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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4]
고요히 흐르는 금강
이상면_작가, 전 서울대 교수, 종학대학원장
제21화 아산만 송악에서 왜적을 막았다
미나미(南) 소좌는 11월 14일 정오 연산에서 공주로 가려다가 동학군에 포위 공격을 받게 되자, 그 사실을 공주 모리오(森尾) 대위에게 알리는 메모를 썼다. 지나가는 소금장수에게 거금을 주고 공주에 전달케 했으나, 그게 전해질 리가 있겠는가---.
모리오(森尾)는 여전히 미나미(南) 중로군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지만, 금산 진산을 거쳐 연산으로 나오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공주성 주변에 동학군 세력이 많이 약화된 참에, 마침 서북 내포 지역에서 토벌하던 이두황이 장위영 군 8백여 명을 이끌고 저녁 때 곰나루(熊津)를 건너 이인(利仁)으로 들어왔다.
장위영 군의 진입으로 경군 전력이 배가된 것이었다. 모리오(森尾) 대위는 한결 고무되어 예하 서로군에 지시해 경리청 통위영 등 공주성 경군(京軍)을 이인 용수막(龍水幕)으로 집결케 했다. 그날 밤 망월 아래 노성산에 포진해 있을 전봉준 군을 격퇴할 셈이었다.
그 무렵 이종만은 연산에서 전투를 마치고 말을 달려 노성으로 전봉준 대장을 찾아갔다.
“일단 중로군을 연산에 주저앉혔지만, 필경 그들이 공주에 상황을 알렸을 테니 서로군이 경군을 대동하고 쳐내려올 겁니다. 일단 피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알겠소. 전라도로 내려가서 재기를 도모하리다. 장군은 서북 내포 지역으로 가서 박인호 대접주를 구원하고 아산만 송악을 지키며 왜적을 막아주시오.”
이종만은 이내 별동대(別動隊) 기마 경호대를 이끌고 호중 동학군이 집결해 있는 계룡산 신도안으로 말을 달렸다. 말 머리 위로 별이 나르는 달밤, 그의 뇌리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전봉준 대장이 잔여 병력 5백여 명을 이끌고 전라도로 내려간들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까? 손병희 대통령(大將軍)이 호북 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간대도, 호남 군과 합세해서 관군 일본군과 싸우기보다 산간 어디엔가 숨어 있을 교주를 찾아서 충청도로 돌아오는 게 목표리라.’
생각할수록 그날 연산 전투에서 중로군을 포위했다가 놓친 것이 한스러웠다. 아침에 연산에 오겠다던 손병희가 점심때만 왔더라도, 중로군을 섬멸할 수 있었을 텐데---. 손병희가 오전에 연산으로 오다가 중로군 지대를 조우해 교전을 하고서도, 그들이 물러나자 추격을 하지 않고 중간에 밥을 해먹고 오느라고 늦었다니---.
반면에 중로군 지대는 호북 군에 쫓기면서도 구보로 연산에 돌아와서 본대가 포위당한 것을 발견하고 즉각 그 배후를 처서 포위망을 뚫었겠다---.
손병희는 궁리에 열중하다가 실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달포 전 전봉준이 논산에서 공주로 출격할 적에도, 그는 영동에서 새삼스레 모병을 더 한답시고 5일이나 머뭇거리는 바람에 경군 일본군이 공주성에 먼저 진입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그래도 그가 한강 유역에서 이끌고 온 2천여 호북 군이 아직도 별 탈이 없이 건재하는 것은 괄목할만한 일이었다. 병사들을 도인으로 대하고 잘 살펴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전봉준도 선비 출신이라 그런지 외곬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었다. 지난 봄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장태를 앞세우고 화승총 밀집대형을 지어 공격해서 승리를 거둔 것을 늘 자부했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는 장태가 없었는데도 동학군에게 밀집대형을 지어서 반복해서 적진에 밀고 들어가게 해서 희생자가 너무나 많이 나왔다. 병사들이 도중에 탈영한 것도 전술 운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에 비해 이종만의 호중 동학군은 어떤가? 거의가 둔전병(屯田兵)이라서 전투가 없는 시기에는 귀가시켰고, 포접(包接) 별로 동학을 익히며 결속을 다졌다. 주요 전투에는 으레 양총을 든 경호 기마대가 선두에 나서서 싸웠기 때문에 병력 손실이 적었다.
