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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己巳世譜序(1)(栗隱公派)
김해김씨 기사(1989)세보서(1)(율은공파)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7. 金順大
族譜何爲而作也迺譜其族之史也有國無史莫能考垂統之傳也有族而無史莫能詳氏族之分也昔眉蘇氏之譜由是而設也哉
족보는 무엇 때문에 만드는가? 곧 보첩은 그 씨족(氏族)의 역사이다. 나라는 있는데 역사가 없으면 능히 국통(國統)의 전해 옴을 고증할 수가 없고, 씨족은 있는데 족보가 없으면 능히 종지(宗支)의 나누어짐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옛날에 미산소씨(眉山蘇氏)의 족보가 이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다.
由一人而兄弟分由兄弟而降爲功緦爲袒免則愈降疏愈疏則遠愈遠則不爲路人者無幾矣然則族可以無譜宇不譜其流必將忘先而不知族之其族矣可勝惜哉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형제가 나뉘고 형제로 말미암아 내려가서 공시[1]가 되고 단면[2]이 되어 더욱 내려가면 소원해지고, 더욱 소원해지면 멀어지고 더욱 멀어지면 길가는 사람이 되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 되겠는가. 그러니 씨족으로서 족보가 없어서 되겠는가. 족보가 아니면 그 흐름의 끝에 가서는 반드시 선조를 잊게 되어 일가라 하여도 그 일가인 줄을 알지 못할 것이니 애석함을 이기겠는가.
[1]공시(功媤) ; 오복(五服)의 제도, 공복은 4촌부터 6촌까지이고 사마복은 8촌(三從)까지를 말함
[2]단면(袒免) ; 왼쪽 소매를 벗고 머리에 삼으로 두르는 것 五服 이외에 親族을 말함
金海金氏之譜其來甚遠矣始自駕洛寇冕文獻在在相承今不可贅說而栗隱先生諱遜當麗朝改屋之際以忠節見稱而繫獄而晦名世無得而顯揚者屢百祀矣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족보는 그 유래가 심히 장원하다. 가락(駕洛)으로부터 시작하여 관면(冠冕 : 관직)과 문헌(文獻)이 끊이지 않고 이어 왔음은 번거롭게 말할 나위도 없는데 율은선생(栗隱先生) 휘손(遜)께서 고려(高麗)가 망할 때를 당하여 충절(忠節)로 일컬어졌는데 감옥에 구금되어 이름이 희미해지고 말았으니, 세상에 두드러지게 찬양되지 못한 사람이 여러 백 명이다.
士林之所景仰後孫之所追慕當復何如而栗隱公在天之靈蔭佑冥冥之中使其後裔蔚蔚乎東韓望族而且東史秘部屢閱於兵燹之餘而煥然復明於世豈不爲慈孫遹追孝思之所致乎
사림(士林)들의 높이 우러러 보는 바와 후손의 추모함이 의당 어떠하다 말할 나위가 없는데 율은공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어둡고 어둔 속에서 가만히 도움이 있으니 그 후손으로 하여금 번창하여 동방한국(東方韓國)에 명망있는 씨족이 되었고 또 동사(東史)의 일부가 비밀리에 보존되어 여러 번의 병화(兵火)의 여파에도 빛나게 다시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훌륭한 자손들이 추모하고 효도를 생각하는 결과라 하지 않겠는가.
今是譜累刊而今去甲午己卅載餘矣一代修譜適丁此時而後孫宗基斗瀅二友隨門意來余而索弁卷文顧余拙陋何可勝堪而辭謝不獲迺爲之復曰修譜之意者非直彰先德述世媺而己盖因此而孝悌之心友睦之誼豈不油然而生者乎
지금 이 족보가 여러 번 간행 되었으나 지난번 갑오(1954년)에 발간한 이후는 이미 30여년이 되었다. 한 세대에 한번 씩 족보를 편찬하는데 마침 이때가 되어서 후손인 종기(宗基)와 두형(斗瀅)의 두 친구가 문중의 의사로 나에게 찾아와서 서문(序文)을 지어 달라고 하니, 생각해보건대 나와 같이 마땅찮은 사람으로서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절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이에 반문하기를 「족보를 닦는 의사는 다만 선조의 덕업과 사적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대게 이로 인하여 효도와 우애의 마음과 돈목하는 정의가 어찌 왕성하게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昔程夫子曰管攝人心收宗族厚風俗惟在於修譜系孰敢曰不可而不副應哉謹書如此而歸之
옛날 정부자[1]께서 말씀하기를「인심(人心)을 다스리고 종족을 모우며 풍속을 두텁게 하는 것은 오직 족보를 편찬하는데 있다」 하니 누가 감히 불가(不可)한 일이라 하여 따르지 않겠는가. 삼가 이와 같이 써서 돌려보낸다.
[1]정부자(程夫子) ; 이천선생(伊川先生) 이름은 이(頤)
大韓光復後 初 己巳年冬 十月 上浣 仁同 張建德 序
대한광복후 처음 기사(1989)년 10월 상순에 인동 장건덕이 서문을 씀
己巳世譜序(2)
<내용 생략>
歲辛未淸明 後孫 鍾得 謹序
己巳世譜後考(3)
<내용 생략>
歲己巳季冬 後孫 鍾華 謹序
己巳世譜序(4)
기사(1989)세보서(4)
維我聖祖自天以降龜旨峯國號爲駕洛始開都邑綿綿十王四百九十餘年間王朝繼承其後新羅百濟及近朝歷經于今一族宗史近於二千載矣
우리의 성스러운 조상께서 하늘로 부터 구지봉에 내려오셔서 국호를 가락(駕洛)이라하고 처음으로 도읍을 여시고 면면히 10왕 490여년간 왕조(王朝)를 계승하시다가 그 후 신라, 백제와 근세의 조선을 거치니 지금까지 한 종족(宗族)의 역사로 거의 2000년이 되었다.
其間歷閱於榮枯盛衰然而子孫之繁昌共認我邦第一族其數計九百餘萬又分派數百矣誰能悉知總系譜矣
그간 영화롭고 욕되고 성하고 쇠함을 다 겪었으나 자손의 번창함은 우리나라 첫째가는 씨족(氏族)으로 공인될 만큼 그 수가 900여 만명에 헤아리고, 또 수백 파로 나누어진지라 누가 능히 그 전체 계보를 알 수 있으리오.
今而考我栗隱公派自麗末忠節之臣諱遜字豊城君栗隱公爲一代中始祖也落鄕于醴泉普門眉屹地卜居以來且五百餘年而愼守敬祖崇儒之美風勤勉讀書世祿簪纓可謂稱吾等駕洛族之白眉一派也
이제 우리 율은공파(栗隱公派)를 고찰해보면 고려말에 충절(忠節)의 신하였던 휘자를 손자(遜字)로 하는 풍성군(豊城君) 율은공(栗隱公)으로부터 일대(一代) 중조(中祖)로 삼았다. 예천의 고향으로 내려와 보문 미흘땅에 살 자리를 잡은 이래 또 오백(五百)여년이 되었고, 삼가 조상을 경모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미풍을 지키고 부지런히 글을 읽어 대대로 벼슬하니, 가히 우리 가락족의 대표적인 한 파라 말할 수 있겠다.
代過二十餘世其戶數千其數不計累萬矣互相疏遠親族無異於途上之人而或有辱鬪或甚於不測之不倫羞恥豈不嘆哉
대(代)수는 20여세(世)가 지났으니 그 집안이 수천이요, 그 수는 아주 많아 헤아리기 어려운지라 서로가 소원하여 친족이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때로는 욕하고 싸우기도 하고 혹은 심하면 말할 수 없는 비도덕적인 부끄러운 일까지 일어나는 수가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한가.
