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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호]
기억의 시작과 끝, 장엄한 구도의 길을 질주하다
- 김인배의 소설을 읽다
임종욱
1
내가 소설가 김인배 선생(나보다 연배가 한참 위라 경칭을 쓰는데, 글의 흐름상 2부부터는 생략하겠다.)을 처음 안 것은 지난 해 늦봄이었다. 작년 5월 초에 경남 진주시에서는 시인 이형기 선생의 문학을 기리는 이형기 문학제가 열렸다. 이형기 선생님은 나에게는 단순한 시인으로만 기억될 수 없는 분이다. 선생님은 내 모교인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오랜 기간 교수로 재직하셨고, 나는 그때 대학원생으로 학과 조교가 되어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실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은 훌륭한 시인이셨지만 인품 또한 소탈하고 겸손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통찰하는 혜안까지 갖추셨다. 대학에 있는 교수라 해서 다 학문과 인성에서 격에 맞는 자질을 갖추고 있지는 않는데(개 눈엔 똥만 보여서 그런지 인간 탈만 썼을 뿐 이리떼들이나 다름없는 교수족이 더 많다.) 선생님은 이런 정상모리배와 소인배들 때문에 때로 곤경에 빠지신 적도 있었다. 당시 나도 잡놈 중에서도 상잡놈이나 다름없는 어떤 교수(이 인간은 돈만 되면 나라도 팔아먹을 망나니였다.)의 횡포와 막말을 뒤집어써 분루를 삼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 각별히 나를 위로하고 경거망동을 자제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나중에 선생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정년을 채우시지도 못하고 학교를 떠나셨다가 2005년 초에 유명을 달리하셨다.(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선생님, 그곳에서도 환하게 미소 지으며 볼펜을 손에 쥐고 시작에 분주하시겠죠?)
그런 인연으로 나는 진주시에서의 이형기문학제에는 반드시 참가하려고 애쓰는 편이었다.(올해는 가보지 못해 너무나 송구하고 죄스럽다.) 지난해에는 나와 함께 대학에서 공부한 동기 윤재웅 교수가 문학제 발표를 하여 동행했는데, 뒤풀이 행사 때 김인배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진주교대 국어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송희복 선배와 김인배 선생이 같은 진주교대 동문이라 교분이 있었고, 우연히 그곳 출신 문인들과 합석하게 되면서 선생을 소개받게 되었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김인배 선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우선 워낙 오래 동안 선생이 소설 창작과는 거리가 먼 일에 전념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선생은 1948년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나 1975년도에 《문학과 지성》에 중편소설 「방울뱀」을 발표해 등단했다. 이후 선생은 1987년 첫 창작집 하늘 궁전(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고, 1992년에는 두 번째 창작집 후박나무 밑의 사랑(문학과지성사)에 간행했는데, 이때를 전후로 창작의 길에서 벗어나 조금은 엉뚱한 분야에 정열을 쏟기 시작했다. 그것은 만엽집萬葉集을 비롯한 일본의 고대 가요에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우리나라와 일본과 고대 교류사에 관심을 가져 그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근래까지 고대로 흐르는 물길과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집, 万葉集の謎(만엽가의 수수께끼, 일본어판), 임나신론任那新論, 신들의 이름 등 놀랄만한 정력으로 연구 성과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죄송스럽게도 나 역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고 일본 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생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었다. 그 이유야 물론 나의 게으름 탓이겠는데, 선생이 이른바 기성 학계의 일원(쉽게 말해 교수 집단)으로 활동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연구의 길을 걸어간 까닭도 있었다.(이게 더 크다. 아니 다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교수 집단은 결벽증과 배타 의식이 아마조네스나 미국 백인들 못지않게 아주 심해(천지개벽을 해도 이 질병은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담을 쌓아 추방한 ‘재야학자’의 논리와 성과는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비웃는데, 그런 따돌림에서 선생도 자유롭지 않았다. 교수 항문에서 나오는 것은 ‘옥반玉飯’이고, 기타 인간들의 것은 ‘분뇨糞尿’다.) 이런저런 이유로 선생의 연구 성과를 나는 접하지 못했고, 문인으로서나 연구자로서나 나는 선생의 글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이 자리를 빌려 권하고 싶다.)