장수는 모름지기 병사를 살펴 사기를 북돋우고 전법에 맞게 전투를 해서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 강적 앞에서 전술 전략도 별로 없고 병법마저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좋은 결과를 바라겠는가?
*
계룡산 신도안에는 호중 동학군이 여기저기 화톳불을 피워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북부 연대로 오일상 대접주를 찾아갔다. 그가 나와 반기면서
“관군 일본군이 내려올 모양인데,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전봉준 대장은 곧 논산을 거쳐 전라도로 내려갈 모양입니다. 손병희 호북 군도 그 뒤를 따라가 호남 군이 재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 해월 선생님을 찾아서 다시 충청도로 올라오면 전투가 재개될 겁니다. 저는 그 사이에 전봉준 대장의 뜻에 따라 서북 내포 지역으로 가서, 박인호 대접주를 구원하고 당진 송악산을 지키면서 왜적을 막으려고 합니다.”
“하기야, 동학군이 남과 북에서 각기 싸워야, 관군 일본군도 갈라질 수 있는 게 아니겠소.”
“그런데 아까 노성에서 보니까, 전봉준 대장의 잔여 병력이 5백여 명뿐입디다.”
“전라도에 내려가서 보충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오.”
“해월 선생님께서 충청도로 돌아오실 때까지, 형님은 향토에 계시면서 각 포접 핵심 대원들을 지도하며 전투 재개에 대비해서 준비를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 교통과 병참 확보가 중요합니다.”
“조재벽 대접주는 일찍부터 해월 선생님께 동학혁명운동을 건의했고, 연초부터 전봉준 대장과 함께 기포(起包)를 선도했으며, 가을부터는 김개남 군과 함께 관군 일본군을 상대로 몇 차례 전투를 치렀으니, 전라도로 내려가서 호남 군을 돕고 호북 군과 함께 해월 선생님을 구원해서 올라오는데 동참할 것 같습니다.”
“의향을 한번 떠 보시지요.”
이종만이 남부 연대 조재벽 대접주한테 가서,
“연산의 중로군은 이미 공주성 서로군과 통해서 당장이라도 연합 동학군을 협공하려 들 것입니다. 전봉준 대장도 곧 예하 병력을 이끌고 논산으로 내려갈 겁니다. 손병희 대통령(大將軍)은 이미 논산에 가 있습니다. ”
“나도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을 인솔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호남 군을 돕고 해월 선생님을 찾아서 모시고 오는데 동참하고 싶소. 장군도 같이 남쪽으로 가시겠소?”
“아닙니다. 전봉준 대장께서 저더러 서북 내포 지역으로 가서 박인호 대접주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해월 선생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합세하겠습니다. 오일상 대접주도 향토에 남아서 전투 재개에 대비할 겁니다. 전라도에 내려가시면 여러 모로 어려우실 텐데, 저희 기마 경호대 중에 그간 남부 연대를 돕던 소대 하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배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종만은 다시 북부 연대 오일상 대접주한테 돌아와서
“조재벽 대접주는 남부 연대 중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을 인솔하고 내려갈 모양입니다. 북부 연대와 중부 연대도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은 내려가게 하고, 그 외 일반 병사들은 일단 귀가 시켰다가 해월 선생님께서 돌아오실 때 다시 소집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향토에 남는 포접 군을 중심으로 통신과 병참에 대비하면 되겠지요.”
“형님께서 향토에 남아 전투 준비를 잘 하시도록 저희 기마 경호대 가운데 그간 북부 연대를 돕던 소대 하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그렇게 해주시면 교통과 병참 확보에 유익하겠습니다.”