昔我有意先祖已修累回派譜正着其系然人生一代恒爲三十年以一期又至適年此難中之難事先念族丈諸位至誠發議修單計劃諸宗極參協贊知於己巳譜上梓之喜不肖微力鍾玉比於責務之重未及於半分之役有羞無言之地但以自不禁喜悅之心兼爲感謝於諸宗誠力一言蕪辭付之耳
옛날에 우리의 뜻있는 선조(先祖)님들이 이미 여러 번 보첩을 편찬하여 그 계통을 바르게 만들어 놓으셨으나 인생의 일대(一代)를 보통 30을 한 주기(一期)로 삼으니 또 다시 때가 되어 이 어렵고 어려운 사업을 앞서 염려하시는 족장(族丈) 여러분께서 정성껏 발의하여 수단계획을 하시고 여러 종친께서 적극 참여하시고 협찬하시어 드디어 기사보(己巳譜)를 인쇄하게 되었으니, 불초 미력한 종옥(鍾玉)은 그 책무의 막중함에 비하면 반분에 해당하는 역할도 담당하지 못했으니 부끄러움 말할 수 없으나, 다만 스스로 기쁜 마음을 억제할 수 없고 겸하여 제종의 성의있는 노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마디 거친 말을 붙일 뿐입니다.
添而託之俗謂珍珠三斗不聠不寶積架千卷無讀無價諸宗此譜牒勿爲止於書架裝飾有時得暇讀之敎之傳受聖祖偉業務爲睦宗睦族之誼契爲一層相互發展之禧伏望耳
덧붙여 드릴 말씀은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요 서가에 천권 책이 꽂혀 있어도 읽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하였으니, 제종께서는 이 보첩을 서가 장식품에 그치지 마시고 때때로 틈을 얻어 읽고 또 가르쳐 조상님들의 위업을 이어받고, 족친끼리 화목하고 서로 돕는데 힘써 한층 상호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歲己巳季冬 後孫 鍾玉 謹書
기사(1989)년 겨울 후손 종옥이 삼가 쓰다
凡例(범례)
一,惟我駕洛之金皆十一世十二王之遺裔則凡貫金海者迄今數千載而世代久遠文獻無徵世系中絶莫知其系於何葉故謹按所載東史只以 始祖王以下十餘代諱啣載錄而各立中祖修譜矣
오직 가락김씨(駕洛金氏)는 모두 11세(世) 12왕(王)의 후손이니 모두 김해(金海)를 본관을 삼은지가 지금까지 수천년이 되었으니, 세대(世代)가 오래되었고 문헌(文獻)을 모을 수 없으며 세계(世系)도 중간에 끊기었으므로 그 계통(系統)이 어느 세대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삼가 우리나라의 역사책에 기재된 바를 고찰하여 다만 시조왕(始祖王)이하 10여대에 휘함(諱啣)만 올려 기록하고 각 중조(中祖)를 세워서 족보를 편찬하였다.
一,惟我璿源世譜舊爲橫間細註矣今自 聖上追尊上諡號之後一依帝王家興禮書謚某王而改正大書長文以示尊重之法義焉
오직 우리 선원[1]세보(世譜)는 예전부터 가로로 칸(層欄)을 만들고 자세하게 주각(註脚)을 달았는데 지금 임금께서 추존(追尊)하여 시호(諡號)를 올린[2] 이후로는 한결같이 제왕가(帝王家)의 흥례서[3]에 시호 누구 왕(王)이라는 준례에 의하여 대서장문[4]으로 개정하여 존중(尊重)한 법의(法義)를 보였다.
[1]선원(璿源) ; 왕가의 계통
[2]시호를 올린 분은 임금이 아니고 1884년 許傳(1797~1886)께서 崇善殿神道碑文을 작성하면서 지어 올린 것이 분명하다.
[3]흥례서(興禮書) ; 왕의 연보를 꾸민 문서
[4]大書長文 ; 줄로 크게 씀
一,中祖諱字上不敢加姓字者重繼承之至義也凡於本宗外必書姓字所以表別內外氏族也
중조의 휘자 위에는 감히 성자(姓字)를 쓰지 아니한 것은 계승(繼承)하는 지극한 의리를 소중하게 여긴 것이고, 대체로 본종(本宗)이외에는 반드시 성자(姓字)를 쓴 것은 내외손(內外孫)의 씨족(氏族)을 표시하여 분별한 것이다.
一,栗隱公派世譜 中祖栗隱公下繼節堂退愼齋兩代諱號官爵舊譜不載而今爲大宗家遺箱古蹟中發見故攷據東史麗史而釐正焉
율은공(栗隱公)파의 세보는 중조(中祖) 율은공(栗隱公,휘佇) 아래에 계절당(繼節堂,휘鈿)과 퇴신제(退愼齋,휘㺶)의 양대(兩代)의 휘호(諱號)와 관작(官爵)이 구보(舊譜)에 기재되지 않았는데 지금 대종가(大宗家)의 오래된 상자속에서 옛 사적이 발견 되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역사채과 고려사(高麗史)를 근거하여 개정하였다.
一,各位下書字書號及生卒官爵實行顯蹟而行職書於年下贈職書於忌日下壽職必書壽蔭職必書蔭或筮字墓陰記墓碣下某人撰某人書隨所載錄焉
각위(各位)아래에는 자(字)․호(號)및 생졸(生卒)․관작(官爵)․실행(實行)․현적(顯蹟)을 썼으며 행직(行職)은 연조(年條) 아래에 쓰고 증직(贈職)은 기일(忌日) 아래에 쓰되 수직(壽職)은 반드시 수직(壽職)이라 쓰고 음직[1]은 반드시 음직(蔭職)이라 쓰고 간혹 서자[2]도 기록하였으며 묘표음기[3]와 묘갈명(墓碣銘) 아래에는 누가 짓고 누가 썼다고 이에 따라 기록하였다.
[1]음직(蔭職) ; 조상의 벼슬로 받는 벼슬
[2]서자(筮字) ; 처음 벼슬길에 나감
[3]묘표음기(墓表陰記) ; 비석 후면에 새김
一,內外子孫凡於王后妃嬪雖外外遠孫必爲記載前式而空圈於本欄內特書於高一層或紙頭如某祖某宗要之別君尊而臣卑焉
내외자손에서 무릇 왕후(王后)와 비빈[1]이 있으면 비록 외손에 외손의 아주 먼 자손이라도 반드시 기재하되 전의 법식대로 본란(本欄)의 안에는 비어두고(空圈) 한층(一層)을 높이거나, 혹 종이 윗부분에 어느 임금(某祖) 어느 임금(某宗)이라고 특서(特書)하였으니 요약하자면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기 위해 분별한 것이다.
[1]비빈(妃嬪) ; 세자의 아내
一,忌辰年月日俱備則書卒 字於日下只有月日則書忌字於月日上焉
기일(忌日)의 년(年)․월(月)․일(日)을 구비하여 기재한 것은 졸자(卒字)를 일자(日字) 아래에 쓰고, 다만 월․일만 있는 것은 기자(忌字)를 월․일 위에다 쓴다.
一,無男而不立后只有女婿則書以無嗣子女俱無而不立后則書無后年久無徵之派必書子孫無傳
아들이 없으나 입후(양자)하지 못하고 다만 사위(女婿)만 있으면 무사(無嗣)라고 쓰고, 자녀가 모두 없고 입후(立后)하지 못하였으면 무후(无后)로 쓰고, 연대가 오래 되어 고징이 없는 파(派)에는 반드시 자손의 전함이 없다(子孫無傳)고 쓴다.
一,本宗繼后子於本生名下書系某親某后於所后下直書以子者取禮記爲人后者爲人子之義也書生父某
본 종의 계후자(양자)는 태어난 곳의 이름 밑에 어느 부친의 누구의 뒤를 이었고(系), 양부의 이름 밑에는 자(子)라고 써서 예기(禮記)에서 사람의 아들이 된 도리를 따랐고 더불어 생부가 누구인지도 썼다.
一,每張印掛十擴間設六層自一世起頭至六世更爲起頭其序次則一家畢後更起一家仍舊式也
각 장(每張)에 인쇄의 줄 수는 가로가 열줄이며 중간에 6층(六層)을 만들어 일세(一世)로부터 세워서(起頭) 6세까지 이르면 다시 세워(起頭) 순서를 매겼고, 한 집안을 마친 후에 다시 한 집안을 일으키는 구보(舊譜)의 법식(法式)을 인용하였다.
