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뇌기는 제게 가장 친숙한 기운입니다
무영은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공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응?"
공터 한구석에서 당백형이 신선주를 마시고 있었다. 당비연은 없었다. 대신 오늘은 처음 보는 사람이 당백형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 역시 겉보기에는 당백형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당백형이 겉보기에는 마흔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이가 상당히 많으니 그의 나이도 쉽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무영이 다가가자, 당백형이 힐끗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그리고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왔군."
당백형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부터 강악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무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이 술을 담갔느냐?"
무영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악은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사람인 듯 당당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소상히 읊어 봐라."
강악의 물음에 무영은 약간 황당한 심정으로 당백형을 쳐다봤다. 하지만 당백형은 무영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지 그저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무영이 보니 벌써 주변에 빈 술병이 여러 개 돌아다녔다.
"많이 취하셨군요."
"그렇게 됐다."
당백형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선주를 많이 마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독한 술을 많이 마셔도 거의 취하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급격히 취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왔다.
강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악은 당백형보다 훨씬 많은 술을 마셨기에 더 취했다. 강악은 취기가 아른거리는 눈으로 무영을 노려봤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냐!"
강악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다짜고짜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펼쳐 벼락같이 밀어냈다.
꽈르릉!
강악의 손에서 뇌기가 쏟아져 나갔다. 당백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취했기로 다짜고짜 굉뢰번천장을 내지를 줄은 몰랐다.
강악이 발출한 뇌기는 고스란히 무영에게 쏟아졌다. 무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뇌기를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받아냈다.
빠지지직!
당백형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취기가 단번에 날아가는 듯했다.
물론 진짜 날아가지는 않았다. 신선주를 마시고 취하면 내공으로 취기를 밀어낼 수도 없다.
"지나치게 취하셨습니다. 이만 주무시지요."
무영의 말에 당백형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그러지. 좀 취했군."
당백형은 다시 손바닥을 휘두르려는 강악의 팔을 움켜쥐고는 끌어당겼다.
"취하려면 곱게 취할 것이지, 이게 무슨 추태야!"
강악이 몸부림쳤지만 취해서 몸도 못 가누는 마당에 당백형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강악은 당백형에게 이끌러 공터 한구석에 만들어진 천막으로 향했다.
털썩.
당백형은 강악을 천막 안에 던져 놓은 후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취기 때문에 아직도 눈앞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궁금한 건 물어야만 했다.
"드르렁!"
천막 안에 강악이 코고는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당백형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무영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미안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방금 어떻게 한 게냐?"
"뭐가 말입니까?"
무영은 약초로 채워진 자루를 공터 한구석에 놓으며 대꾸했다. 무영의 말투는 약간 차가웠다.
이곳에 다른 누군가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비연까지는 어쩔 수 없어도, 다른 사람을 데려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끄응. 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라."
당백형의 말에 무영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당백형을 쳐다봤다. 마침 그때 표중산이 다가왔다.
"모두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당 어르신께서는 절 도와주신 것뿐입니다."
표중산은 죄송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무영은 그제야 의아한 표정으로 표중산과 당백형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기서 코 골고 자는 놈, 강악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들어 봤나? 나름 유명한 놈이야."
당백형의 말에 무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굉뢰번천장 말입니까?"
당백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 아는군. 나랑 약간의 인연이 있어, 뭐, 예전 같았으면 앞뒤 안 가리고 한 판 붙었겠지만......"
사실 얼마 전 새로운 길에 들어서기 위한 문을 연 이후에 그런 불 같은 성정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그 길을 달려가는 중이었다.
'어쩌면 지금 싸우면 내가 이길지도 모르지. 아무리 상성이 나쁘다고 하지만 말이지.'
당백형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막 쪽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신선주가 정말 대단하긴 하군. 십대고수가 맥을 못 추고 취해 쓰러질 정도면."
"그래도 몸에 해롭지는 않습니다."
무영의 말에 당백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도 안다. 또한 무영이 한 말에는 뒤에 몇 마디가 생략되었다는 것도 안다.
신선주를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마시고도 멀쩡하려면 자신이나 강악 정도 되는 고수이거나, 아니면 무영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어쨌든 저놈이 어떻게 알았는지, 신선주를 마시더니 아주 목을 매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저놈 덕에 몇몇 놈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당백형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 알 듯했다.
신선주에는 무영의 고유한 기운이 서려 있다. 신선주를 만들 때 무영이 그 기운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뇌기다. 신선주를 마실 때 온몸을 관통하는 듯 찌릿한 느낌이 드는 건 모두 뇌기 때문이다.