이종만은 다시 기마 경호대 집결지에 돌아와서 대원들에게
“전봉준 대장의 뜻에 따라 기마 경호대 본대는 서북 내포 지역으로 가서 현지 동학군과 함께 박인호 대접주를 도우며 당진 송악산에 포진하려고 하오.
조재벽 대접주가 남부 연대 중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을 인솔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호남 군도 지원하고 해월 선생님을 모시고 돌아오는데 동참한다고 합니다. 남부 연대와 종종 활동하던 원남 소대는 조재벽 대접주를 따라서 남행을 하면 어떻겠소?
그리고 오일상 대접주는 각 연대 핵심 요원들과 함께 해월 선생님께서 돌아오시면 전투가 재개 될 것에 대비해서 교통과 병참에 만전을 기하신다고 하오. 그간 북부 연대와 종종 활동하던 원북 소대는 오일상 대접주를 모시고 향토를 지키면 어떻겠소?”
대원들이 다 좋다고 박수로 화답한다.
이어서 이종만은 조재벽 오일상 대접주와 함께 각 연대 포접 군 지휘자들을 불러 놓고,
“오늘 연산 전투에서 중로군을 포위했다가 섬멸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 중로군을 일단 현지에 주저앉혔으니, 전봉준 대장의 호남 군은 노성에서 이제 곧 전라도로 내려갈 것이오.
호중 군은 둔전병(屯田兵)이라서 모두 전라도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소.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이 호북 군과 호남 군을 따라 전라도로 간다고 해도 머지않아 해월 선생님을 모시고 충청도로 돌아올 것 같소. 남행을 할 포접 군은 지금 의사표시를 하시지요.”
남부 연대 가운데서는 무주 금산 등 금강 원남 중대가 남행을 하겠다고 나섰다. 중부 연대 가운데서는 회덕 진잠 등 금강 서부 중대가 남행을 원했다.
“그러면, 향토에 남는 각 연대 각 포접 군은 당분간 일시 귀가 했다가---.”
‘일시 귀가’ 소리를 듣자, 포접 군 지휘자 다수가 ‘와-’ 함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일시 귀가했다가---, 남쪽으로 간 북접 군이 해월 선생님을 모시고 돌아오면, 다시 모여서 함께 활동하기로 합시다.”
모두가 좋다고 박수로 환호했다.
*
이종만은 궁을기(弓乙旗)와 총관령기(總管領旗)를 펄럭이며 기마 경호대 본대 3백 명을 이끌고 진잠 김개남 총관령 지휘소로 접어들었다. 왁자지껄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왕림하시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난국에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무사라니요? 어제 청주성을 치다가 변을 당했어요. 갑자기 협공을 받고 놀란 참에 비까지 내려서, 남문 못미처에서 그만 발길을 돌려야 했어요. 전투를 그 정도로 끝내고 연산으로 가려고 했는데, 도중에 강시원(姜時元) 차도주(次道主)께서 각중에 복병을 만나 운명하셨어요.”
“복병을 만나다니요----.”
“차도주께서 을미(1885)년 수난 시 관에 끌려가 고초를 받아 옥체가 불편해서---, 가마를 타고 전장에 오신 것이 그만 도리어 표적이 된 것 같습니다.”
“해월 선생님을 이어서 교주가 되실 분인데---.”
“시신을 찾아서 장례를 모시느라고 연산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황망 중에 장례를 모셨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연산 전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호중 군이 온종일 중로군과 싸워서 일단 그들을 연산에 주저앉혔습니다. 손병희 호북 군은 이미 논산에 가 있고, 노성의 전봉준 군도 곧 논산으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저희 호중 군은 거개가 둔전병(屯田兵)라서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을 제외하고 일시 귀가시켰다가, 해월 선생님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소집해서 활동하려고 합니다.
저는 기마 경호대를 이끌고 서북 내포 지역으로 가서 박인호 대접주를 지원하며 당진 송악산에 포진할 예정입니다. 북부 연대 오일상 대접주는 향토에 남기로 했고, 남부 연대 조재벽 대접주가 남행을 원하는 포접 군을 이끌고 내려가서 호남 군을 돕고 해월 선생님을 모셔오는데 동참할 것입니다.“
“우리 호남 좌도 군도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 대장의 우도 군에 합세해야 쓰것소.”
