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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다른 나라 진보정당에서 배우자!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2008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
차례
1. 들어가며 - 오늘의 경제 위기를 세상 바꾸는 기회로!
2. 다른 나라 진보정당의 집권과 변혁 사례
[사례1]애국 군인과 도시빈민, 노동자의 합작품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혁명>
[사례2]노동자중심의 진보민주연합, 민중참여지방자치<브라질노동자당(PT)집권과 그 후>
[사례3]노조와 당과 전선, 3자 동맹에 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족민주혁명과 그 후>
[사례4]노동자, 노조의 조직적 총선투쟁의 모범 <호주노총의 정권교체>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생활∙정치∙투쟁 공동체 <이탈리아 ‘민중의 집’>
반신자유주의 진보정치세력의 통합과 도약, <독일 좌파당>
3. 마치며
들어가며 - 오늘의 경제 위기를 세상 바꾸는 기회로!
미국 발 금융위기가 세계대공황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대외의존적인 외자∙재벌 중심의 허약한 한국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쉬거나 문 닫는 회사와 가게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 농민, 장사하시는 분들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그런 형국입니다. 그럼에도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부자 감세에 은행은 재벌에게, 비정규직 기간은 2년에서 4년으로 늘이고 방송사는 조중동처럼 어용의 나팔수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를 10 대 90으로 양극화한 신자유주의로의 역주행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그것도 힘으로 강압적으로 MB식 밀어붙이기로 말입니다. 그러다가 이명박이 대형사고 쳤습니다. 생존권을 요구하며 건물옥상 망루에서 농성하는 용산철거민을 특공대로 살인 진압해 여섯 명의 생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용산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 나 하나라도 살아남기 위해 회사나 정부의 눈치를 보며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정당과 될수록 거리를 두는 게 좋겠습니까? 단체행동이나 촛불집회 보다는 적당히 대화나 교섭으로 월급을 깎더라도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려울 때일수록 뭉쳐야 산다. 뭉치면 살고 흐터지면 죽는다” “내가 최전선이다 나로부터 사수하자” “투쟁 없이 쟁취 없다. 투쟁으로 쟁취하자” “기업별노조만으로는 내 밥그릇도 못 챙긴다. 산별노조로 총 단결 총 투쟁하자” “실업자∙비정규직∙영세사업장노동자 외면하면 우리도 그 신세 된다. 지원연대에 앞장서자”는 생각으로 산별노조와 민주노총의 서민 살리기 총력투쟁에 적극 동참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리고 96년 말~97년 초 날치기 노동악법 철폐 총파업투쟁 때 뼈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느냐, 23일간의 4단계 전면 총파업이라는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투쟁으로 김영삼 정권의 무릎을 꿇리고도 국회에서 문구만 살짝 수정된 노동자 이중착취법=파견법이 통과되지 않았느냐, 그 때 노동자국회의원 1명이라도 있으면 하고 얼마나 통탄했느냐, 그래서 국민승리21를 거쳐 민주노동당을 건설하지 않았느냐, 노조와 파업만으로는 세상 못 바꾼다, 노동자를 위한 법 한줄, 제도 하나도 어렵다, 산별노조와 함께 노동자정당 강화하고 노동자의원 많이 배출하자, 정당과 노조와 각계 대중조직이 한데 힘을 모아 정권을 잡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신념으로 정치교육, 정치토론, 정치선전, 당 가입과 정당 활동, 지역주민활동과 선거운동에 앞장서는 게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답은 자명합니다. 오늘의 경제 위기를 세상 바꾸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자본의 위기를 선량한 노동자의 고통으로 고스란히 전가시키는 파렴치한 저들과 비타협적으로 싸우면서 노동자의 정치적 힘을 비약적으로 키우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노동자계급의 억센 두 손에, 한 손에는 실업자∙비정규직∙영세노동자와 함께하는 강력한 산별노조를, 다른 손에는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하는 강력한 진보정당이라는 쌍칼을 쥐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앞장서 대중적 정치투쟁과 선거투쟁을 전개해 진보정치세력이 집권하고 그 정권의 힘으로 노동자, 민중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다른 나라 사례를 살펴볼까 합니다. 애국 군인들과 도시빈민, 노동자가 힘을 합해 반미반제와 21세기 사회주의를 추진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노총(CUT)과 노동자당(PT)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앞장서고 진보개혁세력이 총 단결해 집권한 브라질, 노총(COSATU)과 공산당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3자 동맹으로 집권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조직적인 선거운동으로 자유당에서 노동당으로 정권 교체한 호주노총, 그리고 독일 좌파당 등 최근 유럽의 반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단결과 도약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알아봅시다.
그러나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면 강북의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진보정당의 집권과 사회변혁, 그 과정의 노동자의 역할에 대한 외국의 좋은 사례도 어디까지나 그 나라 역사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기계적 모방이나 긍정∙부정의 일면적 인식은 금물입니다. 오직 우리는 우리 실정에 맞게 우리의 길을 가는데 참고할 따름이지요?
다른 나라 진보정당의 집권과 변혁 사례
[사례1]
애국 군인과 도시빈민, 노동자의 합작품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혁명>
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스페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남미의 독립투쟁을 벌인 인민 봉기의 지도자인데, 그의 이름을 따 ‘볼리바르 혁명’이라 함.
정치경제상황
-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된 대콜롬비아공화국에서 1830년 분리, 공화국 선포
- 100여 년간 군사쿠데타 연속, 1958년 군정종식, 푼토피호협정 이후 군부 정치개입 금지
- 40년간 민주행동당(AD), 기독교사회당(COPEI) 보수양당 정권교체와 민중의 정치소외
- 공산당, 사회주의운동(MAS), 급진적 대의(LCR) 등 군소 진보정당
- 세계 제 5위의 석유수출국, 국내총생산의 1/3, 수출총액의 80% 차지
- 70년대 유가 상승으로 경제 호황, 도시화, 현재 인구의 87%가 도시 거주
- 심각한 빈부격차, 노동자 절반이 도시의 거대한 빈민지역 ‘비공식 부문’ 종사, 산비탈 달동네 ‘바리오’ 거주
- 농업, 국내총생산의 6%, 식량 수요의 3분의 2 수입 의존
- 80~90년대 외자개방, 현재 석유생산의 1/4 외국기업들의 몫
- 2002년 현재 외채 325억 달러, 국민총소득의 1/3(73년 12억 달러→78년 110억 달러)
- 개인소유 토지 전체의 약 75%~80% 전체 지주의 5%가 소유
89년 카라카스 민중봉기 ‘카라카조(Caracazo)’
- 유가하락과 외채 급등으로 1980년대 심각한 재정위기 직면
- 기간산업 민영화, 퇴직금∙사회보장제도 축소 등 신자유주의 도입, 양극화 심화
- 89년 2월 취임한 페레스 정권(민주행동당), IMF 긴축∙구조조정 정책 수용, 1단계조치로 기름 값 자유화
- 2월 27일 아침 출신하던 노동자들, 버스요금 밤새 100% 인상에 분노 폭발
“버스가 뒤집히고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봉기의 첫 징후에 불과했다. 몇 시간 내로 봉기는 확대되어 각종 상점의 약탈과 파괴가 확산되었다. 빈곤과 분노로 열이 오른 빈민지역 청년들이 카라카스의 상업중심지에 몰려다녔고 도시 중심부에 가까운 아빌라산 기슭의 특권 부유층 거주지에 모여들었다. 밤새 그리고 다음날까지 봉기와 약탈이 저지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카라카조’라고 불리는 이 저항운동은 위력을 보이며 장기화되었으나 곧이어 군대의 잔인한 탄압이 며칠간 이어졌다.”(리처드 가트, 2000년)