아마 강악은 그 뇌기를 느끼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강악 역시 뇌기를 근간으로 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오늘은 어르신도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겠습니까?"
무영의 말에 당백형이 급히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의 말에는 꼭 그렇게 하라는 듯한 압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어차피 저놈이 다시 날뛰지 못하게 내가 막아야 할 테니까."
당백형은 '어차피 필요 없겠지만' 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강악이 날뛰어 봐야 무영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듯했다.
굉뢰번천장을 몸으로 흡수해 버리는 자를 강악이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상성이 아주 안 맞는군. 어쩌면 저 벼락 늙은이가 천적을 만난 걸지도 모르겠어. 큭큭큭."
당백형은 그렇게 속으로 한참이나 웃었다.
어쨌든 자신은 예전에 강악에게 한 번 당한 적이 있다. 그 원한을 아예 잊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치고 박고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흐아암. 자알 잤다."
강악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마치 아침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마친 것처럼 몸이 상쾌했다. 어제 그렇게 술을 퍼마셨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거,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군."
강악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생각해 보니 어제 어느 순간 이후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어제......"
"이제 정신은 좀 차린 건가? 다 늙어서 채신머리없이 주정이나 부리더니."
강악이 고개를 돌려 보니 당백형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뭐야? 지금 한 판 붙어 보자는 거냐?"
강악의 말에 당백형의 눈이 더욱 한심하다는 듯 살짝 일그러졌다.
"쯧쯧. 어제 뭘 했는지는 기억하는 게냐?"
당백형의 말에 강악이 곰곰이 기억을 뒤집었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술을 쉴 새 없이 퍼마신 정도가 전부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참 기묘한 꿈을 꿨지."
"꿈?"
"아니, 어떤 빌어먹을 놈이 덤비기에 손바닥 한 방 날려줬는데......"
강악은 슬쩍 뒷말을 흐렸다. 당백형이 답답한 마음에 재촉했다.
"그런데?"
"아, 그런데 내 손에서 쏟아져 나간 뇌기들이 갑자기 그놈한테 쫙 빨려 들어가더라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뇌기를 마치 그놈이 끌어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 꿈을 꾸다니 기가 허해졌어."
강악의 말에 당백형이 더욱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뭐냐? 그 눈은? 정말 한 판 해보자는 거야?"
"정말 기억 안 나는 게냐?"
"아, 무슨 기억!"
당백형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강악의 시선이 당백형의 손가락을 따라 돌아갔다.
"헉! 저, 저놈은!"
강악이 눈을 부릅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꿈속에서 봤던 바로 그놈이 서 있었다.
"저, 저놈이야! 저놈이라고!"
당백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아주 똑똑히 봤으니까."
"뭐라고?"
강악이 놀란 눈으로 당백형을 바라봤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 설마...... 아니지?"
"안됐다만, 맞다. 어제 네놈이 저 녀석한데 굉뢰번천장을 아주 거하게 쏴대더군. 그 뒤는 네가 기억하는 대로다."
강악이 멍한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가만히 서서 어제 가져온 약초를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강악의 눈에 무영의 손가락 끝에서 빠직대는 뇌기가 확연히 보였다.
"헉! 저, 저놈!"
강악은 정말로 놀랐다. 무영의 손끝에서 번득이는 뇌기를 보고 있으니 무영이 얼마나 섬세하게 뇌기를 다루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자신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악이 신경질적으로 당백형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저놈 대체 정체가 뭐야!"
"약장수."
"뭐?"
"약장수라고."
강악이 멍한 눈으로 당백형과 무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영은 온 정성을 다해서 약초를 말리고 가루로 만들었다. 손가락 끝에서는 끊임없이 뇌기가 번득였고, 커다란 통에는 고운 가루가 쌓여갔다.
이윽고 자루가 모두 비자, 무영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한자세로만 너무 오랫동안 서 있었더니 온몸이 삐걱거렸다.
잠시 그렇게 몸을 풀고 있으니 강악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있는지라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물론 옆에 당백형이 있다는 것도 이유의 일정부분을 차지했지만.
"거...... 어제는 좀 미안하게 됐네."
무영이 고개를 돌려 강악을 쳐다봤다. 당백형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훨씬 많을 것이다.
뇌기를 다루는 무공을 극성으로 익혀서 그런지 온몸에 뇌기가 가득했다. 사실 무영은 이렇게 뇌기가 많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주인도 없는 곳에서 마음대로 술을 꺼내 드신 건 좀 그렇군요."
무영의 말에 강악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당백형은 놀란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무영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 그, 그것도 미안하게 됐네."