선생은 나를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부터 크게 환대해 주셨다. 송희복 형이 나를 학자로서 소설 창작까지 겸하고 있다면 과분하게 소개해준 덕분이지만, 선생의 인품 자체가 사람의 좋은 면만 보고 미덕을 칭찬하는 성품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침 가지고 내려간, 그 무렵 막 출간한 내 소설 이상은 왜을 드렸는데, 이 작품도 금방 읽으시고는 분에 넘치는 격려와 평가를 해주셨다.
그러다 얼마 뒤 나는 다시 선생과 재회했다. 선생은 자신이 막 탈고한 장편소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의 원고를 복사해서 들고 오셔서 나에게 읽어 주기를 부탁했다. 나로서는 대선배이자 이미 문인으로서도 자리를 구축한 작가의 글을 읽는 영광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원고를 읽으면서 선생의 80년대 당시 문단 생활과 일본 고대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대강의 경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뒤늦게 선생의 작품을 접하자 이미 발표한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은 앞서 말한 두 권의 창작집 외에도 세 번째 창작집인 비형랑의 낮과 밤(문학세계사, 2008년)도 출간하고 있었다.
선생의 초기 창작집 두 권은 이미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그나마 하늘 궁전은 도서관에조차 없어 선생으로부터 증정받아 읽을 수 있었다. 새삼 좋은 문학작품이 세간에서 일찍 사라지는 현실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었다. 여하간 원고로 읽었던 장편소설이 올해 6월 도서출판 황금알에서 간행되어 나와 나는 다시 한 번 즐거운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음미할 수 있었다.
선생은 오랜 외유(작가로 지낸 시간보다 연구자로 지낸 시간이 길긴 하지만, 나는 선생의 소설을 더 좋아하니 이런 가당찮은 표현을 쓴다.)를 정리하고, 앞으로는 창작 활동에 전념하시겠다고 한다. 그런 결심이 나로서는 너무나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새롭게 창작 의욕을 달구는 이 시기에 선생께서 그간 쓴 작품들의 내용과 가치, 내 소회를 소개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해, 무례함과 부족함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선생께서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입가에 미소 한 번 지어주시기를 빌 따름이다.
2
김인배가 일찍이 낸 두 권의 창작집을 읽으면서 나는 먼저 오래전 학창시절에 찍어두었다가 우연히 다시 들춰 보게 된 낡은 흑백사진을 보는 감회를 느꼈다. 연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책 자체가 낡기도 했지만, 지금 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크기의 활자와 촘촘한 편집, 그리고 활판으로 인쇄된 외양 때문이었다. 책이 출간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나는 대학원생이거나 강사였었고, 그때도 분명 그런 외양의 책을 적지 않게 읽었을 터인데, 이제 20년이 지나 그 책들을 접하니 마치 고서古書를 읽는 듯한 이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책을 편하게 읽기가 쉽지 않았다. 20년 동안 출판의 형식이 얼마나 변했는지 격세지감을 느끼면서도 사람의 눈이란 것이 얼마나 간사한지 깨닫자 스스로 면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대 책을 수없이 읽었던 내가 이 지경이니 요즘 책에만 길들여진 일반 젊은 독자들의 처지라면 이는 분명 고역이 될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어서 빨리 다시 출간되어 지금 독자들도 손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차이는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김인배의 옛 작품들을 읽자니 나 자신도 10대와 20대로 살아왔던 70년대와 80년대의 풍경과 사건들이 풍속화첩을 넘기듯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래 저런 시절을 나도 분명히 살았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그 시절 일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그것은 무심하게 떠나보낸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고, 앞만 보고 지난 일들은 휴지를 버리듯 외면하는 우리들의 청맹과니적인 행진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우리들은 엄청나게 큰 고민과 고뇌를 업보처럼 안고 살아왔다. 그 시대는 질곡과 협잡의 시대였고, 분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뒤섞여 청탁淸濁이 혼재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정의와 자유보다 부조리와 억압에 짓눌려 살았지만, 숭고한 가치와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느끼면서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 때의 그 신산했지만 묵직했던 삶은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때 우리들이 보여 주었거나 마음속에 비수처럼 품고 있었던 그 기백과 사고들을 과연 온전하게 지니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 때의 일과 사람들을 두고 많은 말들을 하지만, 어쩐지 표피에 두드러진 흔적들만 훑으면서 그 가죽 속에서 약동했던 뜨거운 피와 육질은 다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폭우가 내린 뒤 계곡으로 쏟아지는 거센 물결처럼 나의 뇌리를 뭉개고 지나갔다.
