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성읍 본정리 꽃동산 농민폭동을 말한다
이상학(남, 1935년생)
*팽성읍 본정1리 / 2008년 8월 13일 인터뷰
필자)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해방 뒤 꽃동산 좌익폭동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해방정국에서 계양지역(팽성읍 서부지역)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이)여기는 좌익이 많았지. 그 때는 좌익마을, 우익마을 그랬는데 원정리허고 우리마을(본정1리 새나리)만 빼고는 좌익마을이라고 봐야지. 아까 꽃동산 폭동이라고 했나. 그거 꽃동산이 아니여, 봉화재산(망해산)이지.
필자)그럼 봉화재산폭동이라고 해야겠네요. 진행과정을 말씀해주세요?
이)오후 4시쯤이었을 꺼여. 노산(노양2리) 사람들이 쇠스랑, 도끼같은 거 들고 봉화재산 토성 안으로 몰려들어왔어. 아마 계양쪽 좌익마을 사람들은 좨다 모였을 거여. 그러자 본정리(1리) 사람이 지서에다가 신고해버렸어. 그려서 경찰이 출동혔지. 총으로 위협하며 죄다 잡아들여버렸어. 본정리 입구 백마상 있잖어, 거기에서 농기구 압수허고 모두 해산시켰지.
필자)봉화재산 폭동은 좌익들이 집회를 한 것을 경찰이 출동해서 해산시킨 것에 불과하네요?
필자)아녀, 그렇게 끝났으면 간단허지. 그런데 해산소식이 원정리에 잘못 알려졌지. 본정리 사람들이 좌익들헌티 습격당했는디 도와줘야 한다고. 그려서 도와주러 오려다가 해산되었다는 말을 듣고 저녁을 먹고 있는디 원정리 사람들이 흩어졌던 좌익들이 안정리 비행장 근처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 거여. 그래서 안 되겠다 생각하고 다시 청년들을 모아서 본정리로 와 가지고 마을에 횃불을 걸어놓고 동네 사람들을 단속했지.
필자)물리적 충돌은 없었어요?
이)왜 아녀, 그렇게 되니까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벌해지더라고. 서로 함성을 올리며 기세를 올리기도 허고. 그러다가 서로 마을을 뛰어다니며 테러를 했지. 우리는 나이가 어려서 집안에서 꼼짝 못혔어. 새벽에 경찰이 출동혀서 총을 쏘면서 사태가 진정되었지.
필자)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이)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졌지. 사건이 끝나고도 마을청년들이 죽창을 준비해서 경계를 서고,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동네 입구에다 설치하고. 그 때 (폭동) 주동섰던 사람들 6.25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비행장(안정리 비행장)에서 총살시켰어. 24명인가. 그냥 놔두면 좌익한티 협조하잖어.
필자)6.25 때 인민군들이 내려오면서 우익마을들은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이)그랬지. 긴장 많이 혔어. 동네사람들이 알아서 소잡아 바치고 협조하고 겨우 살아남았어. 신대리가서 저녁마다 교육도 받았고. 수복 후에도 보복같은 거 안 했어.
필자)전쟁 때 죽은 사람들은 없어요.
이)조금씩은 죽었지. 그려도 서근보(석근2리)나 도두리 사람들만큼 죽지는 않았어. 우익마을이라는 것 땜에 살아남을려고 인민군에 자원했다가 죽은 사람은 많았지.
*해방 후 계양지역에서는 신대1리의 이OO씨 3형제가 가장 활발하게 좌익활동을 했다. 이씨는 일본에 유학한 뒤 돌아와 좌익 세포역할을 했다고 하며, 정부수립 뒤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때에는 다시 좌익에 기울어져 팽성지역 인민위원장을 했다고 한다. 계양지역 우익인사로는 서북청년단을 했던 도두리 정태진씨와 서북청년단 팽성면 단장을 지낸 원정리 방훈제, 그리고 1970년대 초 팽성면장을 지낸 유인열씨가 있었다. 정태진씨는 자유당시절 대한청년단 팽성면 단장을 지냈으며 마을 이장을 오랫동안 했다. (신대1리 정OO씨 증언)
*봉화재 폭동이 있던 날 오후 3시쯤 대추리 쪽에서 청년들이 몰려오며 원정리 서북청년단이 좌익들을 죽이러 온다며 신발을 벋어들고 손에는 호미같은 농기구를 들고서 쫓겨왔다고 한다. 그래서 도두리 사람들도 휩쓸려 봉화재산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밤에 경찰과 우익들이 총을 쏘며 쳐 올라와서 모두 붙잡아 해산시켰다. (도두리 박OO씨 증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