一,千字文排列一卷天二卷地天字下書數字以天數考閱無紊焉餘皆以此爲例焉
천자문(千字文)을 배열하여 1권(一卷)은 천(天)이라 하고 2권(二卷)은 지(地)라고 하였으며 천자(天字) 아래에는 수자를 써서 천(天)의 몇이라 하여 참고하고 열람하기에 어려움(紊亂)이 없게 하였으니 나머지는 모두 이것으로서 예를 삼았다.
一,子女不用行次必以先男後女書爲重宗之道也古有嫡庶之分不計年序書諸嫡子女之下今序次以書之小無別焉
자녀(子女)에는 출생한 순서를 따르지 않고 반드시 남자를 먼저 쓰고 여자를 뒤에 써서 종족(宗族)을 소중하게 여기는 도리를 위하였고, 예전에는 적서(嫡庶)를 분간하는 제도가 있으므로 나이의 순서를 계산하지 않고 적자녀(嫡子女) 아래에 서자녀(庶子女)를 썼는데 지금은 나이의 순서로 써서 조금도 분별하지 않았다.
一,或生室死配而吾金則而配全書配位下必書貫鄕及父顯祖俾知某閥女婿下亦如之舊爲外孫俱姓大書層則而在六層則又起頭而系之今爲橫間小註而書焉
간혹 생존한 아내에는 실(室)이라고 하고 사망한 아내에는 배(配)라고 하는데 우리 김씨(金氏)는 전체를 배자(配字)로 쓰고 배위(配位) 아래에는 반드시 관향(貫鄕) 및 부(父)와 현조[1]를 써서 하여금 누구의 문벌(門閥)임을 알게 하고, 사위(女婿) 아래에도 역시 이대로 썼다. 구보(舊譜)에는 외손(外孫)도 성명(姓名)을 모두 크게 쓰고 6층(六層)에 있었으며 또 다시 다음 사람을 세워서(起頭) 이었는데 지금은 옆 칸에 작은 주석(小註)으로 쓴다.
[1]현조(顯祖) ; 훌륭한 조상
一,我本派中或有漏單子只書其分派之祖以俟後考若无后則必書無后以防後世冑屬焉
우리 본파 중에서 혹 누락한 단자(單子)가 있으면 다만 그 분파의 조상만 써서 후일에 상고하기를 기다리고, 만일 무후(无后)이면 반드시 무후(無后)라고 써서 후세(後世)에 맏아들로 다른 사람이 붙는 것을 방지한다.
一,金海之金有金濂卽新羅敬順王之孫高麗初封金海君移貫於金海又有慕華堂金忠善之金 宣祖壬辰賜姓金海之金本姓沙也可亦非駕洛之金明矣勿許同譜
김해김씨에 김렴(金濂)이라는 분이 있으니 즉 신라경순왕(新羅敬順王)의 손자로서 고려초기(高麗初期)에 김해군(金海君)을 봉하여 김해(金海)로 관향을 삼았고, 또 모화당(慕華堂) 김충선(金忠善)의 김씨가 있으니 선조(宣祖) 임진(1592년)에 김해김씨로 사성(賜姓)받았으며 본성(本姓)은 사야가(沙也哥)로서 역시 가락김씨(駕洛金氏)가 아님이 명백하니 동보(同譜)를 허락하지 말 것이다.
一,名號之重疊者隨單而書之無以改正後覽者恕焉
이름과 호가 중첩된 자는 단자(單子)를 따라 쓰고 고쳐 쓰지 않았으니 뒤에 열람하는 자는 용서가 있기 바란다.
一,凡於行列古無預定之規雖至親名字別無同行之定例有非敦睦之義故一遵近世普通之規五行相生之理定行字別序次焉
대체로 항렬자에 있어서는 예전에는 예정된 규칙(規則)이 없었으므로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도 이름자에 별도로 동항(同行)의 정례가 없었으니 돈목하는 본의(本意)가 아니기 때문에, 한결같이 근세(近世)에 보통 규칙인 오행상생[1]의 이치를 준수하여 항렬자를 정하여 순서를 분별하였다.
[1]오행상생(五行相生) ;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一. 학력(學歷)과 직급(職級)은 남녀(男女)를 구별(區別)하지 않고 전문대졸업 (專門大以上)부터 쓰고 직급(職級)은 군인(軍人)은 위관(尉官)이상 사무관(事務官) 이상 조합(組合)과 회사종사원(會社從事員)은 그 직급(職級)에 따라 기록하였다.
一. 출생(出生)의 연조(年條)는 조선(朝鮮)에는 왕호(王號)를 기재(記載)하고 근세(近世)에는 간지(干支)와 서기(西紀)를 병기(倂記)했다.
一. 본보(本譜)의 특징(特徵)은 계도(系圖)로써 색인(索引)에 활용(活用)토록 하였다.
甲寅世譜序
갑인(1974)세보서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7. 金順大
眉湖金氏之譜始自駕洛而其來也遠且久矣千載之下盖其文獻在在今不敢疊架贅說前大護軍初諱佇賜名遜眉湖金氏之顯祖也
미호김씨(眉湖金氏)의 족보가 가락(駕洛)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유래가 멀고도 또 오래 되었다 하겠다. 천년(千年)이 지났으나 대체로 그 문헌(文獻)이 모두 남아 있으니 지금 감히 쓸모없이 덧붙여서 말하지 않는다. 예전에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처음 휘는 저(佇)이고 하사받은 이름은 손(遜)이라 하는 어른이 계시니 미호김씨의 현조이다.
粤在麗王改屋之際以忠節坐於時諱生而繫獄沒而晦名幽宅無傳焉則設壇而祭之殆五百有餘{示異}矣爲其後裔者豈不慟嘆也哉
옛날 고려왕실이 무너질 때에 있어서 충절(忠節)로 시휘[1]에 연좌되어, 살아서는 감옥에 갇히고 돌아가서는 이름까지 숨겨지고 묘소도 전하지 못하였는데, 단소를 창설하고 제사를 받들어온 지가 자못 500여년이 되었으니 그 후손이 된 자로는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1]시휘(時諱) ; 당시에 미움을 받음
夫松竹不爲霜雪所改節卽護軍公在天之靈黙佑於冥冥之中使其子孫蔚然爲吾鄕望族且一部東史纂要亦不爲兵燹虫鼠之所災而公之秘跡復明於今世豈非金氏之孝感所致歟
대체로 송죽(松竹)은 서리와 눈을 맞아도 절개를 고치지 아니하니 호군공(護軍公,휘佇)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어둡고 어둔 가운데서 묵묵히 도와서 그 자손으로 하여금 번성하여 우리 고장에 명망있는 씨족이 되었다. 또 일부의 동사찬요[1]가 또한 병화와 좀벌레로 인하여 없어지지 않아 공의 비밀 사적이 다시 지금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김씨(金氏)들의 효감(孝感)에 이룬 바가 아니겠는가?
[1]동사찬요(東史纂要) ;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오운(吳澐,1540-1617)이 1609년 편찬한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 본 동사찬요에는 휘저의 내용을 찾을 수 없으니 아마도 여기서는 휘저의 가문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말하는 것 같음.
在此滄桑之世不可遷延一門齋聲協力以吳公所著添入譜牒使遠近諸族各奉一帙可以闡揚先誌永垂來裔也此金氏之所望
이러한 창상[1]의 세대에 있어서 미루고 있을 수가 없다하여 한 문중이 같이 성원하고 협력하여 오공(吳公)[2]이 저술한 것을 보첩에 첨가해 넣어 원근에 여러 종족(宗族)으로 하여금 각각 한질씩 모시게 하였으니 가히 선조(先祖)의 문적을 드날리고 앞날의 자손에게 드리웠다 하겠다. 이것은 김씨(金氏)들의 바랐던 바이다.