김인배의 초기 작품은 이런 자전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적절한 소설적 변용을 거치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를 포함한 당시를 살았던 인간 군상들의 삶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작품은 지금 읽기에 대단히 부담스럽기도 하다. 아주 오래 전 우리들이 드러냈던 초라하고 궁색하기만 했던 소시민적 삶을 다시 대면하는 일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작가의 시선과 목소리가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은 아니다. 때로 이 작가는 그 시대의 일상을 재현하거나 암시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신의 판단과 방향까지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과도한 자기감정의 분출이다. 그러나 이를 나무랄 수만도 없는 것이 바로 그 시대가 그런 상황이지 않았는가? 독재와 부조리에 대해 자신의 속내는 감춘 채 외면하면서도 끓어오르는 울분을 삭이지 못해 허덕거렸고, 진정 용기 있는 사람들은 탄압과 고문을 당하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면서 뜨겁게 항거했으며, 마침내 독재를 타도하고 말았다.
김인배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용기 있게 저항의 길로 나간 사람들은 아니다. 무지몽매하여 부조리한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행동, 즉 투사의 길로까지는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현실의 모순과 압제를 몸과 눈으로 느끼면서 계몽의 단계를 밟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투사들이 흔드는 깃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내면의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언제라도 깃발 아래 모여들 준비와 태세를 갖춰가는 도중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존경보다는 공감(또는 연민)을 느끼게 되고, 그럼으로써 당시와 지금의 나의 삶을 대비해 돌아보게 만든다. 이 땅에 민주화가 한 단계 발전하게 된 과정에서 이렇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계몽된 사람들의 힘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가는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저 시대가 뻔뻔하고 부도덕한 독재의 시대라면 이 시대는 민주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분열의 시대가 아닌가.)
등단작인 「방울뱀」부터 「극락선極樂船」, 「하늘 궁전」, 「어항 속의 물고기는 탈바꿈을 못한다」 등에 나오는 인물들은 왜곡된 현실에 짓눌려 올바른 길을 모색하지만 여전히 어둠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은 인간답게 살아가거나 존재해야 하는 당위에 대해 부단하게 의심한다. 한편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희미하게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성적으로 정의로운 대안對岸의 모습에 혼란스러워 하면서 그곳에 이르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때로 모순에 빠진 혼돈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작품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들은 소설 미학적으로는 공격받을 여지가 없지 않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평한 몇몇 비평가들은 이런 점에 대해 힐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부분은 그저 변명이나 두둔으로 피해 갈 수 있는 약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진정성을 읽는다. 작가가 작품 속에 기교를 적절하게 안배하거나 매끄럽게 소설을 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몰라서 이런 형식을 취했을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구성이나 인물들의 혼란을 통해 작가는 바로 그 시대의 혼란과 모순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는 판단이 나는 들었다. 이런 담론과 구성을 지금 독자들은 인내를 가지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달착지근하고 무반성적이거나 알량한 감성으로 독자의 눈을 현혹하는 데 혈안이 된 근래의 많은 소설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김인배의 소설은 분명 지루하고 요령부득이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음식도 편식이 건강에 해롭지만, 독서 역시 편독偏讀은 위험하다. 편식은 몸을 망치지만 편독은 영혼을 망치니, 어쩌면 이것은 마약보다 더 끔찍한 재앙일 수도 있다.(안타깝게도 이미 우리의 독서계는 상당히 중증 마약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3
김인배 소설의 특징을 말하면서 예술가 소설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작품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걸어간 현실의 풍속도를 실감나게 그려냈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비유적으로 말해 풍속화가로서 화론畵論을 펼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문학을 포함한 예술 또는 예술가가 지향해야 할 바 또는 예술의 본령이나 울타리 안과 밖의 차이, 그런 차이가 야기되는 이론적인 근거 또는 결과에 대해 다양하게 관심의 촉수를 뻗치고 있다. 이미 「하늘 궁전」 같은 작품에서도 이런 사고의 편린들이 드러나지만 역시 압권에 해당하는 작품은 중편 「문신文身」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화가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전시회를 가진 주인공은 어떤 기자에게 자신의 화풍이 귀국 전후를 해서 달라졌다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는 그 동기와 경위에 대해 뒤늦게 편지로 대답하면서 자신이 귀국한 뒤 겪은 일련의 경험에 대해 회고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거나 변용하게 되는 논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펼치는 논리와 실제를 이 글에서 요약하기는 (내 능력 밖이라서) 쉽지 않다. 또 그 지문들을 다 인용하기에도 너무 길다.(줄여놓으면 맛도 떨어지고 왜곡시킬 소지가 크다.) 다만 귀향한 뒤 댐이 생겨 수몰되어버린 자신의 고향을 기억의 단상과 눈앞에 펼쳐진 수면 위의 풍경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이를 화폭에 담으려는 화가의 탐색 과정이 범박한 답안일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참된 예술을 찾아 방황하다 결국 자살로 인생을 끝낸 무명 천재화가의 삶에서 진정한 예술혼의 실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겨우면서 의미있는 일인가를 웅변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예술가 소설이 좀 더 작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이 되어 진술되는 것은 작가가 올해 출간한 장편 바람의 끝자락을 보있는가를 통해서다.
