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 12. 18(월)
東岡先生文集卷之十七 / 行狀
■ 南冥先生行狀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찬
先生姓曺氏。諱植。字楗中甫。自號曰南冥。曺氏爲昌山著姓。高麗太祖神德王后生德宮公主。下嫁于曺氏。生刑部員外郞瑞。寔爲鼻祖。其後九世平章。代有偉人。先生以弘治辛酉六月二十六日辰時生。生有異資。早歲豪勇不羈。稍長喜爲文。務爲奇古。以文章自負。判校公每勉以擧子業。先生自雄其才。謂科第可俯取。年二十五。偕友人肄擧業於山寺。讀性理大全。至魯齋許氏語。有曰。志伊尹之志。學顔淵之學。出則有爲。處則有守。丈夫當如此。先生於是惕然警發。惘然自失。始牾從前所趣之非。而古人所謂爲己之學者蓋如此也。遂喟然發憤。竟夜不就席。遲明。揖友人而歸。自是篤志實學。堅苦刻勵。終日端坐。夜以達朝者累年。旣已博求經傳。旁通百家。然後斂繁就簡。反躬造約。而自成一家之學。嘉靖丁酉。先生年三十七。始斷棄擧業。一意吾學。屛居丘園。結茅水竹之間。謝絶世故。蕭然自適。由是潛修靜養。磨厲精神。而所造益以高遠矣。家世淸貧。先生授室于金海。婦家頗饒。先生旣蚤孤。遂奉母夫人。就養于海上。乙巳。丁憂。奉柩還葬于嘉樹。遂居本業。晩歲卜居頭流之德山洞。以定菟裘之計。先生以 中廟朝。用薦特除參奉。不就。 明廟嗣服。再除主簿。皆不就。乙卯歲。特除丹城縣監。又不就。上封事。略云。 殿下之國事已非。邦本已亡。天意已去。人心已離。 慈殿塞淵。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只是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何以收之耶。川渴雨粟。其兆伊何。音哀服素。形象已著。當此之時。雖有才兼周召。位居勻軸。亦末如之何矣。況一迷身才如草芥者乎。上不能持危於萬一。下不能庇民於絲毫。爲 殿下之臣。不亦難乎。號召勤王。整頓國事。非在於區區之政刑。惟在於 殿下之一心。汗馬於方寸之間。而收功於萬牛之地。其機在我而已。獨未知 殿下之所從事者何事也。好學問乎。好聲色乎。好弓馬乎。好君子乎。好小人乎。所好在是。而存亡繫焉。誠能一日惕然警悟。奮然用力。忽然有得於明新之內。則明新之內。萬善具在。百化由出。擧而措之。國可使均也。民可使和也。危可使安也。疏入不報。丙寅。朝廷大召名儒成運李恒林薰金範韓脩南彦經等。復以遺逸召先生。辭。再有旨敦諭。乃就徵。除尙瑞院判官。拜命。引對思政殿。 上問治亂之道。爲學之方。對曰。古今治亂。載在方策。不須臣言。臣之意以爲君臣之間。必情義交孚。然後可以有爲也。因極陳小民流移困頓之狀。 上又問三顧草廬事。對曰。諸葛亮。英雄也。非不能料事者。然與昭烈同事數十年。竟不能興復漢室。臣所不得以知也。先生意蓋謂孔明不當出來也。先生旣入對。卽發南還。不俟朝命。隆慶丁卯。 今上卽位。首下敎書。所以獎諭求助者甚至。已而。繼有旨。待日候溫暖。乘馹上道。先生再辭。初辭所志。有老甚病甚罪甚之語。又言宰相之職。莫大於用人。今乃不論善惡。不分邪正。再辭所志。略云。請以救急二字獻爲興邦一言。以代獻身。方今邦本分崩。百弊斯極。所宜大小急急。如救焚拯溺。罔或支持。而徒事虛名。論篤是與。幷求山野棄物。以助求賢美名。名不足以救實。