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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학술자료실 스크랩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단상
김일수 추천 0 조회 42 07.01.23 14: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단상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김혜순


1. 영감―버려진 여자가 버려진 여자를 쓰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가 떠돈 적이 있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한 소녀가 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다가 창 밖의 어떤 사람과 아주 짧은 순간 눈길이 마주쳤다. 고층 아파트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다른 사람의 눈과 자신의 눈을 직접 마주치는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녀는 깜짝 놀라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저 아래, 지상에 몸을 밀착시켰지만, 이미 목숨은 지상을 떠난 한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 일련의 상황을 파악한 순간, 소녀는 그만 알 수 없는 공포로 미쳐버렸다. 이 이야기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이런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죽음의 목격자가 된 이야기들이 우리 주위를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소녀가 창 밖의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렇게 죽음을 향하여 급강하하는 한 목숨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언어의 세계에 체포하여 명명한다면, 나는 그 순간을 시적 영감의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에게 영감은 자신의 존재와 눈이 맞닿은 순간에 발생하는 상상력이 가 닿을 종결점(출발점이 아니라)으로 존재한다. 즉, 영감은 자신의 멀고 먼 미래에의 투시, 바로 그것이다. 이 순간에 소녀가 응시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은 어떠했겠는가. 그 모습은 바로 옥상에서 저 딱딱한 바닥을 향해 추락해가는 자신의 죽음, 혹은 열린 부재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플라톤 이래 영감은 신이 보내준 선물이었다. 어딘가 외부에서 뮤즈가 날아와 시인에게 깃들일 때, 그것을 영감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시인을 미치게 만든다고도 했다. 그들은 은총처럼, 그러나 시인을 미치게 하는 독(毒)처럼 영감이 어딘가에서 온다고 믿었다. 과연 그럴까. 외부, 어딘가에 영감의 저장고가 있고, 거기서부터 시인에게로 어떤 기운이, 보이지 않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 들리워짐, 이 광기, 그리고 이 ‘삐딱한 응시’는 외부의 절대적 존재자가 우리에게 시혜를 베풀기에 우리가 목마르게 얻게 되는 것일까. 헤겔이 말한 대로 우주가 시인에게로 품어져오는 것일까. 아니면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외부의 절대적 존재자나 이성 대신에 내면의 그것 자체가 절대적 존재자의 자리를 탈환하는 것일까.

 

