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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라구함보다 큰 나의 쓸모>의 줄거리:
'인간쓰레기'라는 단어가 그냥 분개할 때 내뱉는 말인 줄 알았는데 사전에 있더라고요. "사회에 해만 끼치고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랍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쓰레기 됨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역시 ‘쓸모’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몹시 궁금합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은 하는데 과연 내 인생의 쓸모는 어느 정도일까요? 인간 사회의 결정 말고 창조주의 결정에 따른, 나라 구하기보다 더 큰 내 인생의 쓸모를 확인해 봅니다.
나라 구함보다 큰 나의 쓸모
(예레미야 19:1~15)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3.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라 구함보다 큰 나의 쓸모>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라 구함보다 큰 나의 쓸모’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그룹은 취업준비생, 재수생, 사업에 실패하고 혼자 등산을 다니는 사람, 은퇴해서 여행이나 다니는 사람, 죽음을 앞둔 노인들입니다. 다른 한 그룹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판검사, 공무원, 교수, 대기업의 총수나 간부, 전문 분야에서 바쁘게 뛰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 두 그룹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그룹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고, 나중 그룹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많은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인생의 쓸모에 대해 어렵잖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 내에서의 기준으로 활용가치나 역할가능성을 염두에 둡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인생에 대해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기준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세상이 생각하는 쓸모의 기준으로 나의 상태를 평가합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게 해달라며 하나님께 울부짖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세상 쓸모의 기준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쓸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내 인생의 쓸모의 기준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 그룹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쓸모 있는 인생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한편 먼저 그룹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 영웅이나 위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이 생각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예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해봅니다.
부자는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거지인데 심지어 몸의 헌데를 개가 핥는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부자들이 식사 때에 빵조각으로 손을 닦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주워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자는 지옥으로 보내고 나사로는 천국으로 부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먼저 ‘나사로’라는 이름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쓸모 있기 위한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인간의 쓸모는 이 세상에서의 사회적 활동이나 역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쓸모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더불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을 최우선의 대상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 한 가지 쓸모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려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추앙 받는 위인이나 영웅이 아닙니다. 돈 많은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대통령감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쁨과 만족으로 여기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이 쓸모 있게 여기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세상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떤 일이라도 해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역할이 내가 생각해야 하는 인생의 쓸모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가족을 갖기도 하고 직장을 다니기도 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최우선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인간의 쓸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분리수거하십니다.
인간들 중에 쓰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쓰레기의 기준이 우리의 상식과는 다릅니다. 인간쓰레기라 하면 우선 감옥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런 사람은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고 욕하는 것은 일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감옥이라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하나님을 최우선의 현실로 인정하며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대통령보다도 이 죄수를 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인지 혹은 쓰레기인지를 결정하는 분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내용의 예를 드셨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무시당하던 세리나 창기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세리나 창기들이 하나님께 더 쓸모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혹은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은 사회의 지도자들로써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요새 우리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하나님이 크게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큰 목회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쓸모 있게 보신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개척한지 10년이나 됐는데도 교인이 10명밖에 안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목사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최우선의 대상으로 붙잡고 있다면 하나님께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제 보았던 토기장이 비유 끝에 깨뜨린 옹기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옹기를 하나 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옹기를 가지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함께 하시드 문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곳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이 예레미야와 동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같이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시드 문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질그릇 조각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문이 예루살렘성의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이 문이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이유는 이 동쪽 문이 예루살렘성 안의 생활쓰레기를 반출하는 문이었고, 그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이곳은 동문으로 나온 생활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으로 백성들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들 몇을 데리고 가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따라간 이들은 예레미야가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 자체가 하나의 상징적 예언입니다. 질그릇은 한 번 깨지면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질그릇 조각의 문으로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도 예루살렘성 안에서 발생한 생활쓰레기를 가져다 태우는 소각장이었습니다. 그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시듯이 선민들을 분리수거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쓰레기 취급을 당한 이들이 백성들의 어른들 즉 장로들이었고 제사장들의 어른 즉 대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고 있었고 쓸모가 많다고 여겨지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이러한 자들을 골라서 쓰레기 소각장으로 데리고 가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에 보면 사가지고 간 옹기를 바닥에 내쳐서 깨뜨리심을 통해서 이들을 버리시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드러내십니다.
물론 백성의 모든 지도자들이 다 쓰레기였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쓰레기 취급하시는 인간들에 대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심지어 그 쓰레기는 재생이 불가능한 깨진 질그릇과 같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예언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쓸모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왜 쓰레기 취급하셨던 것일까요? 또한 이들이 백성의 대표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유다 나라 전체가 쓰레기로 분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4절에 나타납니다.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곧 유다 땅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결하게 했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이방인의 땅으로 만들었다는 뜻이 됩니다. 선민들의 삶의 현장이 이방사람들의 삶과 똑같아졌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가 더럽혀진 것을 넘어서서 선민들의 삶 자체가 이방인처럼 되었기에 이제 이들을 인간쓰레기로 분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은 곧 풍습과 습관과 가치관이 전혀 다른 남의 나라입니다.