[1]창상(滄桑) ; 바다가 뽕밭되고 뽕밭이 바다가 됨 곧 세상의 변천을 말함
[2]오운(吳澐) ; 위의 동사찬요를 저술한 사람
譜旣成鍾得斗會擇基斗玉斗鴻斗永宗基斗瀅謬屬弁文於不佞不佞早孤失學病伏窮巷僅保喘息安敢自知其非而犯此不偉之誚乎固辭不得則擧其平日所感者數語叙之如右未知金氏之意何如耳
족보가 이미 이루어지니 종득․두회․택기․두옥․두홍․두영․종기․두형이 찾아와 서문(序文)을 불녕[1]한테 부탁하니 불녕이 일찍 고아가 되어 배우지 못하고 병들어서 궁벽한 마을에 엎드려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그것이 아니 될 줄 알면서 이같이 커다란 책망을 범하겠는가? 굳이 사양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 평상시의 소감의 몇마디를 오른쪽(위)와 같이 서술하였으나 김씨(金氏)의 의사는 어떠한지 알지는 못하겠다.
[1]불녕(不佞) ; 자기를 겸칭하는 뜻 재주가 없다는 것
駕洛紀元一九三三年甲寅正月下澣 後學咸陽朴魯學 謹序
가락기원 1933년 갑인(1974)년 정월 하순, 후학 함양 박노학은 삼가 서함
甲午世譜序
갑오(1954)세보서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7. 金順大
東方譜法未知昉於何代而余觀人家譜例類多詳於近世而畧於遠代是非故欲其畧也盖以譜法未行之前文獻無徵而世代荒遠雖欲詳之而不可得也
동방(東方)의 보법(譜法)이 어느 세대에 시작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내가 보건대 사람들의 집에서 족보를 하는 예가 대체로 가까운 세대에는 상세하고 먼 세대에는 간략하니 이게 무슨 이유로 간략하게 하는가? 대체로 족보의 법이 성행하기 전에는 문헌(文獻)의 고징이 없고 세대가 요원하여 비록 자세히 하려고하나 얻을 길이 없다.
以此而配位生卒墓所俱爲失傳而至或序代差誤有以疑傳疑之恨譜之不可不修有如是
이래서 배위(配位)와 생․졸(生卒)이며 묘소가 모두 실전하여 혹은 대수의 착오도 일으키는 데에 이르게 되어 의아하므로 의심을 전하는 한이 있더라도 족보를 편찬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이와 같다.
夫往歲余寓酒泉得與眉湖金氏諸君子遊聞其宗君世基得家譜小帖於古篋堆紙中見其中世代序與現行世譜有錯誤以其中經禍變攷據失當故耳
지난해에 내가 주천(酒泉)에 살면서 미호(眉湖)에 사는 김씨(金氏)의 여러 군자(君子)와 더불어 같이 지내면서 그 종손 세기(世基)가 가보(家譜)의 작은 책자를 옛 상자속 휴지에서 찾았다는 말을 듣고 가보았는데, 그 가운데에 중세(中世)의 대수를 보니 지금 현행 세보(現行世譜)에는 착오가 있으며 그 중간에 변란을 겪었고 고징(考徵)에 필요한 근거를 잃었기 때문이다.
卽惕焉謀諸宗釐正而刊新譜是壬申譜也今距壬申纔二十三年而又發慮修譜儘可謂懲前而慮後者乎
곧 울적한 마음으로 여로 종친들과 정리하여 새로 족보를 발간하기로 모의 하였으니 이것이 임신보(1932년)이다. 지금 임신년을 지낸지가 겨우 23년인데 또 수보(修譜)할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앞을 징계삼아 후일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金氏駕洛國王之後新羅時有太大舒發翰興武王有統合三韓之功而代序無傳
김씨는 가락국왕의 후손으로서 신라 때에 태대서발한 흥무왕(太大舒發翰興武王)이 계시어 삼한(三韓)을 통합한 공로가 있었으나 세대는 전함이 없다.
高麗末有吏曹典書栗隱先生謀復驪興廢主事覺而死於獄其子贊成公見麗社屋憤恚不食而殉其孫侍中公入杜門洞三世特節前吏所罕見爾
고려 말기에 이조전서 율은선생(吏曹典書栗隱先生)께서 여흥(驪興)으로 폐위된 임금(禑王)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중에서 돌아갔는데, 그 자제 찬성공(贊成公,휘鈿)이 고려가 망함을 보고 분개하여 먹지 않고 순절하였다. 그 손자 시중공(侍中公,휘㺶)은 두문동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으니 3대에 특별한 절의(節義)는 이전의 관리로는 보기 드문 바이다.
後簪組文學式世不絶輝映譜牒盛矣哉然而譜之所以作非直爲彰先徽述世德而己盖欲因此而勸友睦之道也
그 후로 벼슬(簪組)과 문학이 대대에 끊이지 않아서 보첩(譜牒)에 휘황찬란하게 성대하였다. 그러나 족보를 제작하는 이유는 다만 선조의 아름다운 업적을 밝히고 세덕(世德)을 기술하는데 그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이 족보로 인하여 우애와 돈목의 도리를 권장하려 함이다.
夫自一人而分爲兄弟兄弟而分爲再從三從而至於宗易派分而其本則乃一人也血脈相通性氣相類其於好惡悲歡獨不可以相同乎
본래에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누어 형제가 되고 형제에서 나누어 6촌(再從)․8촌(三從)이 되어 종중(宗中)이 바뀌고 파(派)가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그 근본은 바로 한사람이다. 피와 맥박이 서로 관통하고 성질과 기미가 서로 같으니 그 좋아하고 미워하며 슬프고 기쁜 것이 유독 서로 같지 않겠는가.
其所以不能者口腹耳目之私害之也今有人遇人於千里之外而聞姓貫之同則未暇論派分遠近而情愛自別者良心之所發也
그러나 서로 능숙하지 못한 이유는 말하고 먹는(口腹) 욕심과 듣고 보는(耳目) 사사로운 것의 해악 때문이다. 지금 어느 사람이 있어서 누구를 천리 밖에서 만났으나 성명과 본관이 같다는 것을 들으면 파가 나누어지고 멀고 가까운 것을 논할 여지도 없이 정과 사랑이 저절로 분별하게 되는 것은 양심(良心)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况其聯名於一譜而爲同派之親者豈不油然生友睦之心乎此心生而憂而共憂樂而同樂者自不能己矣吾知金氏慕先敦族之風將於是譜乎而益篤矣不亦媺乎
하물며 한 보책에 이름이 같이 실려 같은 파의 친족이 되는 자는 어찌 우애와 돈목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이 마음이 생겨나게 되면 근심스러운 것은 같이 근심하고 즐거움에도 같이 즐거워하게 되어 혼자로서는 불가능 할 것이니, 내가 알고 있는 김씨들은 선조를 사모하고 일가에 돈목하는 풍속을 장차 이 족보로 인하여 더욱 돈독해 질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程子曰管攝人心收宗族厚風俗惟在於明譜系旨哉言乎譜旣成金君世柄以其門父老之意問序於相圭顧耄弊不堪而深感其緊囑之意敬爲說還之云
정자[1]가 말씀하기를 「인심을 다스려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것은 족보의 계통(系統)을 밝힘에 있다」하였으니 긴요한 말씀이라 하겠다. 족보가 이미 만들어지니 김군 세병(金君世柄)이 그 문중의 어른(父老)의 의사를 따라 나 상규(相奎)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하니 돌아보건대 늙어서 폐를 끼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나 긴히 부탁하는 뜻에 감사하여 공경으로 서문을 써서 돌려보냈다.
[1]정자(程子) ; 송나라 육현중 한분으로 이름은 頤
歲甲午之重陽月旣望 永嘉權相圭謹序
갑오(1954)년 9월(重陽月) 16일(旣望)에, 영가 권상규가 삼가 서함
壬申世譜序(1932년 임신세보 서)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3. 金順大
南唐江文蔚渡江以一葉亂流望洋嘆曰惟知水哉而不知源出於一脈黃河之大則安知其江漢朝宗之義乎人有朝宗之事業嵬赫於當世而后承綿遠不能識認則何異於此哉
남당 강문울[1]이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흘러가는 강을 건너다가 바다를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로지 물의 이치를 안다면서 원천이 한 맥에서 나온 것을 알지 못한다면, 황하(黃河)와 같이 큰물도 어찌 모든 강물(江漢)이 흘러 들어와서 된 이치(朝宗之義)를 알겠는가. 사람으로도 서로 모여야 할 사업이 있으니 당세에 우뚝하고 혁혁하였으나 후손이 이어 가면서 능히 인식하지 못하면 무엇이 여기에 다를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1]강문울(江文蔚) ; 중국 南唐시대 建陽縣에 살았는데 江州로 폄박되었다가 禮部朗에 옮겼다.
