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 2009-5-30 발표
9. 캄보디아 주요 정세
가. 제1차 총선 및 제1기 연립정부(1993.9~1998.7)
- 1993년 5월 23-28일간 UNTAC의 주관 하에 470만 명의 등록 유권자 중 90%가 투표에 참여, 제1차 총선거 실시
▪ 국?120개 의석 중 훈신펙당이 58석(45.47%), CPP가 51석(38.23%) 차지
▪ 크메르루즈는 국민통합당을 구성하였으나, 선거에는 불참
- 1993년 6월 14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시하누크를 국가수반(국왕)으로 선출
- 1993년 9월 23일 제헌헌법을 공포하고, 9월 24일 시하누크 왕 즉위, 중앙 및 지방의 모든 권력을 분점하는 독특한 연립정부 구성
▪ 라나리드 훈신펙당 총재와 훈센 CPP 부총재를 공동총리로 임명
- 1993년 11월 15일부터 12월 31일까지 UNTAC 요원 캄보디아 철수
- 1994년 7월 2일 차크라퐁 왕자(전 부총리)와 신송 전 내무장관이 연립정부의 크메르루즈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 해외로 도피
- 1995년 11월 21일 시하누크 국왕의 이복동생인 시리부드公(외무장관 역임)이 훈센 총리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 체포(프랑스로 망명)
▪ 망명 중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1996년 말 및 1997년 4월 귀국을 시도하여 훈신펙당과 국민당간 무력시위로 위기 상황 초래
- 1997년 1월 라나리드 제1총리 및 훈센 제2총리가 각각 세력 확장을 위해 군소정당과 제휴를 추진하면서 양 정파간 무력시위가 격화되는 등 정국 악화
- 1997년 4월 15일 훈신펙당의 일부 중진 인사들이 라나리드 총재의 독선적인 당 운영에 불만을 품고 불신임 선언
- 1997년 4월 이래 국회 의정활동이 중단되고 양 정파간 무력시위가 계속되던 중 1997.7.5-6간 훈센 제2총리와 라나리드 제1총리간 무력충돌 사태 발생
▪ 라나리드 제1총리 국외 축출
나. 제2차 총선 및 제2기 연립정부(1998.7∼2003.7)
- 1998년 7월 제2차 총선 결과, CPP 64석, 훈신펙당 43석, 삼랑시당 15석 획득
- 1998년 11월 30일 훈센 당시 제2총리는 라이벌인 라나리드 왕자를 국회의장에, 자신은 단독총리에 취임하는 연립정부를 출범(양당간 50/50의 권력 배분), 최초로 캄보디아 전역을 중앙 행정력으로 통제하는 통치권 장악에 성공
- 1999년 3 국회를 상원과 국회로 구성하는 헌법개정과 1999년 4월 캄보디아의 ASEAN 가입으로 국내정치의 안정과 국제사회 복귀를 통한 국정 개혁과 경제발전을 추구
- 대내적으로는 2002년 2월의 지방선거, 대외적으로는 2002년 제8차 ASEAN+3 정상회의와 2003년 제10차 ARF 및 ASEAN PMC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국내외적 안정과 발전을 이룩
- 훈센 총리는 ① 평화정착 및 국내정국 안정, ② 국제사회에의 편입, ③ 경제개발과 개혁을 통한 빈곤타파라는 ‘삼각전략(Triangle Strategy)’의 정책 기조 하에, 훈신펙당과 마찰 없는 연정 유지, ASEAN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 및 WTO 등 국제기구 가입 및 경제, 사회 각 분야의 개혁정책을 추진
다. 제3차 총선 및 제3기 연립정부(2003.7~2008.7)
- 2003년 7월 27일 제3차 총선 결과 CPP 73석, 훈신펙당 26석, 삼랑시당 24석 차지
▪ 국민당은 의석 수에서 훈신펙과 삼랑시당의 합계(50석)를 훨씬 넘는 73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헌법규정상 단독정부 구성에 필요한 총 의석수의 2/3(82석) 확보에 실패