사실 이 작품은 창작에 전념하다가 갑자기 길을 바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일 고대사 연구에 천착하도록 만든 작가 내면의 동기와 그 외유를 마치고 다시 창작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저간의 사정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서 기대와 아쉬움을 함께 맛보았다.
소설의 전반부는 전형적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한 소설가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고, 문단이란 제도 안에서 움직였으며, 작가의 창작과 그의 현실이 어떻게 길항 작용을 하는지 등등에 대한 다차원적인 탐색과 묘사로 진행된다. 그 때문에 나는 오랜 시간 소설과는 거리를 두면서 본의 아니게 소설을 관조했던 이 작가의 소설론이 경험이라는 싱싱한 질료를 이용해 구현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발견 아닌 발견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고,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를 공들여 읽게 했다.
그러나 소설은 후반부로 가면서 조금 다른 전개를 보인다. 화자는 주목할 만한 소설을 발표하다 갑자기 모습을 감춘 한 작가의 언행을 추적하는 눈을 거두고, 자신의 어린 시절 고향 땅에서 만났다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멀어진 한 여자,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회상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물론 기억 속에서 이상화되고 재구성된 과거의 사랑과 수십 년 뒤 그 사랑과 재회하면서 겹치거나 어그러지는 감정의 확산과 수렴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작가가 창작이라는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꿈꿀 수도 있는 의식의 흐름을 왜 이 작품은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지 않는지 의아스러웠다.
원고 상태로 읽은 뒤 정식 출간된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그 때 내가 아쉬워했던 부분은 단지 독자로서의 내 입장에서 드러낸 욕심일 뿐이었고, 작가가 추구한 작품의 주제와 방향은 달랐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김인배는 거의 자신의 모든 소설에서 ‘기억’의 문제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해답을 소설로 구현해내고 있다. 작가가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기억’이 우리들이 사전적으로 알고 있는 단어 기억과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아직 나는 명징하게 제시할 자신은 없다. 어디선가 작가는 한 인간의 현재는 바로 기억에 의해 완성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그 사실을 나는 기억하는데, 그게 어딘지 지금은 찾아보아도 확인되지 않는다. 내 기억도 참 한심하다.) 다만 짐작하건대 그의 기억은 수만 개의 벽돌로 쌓아올려진 건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기억은 드넓은 호수에 뿌려졌다가 물과 한 몸이 되어 녹은 물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물감은 단색이 아니라 온갖 빛깔로 버무려져 있다.
만약 기억이 벽돌이라면 하나하나 분해하여 정형화시킬 수 있지만, 물에 녹은 물감은 그런 분리가 불가능하다. 작가가 「문신」에서 수몰된 자신의 고향을 기억의 흔적을 좇아 화폭에 담으려고 하면서 고향을 품에 안고 있는 호수가 보여주는 다양한 변화(그것이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계절이든 아침과 한낮, 저녁 또는 심야든, 수면 바로 옆이든 배를 타고 수면에 뜬 상태이든 높이 호숫가 호텔의 라운지에서 본 것이든)를 지치지 않고 살피는 것도 이런 ‘기억’의 역학을 암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나는 느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김인배가 앞으로 쓸 소설에서는 지금까지는 다 드러내지 못해 아쉽기도 하고 더 말할 여지가 있어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이 분야의 작품을 많이 창작하기를 기대하면서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유의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쓴 작품에 나오는 논의나 담론만으로도 상당한 경지에 올랐는 데다가, 이는 더욱 발전해야 하고 그럴 잠재력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나는 근래 경남 남해로 내려와 생활하고 있는데, 다행히 김인배는 가까운 진주시에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비교적 자주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결코 대화에서도 어눌하지 않지만, 언어의 결 속에 숨어 있는 깊이나 속뜻이 더욱 나를 궁금하게 만들곤 한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글이나 말로 다 토해내지 못하면 울거나 웃거나 손짓 발짓으로 버둥거리면서 남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런데 김인배는 말보다는 그의 표정에서 더 내면을 읽을 수 있고, 글로 훨씬 잘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런 예술가 소설류에서는 그 기량이 출중하다.(한참 후배가 이런 건방진 단어를 쓰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를…….)