余近觀眉湖金氏修嵋蘇古事而始得栗隱先生卓行偉蹟之詳尤有感焉先生在勝國之季衛社之勳殉國之忠著載麗史
내가 근래에 보니, 미호에 사는 김씨가 미소(嵋蘇 : 蘇洵)의 옛일(족보의 일)을 하다가 비로소 율은선생[1]의 탁월하고 위대한 행적의 상세함을 얻게 되어 더욱 감상이 있으니, 선생께서는 나라(高麗)의 말기에 사직[2]을 보위한 훈업과 국가를 위하여 순절한 충성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1]율은선생(栗隱先生) ; 휘손(遜, 초휘는 저(佇) ,1304~1389)
[2]사직(社稷) ; 나라의 사당으로서 그 명맥을 말함
夫人慶州金氏殉從於三日之內及其麗運告訖其胤繼節堂公憤恚不食而終守夷齋之義孫退愼齋公自靖其身竟遂不朝之志一門三世炳炳特節層現而續發吁亦奇且偉哉
그 어른의 부인인 경주김씨(慶州金氏)가 3일 이내에 순종[1]하였는데, 마침내 고려의 국운이 망함에 이르러서는 그 자제 계절당(繼節堂, 鈿) 공이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식음을 폐하고 마침내 백이숙제[2]의 의리를 지키었고, 그 손자 퇴신재공(退愼齋公, 㺶)도 그 몸을 자정[3]하고 마침내 조선의 조정을 섬기지 않을 뜻을 이루었으므로, 한 문중에 3대가 빛나고 빛나는 특별한 절의가 층층으로 계속하여 발생하였으니 아! 기이하고도 위대하다고 하겠다.
[1]순종(殉從) ; 죽어서 남편을 따름
[2]백이숙제(伯夷叔齊) ; 古竹君의 二子로서 殷나라가 망하매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주려 죽었음
[3]자정(自靖) ; 의리를 지키어 혁명한 나라에 벼슬하지 않음
其後栗湖公卜居于湖子姓之昌熾蓮桂之蟬赫世而益顯儘所謂源遠而流長也矣目今山河異昔龍漢屢嬗人類氏族之推原明系不其急務乎
그 후에 율호공[1]께서 미호(眉湖)에 이주하여 살았으니 자손이 번창하여 연화(蓮花)와 계수[2]가 선명하고 혁혁하여 대대로 내려오면서 더욱 현달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원천이 깊으니 흐르는 물이 장원한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 산하[3]가 옛날과 다르므로 용한[4]이 여러 번 변천 되었으니 인류(人類)의 씨족으로서 근본을 추측하여 계통(系統)을 밝히는 것이 그 급선무가 아니라 하겠는가?
[1]율호공(栗湖公) ; 諱계원(繼元,1455~1527)
[2]계수(桂樹) ; 문중이 훌륭하였음을 비하여 말한 것
[3]산하(山河) ; 국가를 비유하는 말
[4]용한(龍漢) ; 우리의 국토
眉湖金氏此役有見於此矣譜旣成其宗君世基及斗鎬斗復甫奉門丈老之命囑以弁卷之語顧余拙陋何敢當是任也
미호에 사는 김씨의 이 일(수보)이 이때에 보이게 된 것이다. 족보가 이미 이루어지니 그 종군세기(宗君世基) 및 두호(斗鎬) 두복(斗復)이 문중 어른들의 명령을 받들고 찾아와 책머리에 서문(序文)으로서 부탁하니, 돌아보건대 나와 같이 졸렬하고 비루한(拙陋)한 사람으로 어찌 감히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겠는가.
夫譜也者推祖宗之所自出明後昆之所由分辨昭穆而不錯敦孝悌而實行溯而上之知由乎一人之身疎而遠之而不至塗人之歸使不百其派不億其麗一開卷而瞭然於心目者莫譜若也
대개 족보라 함은 조상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추측하여 후손들이 어떻게 나누어졌는가를 밝히고 소목[1]을 분별하여 착오없이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하고 실행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 유래를 아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몸이 소원하게 되어 길가는 사람과 같은 데에 이르지 않고 백(百)에 가까운 파(派)와 억(億)이 넘는 자손으로 하여금 한번 책을 열고 보면 마음과 눈에 명료(明瞭)해 지는 것이 족보와 같은 것이 없다.
[1]소목(昭穆) ;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편을 소(昭), 오른편을 목(穆)이라 하며, 시조의 신주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심.
今玆之役雖不係於大同之規模而止於栗隱先生一派之作爲先生之卓節大義子孫諸公之懿行美蹟未免於曠世湮沉而大得闡明於今日玆豈非慈孫之萬幸也耶
지금 이 족보의 공사가 비록 대동보(大同譜)의 규모에는 관계되지 않고 율은선생의 일파에 국한하여 제작하고 있으나, 선생의 탁월한 절개와 큰 의리며 자손 제공(諸公)의 아름다운 행실과 사적이 오랜 세대에 침몰되지 않고 크게 오늘날에 천명(闡明)되었으니 이에 어찌 사랑스러운 자손들의 만번이나 다행함이 아니겠는가?
此雖出於祖宗幾百年積德累仁之報而今日諸公之述先懿裕後謨之道並擧而母隳一心協力期克有終則亦足爲欽艶不置玆敢忘其僭猥書此而歸之
이것이 비록 조상의 몇 백년을 덕(德)을 쌓고 인(仁)을 심은 보답에서 나왔다 하겠으나 오늘에 제공(諸公)들의 선조에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고 후손을 감싸주는 도리를 아울러 거행하여, 무너뜨림이 없고 일심협력하여 잘 마침이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충분한 공경과 부러움을 다 쓰지 못하고 여기에 감히 참람하고 외람됨을 잊고서 이대로 써서 돌려보낸다.
昭陽作噩仲呂上旬 冶城宋啓欽 謹序
소양(昭陽 : 癸) 작악(作噩 : 酉) 1932年 중려(仲呂 : 4월의 이칭)
야성 송계흠(冶城宋啓欽)은 삼가 서문을 지음
壬申世譜後叙(1932년 임신세보 후서)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3. 金順大
李翶氏有言曰先祖有美而不知罪也斯言也誠爲吾家百世之至痛吾祖殉麗之日今距五百四十年之久吾祖后血續相傳洎不肖亦十九世矣
이고씨[1]의 말에 이르기를 「선조가 아름다운 사적이 있는데 알지 못함은 죄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우리 집안에 백세를 내려오면서 지극히 통탄함이 된다. 우리 선조께서 고려(高麗)를 위하여 순절한 날이 지금에 540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고, 우리 선조의 혈속인 후손들이 서로 전해져 이어져서 불초(不肖)에 이르러서 또한 19세(世)가 되었다.
[1]이고(李翶 ; ?~844); 당나라 시대 성리학의 개창자, 유교사상의 본질이 본성을 밝히는 데 있음을 천명함.성품이 강직하여 세상에 순응하지 못했다 함.
其間經術文章碩德耆舊圭組軒冕項背相望而先祖實蹟歷世茫然何莫非文獻無徵故耶自先世兩遭毒火屢嬗魚河之怯而來雲綿綿墜緖茫茫竟不免李翶氏之所譏則子孫之痛症無己時
그 사이에 경술(經術)[1] 문장(文章)이며 석덕기구(碩德耆舊)[2]의 높은 벼슬이 항배(項背)[3]로 서로 바라 볼 정도였는데 선조의 실적(實蹟)이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막연하게 되었으니 어찌 문헌(文獻)의 고징이 없기 때문이라 하지 않겠는가? 선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두 번이나 혹독한 화재를 만났고 여러 차례 어하(魚河)[4]의 난리를 지내면서 자손이 면면(綿綿)히 이어오니 선조의 업적이 아득하여 마침내 이고씨(李翶氏)가 핀잔을 주는 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자손의 아픔이 그칠 때가 없다.
