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모스테 마을의 습격과 노브고로드 군의 철수
그리하여 그 곳(도르팟 주교구)으로 가 독일인들의 땅을 황폐화시키고 불을 질렀으며 많은 이들을 죽이고 몇몇은 사로잡았다.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생애 -
(헤르만)주교는 가만히 앉아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기사단의 부대로 서둘러 가서 러시아 인들을 대적하게 하였다. 그 명령은 지켜졌고, 그들(주교의 부하들)은 급히 기사단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 리보니아 운문 연대기 -
1242년 3월, 프스코프 시를 탈환한 노브고로드 군대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지휘 하에 벨리카야 강을 건너 도르팟 주교구로 쳐들어왔습니다.
그의 의도는 십자군 세력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에서 몰아내어 발트해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1224년까지 노브고로드의 서쪽 영토였던 도르팟 주교구를 탈환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격의 목적은 지금까지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1240년부터 노브고로드가 십자군에게 입은 피해를 복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독일 카톨릭 세력의 영토에 진입한 노브고로드 군대는 이즈보르스크와 도르팟 주교구의 주요 거점인 오덴패에(Odenpaeh) 사이에 있는 촌락들을 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습격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1년 전까지의 상황을 그대로 뒤집은 것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 군대의 공격으로 촌락들은 불에 탔고 많은 거주민들이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도르팟 주교구의 헤르만 폰 북스회베덴 주교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노브고로드의 침공에 맞서서 다시 군대를 집결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헤르만 주교는 교구관할의 봉건 영주들과 에스토니아 원주민들을 징집하였고 외부에도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의 요청에 부응한 튜턴 기사들이 지원군으로 왔고, '왕의 부하들’로 불리는 덴마크 령 에스토니아의 봉건영주들과 주교의 군대가 그들과 합류하였습니다.
이 군세는 1240년 말 이즈보르스크 공격으로 화려하게 출발을 끊은 십자군에 비교해 본다면 아무래도 미약해 보였습니다. 과거 헤르만 주교와 같이 십자군을 지휘했던 튜턴 기사단의 안드레아스 폰 펠벤은 튜턴 기사와 함께 오지도 않았고 덴마크의 왕자들도 없었습니다. 또한 다시 형성된 이들 십자군은 노브고로드 군대에 비해 그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군대는 충분히 재 반격에 나설 만큼은 강력했습니다. 튜턴 기사들로 대표되는 중무장한 기사들이 군대의 주축이었고 수많은 에스토니아 징집병들이 그들을 뒷받침하리라 기대되었습니다. 마침 계절은 겨울의 끝자락으로 전력의 핵심인 기사들이 활동하기에는 좋은 계절이었습니다.
1242년 3월 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이끈 노브고로드 군대는 도르팟 주교구의 영토들을 유린하며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더듬이를 늘어뜨리듯 군대의 진로 앞에 정찰대를 보내어 적정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정찰대는 노브고로드의 민병사령관인 도마쉬 트베르디슬라비치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십자군 측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노브고로드 군대의 진격 방향에는 모스테(Mooste) 부락이 위치하고 있었고, 이 곳에서 일련의 지역 기사들과 에스토니아 원주민들이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스테 부락에 당도한 노브고로드 정찰대가 마을 안의 다리 부근에 다다른 순간 적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도마쉬 트베르디슬라비치를 비롯한 많은 노브고로드 인들이 전사하였고, 단지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학살 현장에서 도망쳐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이끈 본대에 간신히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충성스러운 지휘관과 정찰대를 잃어버렸지만 생존자를 통하여 십자군의 방비태세와 위치를 알게 되었고, 어쩌면 십자군이 다시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의 약탈을 중지하고 동쪽으로 군대를 돌렸습니다.