영감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나’를 통해 ‘나’를 무(無)로 만드는 기제, 그러나 그 기제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저 바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바깥이 내게로 여릿여릿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열자, 저 바깥이 착각의 소용돌이인 내 안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영감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나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져 있는 것만 같다. 먼지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만 소용돌이친다. 나는 휘날리는 모래 알갱이들 같은 불모에 휩싸여 사라져버린 나를 부른다. 나는 나와 만났다 헤어지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사라졌다 하는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걷어차며, 걷어찼다가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방으로 떨어져가며 말의 새끼줄을 스스로 생산해낸다. 그 새끼줄이 나에게서 뿜어져나와 나를 옭아맨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끼줄을 뽑아내지 않으면, 또는 그것에 옭아매여 있지 않으면 나는 영감에 파묻혀 미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새끼줄을 끊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그 허방에 목매달려 있을 것만 같다. 앞으로 나는 어쩌면 그 영원한 허방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한 대로 미쳐버릴, 아니 벌써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그 절명의 시각, 내가 나라고 믿었던 사랑과 아픔이 모두 깨어난다.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죽음이 보내온 신기루라는 이름으로. 그때 역설적으로 세계가 다시 내게로 살아 나온다. 시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아득한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여성인 시인이 ‘나’를 열어 ‘나’의 그 알 수 없는 심연의 죽음 속으로 빠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심연이 바로 자신의 존재임을, 시를 쓰는 작업이 바로 그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여성시인은 그 불모의 사막 속에서 ‘나’를 보내고, 모든 ‘나’를 불러들인다.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비추며, 모두를 무성하게 한다. 그것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부재를 통한 무수한 존재의 발견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두 있다. 그곳을 여성시인인 내가 방문하는 것이 내 시의 궤적이다. 마치 바리데기가 저승 여행을 할 때처럼. 아니, 샤먼인 여성시인이 바리데기를 저승에서 만날 때처럼. 그때, 여성시인이 만난 바리데기는 전 일생을 투자해 저승 여행을 감행하고 있지만, 그 시간의 길이를 이승에서 재보면 단 한순간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해서 여성시인의 영감이 신비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다. 여성시인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신비 경험을 감각적, 언어적 세계보다 더욱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이런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만약 영감이 신비주의의 그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한 체계를 타고 지어진 집이라면, 아니 길이라면 그 신비가 언제 우리에게 말을 걸 것인가. 아마 신비주의의 그물을 다 걷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 것이다. 더구나 여성의 절망이나 희망, 기억, 고통은 증발하고 없을 것이다. 거기엔 인생의 외부와 결합해서, 여성임을 망각한 허망한 상실만이 존재할 것이다. 신비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은유 체계다. 그것은 세계를 혹은 ‘너’와 ‘너희들’을 모두 타자성의 계시물로 탈바꿈시켜버린다. 그때 삼라만상은 거대한 시적 자아의 유사적 존재, 혹은 반사적 존재로 놓여 있을 뿐, 그것들은 절대 스스로 살아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곳엔 ‘나’라고 불릴 수 있는 시적 화자마저 증발하고 없을 것이다. 이런 함정 속으로 여성시인들이 자주 빠진다. 자신 스스로가 우주의 삼라만상의 간격을 가득한 밀도로 채운 대모신으로 등극하거나 혹은 세상의 틈들을 모두 메우고, 체계를 새롭게 구축해버린 거대한 여자 통치자로 가상의 세계에 군림하는 것이다. 혹은 절대적 외부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이본이 분포하는 「바리데기」 신화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인 무조신(巫祖神)이 탄생하는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살아 있는 텍스트이다. 살아 있는 텍스트라는 것은 ‘바리데기’ 혹은 ‘바리공주’라는 굿판에서 구송되는 무가가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다른 40여 가지의 이본을 갖고 분포하는 것은 물론, 진오귀굿 같은 자리에서 구송될 때, 구송하는 연희자에 따라, 혹은 굿을 부탁한 단골의 인생살이, 죽음의 내용에 따라,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늘 변화를 겪고 있는, 열린 텍스트라는 말이다. 진오귀굿을 시작할 때, 무당은 망자가 이 세상을 떠나, 아무 사고 없이 저승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들이 모시는 온갖 신들을 불러온다. 망자의 가족들이 자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귀신들의 위력에 놀라고 있을 즈음 바리데기의 구송이 시작된다. 이때 비로소 망자의 가족들은 무당이 부르는 망자의 이름을 듣게 되며, 텍스트 변용을 거쳐 바로 그 망자를 데려가는 저승길 안내자가 된 바리데기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더이상 망자가 자신들과 함께 이승에 거주할 수 없다는 사실, 아울러 망자는 온갖 고난을 물리치고 드디어 무조신으로 등극하게 된 여자, 바리데기의 안내를 받아 저승 가는 길을 안전하게 갈 것이라는 확신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드디어 죽음의 공간을 자신들의 내면 안에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망자는 바리데기의 인도를 받아 구체적으로 명명된 어떤 지역들을 지나간다. 굿판의 사람들도 그 길을 따라간다. 무당에 얹힌 망자의 목소리가 이제 저승문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망자는 그 알림을 통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안전하게 바리데기의 안내로 이승보다 더 안전한 저승, 극락에 당도했음을 고하고 가족들 곁을 영원히 떠나간다. 그리하여 그 죽은 이의 혼은 구천을 떠돌지도 않을 것이며, 영원히, 남아 있는 가족을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더구나 바리데기의 안내를 받고 죽음을 건너간다니 남아 있는 가족에게도 더이상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어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바리데기」는 버려진 여자아이의 모티프로 씌어진 신화이다. 〔바리는 버린다의 뜻 이외에, 순수 우리말인 ‘발’(없던 것이 새로이 일어난다)의 연철(連綴)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생산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바리공주는 생명공주, 소생공주, 생산공주가 된다.(『한국무가집』, 김태곤 편, 집문당, 1971) 그러기에 ‘바리’는 플라톤의 파르마콘처럼 독이면서 약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이 버려진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하필이면 죽음의 공간을 누빈다. 가부장제 사회의 이승은 남성들이 통치하지만, 저승은 버려진 아이라는 ‘바리데기’의 안내 없이는 갈 수가 없다. 어쩌면 바리데기의 저승은 여성들이 만든 자기들만의 공간, 환상적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바리데기」의 서사 단락의 전반부는, 많은 이본들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혼인을 한다.
그리고 딸아이를 여섯이나 낳는다.
그러나 일곱번째도 딸이자 부모는 그 딸을 버린다

