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남은 친일연극의 청산 문제
유치진이 친일연극 활동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유치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극예술연구회(1931)를 조직하여
신극운동을 전개하던 초기에는 [토막], [소], [버드나무 동리에 선 풍경] 등
비교적 일제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가난한 농촌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희곡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하던 작가들보다
저항성이나 민족의식의 토대가 강했던 것도 또한 아니다.
그의 민족의식이 허약했기 때문에,
일제 말이 되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국책연극으로서의 국민연극'의 진흥에 앞장 섰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극'에 관해서라면 비록 유치진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치진만이 유별나게 나서서 설친 것도 아니고,
신파 배우든 좌익 출신이 든 할 것 없이,
어떤 면에서는 한결같이 '국민연극'의 각본을 쓰고,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하고, 무대장치를 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일일이 거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거의 모든 연극인이 국민연극에 종사했다.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해진 1940년대에 들어서
그 많은 연극인 가운데 한 사람도 투옥되거나
심지어는 상연금지된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를 잘 웅변해 준다.
따라서 유치진의 친일연극은 그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비극적이지만 전체 근대연극사의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극계는 해방공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문제를 훗날의 과제로 남겨 놓게 된다).
일제하에서 활동하던 지식인치고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식민지하에서의 연극인 또한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에서 연극을 해야만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 그러한 고충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
그러나 아무리 개개인의 면면과 고충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국민연극'으로 근대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역사적 과오는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친일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친일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연극 문화가 주체적,자주적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 연극의 잘못된 뿌리에 대한 진지한 점검 한 번 없이,
유치진과 관련된 것이라면 친일도 괜찮은 것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연극 [격정만리]의 사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현재의 한국연극협회가 연극계 선배들의 친일문제는 그저 덮어 두려고만 하면서
건전한 민족연극의 발걸음을 붙잡으려고 한다는 데,
그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해방 직후 일제 잔재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 있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교과서나 일반인의 인식 속에 무감각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우리 연극사의 큰 위치를 가지고 있는 유치진에게
일단의 욕이 되는 내용으로 비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덮어 둔다고만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냉엄한 지적만이
그에게 덧씌워진 역사의 굴레 또한 바르게 벗겨 내는 길일 수도 있다.
죄가 밉지 인간이 미운 것이 아니라는 상투적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치진의 친일행각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연극이 바른 방향을 찾아나가는 데 타산지석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박영정(연극평론가, 건국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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