- 총선 결과 발표 후 훈신펙당과 삼랑시당이 연대하여 민주연합(Alliance of Democrats)을 결성, 훈센 총리의 퇴진을 요구함에 따라 총선 이후 1년 가까이 신정부 구성 지연
▪ 2003년 9월 제3대 국회 개원식 개최(체아심 상원의장 주재, 훈신펙당 및 삼랑시당 소속의원 전원 불참)
▪ 2003년 10월 제3대 국회의원 당선자 선서식 개최(당선자 123명), 전원 참석
- 2003.11. 시하누크 국왕 주재 3당 대표자회의에서 3당 연립정부 구성(총리지명권은 국민당이 보유) 및 라나리드 훈신펙 총재를 국회의장으로 임명한다는 차기 정부 구성 원칙에 합의
▪ 민주연합측의 비협조로 신정부 구성이 지연되자 당시 시하누크 국왕은 훈센 총리의 총리직 계속 수행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신병 치료차 출국
- 2004년 6월 초 훈센 총리와 라나리드 훈신펙당 총재간 여야 영수회동을 통해 주요 쟁점사항에 대해 합의하였으며, 이어 내각구성을 위한 26개 부처 각료직 배분 및 연정 운영 방안 합의
▪ 국회 원 구성 및 연립정부 내각 인준안에 대한 동시 표결
▪ 체아심 CPP 총재는 상원의장으로, 라나리드 훈신펙당 총재는 국회의장으로 추대
▪ 훈센 총리를 정부수반으로 하는 CPP-훈신펙당간 연립정부 구성
▪ 복수장관제로 운영되는 내무, 국방, 재경부의 3개 특별부처를 제외한 23개 일반부처는 CPP에서 14명, 훈신펙에서 9명의 장관을 임명
- 2004년 7월 8일 여야 합의로 소집된 임시국회에서 국회 원구성 및 내각 인준안 동시표결에 관한 헌법절차 마련
▪ 양당 소속 전체의원(99)중 96명 참석(삼랑시당 소속의원 24명은 전원 불참), 참석의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통과
- 2004년 7월 15일 국회 원구성 및 내각 인준안 국회 통과, 제3대 국회 및 제3기
연립정부 공식출범(총 26개 부처 및 2개 외청)
라. 제4차 총선 및 제4기 정부(2008.7~ )
- 2008년 7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훈센 총리가 소속된 CPP가 득표율 58.11%로 전체 123석 중 90석을 차지하는 압승
▪ △최근 3개년간 평균 11%의 경제성장을 통한 국내경제 안정, △10개의 야당이 선거에 참여한 야당 분열, △각 지방까지 확고한 여당의 조직력, △프레아 비헤아 사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
- 훈신펙당은 기존 26석에서 2석만을 차지하는 참패를 기록하고, 삼랑시당은 26석, 신생정당인 인권당과 라나리드당이 각각 3석, 2석을 획득
- 총선 압승 이후 구성된 제4기 정부의 첫 각료회의(2008.9)에서 훈센 총리는 지난 제3기 정부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사각전략(Rectangular Strategy)’ 제2단계에 착수하여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임을 천명
- 2008년 7월 총선을 통해 압승을 거둔 CPP 중심의 친정체제가 구축되면서 훈센 총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
사각전략(Rectangular Strategy)
2004년 7월부터 향후 4년간 부패퇴치 및 개혁을 통해 경제성장과 빈곤감축을 추진한다는
전략으로, ①부패 척결, ②사법제도 개혁, ③행정 개혁, ④국방제도 개혁 등 4개 분야에서의 개선된 국정체제 확립이 핵심
사각전략의 성장 사각(Growth Rectangle) : ①농업분야 강화, ②민간부문 개발 및 고용 창출, ③인프라 복구 및 부흥, ④역량 강화 및 인적자원 개발 |
마. 주요 이슈
(1) 크메르루즈 문제
크메르루즈의 와해
- 크메르루즈는 시하누크 주도의 망명정부(1982), 파리평화협정(1991)에는 참여하였으나, 1993년 제1차 총선에는 불참