를 공통적 화소로 갖는다. 이 버려진 일곱번째 딸이 바리데기이다. 물론 ‘기아 모티프’는 영웅의 일생을 다루는 서사물에서 가장 흔한 모티프이다. 그러나 「바리데기」에서의 기아 모티프는 영웅신화의 통과의례적 성격을 넘어서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그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조건만으로 버려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리데기가 신화 시대의 가부장제하의 여성의 조건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버려진 존재로서의 여성이 여성인 자신을 인식하거나 혹은 자신도 여자이면서 여자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인식, 그 비참의 공감대에서 발생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시인의 영감은 이 지상에서 버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버려진 아이를 끌어안고, 그 버려진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정당화시켜주는 기제이다. 혹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여행을 날마다 감행하는 샤먼처럼 살아 있는 죽음 속으로 스스로 떨어져가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성시인에게 있어 영감은 남성시인의 관념적인 죽음의 응시, 그 투명한 공간으로의 여행과는 다른 공간으로의 여행을 감행하게 한다. 여성시인이 바라보는 죽음, 혹은 무(無)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들어 있다. 동양이 바라보던 무(無) 속에 ‘절대적인 없음’ 같은 것은 없었듯이. 여성의 영감이 끌어당겨서 홀려가는 여행의 공간 속에서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그 순간, ‘나’의 죽음이 죽음을 초월해 저 너머로 간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은 아이인 또다른 ‘나’를 만나러.

달려가는 기차에 탄 것처럼 저 너머로, 저 너머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나의 의식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나는 알 수 없는 허방의 미궁 속으로 추락한다. 그 순간 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타자이며, 버려진 아이라는 자신이다. 이때, 모든 것이 증발하고, 모래들이 휘날리며, 의미의 빛은 가물가물해지고, 세계는 스스로의 심연을 열어 주체와 객체를 해체하며 저 바깥이 되어버린다. 저 바깥, 고독한 장막 저쪽에 버려져 죽은 아이가 있다. 나는 나인 그 아이에게 가고자 한다. 죽은 아이는 시의 힘을 통해 나를 맞아들이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나의 침묵조차도 말한다. 나의 온갖 구멍들이 아이를 품지 못해 안달한다. 나는 조금 더, 조금 더 죽고 싶어 안달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는 포근한 죽음처럼, 나에게 깊이에로의 무절제한 경험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내가 시쓰기를 마친 순간, 아이는 봉해진다. 나는 지금도 바리데기의 연희 공간에서 다르게, 또 다르게 생산되고 있는 「바리데기」의 텍스트, 그 무수한 이본들의 이본 중 하나, 그 이본의 또다른 갈라진 텍스트 중 하나를 탄생시켰다. 또하나의 바리데기가 죽살이했다. 그리하여, 아이는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흰 종이가 나를 맞는 날이 더 많다. 나는 내가 만나고 온 나의 부재에 치를 떤다. 어딘가 저 멀리 내 속에서 또 아이가 운다.


2. 공간―그 여자가 서역으로 간 까닭은

나는 지금 이 시대, 여성주의적 사유를 하는 여성시인들의 시에서 발견되는 샤먼적 주술, 혹은 응시의 공간, 그에 따른 시선, 리듬, 문체에서 무가적 요소를 많이 읽어왔다. 더구나 나는 여성들의 텍스트를 접할 때마다 여성들의 내면 깊이에서 메아리쳐오는 그 버려진 여자아이의 구슬픈 목소리를 들어왔다. 나는 여성시인들의 시가 근대 이전의 여성문학이라고 취급되어온 규방가사, 시조, 내간, 전기적 수필보다는 차라리 속요, 작자 미상의 고대가요, 혹은 여성무가인 「바리데기」와의 접속성을 더 많이 갖는다고 생각해왔다. 더구나 무가의 향유층과 그 창작 과정, 산포의 형식성을 생각해볼 때, 여성시의 미래의 바람직한 모습까지도 무가가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여성무가 속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한 흔적이 많다. 그럼에도 무가엔 여성들의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과 경험이 너무 많이 들어 있다. 나는 「바리데기」의 그 수많은 텍스트들, 그리고 그 다양한 산포의 모양을 좋아한다. 나의 이 글쓰기도 그런 모양이 되길 바란다.