[1]경술(經術) ; 세상을 꾸릴만한 도구
[2]석덕기구(碩德耆舊) ; 큰 덕망을 가춘 세록(世祿)의 재상을 말함
[3]항배(項背) ; 목덜미와 등
[4]어하(魚河) ; 난리를 말함. 큰 하수에 뜬 고기떼
不肖於壬申冬因譜議搜舊蹟於遺箱見堆塵䵝昧之中倒篋而灑之雖蠹片黴紙皆愼重而飜括焉見有栗隱先祖年譜草乃潛臯公撰有行狀草卽別洞尹先生撰有世系單撰乃栗湖公之撰也
불초가 임신(1932년) 겨울에 족보를 만들자는 논의로 인하여 옛 문적을 오래된 상자속에서 찾았는데 티끌이 쌓인 어두운 가운데에 상자를 기울이고 보니 비록 좀벌레가 먹은 한조각의 휴지와 같으나 모두 신중한 뜻으로 열람하여 찾아보았더니 과연 율은선조의 연보(年譜) 초본(草本)으로서 잠고공(潛臯公)[1]이 지었고 행장(行狀) 초본이 있는데 즉 별동 윤선생(別洞尹先生)[2]이 지었으며 세계단자(世系單子 : 족보의 系代)는 율호공(栗湖公)[3]이 역은 것이다.
[1]잠고공(潛皐公) ; 유의(兪義,1384~1451)
[2]별동선생(別洞尹先生) ; 윤상(尹祥,1373~1455).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
[3]율호공(栗湖公) ; 계원(繼元,1455~1527)
此三本並非原本乃自笑翁公謄書於當日各附註於其下者也不肖一見瞿然如隕淵谷乃告諸宗族而聚礭之皆惕然怳然三復起感父老至有泣下者
이 세가지의 초본이 모두 원본은 아니지만 자소옹공(自笑翁公)[1]께서 당일에 베껴쓰고 각각 그 아래에다가 주각(柱脚)을 부친 것이다. 불초가 한번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어 연못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에 모든 종족(宗族)에게 알린 다음에 모여서 열람하여 보고난 다음 모두 울적하고 당황하여 몇 번씩 감탄하였으며 노인 어른들은 눈물이 흐르는 분까지 있었다.
[1]자소옹공(自笑翁公) ; 천령(千齡,1494~1562?)
鳴呼吾祖殉國之日國破家亡之禍鬼授神瞰之厄非一再矣凡我家乘之烏有典籍之蕩然墓所之失守容或出於事勢之自
아! 우리 선조께서 순국(殉國)하시던 날에 나라도 깨지고 가정도 망하게 되어 귀신까지도 수색하고 엿보는 액운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니, 대체로 우리 가승에서 찾을 수 없는 것과 문적(文籍)이 막연한 것이며 묘소를 잃어버리고 수호하지 못한 것은 혹시 사정이 부득이 하여 나왔다 하겠다.
然若使此信蹟得顯於吾家中葉則先祖之貞忠大節尙足以暴白於天下矣板蕩若今日諭劣若不肖而始乃見發焉使先祖之遺光潛德無以圖闡揚之萬一是可懼也
그러나 만일 이러한 믿을 만한 자료가 우리 집 중세(中世)에서 발견되었으니 선조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은 숭고하고 충분하게 온 누리에 알려졌을 것인데, 나라가 망한 지금 용렬한 불초에 와서 비로소 발견되었으니 선조의 내려온 광채와 잠겨 있던 덕망으로 하여금 만분의 일이라도 드러내어 널리 알릴 수가(闡揚) 없으니 이것이 송구스러운 일이다.
若夫世系之大謬一洗而正之譜錄之曖昧考據而祥之則爲今日吾宗之慶幸無窮矣玆敢略摭其顚末如右
대체로 세계(世系)의 큰 착오를 한번 말끔히 닦아서 정리하고 족보 기록에 애매(曖昧)하였던 것도 고징하여 상세하게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 중중의 경사와 다행함은 무궁무진하겠다. 이르므로 감히 그 전말(顚末:내력)을 오른쪽(아래)와 같이 역었다.
歲壬申季冬上澣 後孫 世基 謹書
임신(1932)년 12월 상순, 후손 세기(世基)는 삼가 씀
壬申世譜後考(1932년임신세보 후고)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3. 金順大
謹按舊譜序有二一則琴捿權公冑煥撰一則都事公永弼撰跋則達湖公聖源撰
삼가 살펴보건대 구보(舊譜)에 서문이 두개가 있으니 하나는 금서 권공 주환(琴棲權公冑煥)이 지었고 하나는 도사공 영필(都事公永弼)[1]이 지었으며 발문(跋文)은 달호공 성원(達湖公聖源)이 지었다.
[1]영필(永弼) : 1738~?, 율은공 휘저파, 以道->英震->恒重->正龜->宅命->永弼
又有典書公遺事則志庵公在黙撰參奉公開基事實則達湖公聖源撰 贈承旨湖西公諱成物墓碣陰記則校理眉泉公華重撰 贈參判眉山公諱以道墓碣銘則滄州羅公學川撰 贈承旨公諱英兌墓表陰記則志庵公在黙撰生員湖庵公諱恒重墓碣銘則新野李公仁行撰
또 전서공의 유사가 있는데 지암공 재묵(志庵公在黙)이 지었고 참봉공(參奉公)의 개기(開基)의 사실(事實)은 달호공 성원(達湖公聖源)이 지었으며, 증 승지 호서공(贈承旨湖西公) 휘 성물(成物)[1]의 묘갈명 음기[2]는 교리 미천공 화중(校理眉泉公華重)[3]이 지었고 증 참판 미산공(贈參判眉山公) 휘 이도(以道)[4]의 묘갈명은 창주 나공 학천(滄州羅公學川)[5]이 지었고 증승지공(贈承旨公) 휘 영태(英兌)[6]의 묘표 음기는 지암공 재묵(志庵公在黙)이 지었고 생원호암공(生員湖庵公) 휘 항중(恒重)[7]의 묘갈명은 신야 이공인행(新野李公仁行)[8]이 지었다.
[1]성물(成物,1561~1647) ; 천령(千齡)의 子
[2]을기(陰記) ; 비석의 後面에 기록하여 새긴 것
[3]화중(華重,1656~1743)
[4]이도(以道,1604~1677,초명;낙도)
[5]나학천(羅學川, 1658∼173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사도(師道), 호는 창주(滄洲). 영주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수종(壽宗)이며, 통덕랑(通德郎) 수성(壽星)에게 입양되었다.
[6]영태(英兌,1646~1680) ; 이도(以道)의 2子, 형은 영진(英震)
[7]항중(恒重,1649~1713); 영진(英震)의 1子
[8]이인행(李仁行, 1758~18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공택(公宅), 호는 만문재(晩聞齋)·일성(日省)·신야(新野). 영천출신. 해(瀣)의 후손으로, 관섭(觀燮)의 아들이다.
就考其文 栗隱公仕於 李朝者多以潛皐公爲直系子於栗隱公之后可見當世文獻莫徵致此謬誤其爲后孫之痛何如
그 글에 나가서 고징하여 보면 율은공(栗隱公)께서 조선에서 벼슬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많고 잠고공(유의;兪義)을 율은공 뒤에다가 직계자(直系子)를 삼기도 하였으니 당세에 문헌(文獻)의 고징이 없어서 이러한 착오를 일으키게 된 것을 알만하고 후손으로서 통탄함이 어떠하겠는가.