- 군대의 발포, 무려 3천 명 사망
- 진보정당인 사회주의운동(MAS), 급진적 대의(LCR) 급성장
60년대 공산당(31년 창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혁명노선 실패 이후 노동자, 학생, 빈민 속으로 들어가 7~80년대 기층 민중운동 유지, 70년 공산당에서 이탈한 유럽 신좌파 성향의 사회주의운동(MAS), 특히 여기에 다시 떨어져 나와 73년 창당한 급진적 대의(LCR)는 명망가들도 아닌 극소수의 인원과 새로운 전략, 창의적인 방식으로 공장과 달동네로 파고들어 밑으로부터의 민중운동 전개, 그 성과로 88년 의회 3석 진출, 92년 수도 카라카스 시장 배출, 93년 대선 지지율 22% 제3당 부상, 97년 ‘모두를 위한 조국’(PPT)로 발전, 초기 차베스 정부 참여) |
- 93년 페레스 대통령은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공금유용과 1,700만 달러의 비자금 조성이 탄로나 탄핵 소추되자 사임
1단계 98년∼99년 : 40년 보수정치 종식과 새 헌법 공표
- 시몬 볼리바르 탄생 200주년 기념, 82년 12월 군대 안에 ‘MBR-200’이라는 비밀정치조직 결성한 차베스(54년생, 육사 나와 지역부대 지휘, 육사 역사·정치 교관, 당시 대위), 89년 카라카스 봉기에 자극 받아 92년 2월 4일 동료 장교들과 함께 페레스정권 전복 쿠데타 감행, 실패, 또 11월 다시 쿠데타, 또 실패, 이 거사는 “잠시” 중단될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감옥행, 이때부터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영웅으로 부각도기 시작
- 차베스는 수감 중이던 93년 12월 대통령 선거 보이콧 주장, 선거혁명보다는 기존 정당과 선거 방식 반대, 민중제헌의회 소집 요구, 기독사민당의 칼데라 후보 30% 당선, 40% 기권
- 94년 취임한 칼데라 대통령은 대중의 반감을 샀던 경제정책 일부 철회, 부도은행 몇 개 국유화, 차베스 사면, 사회주의운동(MAS) 대표 장관 취임으로 칼데라정권의 민중적 색채 강화, 그러나 경제를 되살릴 수 없었고 96년 4월 IMF 구조조정 정책 재합의, 93년~99년 실질임금 급격한 감소, 노동조합 조직률 13.5%로 반감, 실업률 6.3%에서 14.9%로 증가, 비공식 경제부문 확대, 하루소득 2달러 이하 빈곤층 비율 91년의 32.2%에서 2000년의 48.5%로 증가, 하루소득 1달러 이하 극빈층 비율은 11.8%에서 23.5%로 증가
- 차베스, 94년 3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군민연합의 기치 아래 제5공화국운동(MVR) 조직 시작, 89년 민중봉기 이후 부패와 신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키자는 강령을 내건 정당연합체 ‘애국의 구심(Polo Patriotica)’에 합류, 98년 12월 선거에서 이 연합체의 대선후보로 나서 56.2% 득표(이 가운데 ‘제5공화국운동’ 40.17% 득표, 민주행동당과 기독사회당 11.2% 득표), 대통령 당선(98년 차베스 후보 대선공약 : ①보수양당체제 철폐 ②부패 종식 ③빈곤 완화)
- 99년 4월 19일 제헌의회 소집 여부 찬반투표, 86% 찬성 통과, 6월 25일 제헌의회 의원 선거에서 총131석 가운데 차베스 지지자 119명 당선, “법과 정의에 의거하여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을 지향하는 국가”임을 선언하는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 99년 12월 16일 새 헌법 동의 여부 국민투표에서 71.21% 지지 통과,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선포, 2000년 7월 차베스 새 공화국 초대 대통령 당선
2단계 2000년∼2002년 사회개혁 착수와 반혁명 제압
- 빈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지지는 압도적이었지만 조직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전히 반대파들도 적지 않아, 제헌의회 소집과 새 헌법 동의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불참률 각각 63%, 55.6%, 민중의 이해도가 낮다는 반증, 또 민중정책 추진을 위한 재원 확보도 안 된 상태
- 우선 민중 봉사와 지원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플랜 볼리바르 2000’(Plan Volivar 2000) 가동, 군인들이 빈민 속으로 들어가 가전기기 수리, 협동조합 결성과 교육 지원, 집을 지어주거나 낡은 집수리→수천 개의 학교와 병원, 보건소, 주택, 교회, 공원 재정비, 200만 명 이상 의료 혜택, 1000여 개 공설시장 개장, 200만 이상의 어린이 예방주사
- 2001년 11월 49개 개혁입법 전격 통과, 대통령에게 1년간 입법권을 부여하는 ‘특별입법권’, 석유회사를 다시 국영화하는 탄화수소법, 사유의 미경작지와 휴경지를 농민에게 유상 분배하는 토지법, 소액 대출 신용 법, 협동조합법, 어업법 등
- 차베스정권이 이렇게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걸자 보수양당, 민주행동당과 기독교사회당은 물론 사회주의운동당MAS과 신생우익정당인 ‘우선정의당’ ‘베네수엘라 프로젝트’ 등 이질적인 세력이 총 망라되어 반차베스 연합 구축, 일부 상층 장교 집단, 어용노총 CTV도 동조
- 2002년 4월 11일 군부의 일부 분자들이 차베스 대통령 체포, 20여 명 사망, 148명 부상의 유혈쿠데타, 경영자협회 회장 페드로 카르모나가 대통령 자칭, 신헌법 폐기, 의회 해산, 대법원의 권한과 운영 정지, 차베스 포고령 전부 철회, 볼리바르 운동지도자들 체포 / 언론사, 지식계층 다수, 장교집단, 카톨릭 교회, 대자본가 거대지주들이 지지, 그러나 선거로 수립된 정부를 미국 주도로 전복한 행위를 지지하는 중남미 나라는 하나도 없어
“정보분석가 마즌씨가 어제 이렇게 말했다: ‘카라카스의 미국 대사관에서 육군무관 대리였던 제임스 라저스 중령이 쿠데타 기초 작업을 위해 현지로 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우리의 마약단속반 요원들도 이 일에 일부 관련되었다. 쿠데타와 무관한 작전 때문에 해군은 베네수엘라 해역에 있었으나 쿠데타가 진행되는 동안 통신정보를 지원했다고 알고 있다. 해군은 베네수엘라 군부에게 통신 방해 활동을 지원했으며 차베스 지지를 표명한 쿠바, 리비아,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공관에서 오고 나가는 통신에 특히 관심을 집중했다.’” [가디언]지(런던), 2002년 4월 29일
- 차베스를 지지하는 수십만 대중이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외곽에 집결, 차베스 대통령직 복귀 요구, 또 쿠데타 정보를 미리 입수한 후 대통령궁 지하실에 숨어있던 차베스 충성파 군인 수백 명이 카르모나를 체포(재임 27시간), 쿠데타 실패
- 다시 2002년 12월~93년 3월 차베스 정권 타도를 위한 ‘자본파업’, 어용노총 CTV의 전국 총파업과 자본가들의 직장 폐쇄, 대자본가들 전부와 소수 노동자들 지지, 차베스는 석유공사 경영진 등 가담자 1만8천 명 해고, 군인들과 노동자, 빈민들의 공장·시장 가동을 위한 눈물겨운 투쟁 전개
1936년 창립된 어용노총 CTV(Confederation of Venezuelan Workers)의 군사쿠데타, 자본파업 참가 이유는 경영진, 집권당과 가까이 지내면서 석유회사의 막대한 이윤을 서로 갈라 먹는데, 차베스의 석유회사 국영화로 수입원천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
“석유공사의 직장폐쇄를 저지하고 현장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엘 일레나데로 데 야구아, 푸에르토 라 크루즈, 엘 팔리토 등의 정유소에서는 노동자들이 생산을 직접 통제하는 실험을 다양하게 전개했다. 후자의 경우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경제 사보타지에 저항했다.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에 페라리 정유소는 강제로 조업을 재개하여 휘발유를 배급했다. 다른 산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들이 있었다. 직장폐쇄 중에 노동자들은 회사를 점거한 후 조업재개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를 요구했다. 마라카이의 섬유공장 텍스달라와 라라주의 설탕공장 쎈트랄 카로라가 이런 경우에 속했다.” (프레데릭 레베크, 중남미정보연대네트워크, 2003년 6월 5일)
UNT(National Union of Workers)는 차베스 지지자들, 특히 미조직된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이 2003년 새로 만든 노동조합연맹, 다섯 개의 정파, 가장 큰 정파는 치리노가 이끄는 C-CURA(Class Unity Revolutionary and Autonomous Current), 다른 4개의 소수정파를 합한 것보다 수적으로 많아, 소수의 4개 정파는 무조건 차베스 정부를 지지하지만, 치리노 정파는 노동운동이 차베스 정부에 자율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 차베스의 노사 공동경영 정책에 비판적임.
