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정치만큼이나 혼탁한 미세먼지가 요 며칠사이 극성이더니 오늘은 조금 덜하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로 향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먼저 청룡사 뒷편 산을 먼저 찾았는데 다음에 내용을 포스팅하고 청룡사를 먼저 한다
청룡사는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서운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직산현감 황하민이 썼다는 사적비를 먼저 만나게 된다
1265년(원종 6)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하여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던 것을 1364년(공민왕 13) 나옹왕사(懶翁王師)가 다시 크게 중창해 청룡사로 바꿔 불리게 되었단다
청룡사 입구이자 사천왕문이다 사천왕이 없는 사천왕문도 있는가보다
지난번엔 대대적으로 대웅전 공사중이라 그 자태를 못 보았는데 오늘은 그 위엄스런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신 지난번처럼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듣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이 탑은 청룡사 삼층석탑이다 높이가 2.38m로 평면 사각형의 단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지대석 위에 3단의 받침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9호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저 웅장한 나무 둘레를 보라 천하장사 같은 우람한 이 모습으로 인해 6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저 대웅전의 무거운 기와를 거뜬히 받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이 절은 여러 귀중한 탱화들을 보존하고 있어 진짜로 대웅전 자신도 보물이지만 보물을 5개나 갖고 있는 보물창고이다
명부전이다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이 보살은 삭발하고 이마에 띠를 두른 형상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하고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그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보살이기 때문에 ‘대원본존지장보살(大願本尊地藏菩薩)’이라 하고, 특히 가장 고통이 심한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 보물인 동종이 있다는데 이곳에도 동종이 있어 찍어 보았다 대웅전 안에는 1674년(현종 15)에 주조한 480㎏이나 되는 범종이 보존되어 있단다.
명부전 뒤로는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畫)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한다. 산신신앙은 불전(佛典)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1985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觀音殿)·명부전(冥府殿)·관음청향각(觀音靑香閣)·대방(大房) 등이 있다.
나옹왕사의 중창 이후 절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조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절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730년(숙종 46년) 건립된 사적비에 의하면, 청룡사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원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연고로 이 절 주변에 인평대군의 자손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조선후기 흥선대원군도 같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서 이 곳을 자주 찾게 된 것 같다
그후 본인 아들인 고종을 등극시켜 안동김씨 세도정권을 몰아낸 후 왕 대신 수렴청정을 할 때 이곳과 인연이 있었던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를 알게 되고 경복궁 중건시 고단한 인부들을 위해 안성바우덕이 남사당패가 그 노고를 풀어주게 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청룡사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꾸준히 사세를 확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관음전 복장유물도 경종 때 만들어졌다니 그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서별당 쪽 서운산 등산로로 통하는 철다리가 있어 청룡사를 빠져 나왔다
청룡사 맞은 편 300년의 청룡사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법한 오래된 나무 한그루가 이제는 삶의 고단함으로 힘에 부친지 고사되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도 할겸 식사 후 마을도 돌아볼겸 청룡사 아래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