世基吾宗君也適因譜議搜得信蹟於世傳遺箱之中乃栗湖公收拾世系單撰藏之巾衍者首叙栗隱公之師友淵源官職履歷殉國之節系世之次甚詳悉于以考麗史雜出於諸家野乘者其爲勝國之忠義炳如日月且殉國之事己在於恭讓禪位之前安有入仕 李朝之理耶
세기(世基)는 우리파의 종손이다. 마침 족보를 하자는 의논으로 인하여 믿을만한 사적을 대대로 전해오던 상자 속에서 찾았으니, 이것은 율호공(繼元)께서 세계의 단자(單子)를 수습하여 상자 속에 보관한 것인데, 제일 첫머리에는 율은공의 사우연원[1]이며 벼슬한 이력과 순국(殉國)하신 절의며 세계의 순서를 아주 상세하게 전부 기록하였는데, 고려사와 여러 집안에서 나온 여러 가지 야승(野乘)을 참고해 보더라도 나라(고려)를 위한 충의(忠義)가 일월(日月)같이 밝았으며 또 순국한 사적이 이미 공양왕(恭讓王)이 선위(禪位)하기 전에 있었으니 어찌하여 조선에 들어가서 벼슬할 이치가 있겠는가.
[1]사우연원(師友淵源) ; 스승과 친구의 학통(學統)
公有子曰鈿贊成事鈿有子曰㺶門下侍中㺶有子曰兪義禮賓寺別提曰尙義先系之舛錯若是則前所謂序跋遺事實記銘等皆失實於杞宋之無徵者也不得不據今釐正洗滌謬誤而顧念前輩所述窃不無九原難作之感覽之者其肯諒而原之哉
율은공의 아들은 전(鈿)이니 찬성사(贊成事)이고 전(鈿)의 아들은 두(㺶)이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두(㺶)의 아들은 유의(兪義)이니 예빈시별제(禮賓寺別提)이고 또 상의(尙義)가 있다. 선계(先系)의 착오가 이와 같았으니 전에 이른바 서문(序文), 발문(跋文), 유사(遺事), 실기(實記), 명사(銘辭) 등등이 모두 기송[1]의 고증이 없는 것과 같이 사실을 잃어버렸으니 부득불 지금 정리하여 고치고 틀린 것을 세척하였으나 이전의 선배(前輩)들이 지은 바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만히 구천길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감상이 없지 않다. 이 글을 보는 자로는 긍정적으로 믿어주어서 죄주지 말 것이다.
[1]기송(杞宋) ; 夏. 殷의 두 나라로서 자기 나라의 先祖를 고징하지 못함
--- 계보 ---
*손(遜,1304~1389,전서공,율은공)->전(鈿,1320~1392,繼節堂)->두(㺶,1338~1400,退愼齋)->유의(兪義,1384~1451,潛皐公)->순지(順志,1422~1484)->계원(繼元,?~1482,栗湖公)->천령(千齡,?~임술(1502?),自笑軒公)->성물(成物,湖西公)->이도(以道,1604~?,眉山公)->영진(英震,梅竹軒)/영태(英兌)
*영진(英震,梅竹軒)->화중(華重,1644/1656/~1743,眉泉公)/태중(泰重,1659~1735)/항중(恒重)/형중(衡重)
歲壬申季冬 後孫斗台 謹書
1932년 임신 12월에 후손 두태(斗台)는 삼가 씀
壬申世譜跋(1932년임신세보발)
原文 ; 1989年己巳栗隱公派譜
編輯解釋 ; 2006. 5. 23. 金順大
於乎今距栗隱先生之世五百有餘載矣先生當日之歷官槪要忠義大節俱失於回祿以至於子孫諸公繼述之美系統之重而幷無傳焉
아! 지금 율은선생(栗隱先生)의 세대를 지낸지가 500여년이 되었다. 선생께서 당시에 관직을 지낸 개요와 충의의 큰 절목이 모두 화재에 잃게 되었으므로 자손 제공(諸公)들의 계술(繼述)한 아름다운 말과 계통의 소중함에 이르러서도 아울러 전하지 못하였다.
其間譜牒之成勿論何代何派雖有十再經營至於先生之派系則不免乎杞宋之無徵矣今當經始之日先生之足徵實蹟發現於冑孫世基甫家篋中使累百年謬誤洗滌而釐正之豈非慈孫之一大快擧耶
그 사이에 보첩(譜牒)을 만드는데 있어서도 어느 세대며 어느 파를 논할 것 없이, 비록 수십 번을 보첩을 다시 만들어도 선생의 파계(派系)에 이르러서는 기송(杞宋)의 고증이 없음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족보를 시작하는 날에 있어서 선생의 충분한 증거의 실적(實蹟)이 종손 세기(世基)집 상자 속에서 발견되어, 여러 백년의 착오를 말끔히 닦아서 정리하게 되었으니 어찌 후손들의 한 가지 커다란 쾌거가 아니라 하겠는가?
先生之後五世而至栗湖翁與其季能湖公始居于眉湖隱德不仕其後若自笑翁湖西公眉圃翁眉山翁樗下軒伯仲梅竹軒昆季諸公光承前烈丕啓後謨文學行誼圭組軒冕磊落相望允爲吾州之望族焉
선생의 후로 5세를 내려와 율호공(栗湖公,휘繼元)에 이르러서 그 동생(季氏) 능호(能湖公,휘繼亨)과 더불어 비로소 미호(眉湖)에 이거하면서 덕(德)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그 후에 자소옹(自笑翁,휘千齡), 호서공(湖西公,휘成物), 미포옹(眉浦翁,휘弘道), 미산옹(眉山翁,휘以道), 저하헌(樗下軒,휘英達) 형제(4촌)인 매죽헌(梅竹軒,휘英震) 과 형제분 제공(諸公)들이 빛나는 전열(前烈)을 계승하여 후손의 모범을 크게 열어 주었으므로 문학과 행의며 높은 관직이 우뚝하여 서로 바라볼 정도로 많았으니 참으로 우리 고을의 명망있는 씨족이 되었다.
玆豈無所本而然哉益可見栗隱公積德累仁之報而栗湖公肇基之切亦有以不可誣者矣
이게 어찌 근본이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겠는가? 더욱 율은공께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심은 보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율호공(栗湖公)께서도 기반을 창조하는데 간절하였음을 속이지 못할 것이라 하겠다.
日金斯文斗浩柄海馨植甫以世基斗台斗演柄東瀅柄世柄斗穆言來余語曰吾祖曠世沉晦之蹟由是譜而昭顯焉闔族惇叙之典賴是譜而益篤焉此實私門胯蠁之擧也
하루는 김사문[1] 두호(斗浩), 병해(柄海), 형식(馨植)이 세기(世基), 두태(斗台), 두연(斗演), 병동(柄東), 영병(瀅柄), 세병(世柄), 두목(斗穆)의 말을 듣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잠기고 어둡기만 하던 사적이 이 족보로 말미암아 밝게 드러났으며 온 종족이 돈목을 펴는 의식(儀式)까지도 이 족보를 의지하여 더욱 돈독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가문의 성대한 거사다」고 하였다.
[1]김사문(金斯文) ; 학덕(學德)이 있는 사람을 칭함
此役始於壬申春至甲戌冬乃克了成且始終一心輪誠應役者斗復斗哲永基燁斗泂萬基壽基時德斗永也規畫而董其役者斗海氏也不幸役未就緖遞爾尋泉今役垂完矣
이 족보의 일을 임신(1932)년 봄에 시작하여 갑술(1934)년 겨울에 완성되었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족보의 역사에 대응한 자는 두복(斗復), 두철(斗哲), 영기(永基), 엽(燁), 두형(斗泂), 만기(萬基), 수기(壽基), 시덕(時德), 두영(斗永)이고 계획을 세워서 공역을 돈독히 한 사람은 두해(斗海)씨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구천(九泉)길을 떠나고 지금에야 완료하게 되었다.
尊侍逼在隣堡烏得無一言之籍重乎云不佞辭不獲謹撮夫嵋蘇氏油然孝悌之心奉告之聊且勗之于後來之無窮爾
나와는 나이가 존시[1]간으로서 가까이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어찌 한마디 말의 소중함이 없겠는가 하니 소인(不佞)[2]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삼가 미소씨[3]의 말에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난다함을 받들어 고하고 또 무궁한 후손에게 힘쓰게 할 따름이다.