- 직장폐쇄가 차베스 정권을 타도시키지 못하자 이들은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위한 서명운동 시작, 결국 2004년 8월 15일 국민투표에서도 반차베스세력 패배, 2004년 지방선거에서 차베스 지지 후보들 승리, 대법원에서도 차베스 지지 판사들 다수파 구성
3단계 2003년∼현재 민중참여 사회개혁
- 차베스는 반혁명 쿠데타를 이겨내면서 더욱 높아진 민중참여의지를 토대로 중단된 개혁 가속, 각종 사회개혁 실행 계획 ‘미션’Mission(49개 법률의 구체적 집행 계획이자 사회공공성을 위한 연속적인 대안 실행 방침) 추진
- 미션 수행은 국가의 계획적 지원과 조정, 민중 참여, 자율적 의사결정이 결합된 독특한 방법, 석유에서 발생한 이익을 민중에게 돌려 기금 조성, 각종 개혁 프로그램 추진, 현재 국가예산의 40% 미션 투자
- 개혁사업은 행정조직을 동원하지 않고 도시와 농촌에 주민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자신의 지역에 맞는 프로그램 결정, 집행
- ‘볼리바리안 서클’(7~10명 단위의 지역조직, 약200만 명)이라는 자율적 정치조직이 주민자치위원회나 노조, 협동조합에 파고들어 정치교육 수행, 미션 프로그램 다수 운영
- 미션, 주민자치위(2002년 2월 차베스 정부 '100가구에서 200가구로 구성되는 토지위원회가 빈민지역 주민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하겠다'는 획기적 계획 발표, 5천 개가 넘는 토지위원회, 5백만 명 즉 전체 인구의 20%가 토지개혁운동 참여, 도시 토지위원회가 곧 주민자치위원회로 발전), 볼리바리안 서클이 삼위일체가 되어 아래로부터 민중참여, 그들 자신의 삶을 바꾸는 개혁 프로그램, 반대파 세력이 장악한 관료체제를 우회하는 효과(교육 미션은 교육부와 별도로, 의료 미션은 보건부와 별도로 운영)
교육 미션 - 미션 로빈슨은 문맹 퇴치, 미션 리바스는 중등교육 2년제 과정(2004년 약 60만 명 야간학교 등록, 장학금 수여), 미션 수크레는 3년의 대학과정(첫해 약 7만 명 등록), 2003년 4년제 볼리바리안 대학 설립, 미션 부엘반 카라스는 실업자 취업 훈련
의료 미션 -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1차,2차,3차 : 1차 추진 2년차 2004년 1만 3000여 명의 쿠바 의사들이 약 5000여 명의 베네수엘라 의료 보조원과 함께 의료 사업, 2차는 전국적인 ‘민중의원’ 창설. 3차는 전국병원네트워크 형성, 고급 진료와 수술 장비 지원
유통 시장 미션 - 미션 메르칼은 정부 지원 슈퍼마켓 건설(2002년 12월 자본파업으로 대형 상점이 자본 철시를 할 때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시장을 조직적으로 육성한 생필품 지급 네크워크), 추진 3개월 만에 1만 4000여 개의 판매 지점 구축, 25∼50% 할인 가격에 식료품 공급
그 밖에 여성은행, 인민은행 등 소규모 금융기관들을 수립, 중소기업과 협동조합에게 저리 융자
2003년 전국주부연합은 “토착민 주도 개발” 계획의 핵심 세력
“주부연합의 지도자 프라다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들에게 중소기업 활동과 지역사업을 위한 협동조합 수립 방법을 가르치는 인력도 우리에게 있다. 예를 들어, 바나나와 같은 원재료가 풍부한 지구는 이것을 이용하여 제과점을 차릴 수 있고 사업의 필요에 따라 지역의 수송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들이 지역 활동을 좀 더 촉진할 것이다.’ 요리법, 식품 유통, 직물, 봉제 등과 관련하여 주부연합에 가맹한 협동조합들도 있다.”벤저민 댕글, ZNet, 2005년 4월 27일
베네수엘라의 세 가지 공동경영 형태
- ① 국영석유회사, 국영전력회사 등, 노조는 이사회에 2명의 대표 참석, 정부 임명 이사가 다수이므로 노조 의견이 이사회 통과 어렵다고 우려, 반면 경영자 측은 노조 대표들이 노동자 이기주의, 취업 알선, 금품 수수 등 과거 관행을 계속하면서 온갖 경영상의 문제점을 제기해 압박하기 때문에 석유, 전력 등 전략산업에서 공동경영이 곤란하다는 입장, ② 정부가 자본파업에 동참한 사기업을 국유화하면서 노동자들을 경영에 참여시킨 경우, 인베팔(INVEPALㆍ종이 생산)과 인베발(INVEVAL!!!ㆍ밸브 생산) 등,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해 이 기업 주식의 49%(정부 51%) 소유, 그런데 협동조합이 노동자를 신규 채용하면서 모두 임시직 계약노동자로 취급해 자기들의 협동조합에 참가시키지 않는 사건이 발생,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이 기업의 소유주가 되어 마치 자본가처럼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해고하고 있으며, 더욱이 기업의 수익은 사회 전체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기업의 협동조합만이 이익을 얻고 있다는 비판, ③ 정부가 경영난에 빠진 기업에게 지원하면서 현재 노동자 계속 고용과 경영 참여 요구, 공동경영이라 보기 어려운 노조의 제한적 경영 참여형태
- 2003년 초부터 기득권층은 새 헌법에 규정된 국민소환 투표 요구(공무원은 유권자 20% 서명으로 소환 투표 대상), 11월부터 서명 작업, 240만 명의 동의를 얻어, 2004년 8월 15일 치러진 소환 투표 결과 투표자 59.25% 대통령직 계속 수행 찬성, 반대 40.74%
- 2004년 10월 31일 주지사 선거에서 23개 주 가운데 20개 주, 2005년 12월 4일 국회의원 총선에서 차베스 지지자 전원 당선
- 차베스, 2005년 5월 1일 새로운 민주노조 연맹체인 UNT 주최 노동절 기념 연설에서 “베네수엘라는 21세기 사회주의로 나가야 한다” 고 주장