이종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자고 가시오. 장군을 보면 순천 영호대접주 김인배(金仁培) 장군 생각이 나오.”
“김인배 장군과 저는 경오(庚午,1870)생 갑장(甲長)입니다. 작년 초 금구 원평 김덕명 장군 댁에서 만난 이래 친하게 지내왔습니다. 지난 여름 남원 대회 때도 만났었구요.”
“지난 봄 동학혁명운동 때 이종만 장군이 전봉준 대장을 보필한 것처럼, 김인배 장군은 늘 나를 도왔어요. 그 후 영호대접주가 되어 순천에서 하동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누비며 척왜항전에 나서서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그만 최근 광양만 전투에서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아-, 아까운 인물입니다. 천하장사에 배포가 크고 용맹무쌍한 인물이었는데---.”
“이종만 장군과 쌍벽을 이루는 거물이었지요.”
“제가 어디---.”
“지난 봄 반봉항쟁에서 전봉준 대장을 도와 연거푸 승리했고, 척왜항전에서도 다들 패전을 거듭했어도 장군은 연전연승 하셨지 않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척왜항전 초기부터 삼남 최대의 청주산성을 털었고 진남영 관군 80명의 양총을 탈취해서 기마 경호대를 별동대(別動隊)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도 괴산 전투, 승전곡 전투, 마달령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고, 이어서 최근 금산 연산 지연작전에서도 성공해서 공주와 청주에서 패전한 남북접 동학군에게 퇴로까지 열어주었으니, 그보다 더 큰 전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호중 군이 중로군을 연산에 주저앉힌 것은 다행이지만, 필경 그들이 공주의 서로군과 통해서 이 밤이라도 공격을 해올지도 모릅니다.”
“공격 목표는 노성의 전봉준 군일 거요. 우리야 그제 청주를 치다가 비가 와서 금방 물러났으니까, 무슨 관심이나 두겠소? 벌써 달이 기우는 것 같소.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합시다.”
15일 새벽녘 먼 서쪽 지평에서 간간이 포성이 울렸다.
“노성에서 벌써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오.”
“아마도 서로군 한 패는 남진해서 노성을 치고, 다른 한 패는 금강을 거슬러 우회해서 이쪽으로 올지도 모릅니다.”
“남접이 기포를 먼저 하고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리 돌아가니, 결국 전봉준과 나 그리고 손화중 3인의 책임이 크오. 북접 군은 교주의 도(道)를 받아 항전을 해왔으니 끝까지 싸워서 나라와 민족을 구해주시오.”
“여의치 않으면 초기 동학 때처럼 산맥을 전전하며 때를 기다리도록 해야지요.”
*
모리오(森尾) 대위는 그 시각 서로군 본대를 이끌고 용수막에 나가서 경리청 2개 소대와 내포 지역에서 온 장위영 군을 동반하고 노성산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전봉준 군은 이미 논산으로 떠나간 상태. 관군 일본군은 전봉준 군을 추격해 논산으로 향했다.
모리오(森尾)는 이종만이 예측한 대로 전일 청주성 전투에서 밀려난 김개남 군이 재기할 것에 대비해서, 내포 지역에서 돌아온 아카마츠(赤松) 지대에 홍운섭의 경리청 군 2개 소대를 붙여서, 금강 좌안을 따라 동진케 해서 부강, 신탄을 거쳐 진잠으로 남진케 했다.
이런 판국에 이종만 기마 경호대가 진잠에서 금강을 따라 북진하면 10월 24일 승전곡에서 쳐부순 아카마츠(赤松) 지대와 만나게 될 우려가 있었다. 또한 같은 날 한다리(大橋)에서 손병희 호북 군을 박살낸 홍운섭의 경리청 군까지 조우해 큰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종만은 진잠을 떠나기에 앞서 기마 경호대 본대 60명을 10명씩 6개 반으로 나누어 각 반에 조교대 40명씩 붙여서 6개 소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두 관군 복장으로 변장케 한 다음, 소대 별로 시차를 두고 금강 좌안을 따라 북상케 했다.