猶畫餠之不足以救飢。請以緩急虛實。分揀處置。是時 主上方嚮儒學。諸賢滿朝。論說性理。而朝綱不振。邦本日蹙。先生蓋深念之。故奏及之。戊辰。又下旨趣召。辭。上封事。開陳君德。大抵以明善誠身爲要。而於其終篇。有云。臣前日所志。救急之言也。尙未聞天意感動。應以爲老儒賣直之言。不足以動念也。況此開陳君德。不過爲古人已陳之塗轍。然不由塗轍。更無可適之路矣。又言當今王靈不振。政多恩貸。令出惟反。綱紀不立者數世矣。非振之以不測之威。無以濟百散糜粥之勢。非潤之以大霖之雨。無以澤七年枯旱之艸。必得命世之佐。上下同寅恊恭。如同舟之人。然後稍可以濟頹靡燋渴之勢矣。又極言胥吏之狀曰。堂堂千乘之國。藉祖宗二百年之業。公卿大夫濟濟後先。相率而歸政於儓隷乎。此不可聞於牛耳也。軍民庶政。邦國機務。皆由此刀筆之手。絲粟以上。非回捧不行。方土所獻。一切沮抑。無一物上納。豈意 殿下不能享大有之富。而反資於僕隷防納之物乎。此而不厭。加以偸盡帑藏之物。靡有尋尺斗升之儲。國非其國。盜賊滿車下矣。夫以尹元衡之勢而朝廷克正之。況此狐狸鼠雛腰領。未足以膏齊斧乎。布列王國者。誰非命世之佐。夙夜之賢邪。姦臣軋己則去之。姦史蠧國則容之。謀身而不謀國。靡哲不愚。以樂居憂。臣索居深山。俯察仰觀。噓唏掩抑。繼之以淚者數矣。臣於 殿下。無一寸君臣之分。何所感於 君恩。而齎咨涕洟。自不能已耶。交淺言深。實有罪焉。獨計身爲食土之毛。尙爲累世之舊民。忝作三朝之徵士。猶可自比於周嫠。可無一言於宣召之日乎。疏奏。有旨優答曰。觀此格言。益知才德之高矣。當留念焉。己巳冬。以宗親府典籤召。辭。庚午正月。再召。又辭。朝廷虛位以待者逾年。竟不至。辛未夏。特命本路。宣賜米菽若干斛。以周其乏。先生上疏陳謝。因獻言君義云云。 上報曰。省覽疏章。可見憂國之誠。雖在畎畝。未嘗忘也。是歲臘月。先生寢疾。壬申正月。本路以疾聞。 上遣中使問疾。未至而先生易簀。二月八日也。是日。大風暴雪。天地昏暝。山頹斗隕。豈小變哉。訃聞。特命賜賻賜祭贈爵。壬申四月六日。葬于山齋後峯壬坐丙向之原。遵遺命也。夫人南平曺氏忠順衛琇之女。先五年卒。葬于金海。生一男。雋異。先生奇愛之。九歲而殀。一女適萬戶金行。生二女。長適權知承文院副正字金宇顒。次適士人郭再祐。旁室子三人。曰次石,次磨,次矴。女幼。嗚呼。先生可謂間世之英豪矣。雪月襟懷。江湖性氣。特立萬物之表。俯視一世之上。高識遠見。出於天資。臨機論事。發人意表。而憂時憤世。忠激義形。發於囊封奏對之間者。槪可見也。天性伉慨。未嘗俯仰於人。常與學士大夫。語及時政闕失。生靈困悴。未嘗不扼腕哽咽。或至流涕。聞者爲之竦聽。其拳拳斯世如此。然而由道守義。不肯自小以求用。安貧固窮。未賞自屈以從俗。故與世長辭。巖穴終古。使其未試於廊廟。而經綸之業。零落於煙霞。嗚呼。是孰使之然哉。其所得於性分之內。而亙萬古而不磨者。則初不以用捨而加損也。先生才氣甚高。豪邁絶人。議論英發。儀容峻厲。英毅之氣。達於面目。每對其儀形。接其言論。則放逸之心。偸懦之氣。自不敢萌于中矣。至其造詣之高。自得之妙。則有非汚愚管見所能測度而臆說之者。而姑卽其可見之實。則獨處書室。整齊瀟灑。書冊器用。安頓有常。終日端坐。未嘗見其隤隳傾倚之時。夜分就寢。亦未嘗昏睡。嘗語學者曰。夜中工夫儘多。切不可多睡。又云。恒居不宜與妻孥混處。雖有資質之美。因循汨溺。終不做人矣。其厲志自立。多此類也。其爲學也。略去枝葉。要以得之於心爲貴。致用踐實爲急。而不喜爲講論辨析之言。