 

바리데기는 다른 영웅신화에서처럼 태어나자마자 유기된다. 그러나 여타의 영웅신화와 다른 점은 바리데기가 여자아이라는 이유 때문에 버려진다는 점이다. 바리데기는 짐승 우리, 뒷동산, 뒤뜰, 용늪, 피바다 등에 유기되는데, 그 유기가 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냇물, 황천강, 피바다, 동해, 청천강 등을 거쳐 깊은 산골이나 산굴과 같은 장소에까지 걸치는 세 차례의 지독한 유기를 당한다. 이렇게 버려진 바리데기를 학과 까치와 거북, 바리공덕 할미와 할아비, 수궁용왕이나 산신, 부처가 양육한다. 혹은 부모가 다시 데려가 구박하며 기른다. 어쨌거나 바리데기는 자신이 부모 없는 아이인 줄 알고 자란다. 바리데기가 버려지는 장소는 비현실적 공간이며, 바리데기를 양육하는 자는 모두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바리데기가 버려지는 공간은 모두 무덤이 만들어지는 장소이거나 아니면 죽은 이를 몰래 유기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버려진 아이의 이목구비에서 벌레들이 쏟아진다.

잠겼던 함 문이 열리거늘
아이를 굽어보니 입에는 왕거미 가득하고
귀에는 불개미 가득하고
허리에는 구렁배암이 감겨 있어
양연수 나린 물에 거슬러 씻기시고
―앞의 책, 70쪽

바리데기를 기르는 양육자는 모두 십장생 같은, 죽음을 최대한 연기(延期)해주는 동물이거나, 혹은 죽음을 건너뛰어 다닐 수 있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사정들로 보아 우리는 바리데기가 죽음 속으로 버려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본들 중 어느 것도 바리데기가 죽음에 처해졌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이 부분에서 쫓겨나는 바리데기의 여정을 당시 여성들의 심층에 자리한 여성의식이라는 기의가 표층화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데, 여성들이 자신들의 태어남, 혹은 살아감의 여정을 ‘죽음’의 여정에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바리데기 텍스트 안팎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두 차원을 분리되지 않는 현실감 속에서 받아들인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오히려 죽음의 공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의 감정을 무시하고, 배제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나라 여성시인들이 현실적이라고 명명되는 질서, 제도 속에 숨겨진 다른 차원, 균열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환상의 공간을 현실 공간에 겹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즉, 여성시인들의 시 속에 내재한 환상적 공간은 개념적인 것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 바탕한 또하나의 심리적 현실을 구축한 공간이다. 여성시인들은 세계의 벌어진 틈 앞에, 그 죽음의 균열 앞에 독자를 데려다 세운다.

바리데기는 아버지의 병, 혹은 죽음을 구제할 약수를 구하기 위해 저승, 혹은 서천서역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서천서역국은 바리데기가 돌아온 일상 공간과는 또다른 비일상 공간이며, 일상 공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생명에 대한 제약을 풀 수 있는 열쇠들이 숨어 있는 곳이다. 이 공간에 설정되어 있는 만상과 인물들은 모두 영구 지속되는 생명성을 지니며, 시간도 일상 세계와는 달리 흐른다. 그곳은 일 년이 하루며, 이 년이 이틀이며, 삼 년이 사흘이다. 그곳에서 일 년을 지내고 이곳에 오면, 겨우 하루가 지나갔다라고 한다. 그러나 한평생 살고 오면 겨우 몇 나절 지났을 뿐이다. 그곳은 아마도 시간이 이곳에서처럼 균질하게 흐르는 곳이 아닌가 보다. 그곳은 이곳과 시간의 계열이 다른 곳이다. 그곳에서는 이곳에서 생각하는 선행, 후행의 시간 관념이 없기도 하거니와 모든 사건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할 수도 있다. 보르헤스의 “보이지 않는 시간의 미궁이라는 책”(「여러 갈래로 오솔길이 나 있는 정원」) 속에서처럼.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균질적 구분, 제약을 벗어나 영원히 먼 그곳, 먼 미래에서, 먼 바깥에서 자신의 존재를 볼 수 있게 된다. 혹은 일상 세계를 오히려 더 리얼하게, 리얼함 그 자체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만이 시간적 제약의 극한적 상징인 이곳의 죽음을 일깨울 약수(藥水)를 구할 수 있다.