강악은 자신이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영 앞에 서니 왠지 기가 죽어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그런데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어떻게 내 굉뢰번천장을......"
무영은 강악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강악이 쏟아낸 굉뢰번천장의 뇌기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보다 대단할 수는 없다.
무영의 몸에는 벼락의 힘이 존재하는데 그깟 굉뢰번천장의 뇌기에 당할 이유가 없었다.
"제가 가진 뇌기가 조금 더 커서 그런 모양입니다."
무영은 대충 그렇게 대답했다. 자세하게 설명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무영 역시 그렇게 말을 하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강악이 작아 보였고, 강악을 보고 있으면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의 무영을 생각하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군. 이상해.'
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역시 뇌기를 다루는 무공을 익혔군. 내가 익힌 무공은 뇌령신공일세. 자네는 대체 무슨 심법을 익혔나?"
상대가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사실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악은 너무나 궁금해서 자신이 익힌 무공까지 밝히면서 물었다. 정말로 꼭 듣고 싶었다.
강악의 물음에 무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전 아무런 심법도 익히지 않았습니다."
무영의 대답에 강악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 진한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 말을 어찌 믿으라는 건가? 아무런 심법도 익히지 않고 나보다 더 강한 뇌기를 가지고 있다고? 설마 벼락이라도 맞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강악의 물음에 무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벼락을 맞아서 이렇게 되었죠."
강악이 입을 떡 벌렸다. 지금무영이 한 말은 심법을 익히지 않았다는 말보다 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영의 눈을 보니 거짓이 아닌 듯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아, 아니, 그래도 믿을 수 없네. 어찌......"
"제가 익힌 것은 내공심법이라기보다는 정신을 단련한는 명상법에 더 가깝습니다.
공력을 다스린다거나 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기를 읽고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무영의 말에 강악은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그게 바로 심법이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무영의 말은 정말로 놀라웠다. 기를 읽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상당히 높은 경지였다.
더구나 무영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기를 다루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최고 수준의 내공심법을 극성으로 익히더라도 쉽지 않은 경지였다.
강악은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사실 이렇게 신선주를 만든 사람을 찾아온 이유는 뭔가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무영 앞에서는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에......."
강악이 제대로 말을 못하자 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혹시 저와 대련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무영은 강악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 생각했다. 당백형도 그랬으니까.
왠지 강한 사람들이 자신의 싸움 실력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이상하다 여겼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영의 말에 강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도 괜찮은 일이란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강악의 태도가 갑자기 당당해졌다. 싸운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투지가 샘솟았다.
당백형은 갑자기 느껴지는 막대한 투기에 강악을 쳐다봤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하는 건가?"
"응? 뭐하긴. 대련이지."
강악의 말에 당백형이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영과 강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터 한가운데로 향했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뇌룡대는 공터 가장자리로 물러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무영과 강악의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리 차원이 다른 고수의 싸움이지만 지금 잘 봐두면 언젠가는 분명 도움이 될 거라 믿으면서.
강악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굉뢰번천장은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주먹을 쓸 생각이었다. 굉뢰번천장이 강악의 가장 큰 무기이긴 하지만 강악이 무서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빠지지직!
움켜쥔 강악의 주먹에 뇌전이 흐르기 시작했다. 뇌전은 주먹을 감싸며 사방으로 뇌기를 뿜어댔다.
강악은 선배라고 선수를 양보하고 이런 건 모르는 사람이다.
"먼저 가네."
꽈릉.
강악의 몸이 뇌성과 함께 쏟아져 나갔다. 그야말로 벼락이 따로 없었다. 주먹을 감싼 뇌전이 요동치며 무영에게 뻗어나갔다.
부우웅.
강악의 주먹이 무영의 잔상을 찢고 지나갔다. 무영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강악이 뒤로 주먹을 휘둘렀다.
쾅!
무영의 손과 강악의 주먹이 부딪치며 굉음을 토해냈다.
무영은 강악의 움직임이 상상으로 빨라 꽤 당황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빠른 사람은 처음이었다. 구대흉마도 이보다는 느렸다.
무영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왠지 기뻤다. 이번에도 재미있게 싸울 수 있는 것 같았다.
'기묘한 기분이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몸을 움직였다. 무영의 몸에서 조금씩 뇌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빠직. 빠직. 빠지지직!
무영의 몸에서 뇌기가 흘러나오든 말든 강악은 전혀 개의치 않고 주먹과 발을 움직였다.
일정하게 움직이며 변칙적으로 궤도를 바꾸는 강악의 주먹질과 발길질은 매번 무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했다면 거의 당황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영의 눈이 빠르고, 몸도 빨랐으니까. 하지만 강악의 공격은 그렇지 않았다.