그는 페이푸스 호수와 프스코프 호수 사이의 합류점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움직임이 유인작전의 일환이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노브고로드 영내로 돌아가기 위한 빠른 길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일부러 의도했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던 간에, 아무튼 이러한 그의 선택은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남쪽의 이즈보르스크에는 아직 십자군 병력이 잔류하고 있었으므로, 왔던 길로 되돌아갔을 때 앞뒤로 적을 맞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군대의 위치를 감안해본다면 호수를 건너는 것이 노브고로드로 돌아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었고, 만일 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적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한편 모스테 부락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십자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하여 노브고로드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군대는 헤르만 주교가 지휘하고 있었고 지역 원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노브고로드 군대보다 약간 북쪽에서 호수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양 군대의 이동경로>
그러나 철수를 하는 동안에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낸 정찰대가 접근하는 십자군을 발견했고, 이 보고를 받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페이푸스 호수와 프스코프 호수의 합류점을 도하한 뒤, 다시 군대를 반전시켜 갈대가 낮게 깔린 호숫가를 따라 북쪽으로 행군하였습니다. 군대가 ‘까마귀의 바위’라고 일컬어지는 지점에 다다르자 마침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행군을 멈추고 부대를 정렬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따라오고 있는 적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 페이푸스 호수의 전투 (1242년 4월 5일)
알렉산드르 대공의 전사들은 투지로 가득 찼으니, 그들의 마음이 사자와 같음이니라.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오 존경스럽고 경애하는 우리의 대공이시여,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그대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던지겠나이다.”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생애 중 전투를 앞둔 노브고로드 인들의 결의 -
어쨌거나 그들(십자군)은 러시아인들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인들은 많은 궁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왕의 부하들(덴마크 왕의 봉신들)에 대한 그들의 과감한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얼마 안가 그 궁수들이 있는 곳에서 기사단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고 검으로 투구를 반으로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 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땅 위에 쓰러졌다.
- 리보니아 운문 연대기에서 묘사된 전투장면 -
페이푸스 호수, 또는 러시아 어로 추드 호수라고 불리는 이 호수는 러시아와 에스토니아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빙하시대의 잔재인 이 호수는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큰 민물호수로서 3,500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덮고 있었습니다. 깊이는 평균 7미터였고, 가장 깊은 곳은 15미터 정도였습니다.
모래시계 모양의 페이푸스 호수는 실제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북쪽의 가장 큰 부분은 페이푸스 호수라 불렸고, 남쪽에 위치한 모래시계 모양의 아래 부분은 프스코프 호수라고 불렸습니다. 이 두 호수는 가느다란 바름(Warm) 호수를 통해 연결되는데, 이 합류점은 수심이 상당히 얕아서 불과 1~2미터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3월까지도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는 북방의 황무지였습니다. 3월 초에도 얼음의 두께는 20~50센티미터에 달했으며, 전투가 4월 초이고 얼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 때라는 점을 감안해본다 하더라도 충분히 조심한다면 중무장한 병사들도 건널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군마를 탄 중무장한 전사들이 두께가 비교적 얇은 지점으로 한꺼번에 몰려든다면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호수를 건너는 튜턴 기사단 – 다만 그림 중의 대 기사단장(Hochmeister)는 오류이다. 당시 그는 팔레스타인에 있었다.>
호수는 얼어있었지만 얼음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호수의 물을 동쪽 호숫가로 밀어붙였고, 이 물결은 겨울에 얼어붙어 들쭉날쭉하게 날이 선 얼음 조각들로 변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얼음 조각들은 호숫가 동쪽 편에 자리잡은 노브고로드 군대의 앞에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습지대와 갈대밭을 가로지르며 노브고로드 군대를 추격하던 십자군은 페이푸스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세부적인 전략은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철군 중인 노브고로드 군대를 앞질러서 급습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1242년 4월 5일, 십자군은 호숫가에서 노브고로드 군대와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인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브고로드 군대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노브고로드 인들과 안드레이 야로슬라비치의 수즈달 인들의 연합군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전력은 드루지나들이었으며, 여기에 도시민들과 사냥꾼, 목축업자 등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민병대가 가세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쿠만 족으로 이루어진 기마궁수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 노브고로드 군대의 병력은 6000명 정도였지만, 혹독한 기후로 인한 비 전투 손실과 프스코프 등지에 남겨두었을 수비병들, 그리고 모스테 부락의 전투와 같은 그간의 전투 손실로 인하여 숫자는 더 줄어들었습니다.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숫자는 대략 50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십자군은 헤르만 주교가 이끌고 있었으며, 튜턴 기사단과 덴마크 왕의 봉신들, 그리고 도르팟 주교령에서 출진한 봉건 영주들로 이루어진 기사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서전트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그들은 후방에 창이나 도끼, 방패 등으로 간단하게 무장한 에스토니아 인 보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의 수는 2000여명 정도로 노브고로드 군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 전력은 튼튼한 갑옷을 입고 무거운 군마에 올라탄 기사들이었고, 이들 중에는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전력상으로는 상당히 강력한 튜턴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면도 딱딱하게 얼어있었기 때문에 이들 기사들이 활약하기에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종종 기사들의 맹렬한 돌격은 수적인 열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터무니 없는 승리를 불러오기도 해왔습니다.