蓋以爲徒事空言而無益於躬行也。其讀書。不曾章解句釋。或十行俱下。至切己處。便領略過。其用功之篤也。常佩金鈴。以自警省。號曰惺惺子。蓋喚醒之工也。嘗以淨盞貯淸水。兩手捧之終夜。蓋持志之事也。又有短屛。畵先聖先師遺像。常置几案上。每對之。肅然如侍坐而後先焉。嘗模畫神明舍爲圖。以寓目存警。其銘曰。太一眞君。明堂布政。內冢宰主。外百揆省。承樞出納。忠信修辭。發四字符。建百勿旂。九竅之邪。三要始發。動微勇克。進敎厮殺。丹墀復命。堯舜日月。三關閉塞。淸野無邊。還歸一。尸而淵。其革帶銘曰。舌者泄。革者結。縛生龍。藏漠沖。其劍銘曰。內明者敬。外斷者義。其反己內修。篤信自力。類如此。其在金海。有書室曰山海亭。枕山臨海。幽邃而宏豁。名其房曰繼明。左右圖書。靜坐潛養。蓋三十餘年。嘉樹精舍。名曰鷄伏堂。取涵養如鷄抱卵之語。名書室曰雷龍舍。取尸居龍見淵嘿雷聲之語。山居精舍。亦揭名雷龍。書其旁曰。雷則晦冥。龍則淵海。使龍眠畫雷龍狀。一幅垂之坐隅。最後作書室曰山天齋。取易大畜之義。齋有板窓。左書敬字。右書義字。其敬字邊旁。細書古人論敬要語。常目擊而心念之。至於疾革之日。猶誦其語不絶口。寢疾逾月。精爽不亂。其與學者語。猶以行己大方。出處大節。諄諄不倦。疾甚則命旋席東首。揮婦人勿近。戒內外安靜。笑謂門人曰。死生常理耳。又曰。天祐之死。鳴琴鼓缶。羅列歌舞而化。此豈人情耶。渠不學故如是。某卻不要如此。天祐者。三足堂金先生大有也。嗚呼。觀其死生之際。確然不亂如是。則可見其平生問學之工。定力之固。有大過人者。卓乎其不可及已。其敎學者則有云。遨遊於通都大市之中。金銀珍玩。靡所不設。終日上下街衢而談其價。終非自家家裏物。只是說他家事爾。卻不如用吾一匹布。買取一尾魚來也。今之學者。高談性理。而無得於己。何以異此。又言濂洛以後。著述輯解。階梯路脈。昭如日星。新學小生。開卷洞見。至其得力之淺深。則只在求之誠不誠如何耳。又言吾於學者。只得警其昏睡而已。旣開眼了。自能見天地日月矣。以故未嘗爲學徒談經說書。只令反求而自得之。然其精神風力。有竦動人處。故從學者。多所啓發。卻非區區講說所能及也。頗喜看參同契。以爲極有好處。有補於爲學。至於陰陽地理醫藥道流之言。無不涉其梗槪。以及弓馬行陣之法。關防鎭戍之處。靡不留意究知。蓋其才高志彊而無所不學也。平生酷好山水。凡泉石佳處。遊歷靡遺。尤愛頭流山水之壯麗。至於十往來不厭。嘗與李黃江諸公遊頭流。有錄行于世。未嘗著書。只有讀書箚記要語。名曰學記。嗚呼。此特講學之規模。做功之次第。議論之緖餘耳。其用功則親切著明。要自確實頭做來。故其炯炯之心。烈烈之氣。卓立頹波。照映方來。而廉頑立懦於百世之下矣。章句小儒。寄命乎耳目。出入於四寸。而猶欲以學術議先生。至其臨小利害僅如毫髮。而張皇失措。進退無門。求其屹然獨立。毅然不拔如先生者。百未見一人焉。則於先生又胡可以輕議焉哉。小子蠡測。本不足以窺滄海之淺深。徒以從遊之久。其於行事之迹。瞷之最熟。粗述所見。庶幾備立言君子採摭之萬一云爾。 <끝>
--------------------------------------------------------------------------------------------------------------------------------------------------------
■ 김우옹(金宇翁)이 지은「남명선생행장(南冥先生行狀)」의 서사(敍事)에 대하여...
