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의 기억- 원평동 ‘평택제일낚시’ 강동성(남, 1934년생)
2020.01.09
서울에서 태어나서 덕수상고를 졸업했다. 형은 은행원이고 두 동생이 낚시가게 도매업을 했다. 그 영향으로 1980년 평택으로 내려와 통복고가 아래에 ‘제일낚시’를 개업했다. 평택지역 낚시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고향이 어디세요?
우리는 서대문 미근동이요. 서대문경찰서 옆.
학력은?
내가 미동초등학교 나왔어요. 충청로에 있는 거. 한양공업중학교 3학년 때 6.25가 나서 피난 다니다가 제 때 졸업을 못했지. 내가 친구들 졸업하고 3년 있다가 졸업했어요. 22살에. 우리 형이 덕수상고 1회인데 내가 45회로 들어갔어요.
군대는?
군대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갔지. 나이 먹어 졸업해서 졸업하자 가야 됐어.
형제는?
우리 형제가 아들만 열이오. 우리 형이 덕수상고 1회로 나와서 식산은행 상주지점에 다녔다구. 나머지 형제들은 종로에서 낚시가게를 운영했어. 국내에서 가장 큰 도매상이었어. 종로제일낚시하고 남대문 제일낚시가 우리 형님들이 운영하는 가게였지. 내가 덕수상고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니께 27살이더라고.
전역 후에는?
제대한 뒤에는 서울에서 직장생활 5년했고 수원 내려와 구로동 집까지 기차 통근하면서 3년 다녔어.
결혼은 언제했어요?
내가 결혼이 좀 늦어. 서른하나에 했는데 피난 다니고 직장 다니고 하느라 늦은 거지. 우리가 3남매를 뒀어요. 아들 하나고 딸이 둘이어. 아들은 평택 사는데 여기 낚시가게(제일낚시)하고, 큰딸은 서울 살고 둘째 딸은 혼자 사는데 국세청에 다녀. 쉰 세 살인디 결혼할 생각을 안혀.
평택에는 언제 내려왔어요?
평택은 1980년에 왔을 거여. 아는 사람은 없었는디 사업상 좋아 보이더라고. 교통도 좋고 농사도 잘 되고. 그래서 수원에서 내려왔지. 동생들이 밀어주지 않았으면 못 왔어. 순전히 밀어줘서 오게 된 거지.
평택에 와서는 무슨 일을 했어요?
여기 안성천 둑방 아래가 낚시하기가 좋았어. 기차역 앞에 낚시 가게가 6개가 있을 땐데 저기 고가다리 아래쪽 둑방 옆에서 낚시점을 했지. ‘제일낚시’라고. 장사가 잘 됐어. 둑방 아래에 가게가 있어서 차를 주차하기도 좋고. 서울 동생들이 하는 낚시 도매상에서 물건을 싸게 밀어줘서 잘 된 거지. 그러니께 이문이 많이 남지. 그렇지 않았으면 쉽게 자리 잡지 못했을 거여.
평택지역은 왜 낚시가 잘 됐어요?
안성천에서 민물낚시를 많이 했어. 아산만 막힌 지 얼마 안 되어서 통복천 둑방 아래서도 바다낚시가 아주 잘 되었다고. 그러다보니까 둑방 아래는 순 쓰레기장이여. 낚시하고 쓰레기 함부로 버리고 가버리니까. 너무 그러니까 시청에서 못 내려가게 막았어, 5년 전에. 그래서 5년 전부터 우리 가게가 장사가 안 돼.
가게 위치는 어디였어요?
통복고가다리 아래 육교반점 있잖어 거기 건너편. 위치가 좋아서 잘 되었어. 우리 가게는 도로 확장한다고 철거됐지. 지금 이 건물 1층에 가게가 있잖어. 우리 아들이 해. 그런데 장사가 안 되어서 손해만 봐. 이 건물 임대료 받아서 손해를 메꾸고 있다구.
돈은 많이 벌었겠네요?
내가 수원에서 내려올 때 24평짜리 아파트를 1억 원 받고 팔아서 내려왔어. 그런데 그걸로 여기 삼성아파트 32평짜리를 6천 2백에 매입했는데 돈이 남더라고. 장사해서는 20년 만에 여기 지금 살고 있는 3층짜리 건물을 샀지. 그게 다야. 애들 키우고.
그럼 아드님이 하시는 낚시점 건물주가 어르신이네요?
내꺼라니께. 그런디 (장사가)잘 안 돼. 우리 손주들 대학 등록금을 내가 내주고 있다고. 손해도 보통 손해가 아니지. 그래도 사는 데는 큰 지장 없어. 국세청 다니는 딸이 1년에 용돈 쓰라고 2, 3백씩 주고 큰 딸도 용돈 잘 줘. 그거로 사는 거지 뭐.
이사 와서 동네 분들하고는 잘 지내세요?
장사하느라고 사귈 시간이 없었지. 동네사람 거의 몰라. 우리 집 말고는 주변 지형도 잘 모르고. 지금 시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