 

그 약수가 바로, 저 바깥의 상징물이며, 문제를 해결해줄 저 바깥의 선물이다. 다시 말하면, 그곳(텍스트의 내부)에서의 사건들 속에는 이곳에서는 경험 불가능한 한 가지 이상의 다양한 시간 경험들이 들어 있다. 영원적이므로 순간적이라고밖에는 명명할 수 없는 원형들의 세계의 펼쳐진 시간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그 세계로 가는 것은 죽음의 세계, 부재에 몸을 내맡기는 위험한 일을 감행하는 것이지만 그 위험한 일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끝없는 참여를 요구한다. 이 끝없는 참여가 비유하자면, 시의 시간에의 참여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시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의 영상 속에 있다. 그 영원의 영상은 지금 여기에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순간적으로 있다. 영원한 부재의 접촉 없이 시는 없다. 순간의, 순간의, 순간으로 시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이 물론 현재, 시의 시간인 영원한 현재일 터이지만, 그것을 서사적으로 주욱 잡아당기면 서천서역국의 나레이션이 되는 것이다. 부재에의 중단 없는 참여가 시인에게 시작(詩作)을 하도록 독려한다. 여성시인은 출발선상에서 자신 속에서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버려짐을, 매번 다시 시작한다. 늘, 죽음 속에 있음으로 죽음에 처한 아버지를 살려내러 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빈 곳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앞에 가는 차가 열심히 달리면서 비켜주므로 내가 앞으로 달려갈 수 있듯이 말이다.(속도가 그 빈 곳을 채우는 데 열심이긴 하지만) 만약 너와 나 사이에 빈 곳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 사이에 만일 빈 곳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질식해 이미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정현종의 시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은 아마도 이렇게 텅 빈 곳, 무(無)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 우리의 샴 쌍둥이처럼 붙어 있던 몸을 칼로 베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또 장차 우리를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것이다. 빈 곳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빈 곳 때문에 우리는 미워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자, 역설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이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겁다. 노자는 태초에 그렇게 붙어 있던 너와 나를 칼로 쪼개는 것을 만물의 시(始)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옷을 만들려면 가위를 들고 천을 쪼개야 하듯이 만물은 쪼개짐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마치 한 개짜리 세포가 두 개짜리 세포가 되고, 또 그것으로 생물의 번성이 시작될 때처럼, 쪼개짐이 없으면 만물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허공은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는 고마운 터전이며, 우리가 연기(緣起)의 새끼줄 놀이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새끼줄 속의 지푸라기 한 파람이다. 생명의 새끼줄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씨줄, 날줄로 짜여진다. 삶과 죽음도 이와 같다. 만약 내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아니 너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그러면 아무도 결국엔 살아 있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으로 살아 있다. 여성작가들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버지니아 울프가 쓴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올란도』는 모두 몇백 년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죽지 못함으로, 아니 그들은 그들 생애 이전의 죽은 자아를 갖지 못함으로써, 한 생애, 한 생애 살아낼 때마다 지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고독했다. 그들에겐 돌아갈 빈 곳이 없었다.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자신들이 모두 앞으로 죽게끔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 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천만 번 환생했지만 나의 이전 자아들이 다 죽어주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왜 근대 공간에서 여성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자아, 혹은 어떤 연속성이 죽지 않을까 봐 겁내는 소설들을 창작했을까) 그래서 우리는 텍스트 안에 죽음의 공간(어쩌면 천당이나 지옥 같은 곳)을 상정해놓고, 그곳을 표현할 때에만 그곳엔 아무것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아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그곳들, 죽음만이 영원히 살아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으라는 형벌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이 내 삶 곁에 존재하므로, 나는 여기 살아 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죽음이 살아 있으므로 나는 유한한 존재라고 엄살을 떨 수도 있는 것이다.

 

바리데기가 방문하는 서천서역국은 삶 안에 존재하는 죽음의 공간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샤먼이 중개하는 진오귀굿을 하는 동안 바리데기의 죽음 공간을 구체적으로 여행함으로써 비로소, 자신들이 죽음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리공주의 아버지인 오구대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 그는 죽음으로 죽어 있었다. 그때, 바리데기가 구해 온 약수가, 바로 그 깨달음의 선물, 독이 그를 죽음 안에서 살렸을 것이다.