강악은 무영이 충분히 당황할 만큼 빨랐고, 초식의 변화 또한 오묘해 효과적으로 무영을 공략했다.
무영의 몸이 조금 더 빨리 움직이자 흘러나오는 뇌기의 양이 점점 더 많아졌다.
꽈르르릉!
무영의 몸에서 수많은 뇌전의 줄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무영의 몸을 휘감았다. 무영은 벼락줄기에 갇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렸다.
강악은 화들짝 놀라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뇌, 뇌룡......"
강악은 그제야 뇌룡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뇌룡은 바로 무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왜 저 삼류 무사들이 뇌룡대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뇌전으로 온몸을 휘감은 무영은 빠르고 강했다. 강악은 무영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영의 공격은 단순했지만 충분히 빨랐다.
무영이 주먹을 내질렀다.
강악은 마치 자신의 가슴을 향해 뇌룡이 날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크윽!"
강악이 급히 몸을 피하며 팔을 내밀었다. 강악의 팔에도 충분한 뇌기가 깃들어 있었다. 팔과 팔이 부딪쳤다.
꽈르릉!
뇌성과 함께 강악의 신형이 뒤로 튕겨났다.
구당탕!
"크으윽!"
강악은 바닥을 꼴사납게 뒹굴다 간신히 균형을 되찾고 바로 앉았다. 그리고 경악에 찬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이내 강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됐네. 그만하세."
강악의 말이 떨어지자 무영을 감쌌던 뇌기가 서서히 걷혔다. 무영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평안해 보였다.
강악은 그런 무영의 얼굴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직접 겪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저리도 순수하고 막대한 뇌기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서, 설마 자네 정말로 벼락을 몸에 가둔 건가?"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영의 대답에 강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 수가 없군."
강악만이 아니었다. 대련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십대고수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굉뢰번천장 강악을 이렇게 어린애 가지고 놀 듯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새삼 무영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무영을 키워낸 스승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대체 누구기에 사람의 몸에 벼락을 가둘 수 있단 말인가.
"끄응......"
강악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몸속의 뇌기가 안정되지 않고 마구 날뛰었다.
마지막에 팔과 팔이 부딪치는 순간 온몸을 진탕시킨 무영의 막대한 뇌기 때문에 강악이 가진 뇌기가 놀란 것이다.
"크으윽."
강악은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왜 후련한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무영이 강악의 팔을 잡았다. 강악은 그런 무영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몸속에서 날뛰는 뇌기 때문에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찌릿!
강악은 깜짝 놀랐다. 무영이 잡은 팔이 갑자기 감전이라도 된 듯 짜리해졌기 때문이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강악을 더 놀라게 했다. 팔을 시작으로 온몸의 뇌기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강악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대, 대체.....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무영은 그런 강악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를 읽고 움직일 수 있다고. 뇌기는 제게 가장 친숙한 기운입니다."
강악은 무영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나도 벼락 맞고야 만다.'
남궁무학은 앞에 앉은 남궁명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봤다.
"조사를 마쳤다고?"
"예. 어차피 저와 얽힌 자들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 너와 얽힌 자들이었단 말이냐?"
남궁무학의 반응에 남궁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얼마 전까지 의선각의 부각주였던 자입니다."
남궁명의 대답에 남궁무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의선각의 부각주? 게다가 얼마 전까지라고 하였느냐? 그렇다면 안중혁을 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안중혁이 뇌옥에 갇힌 이후에 부각주를 맡은 자로, 이름은 화무영이라 합니다."
"화무영? 아니, 그보다 그 자가 언제 맹에서 나갔느냐?"
무영이 탈맹한 것은 의선각주가 알아서 처리를 했기 때문에 맹주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기지는 않았다.
맹주 아래에 있는 총관의 선에서 끝난 것이다. 만일 다른 중요한 각의 부각주였다면 달랐겠지만 의선각의 부각주는 전혀 주목할 필요가 없었다.
"임무가 끝난 후에 바로 그만뒀습니다."
의선각의 부각주가 무슨 임무를 맡았었는지도 남궁무학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임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남궁명이었으니까.
"그럼 천수독왕이 그자에게 관심이 있단 말이냐? 그자는 고작 의원이나 약사에 불과할 것 아니냐."
"약사입니다. 좀...... 능력이 뛰어난 약사입니다."
남궁무학이 인상을 찌푸렸다. 만일 천수독왕이 점찍을 만큼 뛰어난 약사라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한데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라."
남궁무학의 말에 남궁명이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보고를 계속했다.