- 2005년 9월 베네수엘라 광업 국유화, 국영 철강회사 설립 천명, 2006년 3월 31일 원유를 포함하여 모든 자원의 직접적인 정부 주도의 국유화 선언, 2006년 5월 1일 천연가스 에너지 자원의 국유화 발표
- 2006년 12월 차베스 대통령 재선 당선
- 2007년 12월 대통령 임기제한조항 철폐를 포함한 개헌안 투표에서 처음으로 패배
개헌내용 - ①지방정부·지방 의회의 통제를 극복한 주민자치 강화, 직접민주주의 실현, ②임기 연장 및 연임제한 철폐, ③영세자영업자를 위한 사회 안전 기금 설치, 다양한 공동소유 및 국유화 강화, 국가의 중앙은행 관리, 6시간 노동제 등, ④반제군 성격 규정, 예비군 확대강화
- 2008년 11월 23일 총 327명의 시장과 22명의 주지사를 뽑는 베네수엘라 지방선거에서 친 차베스 통합사회주의당(PSUV) 창당 후 최초 선거 참여, 전체327개 중 265개 지역 승리, 81%(2000년 친 차베스 후보 114개, 2004년 226개)
통합사회주의당은 2007년 5월~6월 23일 약 570만 명 당원 등록, 약 2만 5,000여 명의 당 건설 추진위원들이 수백 명 단위의 지역 당원대회 조직화, 100명~300명이 참여하는 각 주민기초단위 당원대회 매주 개최, 창당대의원대회 대표 선출, 1,676명의 창당대회 대표단으로 2008년 1월 12일 창당대회
‘제5공화국운동’에 가입하지 않은 3개의 차베스 지지 정당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Podemos)>, <모든 이를 위한 조국(PPT)>, <베네수엘라공산당(PCV)>은 통합사회주의당에 냉담, 2007년 12월의 헌법개정투표 때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에서 친(親)차베스 정당으로 갈라져 나온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Podemos)>은 반대표, <급진적동기(La Causa Radical)>에서 갈라져 나온 <모든 이의 조국(PPT)>은 <베네수엘라공산당(PCV)>처럼 찬성표, 노동운동의 ‘독립’을 지키는 것으로 이름 높은 친 차베스 노조 UNT 위원장 치리노는 <베네수엘라통합사회당(PUSV)> 가입 거부, 개헌 기권 촉구
- 그러나 주지사 선거는 전체 22개 주 중 17개 주 승리, 2004년 선거 때 20개 주 보다 줄어, 더구나 반차베스 진영이 승리한 미란다, 술리아, 누에바 에스파르타, 카라보보, 타치라 주는 전략적 요충지,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 시(Greater Caracas)는 반차베스 쪽으로 넘어가
- 미란다 주에서는 선거 직후인 11월 25일, 미션 리바스(중등 무상교육 프로그램)와 수크레(고등교육-대학)의 강의실로 이용되던 공공장소 폐쇄, 11월 28일 미션 운동의 수혜자들인 교사, 학생, 장애인, 노동자들 시위, 11월 25일 밤 아라구아 주에서는 친 혁명적 전국노동조합(UNT)의 좌파 지도자 세 명이 총격으로 사망, 미국의 후원을 받는 반차베스 진영이 조합원, 풀뿌리 공동체 조직, 친 혁명적 사회운동 등에 본격적인 위협
- 차베스 2019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3선 연임 헌법 수정 2009년 2월 추진 중, 통합사회주의당PSUV은 국민청원 보다 국회에 헌법 수정안을 발의, 또 한 번의 격돌 예상
[사례2]
노동자 중심의 진보민주연합과 민중참여 지방자치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집권과 그 후
노동자당 건설
- 1978년 상파울로를 중심으로 한 50만 명 참가 전국총파업을 배경으로 ‘운동과 투쟁만으로는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므로 정치권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 광범위하게 유포, 80년 창당. 그러나 공산당과 연계된 노동운동 세력은 노동자 독자정당 건설 반대
브라질 공산당(PCB)은 1922년 창당, 반제투쟁에서 국내 자본가와의 연합노선 견지, 전투적 대자본 투쟁, 노동계급 분열, 군부독재 이후 민간정권의 점진적 민주화 장애를 우려해 노동자당 창당 반대
- 다원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지향, 대중의 참여와 투쟁, 독립성 강조, 아래로부터의 당 조직 운영(예비회의와 공식 당 대회의 2단계 회의구조, 누클레오라는 기초조직), 다양한 사회운동세력을 대변해 내부계파의 자유로운 활동 인정
- 상파울로는 노조 활동가들이 현장 활동을 통해 PT 가입 유도, 리우데자네이로는 학생과 지식인, 지역운동가들이 위주였으며 아크레(Acre)주는 가톨릭 지역운동과 농업노조, 지식인들이 진보세력연합 형성, PT 결성 2년 전부터 풀뿌리조직이 참여하는 정당 결성 요구
- 당원 수는 1982년 말 약 24.5만 명, 87년 40만 명, 90년 약 70만 명, 지도부는 81년 8월 상파울로 예비전당대회에서 선출된 12명의 중앙 집행위원 중 8명이 노조 지도자로 노동자 중심성 강조. 야당 내 중도좌파 개혁인사, 사면된 재야인사들도 PT에 결집했으나 노조지도자와 불편한 관계, 실제 참여는 극소수, 가톨릭 기초공동체와 노동사목, 지역 사회운동체 등이 지지기반 확대에 크게 기여, 인종차별반대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 동성애자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 보호운동도 참여, 트로츠키파, 좌파 학생운동, MEP(Movement for the Emancipation of the Proletariat) 등 좌파의 지지와 압력도 PT 성장에 일조, 자신의 독자조직과 정체성을 유지한 채 PT 활동
브라질 노총(CUT)과의 관계
- 83년 CUT 결성 당시 CUT 지도부와 PT 지도부는 거의 일치, 그러나 정당이 노조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노조와의 역할 분담, 각자 독립성 인정.
