한 인류학적 체계를 제시한 저서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중국무술사의 스포츠인류학적 연구를 위한 지식 체계에 따른 이론적 토대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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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port-Anthropological Research on types of military martial arts and civilian martial arts during the Yu, Gi and North and South Dynasty
Kim Yong-Soo(Dogye Computer & Imformation High School)․Kim Yong-Gun(Gangneung-Wonju Univ.)
This study aims to suggest sport-anthropological system of knowledge by searching for the developmental background and the types of military martial arts and civilian martial arts. Related to this, the following conclusion has been drawn. First, the long lasting war resulted in the development of military martial arts and the repetitive separation from and union with other ethnic groups allowed the exchange of the martial arts naturally. Second, the maintenance of the draft system required the high standard of the military martial arts in recruiting and training of the soldiers and also led to the development of hand-to-hand fight that was necessary in the fighting at close quarters. In addition, the military martial arts was considered as both an essential art and education because wars occurred frequently and upward mobility of one's social status was possible through the daft system and 'bugok', a kind of civilian militia. Third, It has been ascertained that the civilian martial arts was closely related to keep-fit sport discipline and Regimen, which intended to train mind and body and also interacted with Yeongyung training method, which was related to martial arts while Taoism and Buddhism developed.
※ key Words: Yu, Gin and North and South Dynasty, Chinese Martial Arts, Sport-Anthropology, Buddhism, Taoism
한국스포츠인류학회지
*논문접수일자: 2012년 04월 30일
*논문심사일자: 2012년 06월 06일
*게제확정일자: 2012년 0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