- 시하누크 국왕은 크메르루즈에 대하여 무조건 휴전을 제안하고, 1994년 5월 및 6월에 각각 평양과 프놈펜에서 원탁회의를 개최하였으나 합의에 실패
- 1994년 7월 캄보디아 의회는 크메르루즈를 대학살의 책임자, 범죄집단, 불법 단체로 공식 규정
▪1994년 7월 11일 크메르루즈는 자체정부 수립 발표
- 1996년 중반까지 캄보디아 북서부 태국과의 접경 밀림지대로 잠입, 동 지역 일대의 보석과 목재를 태국으로 밀수출한 재원으로 무력저항 계속
- 1996년 2월 이래 국민적 화해를 위한 정부측의 투항유도 노력과 장기전에 염증을 느낀 크메르루즈 병사들이 계속 투항
- 1996년 8-11월 간 정부측과의 협상을 통해 크메르루즈 정권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이엥 사리가 약 2,400명의 크메르루즈와 함께 투항
▪ 정부측으로부터 사면조치를 받은 이엥 사리는 이후 현실정치 불참을 선언하고 정파간 중립적인 입장 유지
- 1998년 4월 폴포트 사망, 1998년 12월 키우삼판과 눈치아의 투항, 1999년 3월 타목 체포 및 잔여 크메르루즈 간부의 정부투항으로 크메르루즈 세력 와해
UN에서의 논의 경과
- 1997년 6월 크메르루즈 내부의 붕괴가 진행되던 중 라나리드 제1총리와 훈센 제2총리는 UN 사무총장에게 크메르루즈 지도자 재판 실시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송부
▪1997년 7월 무력 충돌사태 이후 크메르루즈 재판 추진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크메르루즈 붕괴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사회는 크메르루즈 지도자에 대한 재판 실시를 강력히 요구
- 1999년 3월 UN 사무총장이 임명한 국제전문가위원회가 임시국제재판소 설립 제안을 포함한 보고서를 안보리에 제출하였으나, 중국의 반대로 채택 무산
- 1999년 6월 훈센 총리는 기본적으로는 국내 특별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하되, 외국인 판・검사 일부 충원 등 국제적 요소를 가미한 절충형 추진 제시
- 1999년 5월 Thomas Hammaberg UN 사무총장 인권특사가 훈센 총리를 면담하고, UN 법률전문가 파견 및 캄보디아 국내법 제정을 위한 협력 방안 협의
- 1999년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Ralph Zacklin UN 법률담당 사무차장보를 단장으로 한 UN 대표단 캄보디아 방문
- 2000년 2월 UN 사무총장은 혼합법원을 구성하되, 동 재판소 운영에 관해 ‘과반수의 외국인 판사, 독립적인 국제검사, 재판부에 의해 기소된 사람은 전원 체포, 사면이 기소의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캄보디아 정부가 약속할 것’의 4대 원칙을 제시하였으나, 훈센 총리는 이를 거부하고 우호국가 출신 검사가 참여하는 국내재판정 구성 방안을 제시
- 2000년 7월 Hans Corell UN 사무차장보와 Sok An 캄보디아 관방장관 간 크메르루즈 지도자 특별재판소 캄보디아 사법부내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 및 캄보디아 국내법 초안 작성
▪ 양해각서(안)에 재판관, 검사, 행정직원 임명절차 및 국제재판관 등에 부여할 특권면제, UN과 캄보디아간 재정분담에 관한 규정도 포함
- 2000년 12월 캄보디아 정부가 크메르루즈 재판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 2001년 10월 캄보디아는 일방적으로 재판소 설립을 위한 국내법을 제정 및 공포하고 UN 측에 통보
▪ 2002년 2월 UN은 재판소 설립을 위한 캄보디아 정부의 협상 중단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 훈센 총리는 UN 사무총장앞 교섭복귀 희망서한 송부