선민과 이방인들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선민은 곧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은 창세기 17장 1절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완전하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직장에 갑니다. 그 때에도 나는 단순히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서 깨닫고 있는지가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삶의 현장에서 지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최우선의 현실로 체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최우선의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방인과 선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였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라면 당연히 사장님 앞에서도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부장님 앞에서 야단을 맞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곧 이렇게 야단을 맞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체적 인도하심 아래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고방식에서는 부장님께 야단을 맞을 때에 우선적으로 부장님의 심기를 맞출 방법을 생각합니다. 반면 선민이라면 야단을 맞으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골리앗을 앞둔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이러했습니다. 사울은 이방인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골리앗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여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골리앗을 받아들이고 나자 하나님의 계획과는 관계없이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작은 소년이었기에 골리앗을 무서워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선적으로 체감하였고 그 결과 사무엘상 17장 45절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도 다윗처럼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들이 다윗처럼 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서 그러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듯이, 이들도 끝내 하나님을 우선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옹기를 사서 깨뜨리는 비유를 통해 이제는 쓰레기 취급하시겠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한 번 깨진 질그릇은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감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일까요?
5절을 보면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은 가나안 땅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믿어지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드리는 인신제사는 바알이 아닌 몰렉 신을 섬기는 풍습이었습니다.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드리는 이유도 결국은 바알이 관장하는 풍요와 다산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함께 지적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선민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마음이 풍요와 다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풍요와 다산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민들이 돌이키기를 바라시며 선지자를 보내서 깨우치시고 경고하시고 때로는 징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고 풍요와 다산을 마음의 붙박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자 하나님의 쓸모는 없어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쓰레기 분리수거작업에 나서시게 되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하시드 문은 깨어진 질그릇 조각의 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회생이 불가능함을 상징합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쓰레기 소각장이었습니다. 이곳으로 간다는 것은 회생 불가능한 쓰레기로 분류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살육당할 것에 대한 예언이 나타납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도벳 사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시체를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이 예언이 뜻하는 것은 기회의 상실입니다. 더는 하나님께서 쓸모를 기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은 기회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우선적으로 체감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육체로 만나는 것들보다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가 있기에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에 천사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기회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육체로 만나는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사랑하는 마음 상태라면 육체의 죽음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육체가 죽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쓰레기 분리수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신약성경에서는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라는 말의 어원이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들어가게 된 곳이 바로 게헨나입니다. 우리는 돈이 많은 부자들을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혹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았던 결과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돈이 없으면 쓸모없는 인간 취급당합니다. 사업하다 망하면 가족들에게서조차 찬밥취급을 받고, 돈이 없으면 부모취급도 못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자들에게 더 큰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위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의 가치를 그의 소유로 판단합니다. 반면 세상의 가치를 적게 소유한 자일수록 하나님을 갖기는 쉬워집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선민들은 풍요와 다산이라는 가치를 쥐고 있는 바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의 현장에서 체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이 없고 형편이 안 되어서 세상적인 가치를 마음에서 체념하면 하나님을 갖기에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쓸모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조차 세상적인 가치기준을 성경에 적용하면서 모세처럼 되고 요셉처럼 되고 다윗처럼 되어야만 쓸모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야 될 쓸모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 쓸모 있어지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인정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빛이 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먼저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면 참 역설적입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형은 쓸모없다고 판명난 자들만이 매달려서 못 박혀 죽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렇게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판명되어 죽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쓸모를 좇는 동안에는 결코 거지 나사로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전부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나의 쓸모를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지 결코 내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서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얻어야겠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쓸모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제사도 드리고 기도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쓸모를 결정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쓸모, 내가 신경 써야 할 쓸모는 한 가지 뿐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첫 번째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나머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에서 쓸모 있다고 여겨지는 마음을 죽여야만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할수록 삶에서 하나님은 점점 멀어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내가 하나님의 쓸모를 결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판명된 자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레기로 여기시기 전에, 스스로를 쓰레기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자꾸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는 동안에는 십자가에 역행할 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쓸모없는 남편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아내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부모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장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대통령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가 설령 감옥일지라도 실패한 자리에서 재수생의 자리에서 취준생의 자리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인간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참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는 쓸모 있는 인간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이제 하나님이 나를 뜻대로 사용해 가실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쓰실 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두세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라도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쓸모없는 자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쓸모가 없습니다.”라는 죽음의 고백을 반복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더 쓸모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라를 구하는 쓸모보다 하나님께서 더 크게 보시는 쓸모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쓸모를 위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쓸모없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