비슷한 시각 아카마츠(赤松) 지대와 홍운섭 군은 금강 우안을 따라서 부강에서 남하할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마주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설사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기마 경호대가 모두 관군 복장을 착용했기 때문에, 그들에겐 우군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종만은 온종일 말을 달려 예산으로 박인호 대접주를 찾아갔다.
“형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말도 마오. 내포 동학군이 지난 10월 28-29일 홍주성 전투에서 패전한 이래 지금껏 쫓기 고 있어요. 이두황 장위영 군이 내포 지역을 돌며 노략질을 하다가 최근에 공주로 내려갔어요.”
“일본군도 안하는 짓을 경군이 하다니---,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승전곡 패전 후 홍주에 들어가 있던 아카마츠(赤松) 서로군 지대가 최근 장위영 군을 따라 공주로 내려갔는데, 그들을 구원하러 인천 병참감부에서 온 야마무라(山村忠正) 중대가 아직도 내포 지역을 돌며 동학도를 살해하고 있어요. 총알이 아까워서 탄띠나 총대로 때려죽인대요.”
“전봉준 대장께서 저더러 내포 지역에 가서 형님을 도와드리면서, 당진 송악산(松岳山,151m)에 포진하고 객포(客浦)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창구 대접주가 잡혀가서 처형된 후, 송악산이 유회(儒會) 측에서 넘어갔어요.”
이종만은 이튿날 대원들과 함께 면천 승전곡을 거쳐 당진 송악산으로 향했다. 송악산은 당진 북쪽 30리 경 바닷가에 우뚝 솟아있었다. 안개 속에 외로운 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갯벌 위에 치솟은 산으로 그 줄기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만조 때는 반도처럼 보일 것 같았다.
반도 서쪽은 선승면(仙昇面,船乘面)으로 대부분이 갯벌로 보였다. 송악산 서남록 수백 척 절벽 아래 객포(客浦)가 있었다. 마침 간조라 그런지, 냇물 같은 수로가 광활한 갯벌 사이로 수십 리 밖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수많은 배들이 갯벌에 누워있었다. 만조가 되면 수위가 30척이나 높아져서 제법 큰 배도 객포까지 들어온다고 했다.
반도 동쪽은 중흥면(中興面)인데 갯벌과 평야가 이어져 있었다. 객포에서 조그만 고개를 넘어 돌다리(石橋)를 건너서 언덕 너머로 20리를 가면 한포(韓浦,韓浦)가 나온다. 그곳에서 아산만을 건너면 평택을 거쳐 서울로 갈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포는 포구는 좋으나 그곳에 이르는 길이 질어서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민들은 대부분 만조를 이용해 객포에서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드나든다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이종만은 동네 유지 이인직(李麟稙,1875-1911)을 송악산성으로 보내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유회 군 대표에게 청주병사가 보낸 관군이 왔다고 전하라고 일렀다.
얼마 후 유회 군 대표가 산성에서 내려와서 이종만에게
“먼 길을 오셨는데, 황망 중에 모시지 못해 황공하옵니다.”
“내포 일대를 순시하다가 선비들이 송악산을 지킨다고 해서 위로 차 왔습니다. 우리야 늘쌍 험한 일을 하지만, 선비들이 삭풍이 부는 산정에서 고생을 하시니 어디 쓰겄소? 산 위에서 하시는 일이 주로 무엇인가요?”
“그저 불을 밝히고 있는 겁니다. 지나가는 배들이 만조 때 객포로 찾아들게요.”
“산성에 경치가 좋을 것 같소.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없는지 한번 올라가보고 싶소.”
*
날이 어두워지자 밀물이 객포 앞 갯벌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시시각각 수위가 높아져 얼마 안가 수십 리 갯벌이 온통 바다로 변해 출렁였다. 이윽고 만월이 솟아오르자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경치가 전개되었다.
