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폭군이다
小珍 박 기 옥
오늘 아침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삿짐을 챙기던 트럭이 출발하기 전 책 꾸러미들을 쓰레기장에 던지기 시작했다. 내리지도 않고 차 안에서 마구 집어 던졌다. 초호화장정 하드 카바도 있었고, 봉투도 뜯지 않은 새 책들도 있었다. 나무라거나 서운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잉공급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책을 접한다. 책 뿐 아니다. 사람이든 음식이든 우리는 너무 많은 공급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한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책이 무척 귀했다. 나는 읽기를 좋아하여 글자만 보면 무엇이든 닥치는 데로 읽었다. 당시는 동네마다 책방이라는 게 있어서 푼돈으로 책을 빌려주곤 했다. 나는 일찌감치 우리 동네 책방을 섭렵하고 다른 동네 책방까지 기웃거렸다. 심지어는 국수나 과일 포장지까지 코를 박고 읽었다. 다 읽고도 손에서 놓기 아까워 두 번 세 번 되풀이 읽었다.
가슴 설레게 한 연예인은 어떠하던가. 지금처럼 팬덤조직이 구성되지 않았을 때라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이었다. 우리는 모두 가슴에 별을 품고 살았다.
대학 다닐 때 울릉도에 캠프를 갔다. 당시 나는 대학신문사의 막내 기자로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밥 먹다가 선배가 주인집에 가서 김치를 좀 얻어 오라고 했다. 주방에서 모녀가 김치를 버무리는 것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시키는데로 모녀가 일하는 주방으로 갔다. 내가 문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양념을 하던 딸이 벌건 무 조각을 입에 문 채 엄마에게,
“엄마, 나는 신성일이 너무 좋아. 신성일한테 한 번 안겨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야.”
“그래, 이년아. 나는 최무룡이 좋다. 최무룡한테 한 번 안겨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수필에 입문하고 책을 낼 때마다 나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작품은 독자에게 어떻게 읽혀질까. 수필은 영화일까, 드라마일까.
영화는 관객이 작정하고 시간에 맞춰 요금을 지불한 후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극장 안은 어둡고 집중을 요한다. 관객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끝날 때까지 영화에 몰입한다. 상영 도중 잡담을 하거나 극장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다.
드라마는 다르다. TV를 틀어놓고 참외를 깎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다. 아들이 제 방에서 숙제하다 졸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면서, 남편은 뭐 하느라 아직 안 들어오나 벽시계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면 바로 받는다. TV 볼륨을 낮추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떤다. 다시 드라마를 보려고 하면 그새 남편이 들어와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려 버린다. 어쩌면 수필은 드라마가 아닐까.
우리의 호프 윤오영 수필가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를 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결코 작가를 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가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슬픔과 기쁨,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를 뼈 아프게 서로 공감하는 것이다.
백번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나 역시 김훈의 마니아로써 그를 결코 배신한 적이 없다. 글 한 줄, 한 줄마다 그의 호흡을 느끼고, 행간마다 그의 음성을 듣는다. 인생의 슬픔과 기쁨, 시대적 절망까지도 뼈저리게 공감한다.
그러나 나에게 모든 작가가 다 김훈일까. 나 역시 고만고만한 작가를 상대로 폭군행세나 하면서 너무 쉽게 귀한 책들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독자에게 임의로 폭군의 배역을 주고 나니 한 편으로는 홀가분하다. 나 역시 작가인 동시에 독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필집 『커피 칸타타』를 발간했을 때였다. 2년에 걸쳐 매일신문에 단수필로 연재하던 것을 묶은 책이었다. 반응이 좋았었다.
모임에서 한 독자가 책 재미있었다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내 손을 다정하게 잡으면서 어떻게 글을 그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맛깔스럽게 쓰느냐고 칭찬했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친절하게도 다 읽은 『커피 칸타타』를 화장실에 갖다 놓았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화장실에는 왜요 ~ ?”
“식구들 보라구요. 단수필이라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읽기 딱 좋겠더라구요.”
지금도 나의 책은 그 집 화장실에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번에도 만났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첫댓글 옛날에는 읽지도 않은 세계문학전집을 골프체와 함께 거실에다 턱 전시해 두고 폼 잡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저도 고교시절에 "할부 책장사"의 꼬임에 넘어가서 돈도 없는게 세계문학대전집을 한질 샀다가 그 돈 갚는다고 "식껍"한 경험이 있는데 번역 내용이 너무도 허술하고 책만 커다랗게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자기 과시욕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게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혼이 허기가 져 있음에도 물질로 채우려 하니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더러 그런 허영도 부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질이건 마음이건, ㅎ
독자는 폭군 맞습니다. 작품이 마음에 안들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글쓰는 사람은 나무한테 미안하지 않을 때 책을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수협 10기는 회장님만 무서운 줄 알았더니 재무간사마저!
오, 무서워라!
시원시원한 소진 선생님 글을 대할 때마다
속이 시원해집니다.~~~^^*
공감을 얻지 못한 글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것만이 수필의 전부라고 생각한 것 땜 아닐까요.
풀어놓는 내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한 예로 보일 수 있도록 방향을 돌려줘야 더 많은 공감을 얻는다고 봅니다.
독자에게
'인생의 슬픔과 기쁨,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를 뼈 아프게 서로 공감'
하게 하기 위해서는 출발부터 이건 비록 내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으로 의식하며 작품을 쓰면 독자도 그 방향을 읽고 공감하는 듯요.
자기만의 가치에서 사회적 가치로
소승적인 글쓰기에서 대승적인 글쓰기로
맞습니다. 우리 수필이 이게 잘 안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돈 벌고 출세한다면 우리가 그를 존경할 필요가 없듯이 글 또한 그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설 <주홍글씨>는 우리 사회의 악폐인 "낙인(=공공의 적을 만드는 사악한 행위)"에 대한 깊은 깨우침을 주는 소설입니다. 수필도 얼마든지 그런 차원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평론가는 아니지만 그런 작가를 좋아 하고 그런 글을 읽음으로서 삶에 희망을 느낍니다. ^^
빙고!
나의 이야기 : 일기
우리의 이야기 :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