- 룰라는 노조기구의 공식 참여보다는 노조원의 자발적 참여를 강조, 그러나 CUT 소속 대의원의 약 90%가 PT 지지
- 초기에는 노조 우위 시각이 강했으나 선거가 되풀이되고 PT 후보가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제도권정치 역할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노동계급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사회계층의 요구를 반영하고 연대하려는 경향 강해져
- 정당으로서 독자 논리가 중시되면서 CUT와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어, 85년 상베르나르도의 포드 공장에서 CUT 소속 노동자들이 사용자의 단체교섭 거부에 항의, 차량을 파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PT의 지지가 하락하는 사태가 발생 / 87년 8월 CUT 주도 총파업이 실패하자 룰라는 CUT가 노동자들의 분위기를 잘못 읽었다고 비판, 여론동향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대중정당과 운동적 투쟁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노조의 입장 차이
노동자당의 성장
- 82년 동시선거에서 3.1% 지지, 하원의원 8명, 주의원 12명, 시의원 78명당선, 대부분의 득표는 상파울로 주에 편중, 룰라는 상파울로 주지사에 입후보, 약 10%의 득표(110여 만 표)로 4위
- 실패 요인은 당시 민주 대 반민주 구도 하에서 PMDB(우리의 상도동계 동교동계에 해당되는 70, 80년대 민주화운동세력 중 보수적인 부분의 결집체)에 야당 표 집중, PT의 조직력 취약과 선거운동 미숙
- 그 후 85년 선거까지 CUT와 노동운동의 강화에 몰두, 룰라, 두뜨라, 비타르 등 PT 창당멤버들은 금속노조연맹 위원장, 은행노조연맹 위원장, 석유화학노조연합 위원장으로 복귀, 이 기간의 역점 정치 사업은 대통령 간선제 반대운동 주도
- 85년 시장선거에서 1개 주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주 수도에서 후보 출마, 포르탈레자에서 PT 후보 시장 당선, 3개 주에서 득표 2위 기록, 상파울로시장 선거에서 20% 이상 득표, 변호사, 건축가, 교수 등 많은 중간계급 출신 후보들이 PT 후보 참여
- 86년 총선거에서 6.5%를 얻어 16석 확보, 득표율과 당선자수 배가, 룰라는 상파울로에서 65만6천표를 얻어 브라질 하원의원 중 최다득표로 당선
- 88년 시장선거에서 3개 주의 수도(상파울로, 비토리아, 포르투 알레그레)와 36개시에서 시장과 1천명 이상의 시의원 당선, 브라질 최대의 도시이며 경제 중심지인 상파울로시장에 PT의 루이자 에룬디나 당선된 것은 PT의 위상 제고에 결정적인 역할, 브라질 100대 도시에서 PT 지지율 28.8%로 2위인 PMDB의 18.4%를 크게 상회, 그러나 이는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에 의한 항의성 투표
86년 총선거가 끝나자마자 정부는 재정적자 보전을 위한 공공요금 인상과 임금 동결 등을 시행, 국민에게 배신감을 주었으며 경제위기와 정치부패의 지속으로 민간민주정부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PT가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낀 중간계급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
- 89년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는 1차 투표에서 16.1%(1,160만 명)로 2차 결선투표에 진출, 결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3위와 4위를 한 PDT의 브리졸라와 PSDB의 코바스의 지지를 얻었으나 43%(3,100만)에 그쳐 53%를 얻은 PRN의 꼴로르에게 10% 차이로 패배,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자가 결선까지 진출, PT의 정치적 위상 급상승
콜로르는 부패 혐의로 중도에 물러나고 대중시위가 계속되고, 군부 쿠데타 설까지 난무, 노동자당 안에서도 제도권 해결이냐 부르주아 정치 전면 공격이냐 논쟁이 벌어져 당내 극좌파 일부 탈당, 통합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는 새 당 건설
- 90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상원의원을 1명 배출, 하원도 86년의 16석에서 35석으로 2배 증가
- 94년 총선에서 상원 5명, 하원 49석으로 증가, 최초로 2명의 주지사 배출, 기존 군소정당인 PTB와 PDT를 제치고 중간 정도의 세력을 가진 정당으로 성장
- 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는 두 번째로 대통령 후보 출마, 까르도소의 PSDB, PTB, PFL, PL 등 중도보수 연합전선에 1차에서 패배, 까르도소 54.3%, 룰라 27.0%
선거 5개월 전인 94년 5월의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까르도소에 대해 42%대 17%로 우세, 승리의 가능성이 보이자 룰라의 선거전략은 중간계급과 대기업을 겨냥, 기업과 은행, 보수교회의 취향을 반영하도록 변형, 특히 국유화와 외채지불정지 등 기존의 정책을 부인, 민영화의 점진적 추진과 유산․이혼 반대 등을 내건 것은 문제
- 98년 대통령 선거에서 PT, PDT, PC do B, PSB, PCB 등 좌파 연합 후보로 출마한 룰라 31.7%, 까르도소 53%, 주지사 및 연방 상하원선거에서는 상원3명, 하원 58명으로 증가
까르도소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는 첨병역할, 선거를 4개월 앞둔 시기 룰라 44% 까르도소 46%, PMDB는 자당 후보를 부통령 후보로 하는 좌우합작 제안, 그러나 당 내 좌파의 반발을 의식해 중도좌파 정당인 PDT(사회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해 있으며 브라질의 전통적인 좌파 민족주의 민중주의를 대변)의 리오넬 브리졸라와 연합, 마침 브라질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IMF 구제금융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일단 미국의 총아 까르도소를 다시 선택
아래로부터의 노농빈 연대
- 91년 조합의 힘(FS)이라는 또 다른 총연맹 출현, '실리적 노동조합주의'를 내걸고 CUT와 노골적인 경쟁 상태
- CUT도 91년 4차 총회에서 공식 채택한 ‘정책대안 노조주의’로 국민적 개혁정책대안을 제시, 노사정 협상 참가, 95년 국영 석유회사 노동자 파업 패배를 계기로 CUT의 핵심인 석유화학산업과 자동차 산업의 노조 각개격파, CUT 중앙은 대정부협상에서 양보교섭, 96년 사회보장제 후퇴 동의
- 과거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의 주역이었던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이 투자유치 경쟁이라는 부문이기주의로 인해 급속히 탈정치화, 가장 전투적인 노조는 민영화 정책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강화된 공공부문 노동자들, 특히 공무원노조
- 80년대부터 노동자당과 긴밀히 협력, 토지개혁운동을 주도해오던 'MST'라는 조직이 까르도소 정권에 대항(농업 지원 예산 삭감으로 이농은 더욱 늘고, 실업난의 악화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는 이들 이농이 대도시에 거대한 빈민층을 형성), 빈농․도시빈민들이 대지주의 광대한 미경작지를 무단 점거 운동 전개
토지 점거 후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협동조합을 건설하고 정부의 합법적인 토지 수용 및 재분배 요구, 토지점거, 고속도로 봉쇄같은 비합법 투쟁과 헌법 조항의 실현이라는 '합법성'을 결합한 MST의 전술은 브라질 사회 전체에 '신자유주의 대 민주주의' 라는 대립구도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 수많은 농촌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스스로 생산과 생활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으로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사회발전 모델의 가능성 보여, 한동안 민중운동에 등을 돌리고 있던 중산층과 가톨릭교회를 비롯해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
- 99년 11월 노동자당, CUT, MST를 중심으로 750여만 명이 참여한 민영화 및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 총파업 전개