호수 위에서 마주친 두 군대는 곧 전투를 위해 진형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전투 대형은 무척 상반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전쟁문화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군은 기사의 돌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전형적인 서구식 공격 대형을 형성하였습니다. 말에 올라탄 독일과 덴마크의 기사들이 서전트들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섰고, 그들 뒤로는 대부분이 보병인 에스토니아 원주민 보조병들이 늘어섰습니다.
노브고로드 인들은 십자군의 진형과는 정반대의 진형을 구축하였습니다. 대열의 중앙에는 보병으로 이루어진 노브고로드 민병대가 자리잡았고, 궁수들이 방패 벽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배치되었습니다. 그 뒤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그의 드루지나들이 늘어섰고 보병대의 좌우측면에는 기병들이 배치되었는데, 특히 우측의 부대가 강력했습니다.
러시아 인들의 이러한 전술은 수비태세를 갖추고 화살을 쏘아 보내는 보병들을 이용해 접근하는 적들을 막아낸 후 기병대로 일격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과 싸워오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 노브고로드 군대는 수적인 우세 외에도 지형상의 우위도 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페이푸스 호수의 동쪽 해안 위에 올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풍이 호수의 동쪽 호숫가에 쌓아놓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은 그들의 앞에서 천연의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242년 4월 5일, 발트 십자군 기사들의 맹렬한 돌격과 함께 페이푸스 호수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병대의 좌측에는 덴마크 왕의 봉건 기사들이, 중앙에는 튜턴 기사들이, 그리고 우측에는 헤르만 주교가 직접 이끄는 도르팟 주교령의 기사들이 서전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중무장한 기병들이 쐐기 모양의 돌격 대형을 이루고 노브고로드의 진형으로 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노브고로드 진형의 중앙에 위치한 민병들은 돌진해오는 기사들을 향해 화살을 무수히 날려보냈고, 우측에서 뛰쳐나온 기마 궁수들이 십자군 좌익의 덴마크 기사들의 측면을 질주하면서 역시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그러나 일부 기사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기마궁수들의 현란한 움직임에 당혹스러워 하면서, 또한 돌격 방향의 앞에 놓인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 때문에 손실을 입으면서도 무쇠로 온 몸을 감싼 이 무시무시한 저거너트(Juggernaut)들은 돌진을 계속하여 마침내 노브고로드 민병대의 방패벽을 덮쳤습니다.