노자는 그렇게 살아 있는 죽음의 공간을 무(無)라고 하고, 그것을 현빈(玄牝)이라고 명명한다. 현빈의 현은 감은 것, 검은 것이다. 그것은 눈을 감아서, 온통 검은, 스스로 죽음을 감행한 상태를 일컫는다. 왕필은 현을 사물의 지극함, 꾸밈을 벗어버린 상태라고 하였다. 빈은 여성의 생식기, 자물쇠의 입, 골짜기(谷)의 시니피앙이다. 바리데기가 가는 그곳, 죽음을 통하여 여행하는 그곳은 여성적 공간으로 빈 곳이다. 현빈이다. 빈 곳에서 만물은 살아 있고, 유물은 존재한다. 이 어두운 자궁 안에 모든 운명의 가능성이 다 들어 있다. 그곳엔 가부장제라고 하는 남성중심주의가 깨어지며, 만물의 동일성이 깨어진다. 그곳에선 “몸이 외면화되지만 그 몸이 보존된다外其身而身存”.(『노자』 7장) 바리데기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실제적인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존재하기를 멈춘 여성의 상징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서 벗어나 온통 미래인 그곳에서, 미래의 극한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다. 여성 무속인들이 그녀를 기리는 노래를 사람이 죽을 때마다 불러준다. 죽음으로써 살아 있으라고. 살아남은 사람들이여, 죽음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이 곧 삶이라고. 그곳을 여행해보자고.

그렇다면 신화 시대의 여성들은 바리데기의 저승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가부장제하에서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충족하려 한 것일까. 아니면 버려진 아이인 스스로를 위로하고, 감수하려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남성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반대로 버려진 아이인 자신들이 평생 그것을, 버려짐을 끌어안고 살아 있으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오히려 자신들이 버려진 아이로서 살게 된 것을, 자신들이 죽은 아이가 된 것을, 누군가에 의해, 무엇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림으로써 버려짐을 살아내려 한다. 그 안에서 여성적 승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어이없게도 버려진 아이가 버려진 아이를 오래도록 기르게 한다. 그 길러내는 과정이 저승 여행이다. 그러기에 바리데기는 저승 여행중에 온갖 여성의 노동활동(빨래하기, 아이 낳아주기 등등)을 감내하는 것이다. 나는 바리데기의 서천서역국은 버려진 여성이 버려진 여성을 기르려는 욕망을 드러내고, 무대화한 공간이라고 보고 싶다. 그러한 욕망이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적 텍스트를 생산하게 한다. 아니다, 그 텍스트가 욕망을 향하여 간다. 그러한 욕망의 무대가 바로 일상 세계와 수평적(한국 무속에서 저승 공간은 천상과 같은 수직적 공간이 아니라 수평적 공간으로 이해되고, 주인공들은 그런 공간으로 수평적 공간 이동을 한다고 한다. 즉, 지옥으로 내려가거나, 천당으로 올라가지 않는다.―홍태한, 『서사무가 바리공주 연구』, 민속원, 1998)으로 존재하게 만들어놓은 서역이다. 바리데기가 수평적으로 공간을 이동해간다는 것은 천당이나 지옥이 일상 세계와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고,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인물들도 일상 세계의 인물과 다를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여성의 일상 경험 안에 서천서역의 천당과 지옥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서역에서도 일상적 여성노동이 과도하게 펼쳐지기에, 그곳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곳이 여성 텍스트의 공간이다. 나는 「바리데기」에서 표출되는 여성의식을 『노자』 10장에서도 읽는다. 나는 아마도 『노자』 10장을 노자라는 전체 텍스트와 연결해서 여성주의적으로 읽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백(魄은 靈이나 魂과 달리 물질화되는 것이다)을 잘 타고 부려 하나로 안으면, 능히 헤어질 수가 없다. 자연의 기에 맡기고 부드러움에 이르러 어린아이가 되리라. 감은 거울을 닦아내면 흠 하나 없으리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찌 조작된 지식을 쓰겠는가. 천하가 나오는 문이 열리고 닫히니, 능히 여성이로다. (왕필은 이 부분에 대해, ‘여성이 대답하기는 하지만, 조작하지 않으므로, 천문의 열고 닫음이 여성처럼 될 수 있다면 사물이 스스로 손님이 되어 찾아오고, 거처함이 저절로 편안해진다’고 하였다.) 낳고, 기르고, 낳으나 소유하지 않고(왕필은 ‘그 성질을 금하지 않고’로 해석했다) 행하면서 자랑하지 않고,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 것이 현묘의 덕이다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祿兒乎 滌除玄覽 能無瑟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노자』 10장 중에서