진보적 지방자치의 모범, 포르투 알레그레 참여예산제
- 많은 도시에서 노동자당 시정부가 제시하는 정책이 보수파가 다수인 시의회에서 거부되고 재선에 실패하는 등 부침을 거듭했는데, 남부 ‘리우그란데 두술’ 주의 수도인 포르투 알레그레 시만은 예외
- 먼저 교원노조, 교사들이 시의 제한된 예산을 광범한 민중의 이해를 위해 쓰는데 책임 있고 창조적인 제안, PT 당원들이 '예산 입안 과정에서의 민중 참여' 결의, 시의회에 대항해 '예산평의회'를 만들어 광범한 민중이 이에 참여하고 시 예산 사용의 우선순위를 결정
- 평의회나 주민 총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기대만큼 많지 않아, 노동자당 시정부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지구별 부문별로 따로 평의회를 만들어 다양한 주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했으며 주민들 사이에 예산 입안 전문가들을 육성해 시정부와 시의회를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
- 98년 10년간 지속된 포르투 알레그레의 실험을 기반으로 리우그란데 두술에서 주정부 장악. 대선에서도 ‘포르투 알레그레를 전국으로’가 룰라의 주요 구호 중 하나, 새 주지사로 당선된 올리비우 두트라(전 은행노조 지도자) 역시 참여예산제를 주 전체 실시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 남부의 주요 주에서 노동자당이 압승한 98년의 선거 결과는 오랜 침체로 고통 받던 노동자당에게 새로운 활력
- 1만4천명이 매년 예산 지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참여, 수백 명의 활동가들이 새롭게 배출, 지역주민 조직들이 활기
은행노동자였던 두트라 주지사는 법정 다툼으로 비화한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참여예산제 공약을 적극 추진, GM, 포드 같은 해외 투자 기업들의 막무가내 식 공적자금 투입 요구를 거부하는, 다른 주정부에서 찾아보기 힘든 주체적인 태도, MST와 협력해 농산물 메이저의 유전자 조작 종자 반입 금지
- 참여예산제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는 2000년 10월 1일의 지방선거에서 노동자당이 상파울루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시정을 장악하는 것으로 나타나, 고무된 룰라 "적어도 6년 안에 정권을 차지" 장담
상파울로시와 리우그란데두술 주를 비롯해 5개 주 1백87개 기초자치단체에서 집권, 브라질 전체 인구 1/3이 노동자당의 정책을 경험
룰라 대통령 당선과 재선, 그리고 우려
- 2002년 대선에서 좌파통합, 우파분열, 대선승리 전략으로 칭해지는 좌우연합 전술 구사, 전통적 제휴정당인 PCdoB(브라질공산당, 마오주의당)와 PCB(브라질공산당, 소비에트당) 이외에도 PL(자유당)과 공동대응, 부통령 후보로 나선 섬유기업 사장(민족자본가) 조세 알렌카가 속한 PL은 보수여당에서 분리돼 나온 우파정당
- 까르도소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실패로 끝나, 상위20%와 하위20%의 소득격차는 25배, 최저임금은 2백 헤알(8만원) 수준, 실업률은 20%, 빈곤층이 5천3백만명, 투기자본의 폐해, 사회복지예산 삭감 등인 상황에서 룰라는 △조세개혁 △토지개혁 △4년 이내에 실업률 반감·최저임금 2배 인상 △고용창출 △빈곤층 구제를 위한 주택건립과 기초생활보조제도(Food stamp program) △공공보건 강화 △공교육·사회교육 강화 등 대선 공약 제시 지지율 제고, 그러나 IMF 협약과 투기자본의 요구 존중 약속, 공기업 사유화 반대 공약 부재 등 실용주의 노선의 한계
- 2002년 10월 6일의 1차 투표에서 노동자당(PT)의 룰라 46.4%, 집권여당인 사회민주당(PSDB) 조제 세하 후보 28.5%, 브라질사회당(PSB) 리우데자네이루 주지사 안토니 가로티뉴 17.9%, 민중사회당 시루 고메스 11.9%. 가로티뉴, 고메스 후보 룰라 지지 천명, 27일 2차 결선투표에서 룰라후보 61.4%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 당선
- 노동자당은 연방 하원선거에서 지난 98년 선거보다 33석이 더 많은 91석을 얻어 원내 제5당에서 제1당. 그러나 노동자당을 포함 좌파 정당들의 의석은 전체 의석 513석의 41%인 214석으로 과반수에 43석이나 부족. ‘여소야대’의 국회, 자유전선당(PFL)과 브라질 진보당(PPB)을 중심으로 한 우파는 133석, 당시 집권당인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을 포함한 중도좌파가 145석
- 2006년 대선 2차 결선투표에서 룰라 61%로 재선 성공
브라질 룰라정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답습, PT의 내분과 급진파 출당, 신자유주의 정권인가? 까르도주 정권과 다를 바 없는가? 자신의 지지기반이 반대하는 고이자율, 긴축정책, 연금개혁, 공공부문 파업 규제를 추진한 이유? 자발적 선택인가, 구조적 강요인가? 이행의 정치, 관심은 있는 것인가?
- 최근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지지율이 84%로 역대 최고 기록, 안정적 경제성장과 효율적 분배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일부 평가. 2004~2007년 연평균 4.5%의 안정적 성장세 2008년 5.5% 성장, 브라질을 괴롭히던 부채·고물가·레알화 고평가의 위기는 △재정 건전화 △물가안정 △변동환율 등 일관된 경제정책으로 극복. 또 재정책임법 도입과 공무원 연금개혁으로 재정지출을 억제하고, 세제개혁을 통해 세수기반을 확보. 2002년 12.5%를 기록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물가목표제 도입과 고금리 정책으로 2007년 4.5% 수준으로 잡았다. 미국 수출비중을 25.7%(2002년)에서 15.6%(2007년) 줄인 것도 미국 경제침체로 비롯되는 타격을 줄였다. 2011년 1월 물러날 때까지 룰라가 최고 지지율을 누릴지는 미지수. 올해 경제성장세는 1%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
[사례3]
노조와 당과 전선, 3자 동맹에 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족민주혁명과 그 후>
삼자동맹을 맺고 있는 민족회의, 코사투, 공산당이 현재 남아공을 이끌어가고 있는 중심적인 정치세력, 민족회의의 국회의원 수는 252명으로 전체 국회의원 수의 2/3. 여섯 개의 노조 중앙조직이 있지만 코사투(COSATU)가 가장 규모가 크고 조합원수가 약 190만 명, 다른 노조 다 합친 것보다 많다. 공산당은 민족회의와 노동조합운동 속에서 주로 이념적 지도부 역할
민족회의, 코사투, 공산당
-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민족회의)는 1912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
민족회의는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민족민주혁명의 전략적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족민주혁명의 전략적 목표는 통합적이며,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없으며 민주적인 사회의 창출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특히 흑인, 일반적으로는 민중을 정치적, 경제적 구속에서 해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아프리카인들, 특히 주로 흑인이며 여성인 빈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ANC, 1997b).
- 민족회의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비자본주의 길을 지향. 계급적으로는 노동자계급부터 흑인 자본가까지,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부터 신자유주의 경향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민족회의의 내부 사정을 반영
- 1985년에 노동운동의 주요한 두 흐름, 곧 민족민주주의와 작업장 중심주의가 결합하여 코사투(COSATU)를 설립, 코사투는 창립 이후 대규모 파업을 주도, 조합원 수도 급속히 증가, 국가는 강력한 탄압과 비상사태 선포로 이에 맞서, 코사투가 탄압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지도부에 의존하지 않고 현장조직에 근거하였기 때문. 특히 현장위원회의 역할은 결정적. 조직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일상 활동을 통해 조직력을 발전시켜. 일상적인 정치이슈 개입.
