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철 - 하늘 나라 청지기 - 7.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1 1967년 3월, 정읍 교역으로 발령받고 1년 남짓 있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자칫 냉대 받기 쉬운 불구의 식구 한 분이 나오셨다. 늘 어느 식구보다 신경을 쓰며 아기 엄마가 잘 대해 주었다. 떠나온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식구다. 선생님께서는 10여 년 전에 시골 구석진 곳에서 만난 식구라도 기억하시며 살펴 주시는 심정을 다시 느껴 보았다. 2 우리 집 네 아이들은 모두 출생지가 다르다. 서울, 정읍, 대구, 안동에서 태어났다. 지금 고등학교에 들어간 원준이의 갓 태어난 모습을 생각해 본다. 포동포동해야 할 아기가 이마랑 넓적다리가 쭈굴쭈굴했다. 나는 정말 아기와 엄마에게 너무한 것 같아 미안했다.
3 공기총 판매도 어느 교역보다 잘되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공금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구두쇠 소리를 들어가며 절약하여 어려운 본부에 바쳤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원준이는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
4 서울이나 부산에서의 모임에 참석하려면 제일 걱정스럽다. 먹는 것은 없으면 굶으면 되지만 배나 기차를 탈 때는 그냥 탈 수가 없다. 몰래 배나 기차를 타다가 들켜서 도중에 쫓겨나고 어떤 때는 매 맞는 일까지 있었다. 속으로 “하나님의 아들인데 너희들이 사람 볼 줄 모르는구나”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돈이 있으면서도 함부로 쓸 수 없으니 이상하다. 5 하루는 아기 엄마가 덧버선 한 켤레를 허락 없이 샀다고 식구들이 있는 앞에서 눈물 나도록 꾸짖었던 일이 늘 잊어지지 않는다. 아마 그때 일이 몹시 서운하던지 지금도 가끔 이야기한다.
6 1968년 2월 4일, 선생님 탄신일에 1차 7년노정 대상을 부족한 것이 받았다. 15가지의 제반 조건에 통과되어 받은 상이다. 상장을 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든다. 1968년 6월, 신흥 공업도시 경남 울산으로 발령받았다. 돈 많은 신설 공업도시에서의 공기총 판매는 풍성한 만나와 메추리 은사였다. 7 현재 일화제약에 근무하는 박기환 식구가 총포사에서 같이 일했다. 많은 것을 나에게 말없이 가르쳐 준 식구였다. 멀리 수금을 보내면 걸어서 교통비를 아끼고 점심은 빵과 우동으로 때우고 남은 돈은 한 푼도 어김없이 가져오는 식구였다. 하늘 것을 자기 것 이상으로 아끼며 착실하게 총포사를 발전시켰다. 777가정 축복을 받고 하늘 뜻 가운데 잘들 살고 있다. 1년 남짓한 울산의 생활을 청산하고 인사이동으로 경남 밀양으로 가게 되었다. 8 하루는 교구장님이 울산으로 오셔서 많은 말씀은 했으나 오신 목적을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울산의 발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갔으면 하는 것이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기간이요 총포 판매로 별로 전도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던 때다. 그러나 개인의 사정보다 울산을 더 발전시킬 인도자에게 맡긴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순종하면서 떠났다. 짧은 2개월간 밀양에서 생활했지만 하늘이 인도자를 어떻게 대하여 주는가를 배웠다. 9 교역 본부에 식구가 여러 명 있어서 만삭이 된 아기 엄마가 혼자서 부엌 일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 식구에게 교역에서 함께 있기를 권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훌쩍 집으로 가버렸다. 이튿날 아침 그 식구가 와서 “내가 어제 저녁에 잘못했다”라고 하며 머리를 숙였다. “왜 그러느냐”라고 하니 어제 교역장님이 부엌에서 일을 시키려고 해서 너무한다고 생각되어 집에 가서 잠을 잤다고 했다.
10 그런데 몽시에 선생님이 나타나시어 “인도자는 하나님의 대신자요, 내 대신자다. 그들이 없으면 내 말씀과 뜻을 누가 말하며 이루어 주겠는가. 더욱 간첩들이 독약을 넣어 죽이게 된다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부엌에서 밥 짓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듣고 깨어나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부족한 모습들이지만 하늘 대신임을 재삼 느끼고 감사하면서 맡은 일에 더욱 충실했다. 11 특별 인도자 수련회가 청평에서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선생님을 모신 가운데 약 40명의 일선 인도자들이 모여 원리, 설교, 승공 강의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지구장 선발 시험장이요 기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손수 잡으신 잉어며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일선 인도자 생활에서는 생각조차 못 하던 푸짐한 음식들이었다. 고마우신 사랑의 배려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보낸 기간이었다. 12 그 후에 안동 지구장으로 발령받았다. 개인 사정 같아서는 만삭이 된 아기 엄마를 데리고 안동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었다. 가는 도중 대구 교회에 간신히 도착하여 해산하게 되었다. 하늘은 미리 산파도 준비해 주셨고 곽정환 지구장님 내외분께서 보살펴 주시어 무사히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아기와 함께 안동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태어난 선영이가 벌써 중학교 2학년으로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 13 안동은 김병호씨가 비지죽으로 연명하시며 피살을 깎고 땀과 정성으로 마련한 제단이다. 화장품 장사를 하시며 겨우 끼니를 이으시는 권옥주 권사님께서 한 푼 두 푼 저축하신 5만 원이 씨앗이 되어 식구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새로 의젓한 2층 집을 전세 내어 부모님을 모시게 된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