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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3: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 요일 3: 16 우리를 위하여 ( 상 )
요일 3: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저자는 8절과 10절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마귀의 자녀의 모델로 가인을 제시한다.
1]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요한이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인은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죽임으로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Burce).
둘째, 요한 당시의 한 이단 종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채식주의자들이었다.
요한은 그들에게 고기를 드린 아벨은 열납되고 농산물을 드린 가인은 거부되는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율법적인 채식주의보다는 사랑의 계명에의 순종이 우선임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Smalley).
2] 어떤 이유(연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창 4장에 기록된 사건에서는 가인의 살인 동기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에 기록된 가인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추론해 보자.
* 히 11: 4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 유 1: 11 -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가인은 믿음과 순종과 형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요한은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분명한 살인의 동기를 제시한다. 그 동기는 동생 아벨의 의로움에 대한 시기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이나 안녕보다는 의로움 자체를 더욱 시기하고 증오한다. (Stott). 이런 의미에서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본문은 앞의 부분에 이어서 우리가 죄를 범치 말아야 할 이유를 증언한다. 앞의 부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이며 장차 영광스런 모습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대속(代贖) 즉 죄 없이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
그는 혹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 회개하고 죄를 버린다. 그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 입술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그의 행위로 증거 되는 차이점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한마디로 우리가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 우리가 구원받았고 중생한 자일진대 우리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하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일 3: 13-15 형제들아! - ⑬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⑭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⑮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우리는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세상의 표이며 사망의 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들을 미워하고 또 서로를 미워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미움은 세상과 사망의 표이다.
그러므로 만일 구원받은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일 것이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은 자가 아니고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구원과 생명의 표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말하였다.
형제 사랑이 영생의 구원을 얻은 표라는 말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살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다. 오늘날 세계의 어떤 곳에서 보듯이, 자살 폭탄 테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극악한 살인 행위이다.
혁명이나 폭력 시위가 정당화될 수 없듯이, 테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의 개량과 개선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폭력적 시위는 정당한 의사 표현 방식이며 사회 개선을 위해 유익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적 방법은 사회의 개량보다는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정당한 이유 없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도 역시 극악한 살인 행위이며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의 악한 테러와 부당한 침략에 대한 동맹국들의 연합적 응징과 보복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보다 더 큰 현대적 살인 행위는 낙태 혹은 인공유산이다. 그것은 태아 살해의 행위이다. 사람의 생명은 임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된 생명을 살해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된 생명은 반드시 출산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이나 세계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1,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낙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현대적 죄악이다.
물론 이런 행위들이 다 살인에 해당하지만, 이런 것들뿐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에서 형제나 교우를 미워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살인에 해당한다.
또 모든 살인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나 교우를 미워한 죄가 있으면 그것을 회개하고 버리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요일 3: 13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전후 문맥상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Law).
1]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대립은 아벨 - 가인, 이삭 - 이스마엘, 야곱 - 에서를 통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요한은 '미워하거든'(미세이)를 현재 시상으로 사용함으로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다는 사실만으로 미워하므로(12절) 양자 간의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세상의 증오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이김에 기초하여 넉넉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일 4: 4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 요일 5: 4 -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3: 14 형제를 사랑함으로 -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1] 우리는(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본문에서 요한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로서 형제 사랑을 논하고 있다.
(1) 사랑은 율법의 대강령이다.
* 마 22: 34-40 -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 율법의 완성이다.
* 롬 13: 10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3)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이다.
* 요 13: 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고전 13: 13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므로 비록 세상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Calvin, Bruce).
2] 사랑하지(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거하느니라).
'사랑치'(아가폰)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 사실로 인해서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형제'를 목적어로 보아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로 해석한다. (Stott).
Ⓑ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Plummer, Smalley).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된 것이 아니다. (16절; 2:2).
'거하느니라'(메네이)는 현재형으로 사랑치 아니하는 자의 영적 죽음의 상태가 지속됨을 암시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랑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상태처럼 지속적으로 죽음과 진노하에 있는 상태이기에 사망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망에 거하고 있는 상태이다.
* 엡 2: 2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일 3: 15 형제를 미워하는 자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요한은 '사랑하지 않음'의 개념에서 '미워함'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진술하고 있다.
1]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본문은 분명히 12절을 반영한 것으로 세 가지 즉 '사랑하지 않음'과 '미워함' 그리고 '살인'이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미워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 (Plummer).
그러나 여기서 요한이 살인자의 회개와 사죄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의 사죄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Smalley, Stott).
* 눅 23: 34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단지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라는 사실, 즉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우크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엔 아우토 메누산)은 문자적으로 '그 속에 거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가지다'(에케이)는 현재형으로서 '영생을 가질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뜻한다. (Haas).
이것은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비롯된 살인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영생이 서로 상극임을 시사한다.
요일 3: 16 우리를 위하여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의 본과 목표를 말한다. 형제 사랑의 본은 예수님이시고 형제 사랑의 목표는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이다.
예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요한복음 15: 13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 요 15: 13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그가 친히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그것은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알고'(에그노카멘)은 완료형이다. 이 단어는 이 서신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현재형으로 쓰였으나(2: 5, 18, 20; 5: 15) 본문에서는 특히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우리가 알게 된 것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15절에서 미워하는 자의 표본으로서 가인을 내세운 뒤 본 절에서 사랑하는 자의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2]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은 상반절에서 자기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본받아 자기희생적 사랑을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한다.
* 요일 2: 6 -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는 예수께서 친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상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사랑이 자기 부정임을 시사한다.
* 요 15: 12-13 - ⑫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