- 코사투의 주요 활동가들은 공산당원, 노동계급이 1단계 과제인 민족민주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근거로 이후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것
1994년 4월 남아공 선거를 통해 민족회의가 집권하고 새로운 정치상황에서 열린 1995년 9차 총회에서 공산당 의장인 은지만데(Blade Nzimande)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는 먼저 소수 독점자본에 의한 국부의 소유를 끝내고 주요 경제부문을 실제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장악하는 것, 그리고 소수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그들이 주도하는 국가의 관리 하에 국가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구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사회주의자들에게 세계적으로, 특히 남아공에서 자본주의를 끝낸다는 우리의 목표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Shopsteward Vol. 6.5)
코사투 사무총장 실로와(Mbhazima Shilowa)는 97년 코사투 6차 총회 이후 “우리가 자본주의적 의제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나라 자본주의 실패를 혹독하게 비판하려 한다. 우리는 공산당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회의와 함께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요약한 대중적인 프로그램을 작성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패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대자본과 국민당이 지배한 자본주의이다.”(Shopsteward Vol. 6.5)
- 코사투는 동맹 파트너인 공산당에 실질적인 지원, 공산당과 공동프로젝트, 공동프로그램 추진뿐만 아니라 코사투 산하조직들이 공산당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작업장에 당 조직을 건설
삼자동맹
- 삼자동맹은 1991년 7월 네 번째 코사투 전국총회에서 삼자동맹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공식화, 코사투, 공산당, 민족회의기 수많은 공동 캠페인 전개, 노동운동은 94년 선거에서 민족회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내각, 의회, 정부 등에서 주요한 역할 담당
- 삼자동맹의 인적 네트워크는 1970-80년대 노동운동가들과 민족회의 활동가들이 함께 투쟁하고 활동금지․구금․투옥, 암살의 위험에 처하면서 형성, 몇몇 사람들은 만델라가 27년의 감옥생활 동안 18년을 지낸 유명한 감옥인 로벤섬에서 같이 감옥생활
- 98년 공산당 10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30명 가운데는 코사투 사무총장, 광산노조 사무총장, 교사노조 위원장, 금속노조 사무총장 등 수많은 노조 지도자들이 포함, 코사투 사무총장은 민족회의 전국 집행위원 선출
- 그러나 민주주의로의 이행, 특히 선거는 삼자동맹 내부의 세력관계를 민족회의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노동운동 내에서 삼자동맹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 유발
민족민주정권 수립과 그 후
- 1980년대 말 남아공 지배체제는 더욱 심하게 동요. 민중들이 지배시스템의 작동을 어렵게 만들어 대중적 고립 시작, 1989년 10월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1960년대 초부터 감옥에 있던 민족회의의 지도자들을 석방. 1990년 2월 민족회의, 범아프리카회의, 공산당의 해금과 만델라의 석방, 민족회의와 정부 간의 정치협상이 본격화
- 넬슨 만델라, 조 슬로보 등 민중운동 지도부도 투쟁의 기본 목표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협상과 선거를 통한 체제이행을 배제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갈등을 더욱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노력
- 결국 민중의 강력한 결의와 국내외 여론의 압력에 밀려 정권은 남녀평등을 포함한 보편적인 민주주의원리에 걸맞은 정치체제의 정착이라는 큰 틀을 인정, 협상은 임시헌법의 채택, 1994년 4월 첫 번째 민주적 선거, 민족회의가 지도하는 새 정부의 설립으로 귀결
- 민중운동이 투쟁을 통한 철저한 승리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지배집단이 별다른 저항 없이 권력에서 물러나도록 하기 위해 타협, 국민당 등 보수 세력을 포함하는 국민통일정부 수립, 아파르트헤이트체제를 유지․강화하는 데 앞장섰던 보안군, 사법기구와 정부 산하기관 등 기존 공무원들의 고용 보장 등이 한계
- 민중운동은 정치적 민주화, 평화와 안정, 사회경제개혁, 인프라개혁, 의료개혁, 토지개혁, 여성해방, 교육개혁 등에서 일정한 성과. 노동운동은 전국경제발전위원회(NEDLAC)와 같은 3자 기구를 통해 정부의 경제사회정책 개입. 특히 민족회의 정부와 삼자동맹은 노사관계법과 고용조건기본법 등 진보적 법률 관철,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
-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체제 아래서 경제자원의 불평등한 분배, 산업발전의 왜곡, 광범위한 빈곤, 인종차별적이고 비효율적인 공공서비스, 극도로 분절된 노동시장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경제구조가 형성되었고, 이런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COSATU, 1997)
- 더욱이 96년 정부가 발표한 ‘성장, 고용 그리고 재분배’(GEAR)는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어 노동운동은 GEAR가 실업의 증대와 고용창출의 희생, 사회서비스 지출의 축소, 이데올로기적으로 추진되는 민영화프로그램의 확대, 노동기준을 훼손하는 노동시장의 탈규제, 관세인하의 가속화와 같은 수용할 수 없는 산업․무역정책 목표 등을 초래할 것(Shopsteward Vol. 6.5)이라고 반대
- 이런 조건에서도 노동운동은 보수 세력의 간절한 바람인 삼자동맹 와해를 막고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길을 선택.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면서 민족민주혁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체제이행의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
- 1999.6 집권당(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음베키Mbeki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2004.4 총선에서 ANC는 69.7%, Mbeki 대통령의 재선, ANC는 의회 총 400석 중 279석 획득, 야당인 DA(Democratic Alliance) 50석, IFP(Inkatha Freedom Party) 28석, 기타 군소정당 43석
- ANC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구사, 노총COSATU, 공산당와의 이견, ANC의 독단적 정책결정 및 집행 등으로 인한 균열 가능성도 상존
- 남아공 노조연맹과 공산당 측에서도 현 정부의 흑인기업 육성정책이 소수흑인들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다는 비판 제기
- 향후 음베키 대통령 후계구도와 2009년 대선을 겨냥한 ANC내 권력 투쟁이 본격화,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간주되던 주마(Zuma) 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해임(2005.6), 노동조합 및 공산당 세력들이 반발, ANC 전당대회(07.12)에서 Zuma가 Mbeki 대통령을 누르고 ANC의장으로 선출
- 2008년 9월 음베키, ANC전국집행위의 사임 요구(주마 현 민족회의 총재가 무기거래와 관련된 부패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퇴진 압박)를 받아들여 중도사퇴, 10월부터 음베테 국회의장이 대통령 직대
- 2009년 4월 ANC가 의석 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뽑는 대통령에 주마가 당선될 전망. 노총COSATU와 공산당SACP가 내세우는 주마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시 남아공의 급격한 정치, 경제 변화 가능성
2007년 공공노동자 대정부 총파업 의미
-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5년만의 대규모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 전국 46개 지역집회 개최(요하네스버그 약 5만 명, 남아공 수도인 프리토리아 약 1만 명), 전력, 교통, 환경미화원, 병원 간호사들과 교사들까지 파업동참, 임금, 주택수당 및 의료수당 개선, 파업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
-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이 계급적 차별 종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음. 음베키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친 서방 자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빈곤문제 해결 무능 등으로 ANC와의 동맹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지적, ANC정부에 대한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의 경고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생활∙정치∙투쟁 공동체 이탈리아 ‘민중의 집’ - 이탈리아어로 ‘카사 델 포포로’, 카사는 집, 포포로는 인민․민중․시민 - 토스카나 주(피렌체), 에밀리아․로마냐 주(볼로냐), 삐에몬떼 주(토리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체 1,000개 이상, 1850년대부터 130여년의 전통을 갖는 이탈리아의 독특한 민주적 지역조직 - 그 지역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반파시즘 레지스탕스운동 등의 역사적 전통과 생활양식이 반영된 다양한 형태와 활동 - [민중의 집]의 건물은 지하 1층에 3층 건물 ▴ 1층 : 바(BAR), 살롱, 카드실, 당구실 ▴ 2층 : 정당 사무소(주로 사회당, 공산당), 노조사무소(노동총동맹의 지역조직), 각 민주단체, 써클실, 회의실 ▴ 3층 : 다목적 홀(각종 집회, 강연회, 댄스 파티 등에 사용) ▴ 지하 : 창고, 써클실, 암실, 체육실 등 - 노동자, 주민의 모금과 자발적 노동 봉사로 건설 - 정당(특히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협동조합, 청년조직, 부녀조직, 문화․레크레이션․스포츠 조직 등이 협력, 공동 운영또는 지원연대 - 직장 일을 마치고 노동자, 주민들이 와인을 마시거나 오락을 즐기는 ‘휴식 공간’이자 ‘정치토론의 장’, ‘교육문화센타’ - 바티칸의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영향에 일상적으로 대항하는 민주적 진지 |