이종만은 선승면 객포(客浦)와 고개 너머 중흥면 돌다리(石橋)에 각각 1개 소대를 배치했다. 송악산성에 있는 유회 군이 먹고 마실 술과 안주를 잔뜩 들고 2개 소대를 이끌고 유회 대표의 안내를 받아 산성으로 올라갔다.
유회 대표가 관군 복장을 한 이들을 동반하고 나타나자, 산성에 있던 유회 군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종만이 술과 안주를 많이 내놓자 긴장을 풀고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종만은 그들에게 술잔을 권하며 노고를 치하하고,
“글을 읽으실 분들이 이런 험한 곳에서 고생을 하시면 되겠소? 이곳을 우리가 대신 지켜줄 테니 귀공들은 각자 가정에 돌아가서 좀 쉬시지요. 비축한 식량과 각종 비품은 가져가셔도 좋고, 굳이 놓고 가시겠다면 아주 후하게 값을 쳐드리겠소.”
유회 군 대표에게 은화 몇 닢을 건네주자 다들 싱글벙글 하며 돌아갔다.
산성은 주위가 천보나 되어보였다. 고 이창구 대접주가 이곳을 지키면서 수리를 많이 한 듯, 성벽이 아주 견고해 보였다. 성벽 안에는 커다란 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천여 명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높은 산인데도 산성 저지대에 제법 큰 샘물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성벽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에 전투가 많이 있었는지 성벽에서 굴러 내린 듯한 큰 돌들이 여기저기 많이 널려 있었다. 앞으로 전투가 있게 되면 총탄이 한정되어 가급적 커다란 돌을 굴려내려 보내는 것도 적군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원들과 상의 끝에 그 돌들을 산성 위로 운반하기로 했다. 인근 각처 동학군을 동원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직 동학군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그 무렵 10월 24일 승전곡 패전 후 홍주성에 고립된 아카마츠(赤松) 서로군 지대를 구원하려고 인천 병참감부에서 긴급 파견한 야마무라(山村) 중대가 그 지대를 지원해서 공주로 돌아가게 한 후에 인천으로 복귀하려다가, 이두황의 장위영 군마저 그 지대를 따라 덩달아 공주로 가버리자, 그 공백을 메우려고 당분간 머물게 되었다. 해미 태안 서산 등지를 돌며 토벌 활동을 해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야마무라(山村) 대위의 본대는 인천으로 복귀하고 사이토(齊藤) 소위가 이끄는 지대를 홍주에 남기기로 했다.
야마무라(山村)는 18일 덕산에서 아산으로 이동하면서 앞으로 보급품을 아산 대신에 운송이 편리한 송악산 객포(客浦)로 보낼 생각을 하고 조사대를 보내 포구 시설과 제반 여건을 조사하게 했다. 공교롭게도 조사대는 이종만이 송악산을 차지하고 기초적인 보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경비에 나선 날 늦은 오후 객포에 나타났다.
이종만이 급보를 받고 그들을 객포 선술집으로 초대했다.
“먼 길을 오셨는데, 접대가 소홀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야마무라(山村) 본대가 인천으로 복귀하고 지대가 홍주에 남게 되었는데, 아산항에서 홍주가 너무 멀고, 한포에서는 도로가 좋지 않아서, 향후 보급품을 객포로 보내려고 합니다.”
“갯벌이 드넓고 수로가 얕아서 한낮이나 밤중에 만조를 타고 들어오셔야 하겠습니다.”
“인천에서 오려면 밤중이 되겠는데, 등대가 없고 포구에 조명이 좋지 않아 걱정입니다.”
“송악산 위에서 항시 불을 밝혀놓고 있습니다. 그 선박이 언제쯤 들어오게 됩니까?”
“간만의 차이를 생각해서 아마도 그믐께나 될 것 같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귀중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이종만은 그들이 간 후 일본군 보급대가 상륙할 것에 대비해서 작전 구상에 들어갔다. 송악산 동남쪽에 경사가 다소 완만한 점에 유의해서 성벽 안 동남쪽에 큰 돌을 더 많이 확보해두었다. 동남쪽 돌다리 건너편 언덕에서 2십리 밖 한포(韓浦)로 이어지는 길도 탐사를 해두었다.