기사들이 돌격해 들어간 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노브고로드 민병대의 대열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민병대의 시민과 농민들은 기사들의 창과 칼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투는 곧 난전이 되었습니다. 얼음과 눈으로 살짝 덮였던 지면은 피로 붉게 물들었고, 칼과 창이 맞부딪히고 부러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호전적인 고함소리와 단발마의 비명소리들과 어우러져 전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곧 후방에 있던 드루지나들이 앞으로 나와 노브고로드의 민병대와 합류하여 기사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양 측면에서 더 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노브고로드 기병대가 우측과 좌측에서 기사들을 공격했고, 훈련도로 보나 광신성으로 보나 중앙의 튜턴 기사들보다 떨어지는 측면의 덴마크와 독일의 봉건 기사들은 차츰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충성심을 별로 믿을 수 없는 원주민 보조병들의 성향이 치명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원래 기병들의 돌격 후 뒤따라와서 함께 싸웠어야 할 후방의 에스토니아 보병들은 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학살극을 목격하자 겁에 질려버렸고 전투에 투입되고 있는 노브고로드 인들의 숫자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들의 진격속도는 점차 느려지다가, 이윽고 대열을 무너뜨리고는 달아나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먼저 돌격했던 기사들은 고립되었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양 측면의 덴마크와 주교구의 기사들이 혈로를 뚫고 달아났고, 노브고로드 군의 기병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살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의 드루지나와 민병대들은 전장에 아직 남아있는 기사들을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전장에 끝까지 남은 기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전멸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얼어붙은 땅 위에 쓰러졌고 일부는 사로잡혔습니다.
전장에서 탈출한 십자군들도 운이 별로 좋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뒤를 쫓아온 노브고로드 기병들에게 습격 당해 쓰러졌고, 또 어떤 이들은 추격을 피해 위험한 곳으로 섣불리 들어갔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헤르만 주교와 일부 기사들, 그리고 소수의 보조병들 만이 호수의 서쪽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추격하던 노브고로드 인들은 더 멀리 쫓아오지는 않고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페이푸스 호수의 전투는 노브고로드 인들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십자군 측에서는 대략 400명의 기병들이 수많은 보병들과 함께 전사하였고 90여명이 사로잡혔습니다. 노브고로드 측에서도 기사들의 돌격을 받아내야 했던 민병대의 사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 피해는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전투 후 노브고로드 인들과 서구인들은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서구인들은 사절을 보내어 이즈보르스크를 포함해 그들이 아직까지 점령하고 있던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고, 양 측에서 붙잡아두고 있던 포로들을 교환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이에 따라 십자군이 끌고 갔던 노브고로드 인 전쟁 포로들과, 특히 1240년 끌려갔던 프스코프의 어린이 인질들이 풀려났으며 그 대가로 노브고로드 인들이 붙잡아 두고 있던 덴마크와 독일의 기사들이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평화가 정착되면서 상호 간의 교역이 재개되었고, 덴마크 왕자들이 러시아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데려왔었던 덴마크 인들은 북부 에스토니아 국경 지대의 나르바(Narva)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노브고로드를 혼란에 빠뜨렸었던 대 정교도 발트 십자군 운동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3) 에필로그
전쟁은 전설이 되었고, 전설은 신화가 되었다.
- 영화 ‘반지의 제왕 중’ -
2년간의 전쟁은 노브고로드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리보니아의 카톨릭 세력을 심하게 약화시키지는 않았으며 그들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이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 튜턴 기사단은 건재했고 전투에서 잃어버린 기사들은 얼마든지 독일로부터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1242년의 전투는 당시 북방 지역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일어난 일개의 전투에 불과했습니다. 1240년대와 같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서구세력과 노브고로드와의 분쟁은 앞으로도 몇 차례에 걸쳐 더 재개될 것이었습니다. 특히 얼음호수의 전투로부터 30여년 뒤, 프스코프의 러시아 인들은 다우만타스(Daumantas)라는 또 다른 영웅과 함께 튜턴 기사단을 상대로 다시 한번 큰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240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과 그 종지부를 찍은 페이푸스 호수의 전투가 미친 영향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군은 1242년의 전역에서 패배함으로써, 최소한 러시아 북서부 지역을 서구권에 편입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18세기까지 러시아는 서구 세계로부터 늘 한 발짝 물러나 있었고 그 때문에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졌던 페이푸스 호수는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를 분리하는 지리상의 국경선인 동시에, 동방 정교와 카톨릭에서 개종한 개신교 세력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세기에 벌어진 노브고로드의 전례 없는 위기와 얼음 호수 위에서 벌어진 극적인 승리는 노브고로드 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성에 대한 자각을 심어주었고, 오랜 세월 동안 러시아 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민족적인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타타르의 굴레 속에서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었고, 그 굴레를 벗어난 뒤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암울한 시대들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13세기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거둔 승리와 그 지휘관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졌고, 각색된 승리의 기억은 계속 이어져 전투로부터 700년이 흐른 뒤에도 현대적인 시각 영상의 매체로 재구성되어 러시아 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켜주었습니다.
