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갈릴라이오이’는 각자 안(속)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로서 남성이다.
2) 성경 전체가 현재 나의 이야기를 파로이미아(비사)와 파라볼레(비유)로 드러내고 있다.
3) 구약은 히다와 마샬로, 새 언약은 파로이마아와 파라볼레의 관계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4) 번역한 내용이 원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나. 본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1) ‘갈릴라이오이’는 각자 안(속)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로서 남성이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로 번역한 문장을 보더라도 지명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예루살렘 : 여성 단수다.
유대 : 여성 단수다.
사마리아 : 여성 단수다
땅 : 여성 단수다.
유대 땅 지명들은 여성 단수로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땅을 밟고 땅을 터전으로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밭(땅)에 자신의 꿈을 심고 키워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갈릴라이오이’는 남성 복수로 등장하는 것이다.
왜일까?
‘갈릴라이오이’로 불리는 사람들 각자 안(속)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모두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는 부활체가 될 것이므로 남성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남자는 씨를 가지고 있어서 밭(여성)에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남자(씨 뿌림)와 여자(밭, 씨를 받아들임)가 만나야 열매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열매를 맺는 곳이 바로 ‘갈릴라이오이’가 된 자들의 마음 안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사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제가 현재 1인칭이다. 1인칭은 나를 의미한다. 내가 중요한 것이다. 바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자 안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2) 성경 전체가 현재 나의 이야기를 파로이미아(비사)와 파라볼레(비유)로 드러내고 있다.
성경 전체가 현재 나의 이야기를 파로이미아(히다, 비사)와 파라볼레(마샬, 비유)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어떤 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바로 나에 대한 말씀이다. 이래서 겉 사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론 공부를 아니 한 ‘갈릴라이오이’로 불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반면에 이 시대를 사는 열심인 기독교인들 곧 신학 도나 이론 공부도 많이 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각자 안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인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봉사하고, 예배하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왜 그 자신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는가?
밖의 각종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과 자신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과는 아무관계가 없는 것인가?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3) 구약은 히다와 마샬로, 새 언약은 파로이마아와 파라볼레의 관계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어린 아이 때는 관계가 있다. 그러나 성장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더욱더 멀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모두 비사와 비유로 되어 있다. 구약은 히다와 마샬로 이루어졌고 새 언약은 파로이마아와 파라볼레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의 비사와 비유가 새 언약의 비사와 비유로 연결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4) 번역한 내용이 원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 관계를 벗어나면 어느 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유명한 학자가 말했다고 믿으면 큰 일이 난다. 망하는 것이다. 번역한 내용이 원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지금 번역된 성경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하다보면 지금 번역된 성경을 보면 당연히 안 되는 것이다. 번역을 모두 새롭게 하여야 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