작전을 수성과 공격으로 나누어 여러 각도로 구상을 해두었다. 적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큰 돌을 더욱 많이 끌어 올렸다. 다수 병사가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식량도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 객포에 상륙하는 보급선을 야간에 제압하고 보급품을 탈취하는 훈련도 해두었다. 적군이 상륙해서 아군이 밀리면서 벌어질 수 있는 경우도 여러 모로 분석해서 만반의 대비를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믐날 밤중에 괴선 한척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대원들이 객포 요소요소에 포진하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객포 부두에 배를 대고 수십 명이 짐을 주고받아 하역이 끝나자, 이종만의 신호에 따라 동학군이 일제히 사격을 했다. 일본군도 즉각 반격에 나섰다. 동학군이 사격에 약간 밀리는 듯하자, 그들은 더욱 기세를 높여 전진해오며 사격을 해왔다.
그때 탈취조가 몰래 부두로 접근해서 궤짝들을 망보던 두 명을 총검으로 가격해서 바다에 밀어 넣었다. 탈취조 여러 명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궤짝들을 들고 샛길로 나와서 산성으로 줄행랑을 쳤다. 동학군은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하자, 서서히 퇴각해 산성으로 올라갔다.
일본군은 계속 추격을 해왔으나 저지대에 위치하게 되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동학군은 드디어 그들에게 큰 돌을 굴려 내렸다. 일본군은 예기치 않게 큰 돌이 굴러내려오자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여지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그들의 사격도 주춤해졌다.
일본군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객포로 도주했다. 그러나 이미 만조가 간조로 바뀐 상황.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밑이 갯벌에 닿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용케도 미리 부근 지형을 알아 두었던지, 고개를 넘어 돌다리를 건너서 한포(韓浦)로 달아나 버렸다.
기마 경호대는 산성에서 함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 취사대가 미리 비축해 두었던 각종 식자재로 조찬을 푸짐하게 차렸다. 조찬 후 이종만이 핵심 대원들과 함께 노획한 궤짝을 하나하나 열었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양총 실탄 1만 발과 조선 돈 1만 냥을 비롯해서 내의 신발 및 각종 건식품 등이 많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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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큰 보복이 닥쳐올 테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송악산을 누구에게 맡길까?'
이종만은 생각 끝에 유회군 대표를 객포술집으로 초대했다.
"원래는 동학군이 산성을 지켰다던데, 어떻게 해서 유회가 떠맡은 된 것입니까?"
"달포 전에 장위영 군이 와서 동학군을 내쫓고 저희드러 송악산을 지키라고 해서..."
"일본군이 뒤에서 시켰을 시켰을 거요. 지난 6월 경복궁을 점령하고 장위영 군 등 경군을 괴뢰로 만들었어요. 동학란을 진압하려 온 청군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했어요."
"동학란이 단초가 된 것이네요"
"지난 봄 동학당이 전라도에서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폐정개혁을 하려고 난을 일으켰지만, 동학은 유불선 3교에 기반을 두고 서학을 대응하여 일어난 도학입니다. 인간을 하늘처럼 받드는 인내천 (人乃天)사상으로 사민(四民) 간의 화목을 도모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적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해야 합니다."
"동학군 측과 협의를 해보고 싶습니다."
기마경호대가 떠나는 날 10시(巳)시, 유회 군 측과 현지 동학군 대표들이 취주악 연주 속에 객포로 몰려들었다.
양측 대표가 손을 맞잡고 송악산을 함께 지키기로 서약하자, 이종만이 두 손을 은화 주머니를 받쳐들고
"양측이 송악산을 지키기로 했으니 성금으로 5백 냥을 나누어 드리겠소.."
양측 대표들과 주민들이 박수로 환호하는 가운데, 기마 경호대가 뿌연 흑면지를 일으키며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