그 결과,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이 전쟁의 진정한 모습은 점차 군사적이고 종교적인 영광의 색채가 덧칠해 지면서 러시아 인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군주와 영광된 승리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 시대의 이야기는 일종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한편 1240년대의 대 노브고로드 전역에서 패배한 십자군 세력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이 패배가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남쪽의 몽골 족과의 관계에 신경을 더 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얼음호수의 전투에서 패배한 헤르만 주교는 1248년까지 계속 살아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러시아 인들과 무력 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주교구의 중심지인 도르팟 시는 교역의 거점으로 번창하여 리보니아 3대 도시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주교구의 이름이 비중 있게 거론되는 시기는 훗날 리보니아 전쟁 때가 되겠지만, 이 시리즈는 약 300년 뒤의 그 시점까지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덴마크는 이제 이득보다는 유지비가 더 많이 드는 골치 아픈 발트해 북동부의 정세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인 성전의 지지자였던 발데마르 2세는 사망했고 그 뒤를 물려받은 에리크 4세는 형제들과 싸우느라 바빴으므로, 이 지역의 실질적인 실권은 독일계 세속 영주들이 차지하였습니다. 이 영주들 중에서 노브고로드와 접경한 나르바 지역의 한 남작이 1250년대에 대 노브고로드 성전의 재개를 부추기게 될 것이지만 실속은 별로 없었습니다.
발트 지역에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던 튜턴 기사단의 경우, 이 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궁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리보니아 지부의 문제 중 하나는 옛 검의 형제단 출신의 기사들이 기득권을 쥐고서 튜턴 기사단의 방침에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성전 과정에서 다수의 검의 형제단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제거되었고, 성전의 실패로 인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발언권도 줄어들었습니다. 리보니아 지부장인 디트리히 폰 그뤼닝엔의 실권은 확고해졌고, 그는 리보니아 지부를 개혁하여 규율 잡힌 조직으로 거듭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패배는 기사단의 위상을 떨어뜨렸고 그로 인하여 원주민 반란이 촉발되었습니다. 쿠를란트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곧이어 에스토니아 인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은 큰 무리 없이 제압되었던 것 같지만 발트해 남쪽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1242년, 기사단의 패전에 대한 소문은 프러시아로 빠르게 퍼졌습니다. 실제 내용은 과장에 과장을 거듭해서 전해졌을 것이지만, 어쨌거나 이 소문은 당시 발트해 남부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폭발 일보직전이었던 프루스 인들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첫댓글 얼음호수의 싸움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건가요?
이후 튜턴 기사단이 프러시아 대부분을 7년동안 잃게 되므로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얼음호수의 싸움 뿐만이 아니라 기사단의 패배는 대체로 원주민 반란을 불러오지요. 특히 1260년에 리투아니아 인들에게 당하게 될 패배는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의외로 튜튼기사단이 동유럽에서 탄넨베르크 이전에도 많이 당했나 봐요? 프러시아 대부분 한때나마 상실에 리투아니아에게 발린다는 것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기사단이 소수 정예이다보니 작은 패배도 무시못할 정도였지요. 어찌보면 튜턴 기사들의 나라는 이교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시신을 산더미같이 쌓아올려가며 세운 것이라 볼 수 있죠. 기사단의 잔혹함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압도적인 숫적열세로 그렇게 잘 싸우는 십자군은 ㅎㄷㄷㄷ
그래도 한번 만만해 보이기 시작하니 바로 봉기가 일어나는군요. ;;;
중세 기사들의 차징전술의 한계을 보여주는 사례군요~,~ 닭돌에 성공하면 로또지만 실패하면... 즉, 정면의 적이 붕괴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면 반대로 발려 버리는...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