남명학연구 저자 : 최석기
초록
이 글은 김우옹(金宇翁)이 지은 .남명선생행장(南冥先生行狀)을 정인홍(鄭仁弘)이 지은 남명선생행장(南冥曺先 生行狀)과 비교 분석하여 서사(敍事/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시간의 연쇄에 따라 있는 그대로 적음)의 특징을 논한 것으로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서사구조의 측면에서, 김우옹은 전체를 생애-졸기-행적 세 부 분으로 나누고, 생애와 행적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서술하지 않았으며, 행적보다 생애에 더 치중하여 기술하였고, 남명의 자질과 교육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서사내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학문전환에 대해 정인홍은 爲學에 포함시켰는데 김우옹은 별도로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2)을묘사직소와 .무진봉사에 대해 정인홍은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김우옹은 주요 내용을 직접 인용하였으며,
3)도덕에 대해 정인홍은 심성수양을 통해 天德을 이룩한 점을 중시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資稟과 氣像에 중점을 두었으며,
4)공부에 대해 정인홍은 格物致知와 存養 省察을 모두 언급한 반면 김우옹은 省察克治에 중점을 두었으며,
5)학 문성취에 대해 정인홍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일가의 학문을 이룬 점을 서술했는데 김우옹은 自得과 致用實踐을 급무로 여겼다는 점
을 언급하였으며,
6)국가와 백성을 걱정한 점에 대해 정인홍은 소상하게 서술했는데 김우옹은 세상사를 잊지 못하는 측면을 간단하게 언급했으며,
7)교육에 대해 정인홍은 짧게 서술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말을 인용하여 상세히 거론했으며,
8)취향에 대해 정인홍은 언급한 것이 없는 반면 김우옹은 비교적 소상히 서술했으며,
9)전체적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道學者像을 부각시켰는데 김우옹은 남명의 자품과 기상을 바탕으로 高士像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
다. 2편 행장의 서사의 유사성을 검토한 결과, 김우옹이 먼저 행장을 지었는데 정인홍이 그 내용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다시 지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우옹의 「남명선생행장」을 성운의 묘갈명 및 곽종석의 묘지명과 개괄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1)구성비율의 측면에서 성운은 행적에 비중을 두었는데 김우옹은 생애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2)세부항목을 보면 묘갈명은 25개, 묘지명은 18개인데 비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은 13개로 현저히 적으며,
3)세부항목 구성 비율로 보면 성운과 곽종석은 항목을 두루 갖추어 서술하고 있는데 김우옹은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의 서사는 주요 항목을 특징적으로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우옹이 지은 「남명선생행장」에 대해서는 그 동안 별문제가 없다가, 근세에 남명의 후손 曺庸相이 ..德山碑理由.와 「先子門下敍述考
證」을 지음으로써 논쟁이 일어났다.
남명 후손들은 김우옹과 정인홍의 행장 및 허목의 신도비명에서 남명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해 남명의 순정한 도학에 대해 후세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바로잡으려 하고, 남명 문인의 문중에서는 자기선조의 글을 비난한 것에 대해 정면 대응함으로써 논쟁이 야기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