[1]존시(尊侍) ; 연령이 차이가 많음을 말함
[2]불녕(不佞) ; 작자가 자신을 낮추어 말함
[3]미소씨(嵋蘇氏) ; 소동파(蘇東坡)의 아버지 소순(蘇洵)을 말함
歲癸酉仲秋月 西原鄭柱轍 謹跋
1933년 계유 8월에 서원(西原:淸州) 정주철(鄭柱轍)은 삼가 발문을 지음
(1934년 겨울에 보첩이 완성되었다고 했는데 발문은 1933년. 아마도 1933년에 발문을 쓰면서 이 보첩을 언제 인쇄가 가능할 것인가를 물어보니 내년(1934년) 쯤 될 것 같다 고 하여 보첩의 완성연도를 1934년으로 발문내용에 넣은 것 같다.)
0庚辰世譜序
(내용 생략)
上之十七年庚辰(1880)中秋上澣 襄陽權冑煥(주환) 謹序
0庚辰世譜跋
(내용생략)
庚辰(1880)中秋 後孫聖源(성원) 謹跋
0己卯(1879)世譜序
(내용생략)
崇禎紀元五丙子(1876)孟冬下澣
資憲大夫吏曹判書兼 經筵日講官 嘉林趙基應 謹序
0己卯世譜跋
(내용생략)
崇禎紀元五己卯(1879) 淸明節 後孫 聖源 謹跋
癸亥世譜序(1803년 계해세보서)
2006. 5. 10. 譯者 金順大
人家之有譜古也粤自三代傳之也久曰姓曰族者統吾祖之所自出而知子孫之所由分也
사람의 가문에 족보가 있는 것은 오래되어 옛날 3대(하, 은, 주의 3국?)로부터 전해졌다. 옛날 성씨니 종족이니 하는 것은 우리의 조상이 나온 곳과 자손들이 나누어 진 것을 통합하는 말이다.
盖其後生末裔先識乎虫魚草木之名而至於吾祖之所自出吾姓族之所由得所由分則便同聾瞽者面墻者然以子孫而不能言其先祖者可乎必也尋流而知源尋葉而知根則莫如昭其世焉
대개 후손의 후예가 되어 먼저 벌레와 물고기와 풀과 나무의 이름은 알고 있으나, 우리 조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 성씨가 어디에서 유래되어 나누어지게 되었는지에 이르러서는 문득 귀머거리와 소경과도 같고 담장에 얼굴을 대고 있는 것과도 같아서 자손으로서 능히 그 선조를 말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이를 옳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물이 흐르는 것을 찾아서 그 원천을 알아야 하고 잎을 찾아서 뿌리를 알아야 하니 이는 그 세계(世系)를 소상하게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以之而尊吾祖睦吾姓者惟譜族施是已若晉代昭穆撰之設唐時氏族誌之行豈不大有關於人心世道也
이로서 우리 조상을 높이고 우리 같은 성씨를 돈독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족보가 바로 이것이다. 이미 진나라 시대에 소목찬(昭穆撰)을 만든 것과 당나라 시대에 씨족지(氏族誌)가 유행한 것이 어찌 인심과 세도에 있어서 관련성이 크게 있다하지 않겠는가.
我鼻祖駕洛王天降神聖傳國歷世凡爲金姓者蕃衍東土麗羅以後之聞人達士名公鉅卿之班班可者於遺乘舊史者不知其幾許人矣
우리 시조이신 가락왕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성한 왕으로서 나라를 전하고 세대를 지내었으니 무릇 김해김씨 인들은 동쪽 땅에 번창하여 고려와 신라 이후로 이름나고 유명한 선비와 훌륭한 재상들로서 전해지는 가승이나 옛 역사책에서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이루 다 알수가 없다.
其於尊祖德考世族之道有邁於末葉展孫而不幸各派中失世系莫可統屬豈古之人無吾譜耶有而失之於沿革之間耶
그 조상의 덕을 높이고 세족임을 고증할 만한 도리를 말단의 여러 자손들이 매진하여야 할 것인데 불행하게도 각파가 중간의 세계를 잊어버리고 계통의 내력을 통합할 수가 없으니 어찌 옛날 사람들에게 우리의 족보가 없었던가, 또는 있었으나 연이은 난리동안에 잃어버렸는가.
言念我典書公行狀事蹟亦皆遺亡於流寓蕩殘之中後孫之感痛如何哉
생각해 보면 우리 전서공(율은공 휘손, 또는 저)의 행장과 사적이 또한 모두 난리로 탕진하는 도중에 잃어버렸으니 후손의 감탄과 아픔이 어떠하겠는가.
然而六七世之後簪纓相仍先父兄之有志於修譜厥惟久矣歲甲戌忠州宗侍運熙氏金山上舍宬氏始創譜議作一部傳于今偉哉首立之功若是其尊吾祖睦吾姓之誼也
그러나 6, 7세대 후에 벼슬하는 사람이 서로 이어지게 되어 선대의 부형들이 수보하자는데 뜻을 둔지가 오래 되었더니 지난 갑술(1754)년에 충주에 사는 종친인 운희(運熙)씨와 금산에 사는 진사 성(宬)씨가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자는 의견으로 1부를 만들어 지금 전해지고 있으니 위대하도다. 제일 먼저 족보를 세운 공로가 이와 같으니 그 조상을 높이고 우리 일가를 돈독하게 하는 도리라 하겠다.
後人之責宜其汲汲於導舊譜修新牒而散處於南北東西一座團圓之議未易圖得而子孫勝冠者其後亦幾何
후손의 책임으로서 당연히 구보를 이끌어서 새로운 보첩을 닦아야 할 것인데 동서남북에 흩어져 살고 있으므로 한 자리에 모여서 의논하기가 쉽지 않고 자손으로서 벼슬한 사람이 그 후에 또한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없었다.
何幸運熙氏瑞鉉甫宬氏慶彙甫克追家謨更倡斯擧飛文示余眞所謂氣同聲合而吾譜之作果有數矣然而力薄不能鋟梓印出於木活字
그러나 다행히 운희씨, 서현씨, 성씨와 경휘씨가 능히 가정의 규모를 따라서 다시 이 일을 시작하고 통문을 돌리어 나에게 보였으니 진실로 소위 기운이 같고 목소리를 합하였으니 우리 족보의 제작에 과연 운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재력이 부족하여 목활자로 인쇄하여 간행하지는 못하였다.[1]
[1]율은공파보는 무오(1798)년 정리는 하였으나 인쇄는 못함
凡例則一遵舊譜王世系旣絶之後則各立中祖次第聯譜揆諸人家同派譜其法差殊而其爲同祖於駕洛王則一也
범례에는 한결같이 구보를 준수하였고, 왕세계는 이미 끊어져 버리고 그 후 각파가 중조를 세워 차례로 족보를 연결하였으니 남의 가문과 같이 합쳐 파보를 만든 것을 비교하여 보면 그 법규의 차이가 다르다고 하겠으나 가락왕을 같은 조상으로 모시는 것은 한가지 이다.
爲吾之金者盖於斯譜而講世敍族孝悌之敦睦之不失百世之誼則非徒有補於吾宗實有補於風敎其亦世守而家莊則後之視今不猶今之視昔勉之哉勉之哉
우리 김씨가 된 사람들은 대개 이 보첩으로서 세계의 순서와 종족의 효도와 우애있는 돈목을 가르쳐 백세에 까지 잃어버리지 않음은 다만 우리 종족에게만 도움이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풍속의 교화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대대로 잘 지키고 집안에 간직하면 후세가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니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歲癸亥孟冬後孫前都事永弼謹序
계해(1803)년 10월 후손 전도사 영필[1] 삼가 서문을 지음.
[1]永弼(1738~?, 율은공 휘저파) ; 以道->英震->恒重->正龜->宅命->永弼
첫댓글 율은공파 21세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