4
김인배의 소설이 지향하는 또 한 측면은 고전(또는 역사)을 소재로 하거나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이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 한일 고대사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노작을 써낸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떻게 말하면 그는 이미 초기 소설에서부터 그런 기질을 많이 드러냈다. 첫 번째 창작집인 하늘 궁전에 실린 단편 「물목」에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강원도 영월 근처 동강 유역에 자리했던 주막촌을 배경으로 우리의 과거 삶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작품집에서는 「강목다리」라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의 짧지만 빛났던 그리고 비극적이면서 웅숭깊은 생애를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이미 이 작품집의 해설을 쓴 박혜경(내 모교의 2년 선배이기도 한 그녀의 초기 글을 만난 것도 이 창작집을 읽은 즐거움의 하나였다.)도 지적하지만, 이 소설은 구성이나 주제, 결말, 문체 등등에서 흠잡을 곳이 거의 없다. 1862년에 있었던 진주민란에 주동자로 참여했다가 애꿎게 참수당한 한 민초의 굴곡진 삶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노신(魯迅, 1881-1936)이 신해혁명(1911년 발발)을 배경으로 그려낸 ‘아Q’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아Q는 역사의 흐름에 휩쓸리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이나 그 의미에 대해 아무런 자각도 못한 채 죽지만, 「강목발이」의 주인공은 몽매에서 개오改悟를 이루는 성숙을 이룸과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진주민란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신해혁명이 그 역사적 의의나 각성의 깊이가 오히려 미치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세 번째 창작집인 비형랑의 낮과 밤에도 역사 소재 작품이 등장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8세기 초에 살았던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조선 땅에 왔다가 지인과 함게 지리산에 가 암자에 은거했던 한 도인道人을 만나 자신이 주장했던 한일(일본과 조선이 되어야겠지만) 외교 노선인 성신誠信의 논리가 가진 모순과 저의가 여지없이 논파되는 과정을 그린 단편 「독요초獨搖草」는 작가의 역사 인식의 예리함과 역사적 사건과 그 변화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품이 지나치게 담론 위주로 짜인 것이 아쉽지만, 담론의 내용이 중립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정곡을 제대로 찌르고 있어 ‘흥미만 추구하는 글 읽기’가 아닌 ‘생각하면서 반추하는 글 읽기’가 갖춰야 할 미덕이 있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같은 창작집에 실린 중편 「비형랑의 낮과 밤」도 근사치에 가까운 소설이다. ‘비형랑’ 자체가 역사상 인물(비록 허구라고 해도)인 점에서도 두 말할 여지가 없지만, 다만 원점에서 흩어지는 파장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단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장편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에도 고전 소재를 적극 활용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작품화하는 솜씨가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요즘 한국 소설이 보여주는 확실한 경향의 하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이른바 본격문학으로 간주되는 작품들이 더욱 심한데) ‘도시소설’로 고착되어 간다는 것이다. 도시와 도시인들, 그 중에서도 발랄 유쾌하기만 할뿐 아무 생각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사는(눈물나게도 여러 작가들이 이런 도시 젊은이들의 방종하고 짜증나는 삶을 대단한 개성인양 잔뜩 추켜세워 더욱 조장하고 정당화시켜준다.) 군상들의 이야기가 잡지마다 작품마다 판을 치고 있다.(그렇지 않은 작품도 없진 않지만, 창녀촌에서 처녀 찾기 만큼이나 어렵고 귀하다. 이 표현 때문에 분명히 나 욕먹겠구나.) 그런 점에서도 나는 김인배의 고전 소재 작품이 꾸준히 쓰여지기를 희망한다.