"최근 무한에 있는 주요 무인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돌고 있는 신선주라는 술을 아십니까?"
남궁명의 말에 남궁무학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크흠......"
사실 알고 있는 것뿐 아니라 마셔보기까지 했다.
한 병을 뇌물로 받아 마셨는데, 그 놀라운 효능을 이미 경험해 봤다. 그 한 병을 아직도 아끼며 매일 조금씩 마시는 중이었다.
"그자가 만든 것입니다."
남궁명의 말에 남궁무학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평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고작 술이나 만드는 자를 천수독왕이 주시한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하지만 사실입니다. 게다가 예전에 보고를 드렸던 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거둬들인 흑사맹 최하급 무사 백여 명을 여전히 거느리고 있습니다."
남궁무학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흑사맹 최하급 무사는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이 근처에 있어도 부담이 없었다. 흑사맹의 최하급 무사라는 뜻은 삼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무사 백 명이라면 정협맹의 수준급 무사 두 세 명만 나서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다. 그게 바로 수준 차이였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당백형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다. 이대로 놔두기엔 뭔가가 걸린다.
게다가 신선주를 만드는 방법도 탐났다. 선선주의 최고의 술이었다. 아니, 그것은 술이 아니라 영약이었다.
"네가 보기에 그 무사들의 수준이 어떻더냐?"
"쓰레기였습니다."
남궁명의 말에 남궁무학이 고개를 끄떡였다. 남궁명까지 그렇게 판단했다면 정확한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쓸어버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천수독왕이 관계되었다면 함부로 나서서 싸우기도 껄끄럽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남궁무학은 일단 남궁명의 의견을 물었다. 남궁명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즉시 대답했다.
"굳이 천수독왕에 대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으니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됩니다.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기다린다라......"
남궁무학은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대응이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쓸어버리는 것이 훨씬 나았다.
남궁명은 그런 맹주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무사 백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남궁무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기껏해야 파락호들처럼 상인들 보호비나 챙기는 게 다겠지. 아니면 그럴 듯하게 표국이라도 만들던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곳 무한에 자리를 잡은 다음에는 정협맹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군."
남궁무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리를 잡은 다음에 상황을 봐서 처리하는 것이 훨씬 힘이 덜 든다.
그때는 굳이 정협맹이 나서지 않더라도 조금만 충동질하면 알아서 나설 자들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천수독왕도 언제까지 무한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남궁무학은 그것이 적절한 조치라 판단했다. 확실히 천수독왕을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옹이구멍이라......'
남궁무학의 뇌리에 당백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백형은 자신에게 옹이구멍이라 말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좀 더 일찍 흔드는 방법은 없느냐?"
남궁명은 거의 결정을 내린 듯하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는 맹주를 살짝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의뢰를 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역추적당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의뢰라는 것은 살수단체나 낭인들에게 청부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정협맹주라면 더더욱 말이다.
"너라면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
남궁무학이 이미 결정한 듯 말하자 남궁명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제야 남궁무학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신선주를 우리 정협맹에서 만들 수 있으면 좋겠구나."
"염두에 두겠습니다."
남궁명은 대답과 함께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조용히 물러났다.
은왕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앞에 부복해 있는 흑의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도 흑사맹이 조용하구나."
은왕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흑의인에게는 절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네가 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사실을 보고하면 된다. 그래, 왜 이렇게 되었느냐?"
흑의인은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것이....... 독왕곡의 그놈이 실패하는 바람에......"
은왕의 입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호오, 그래? 그럼 그 독왕곡의 애송이는 어디 있느냐? 이름이....... 그래, 운곡이라 했던가?"
"그, 그것이......"
흑의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운곡은 이미 몸을 뺀지 오래였다.
허창에서 다시 최하급 무사가 될 자들을 모으다가 흑의인의 압박을 못 이겨 도망간 것이다. 이는 명백히 흑의인의 책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넌 계속 실패만 하는군."
은왕의 말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흑의인은 그 말에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넌 이만 쉬어라."
"헉! 으, 은왕이시여!"
흑의인은 은왕의 말에 화들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끄아아악!
사내의 몸이 마구 뒤틀렸다. 사내의 입에서는 더 이상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비명뿐이었다.
"끄어어어!"
사내의 얼굴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끄으읍......"
입이 비틀려 비명도 밖으로 새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뼈가 기괴하게 뒤틀려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마치 공처럼 둥글게 뭉쳐졌다. 사내의 주변이 흥건하게 피로 물들어갔다.
은왕은 그 모든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은왕의 눈가에 미미하게 만족스런 빛이 스쳐갔다.
"피 냄새가 향기롭군."
은왕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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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재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