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마가복음 9장 37절『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파이니온 παιδίων)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에서 대조법으로 보면,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에서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린아이가 있다.
어린아이는 누구를 말하는가? 먼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의 귀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원리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 31절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해주셨다.『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따라서 어린아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당시 제자들과 같은 영적 어린아이를 의미한다. 파이니온(παιδίων)은 표면적으로는 소년, 소녀를 의미하지만, 이면적으로는 성숙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말했지만, 제자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영적 어린아이가 된다.
제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누가 크냐” 라는 말로 다투었다. 마가복음 9장 35절에서『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오늘날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에 관심을 더 갖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만, 예수님의 큰 권능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권세를 누려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기복신앙을 가진 자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내 이름으로는 내 이름 안에서 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인데, 영적 어린아이 같은 자에게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의 연합과 부활의 의미를 받아드리도록 잘 가르쳐 주라는 것이다. 이게 복음의 목적이다.
마가복음 9장 42절에서『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작은 자는 영적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가르쳐 주어야 함에도, 인본주의 율법주의로 잘못된 것을 그들에게 심어주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그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세례로 표현한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이고,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 주신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죽음이며, 부활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현재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현재적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성도라면, 교회의 형제들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7절에서『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실족하게 하는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도 못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심지어는 성경 말씀을 왜곡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믿게 한다. 누가복음 9장 37절의 어린아이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인데,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로 말하므로, 부모가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잘 양육해야 한다거나,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므로, 자기를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던지,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말로 연결시킨다. 그들은 성경 말씀의 핵심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 47절에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실족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실족하게 된다. 그래서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게헨나는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불(심판)을 상징한다. 심지어는 마가복음 9장48-49절『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7장 31-32절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힌놈의 골짜기에서 게헨나가 나타났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밖 남동쪽의 쓰레기 장이었다. 동물의 사체를 태우는 것이다. 사체에서 구더기가 나온다. 그런데,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몰렉에게 자녀를 태워 제사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성전의 타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을 비유하자면 교회의 타락을 의미한다. 인본주의 율법주의가 만연한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에서 자유를 주고자 하지만, 신도들은 이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게헨나는 쓰레기를 태우는 의미가 있지만, 혀(비진리)의 불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태우거나, 심지어 신도들에게 세상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과거 이스라엘이 몰렉제사를 한 것 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계속 제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신도 자신에게 떨어진 불은 연단이 되지만, 타인을 비진리의 불로 태울 때는 그야말로 지옥불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불에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