『노자』 10장은 몸을 잘 다스리라는 말로 시작된다. 우리 몸에 깃들인 정신적인 것들 중에 백은 땅으로 돌아가 땅이 될 요소다. 백은 영이나 혼과 달리 아마 연기하는 생 속에서 또하나의 몸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육체적인 것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을 잘 경영하라고 노자는 말한다. 그러면 그것이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영혼과 백이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백을 자연의 기에 맡기면 능히 어린아이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이 될 것이라 한다. 이 부드러움은 최고의 덕목이다. 노자는 어린아이와 여성을 도(道)의 시니피앙으로 삼는다. 어린아이는 남녀의 구별이 없는 몸을 가진 부드러운 덩어리(이 부분에서 나는 아마 노자가 현금의 태생이라면, 양성애를 언급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로서, 여성은 남성처럼 소유함이 없이 만물을 안아들이고, 기르며 지식으로 조작하지 않아도 열리고 닫히는 문처럼, 모든 것을 비추나 가장 아래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검은(눈감은) 거울처럼 비어 있다. 그 거울은 아무것도 가두지 않는다. 소유는 남성적 경제 원리다. 내어주었으므로 반드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 그들의 경제 원리이다. 그들은 생명을 내어주었으면,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비어 있는 어둠인 여성은 그 경제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어둠인 여성에게 오히려 모든 것이 비추어지고, 이곳에서 동일자적 자아는 소멸되지만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길이 열린다. 낳고, 기르고, 낳으나 소유하지 않고, 행하면서 자랑하지 않고,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다. 바리데기의 서천서역국은 바로 이 검은 거울이다. 그곳에서의 바리데기의 행적은 어둠 속으로, 혹은 살아 있는 죽음 속으로, 혹은 무의식 속으로 복귀함으로써 지속된다.

 

여성시인인 나는 이 어둠의 길 위에서, 끝나지 않는 텍스트의 길 위에서 서천서역국을 헤매는 바리데기처럼 저 내 안의 저 바깥에서 들리는 영감의 목소리를 따라간다. 나는 내가 들어선 어둠을 쪼개고, 쪼갠다. 그래야 나는 이곳을 떠나 저곳으로 갈 수 있다. 걸어가는 사이사이 계곡마다 내가 들어찬다. 나는 여러 부분으로 갈라진 텍스트들의 틈 속에서 언제나 허방에 빠져 있다. 나는 그 허방에서 분출하며, 분출된 것과 함께 쏟아져 흩어진다. 그렇게 흩어진 것들이 또 쪼개진다. 그러나 그러한 내 몸의 은유적 텍스트인 내 언어 텍스트가 예언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신비라면 나는 다시는 현실 공간을 쪼개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언어 텍스트는 다만 내가 거처하는 세상에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언어적 육체, 무에서의 분출, 그것이다. 나의 언어적 육체는 개념화를 거부하면서, 나와 세상의 역설적인 결합을 도모한다. 나는 세상에 없는 서천서역국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응시함으로써 세상의 균열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어떤 시간의 패러독스를 통하여 내가 나의 탄생 이전에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시간의 패러독스를 통하여 죽은 아이로서 약수를 가지러 서천서역국을 헤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먼 미래를 여는 것이고, 또 나의 탄생 이전의 과거를 여는 것이기도 하다. 서천서역국은 나에게 어떤 욕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곳이 존재해야만 내가 나로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욕망하는 주체로서 구성되는 것은 서천서역국이라는 환상적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이 없으면 여성시인인 나는 내 욕망을 무대화할 공간이 없다. 내 욕망이 충족되고, 해결되고 만족을 얻는 공간 이전에 무대화할 공간마저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성시인들의 시는 남성시인들의 시보다 훨씬 더 저 바깥의 무대화에 주력하는 시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이곳에 공간을 점유하고, 풍경을 체포해놓을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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