5
나머지 몇 가지 단상을 얘기하고 글을 끝내겠다.
우선 김인배 소설이 보여주는 문체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글을 본 뒤 흥미가 생겨 그의 작품을 읽거나, 또는 전부터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김인배 소설의 문체가 호흡이 길고 문구의 배치가 남다른 데가 있음을 알게 되거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이 서너 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그가 쓰는 단어나 어구가 나쁘게 말하면 한자투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요즘 소설이 보여주는 세련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한 작가의 문체가 가진 개성이기도 하지만, 역시 요즘 독자들의 눈높이와는 차이가 있어 원활한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문체를 버리고 요즘 트렌드를 좇으라고 나는 말하지 않겠다.
문체는 작가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문체는 그의 소설이 구축하고 있는 큰 틀에 어울리는 적합성을 띠고 있다. 연쇄되는 사건이나 말초적인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엮은 소설이 드러내는 부박한 문체가 그의 소설에서 쓰인다면 이것이야 말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이 작가나 저 작가나 문체나 구성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면 참으로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김인배는 소설을 쓰면서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는 고유어를 애써 찾아내 활용한다. 이것만은 예문을 한 번 들어보자.
남정네들이 바다로 나간 사이 아낙네들은 겨끔내기로 길마를 벗긴 소들이 쟁기를 끄는 원시적 농경 방법에 의존한 채 푸서리를 걸기질하는 데도 사내 못잖은 갈망으로 해치웠다. 직접 지게를 지고 질삿반에 얹어 실어 나르는 퇴비를 들이부어 논밭을 걸우고, 넉가래로 다져서 노가리하는 일과 패암까지의 김매기를 거의 아낙네들이 감장하다시피 가말아내는 것이었다.(하늘 궁전 가운데 「등대곶」 298쪽, 밑줄 필자)
박식한 독자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나 같은 천학비재는 밑줄 그은 단어들은 사전을 펼쳐놓고(그것도 꽤 두꺼운 국어사전으로) 뜻을 찾아보고서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에 80년대에 창작된 작품에는 이렇게 사전에서나 볼 수 있는 순우리말 단어들을 찾아내 쓰는 일이 유행했었던 것 같다. 아마 요즘 이렇게 숨어 있는 우리말을 애써 찾아 쓰려는 작가도 없을 듯하고, 오히려 이런 자세를 (차라리 외국어를 멋들어지게 쓰지 웬 골동 취미라면서) 내심 비웃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이런 노력을 굳이 권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새로운 어휘를 발굴하여 작품에 담는 노력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 창작에는 우리말을 더욱 풍성하게 활용하고 그 의미를 확장시키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김인배는 삼천포에서 내어나 진주교대와 동아대학교를 나오고, 오랜 기간 경남 일대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진주시에 정착해 창작과 후진 양성(마산에 있는 창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키고 있다.)을 병행하고 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그의 소설은 진주나 경남 일대 바닷가 등이 배경이 된 작품이 꽤 많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조선 시대에만 유용한 지혜인 줄 알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 정도가 아니라 더욱 심해져 도시 밖에서 젊은 사람 보기가 흥부 집 쌀독에서 쌀알 찾기만큼이나 어려워지고 있다.
지금도 지방 문단이란 것이 활성화되고는 있지만 작가들의 도시(그 중에서도 서울) 편중 현상은 새삼스럽게 지적할 거리도 안 될 만큼 당연한 일로 치부되고 있다. 예전에는 어느 지방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가 제법 눈에 띠었는데, 지금은 이런 분들도 점점 더 희귀해져 가고 있다. 또 앞서 말한 것처럼 소설하면 으레 대도시(그것 역시 서울이나 수도권)가 무대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버리고 있다.
워낙 좁은 나라라 전국토의 도시화가 이뤄질 날도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남을 만큼 코앞에 닥치긴 했지만, 김인배처럼 고향에 머물면서 고향의 이야기를 애정을 담아 쓰는 작가가 있는 것도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 진주에 남아 진주 주변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기를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다.
그의 문운이 앞으로도 더욱 창성하기를(당연히 그러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기원한다.
임종욱/ 한문학자, 소설가. 저서 『동양 문학 비평 용어 사전』, 장편소설 『이상은 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