반신자유주의 진보정치세력의 통합과 도약 급부상하는 독일의 ‘좌파당’ - 독일의 좌파당은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대해 탈당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저임금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과거 서독 사회복지그룹과 구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이 2005년 총선에서 선거연합으로 전국평균 8.6%, 의회 54석을 획득 - 그 성과를 바탕으로 2007년 6월 16일 베를린에서 창당, 당원 수는 2008년 9월말 현재 7만6천명, 반면 사민당(SPD)과 기민당(CDU)은 계속 당원 수 감소, 독일 유명 정치인 사민당 전 당수 라퐁텐이 좌파당의 공동대표 - 통합과정에 시련도 많았으나 상호 양보하고 결합(WASG는 민사당을 ‘스탈린주의다. 언제 야당 해봤나. 집권당만 해봐서 잘 모른 것 아니냐’, 민사당은 WASG를 ‘개량주의다’ 논쟁) - 좌파당 정책강령은 철도, 통신 등 기간산업의 국유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 독일 주둔 미군 전면 철수, 아프가니스탄 등 해외 파병 금지, 부유세 신설, 최저 임금제 도입, 주 35시간 근로제 시행, 무상교육 등 - 최근 의회선거에서 놀라운 득표율 기록, 독일 정치권을 뒤흔드는 새로운 진보정치세력으로 등장, 브란덴부르크주에서 28%의 득표율을, 튀링엔주에서 26.1%의 득표율을, 작센안할트주에서 24.1%의 득표율 -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가 있는 유럽도 신자유주의 폐해가 누적돼 사민당을 대체하는 반신자유주의 진보정치세력이 빠르게 결집, 사회복지 삭감과 독일군 해외파병 등에 대한 일시적 항의가 아님 |
[사례4]
노동자, 노조의 조직적 선거투쟁의 모범
호주노총, 자유당에서 노동당으로 정권교체
호주노총(ACTU)
- 호주 노동조합은 산업별, 주별로 결성, 단일한 연합체인 호주노총(ACTU) 1927년 설립, 현재 가맹조직은 47개, 조합원수는 180만 명 정도. 노총정책은 대의원대회(3년에 1회 개최)와 중앙집행위원회(1년에 3회 개최)에서 결정 집행
- 노사관계의 특징은 1970년대 오일쇼크가 오기 전까지 보호무역주의 아래 세계 최고수준의 노동조건 유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최저임금 자랑, 1980년대 호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봅 호크(Hawke)가 수상 취임, 80년대 말~90년대 초 노동당 정부가 참여하는 노사정 협약을 통해 임금을 억제하는 대신에 사회복지 혹은 사회적 임금을 증가시키는 내용의 사회적 협약을 체결(무상의료 재도입과 연금의 점진적 증가 등)
- 1996년 자유당이 집권, 노사관계 악화, 조직률도 1990년대 초반까지 50%에 이르렀으나 2004년 현재 20%로 하락, 2005년 12월 개별계약제 도입 등 존 하워드 자유당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노동법 개악(‘개별적 근로계약’에 대해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법 개악, 특히 월별로 제한을 두었던 해고 조항을 없애고, 100명 이하 사업장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해고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으나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을 성공적으로 벌이고 1년 전부터 총선대응에 주력, 노동당 승리를 이끌어
총선 준비상황
- 노사관계법 개악을 최대 이슈로 부각, 조합원만이 아니라 비조합원,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는 데도 주력, TV광고를 1년 6개월 동안 진행, 광고비용만 3년간 2천만 달러(약 164억원)를 지출, 광고 내용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노동법 개악 뒤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하는 내용, 2007년 호주 광고상 수상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 200만 명 정도의 호주노총 조합원들 중 50만 명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 조합원들 모두에게 전화, 1/3 보수당 지지, 1/3 노동당 지지, 1/10 녹색당 등 기타정당 지지, 나머지1/3 부동층인데, 호주노총은 이 30%에 집중, 노동당을 지지하도록 조직화
- 부동층에게 절대로 노동당을 찍어라 하지 않았다. 노동법 개악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 이 노동법이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 선거를 통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말하는 수준 유지, 만약 노동당을 지지하라는 식으로 직접 이야기하면 다음부터는 중요한 이슈(노동법 개정)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
- 호주노총은 노조원 9만 3천 47가구를 일일이 방문, 대화를 나눈 경우가 3만9천131건. 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 대단한 숫자, 홍보물만 270만장, 선거 시기 조합원들에게만 40만 통의 전화, 선거 1년 전 유급 조직활동가 선정, 선거기간에 참가한 활동가들만 5천223명
- 호주 선거 시작하기 전에는 노동법 개악에 대해 호주 시민의 38%정도가 알고 있었고 30%가 반대하는 상황,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80%가 인지하고 60%가 반대하는 여론조사 결과, 실제 국민 52%가 노사관계법 개악 때문에 투표했다는 조사발표
"노동자들의 단결 아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충분한 시간으로 접근한다면 노동자들은 충분히 해낼수 있다" (호주노총 리차드 왓츠 노사관계실장실장, 2007.7)
명확한 목표 | 자유당에서 노동당으로 정권교체 |
전략적 대응 | 24개의 전략 선거구에 집중 지원 |
선명한 이슈 | 노사관계법 개악(고삐 풀린 해고의 자유: 어떤 사유도 없이 해고할 수 있다) 최소기준: 최저 임금의 동결과 후퇴 등 |
대규모 재정 | 200억(2,200만 달러) 모금 /조합비 원천징수 결의(조합원 투표) /호주노총 기금 사용 산별노조 재산을 담보로 대출하여 납부 |
중앙 공중전 | 167억을 투입한 TV 광고 / 중앙에서 원스톱 콜센터 운영 |
현장 지상전 | 노동기본권 쟁취 작업장 캠페인 / 상근활동가 지역단체 및 공동체 조직 9만3천가구 호별방문(3만9천명 대화)/ 300만개의 선전물 우편함 투입 |
대규모 집회 | 선두에 1,000개의 유모차 대오 / 07년 11월 역대 최대 규모의 집회 (멜버른 근처의 크리켓 올림픽구장) |
기타 | 30%부동층 노동자 1회 이상 직접대화 / 대의원 교육 훈련(캠페인 재정 27%) 투표소 입구 오렌지색 물결 / 매주에 하루씩 정치적 퍼포먼스 진행 (안전의날: 경찰, 소방수 노동자 참여) |
마치며
이상 베네수엘라, 브라질, 남아공, 호주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집권, 그리고 이탈리아 지역공동체, 독일의 반신자유주의 진보정치세력 통합에 대한 사례를 대강 짚어보았습니다.
애국 군인들과 함께 볼리바르혁명을 추진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노동자, 빈민들의 열정과 헌신, 노동자 중심의 연대연합과 진보적 지방자치를 거쳐 집권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험, 노동조합과 진보정당과 연대연합전선의 3자 동맹에 의한 남아공의 민족민주혁명, 노동자가 주민들과 함께 지역 생활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이탈리아 ‘민중의 집’,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가 되어 반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통합해 약진하는 독일의 좌파당, 그리고 노동자의 조직적 선거투쟁으로 정권을 교체한 호주노총의 빛나는 모범에서 소중한 교훈을 찾읍시다.
지금은 세계대공황입니다. 제2의 IMF위기가 닥쳤습니다. 이명박이 민간파쇼로 가고 있습니다. 한국 노동운동, 진보정치운동은 시급히 반MB 총력투쟁 태세 확립, 현장조직력 강화, 실업자․비정규직, 영세기업 노동자와의 지원연대, 정파 갈등과 분열의 극복, 촛불민심에 부응하는 발 빠른 혁신과 단결에 떨쳐나서야 합니다. 현장노동자가 아래로부터의 힘을 결집해 통일적이고 내실 있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치대연합을 반드시 실현해 우리민중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대안의 정치세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대공황기에 한편 분노하면서도 움츠러드는 기층 민중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누가 이 막중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계급입니다. 그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가 앞장서야 합니다.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96년 말 날치기 노동악법 철폐 총파업투쟁의 기세를 되찾읍시다. 경제 위기를 변혁의 기회로 만듭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