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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는 방황을 하는 마음들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설날 아침 시간입니다.
승이 매일 올리는 글로 인하여
이 글을 읽은 인연으로 삶이 더 윤택해 지고
마음이 더 풍족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서두에 제목을
‘정처 없는 방황을 하는 마음들’이라고 올렸습니다.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갖고 있는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마음까지 한없이 많은 방황을 하면서
뜬 구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계실 겁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정이 없어서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더 나은 것을 찾아서
마음이 정처 없는 방황을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쥐가 아무리 강물을 많이 마신들 얼마나 마시겠습니까?
우리 사람들에게도 각각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을 채우느냐 못 채우느냐에 하는
물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아실 거라 봅니다.
욕심쟁이 할머니가
많은 닭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닭 중에서 한 마리는 매일 알을 하나씩 낳았습니다.
다른 닭들은 알을 안 낳는 날이 많았지만
이 닭만은 매일 알을 하나씩 꼬박꼬박 낳았으므로
할머니는 특별히 그 닭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할머니는
이 닭에게 모이를 갑절로 늘려주면
알을 하루에 두 개씩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생각이 들자
할머니는 당장 닭의 모이를 갑절로 늘렸습니다.
닭은 모이를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습니다.
하루하루 몰라보게 살이 찌자
할머니는 두 개씩 낳으려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매일 한 개 밖에 낳지 않았으므로
할머니는 두 개를 낳을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닭은 알을 낳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쉬고 하루는 낳고 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놀라서 모이를 더 많이 먹였더니
닭은 더 살이 쪘습니다.
그러나 닭은 알을 두 개씩 낳지는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암탉은 살만 피둥피둥 찌더니
마침내 더 이상 알을 낳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 불자님들께서는
이 우화 속의 할머니를 어리석다고 탓할 자격이 있을까요?
냉정한 가슴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동을 비춰보면
이 할머니만을 어리석다,
욕심이 많다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은 그 할머니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런 병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더러는 이런 이야기 들어 보셨는지요?
전셋집에서 살 때는
오두막이라도 내 집 하나만 장만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더니
막상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고 나니
그것이 아니더라는,
《팔대인각경八大人覺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족 할 줄 모른다면,
오직 더 많은 것을 구해서
죄악만 키우는 결과가 된다.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늘 만족하고자 생각하고,
가난해도 편안히 머물러 도道를 지켜,
오직 지혜 닦는 일에만 정진해야 할 것을 안다.”
가난해도 편안히 머물러 도를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부유한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더 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바로 부자요,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더 가지려고
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불쌍한 가난뱅이입니다.
기왕 한평생을 사는데
일부러 가난뱅이 노릇을 사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금년 2023년에는 우리 다같이
‘줏대 있는 삶을 살자’는 것을 제안합니다.
줏대 있는 삶이란
주변 환경에 끄달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유행의 물결에 휩쓸려 살아왔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름도 모르는 괴상한 노래와 춤에 넋을 빼앗겨 버렸고,
나이 먹은 사람들도 주변 환경에 휩쓸려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생활들을 해왔다고 봅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떤 것이 그른지 가치 판단이 모호한 가운데
생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TV에 출현하는 배우들이 아닙니다.
주변 환경에 민감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莊子〉 양생편養生篇에
싸움닭에 관한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투계鬪鷄가 성행했다고 합니다.
투계鬪鷄란 다른 게 아니라 닭싸움입니다.
기성자紀省子라는 제나라의 현인이 임금을 위해서
싸움닭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싸움닭을 기르기 시작한 지 열흘이 되자
임금이 물었습니다.
“이제 싸울 만 한가?”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은 한창 되지 못하게 사나와
제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 임금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임금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나 기성자紀省子는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다른 닭의 소리를 듣고
그림자만 보아도 달려들려고 합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습니다.
임금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닭을 보면 눈을 홀기고
기운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을 때 임금이 묻자,
“이제 거의 됐습니다.
다른 닭이 소리를 쳐도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덕德이 온전하기 때문에
다른 닭이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나 버리고 납니다.”
우리 불자는
마치 완전히 숙달된 싸움닭처럼 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에 너무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옆집에서 새 냉장고 들여왔다고 해서,
옆집에서 외제 주방기구를 들여왔다고 해서
덩달아 멀쩡한 냉장고를 버리고
새것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눈은 새처럼 높은 것을 좋아합니다.
눈이 높은 것은 처녀 총각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좀 더 나은 것,
좀 더 좋은 것을 찾습니다.
귀는 자기에게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만 합니다.
못생긴 사람도 잘 생겼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칭찬은 좋아 하고,
나무람이나 비난을 싫어하는 것이
중생들의 귀입니다.
그러나 귀에 솔깃한 말일수록
자신을 해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혀는 달콤한 것을 좋아 하고 쓴 것은 싫어합니다.
이런 삶은 줏대가 없는 삶입니다.
주체적인 삶이 아닙니다.
피동적인 삶이요,
속아 사는 헛된 삶입니다.
아무리 부지런해도 올바른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면 평생 부지런을 떨어도 불만 속에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눈과 귀와 코, 등이
우리 감각기관이 좋다고 하는 대로 한 평생 살다보면
살아생전 분주다사하기만 하고 저승길은 험하고 험할 뿐입니다.
오늘부터는 참으로 뜻 깊은 한 해가 되시기 바라면서
모두가 행복 가득한 연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내일도 삶의 윤택을 위하여 이어집니다.
민족 고유의 설날에 글을 만나신 인연으로
이 글 보신 이후로는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차례 음식 준비를 승이 혼자 하려니
따끈따끈한 글은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2023년 01월 22일 오전 04:51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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