크메르루즈 지도자 처리를 위한 특별재판소 설립
- 2002년 8월 UN 사무총장은 캄보디아 정부와 동건 협의 계속을 위해서는 UN 총회 또는 안보리의 명확한 mandate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회신하였으며, 2002년 11월 UN 총회 3위원회에서 동 mandate를 부여하는 결의안 채택
▪ 한국, 일본, 프랑스, 호주, 캄보디아 등 15개국 공동제안(컨센서스로 채택)
- 2003년 1월 Sok An 관방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캄보디아 대표단이 UN을 방문, UN 및 캄보디아 정부간 관련 협정 체결에 원칙적 합의
- 2003년 3월 UN 대표단이 캄보디아를 방문, 크메르루즈 전범 기소에 관한 UN과 캄보디아 정부간 협정 문안에 합의
- 2003년 6월 6일 캄보디아 국내법에 의한 크메르루즈 전범기소에 관한 UN과 캄보디아 정부간 협정 체결
- 크메르루즈 전범기소를 위한 캄보디아 법정 내 특별재판소 설치 관련 캄보디아 국내법 제정
▪ 2004년 10월 5일 국회 통과, 8일 상원 통과
- 2006년 7월 3일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 정식 출범
▪ 2007년 11월 Ieng Sary 크메르루즈 당시 외무장관 및 부인 Ieng Thirith(사회장관 역임)을 체포
▪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는 2010년까지 활동 예정
(2) 무력충돌 사태
사태 발생 배경
- 1997년 3-4월 훈신펙당 소속 의원 8명이 反라나리드를 선언하여 라나리드 제1총리에게 정치적 타격 초래 ▪훈신펙당은 국회 내 다수당의 지위 상실
- 1997년 6월 라나리드 제1총리와 혹룬디 경찰청장 양측 경호원 간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양 정파간 긴장 고조
- 1997년 7월 5일 양 정파간 무력충돌사태 발생
▪ 훈센 제2총리는 라나리드의 무기 불법반입 및 크메르루즈와의 불법협상, 크메르루즈의 도심 투입행위 응징을 위한 조치였음을 강조하고, 훈신펙당은 라나리드가 아닌 다른 인사를 제1총리로 추대할 것을 촉구
사태 발전 추이
- 사태 발발 직후 일부 군인 및 군복을 착용한 도적의 약탈이 자행되었으나, 정부의 신속한 대응조치로 도심질서는 곧 회복되었으며, 내무부 산하에 외국 투자업체의 약탈 보상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 태국, 말레이시아, 호주, 필리핀 등은 특별기 등을 이용하여 프놈펜에 있던 자국민을 철수
- 수도권 지역은 곧 안정을 회복하였으나, 바탐방, 시엠립, 시하누크빌, 반테이 맨체이 지역 등에서 양 정파간 소규모 분쟁 발생
- 1997년 7월 10일 캄보디아 정부는 내각회의 소집, 행정업무 정상화
▪ 1997년 7월 28일 외교단 및 내・외신기자 참관 하에 국회 개원
- 1997년 8월 6일 캄보디아 국회는 비밀투표를 통하여 훈신펙당을 대표하는 제1총리로 Ung Huot 외무장관을 선출
▪ 출석의원 총 99명 중 찬성 86표, 반대 4표, 기권 6표, 무효 3표
- 1997년 8월 7일 체아심 국가원수대행은 신임 제1총리에 대한 최종인준 절차인 Royal Decree(칙령)에 서명, Ung Huot 제1총리 겸 외무장관 정식 취임
-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Ung Hout 제1총리에 대해 헌법규정 해석 문제와 정통성 관련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1997년 8월 11일 북경에서 체아심 국가원수대행, 훈센 제2총리 등과 시하누크 국왕을 알현, 국왕의 추인으로 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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