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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주의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반대하여 보편 명사(名辭, terms)는 개념의 보편성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실재론(實在論, Realism)을 반대하면서 개념은 정신 속에 있을 뿐 정신 밖에서는 아무것도 뜻하는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개별자가 먼저일까, 보편자가 먼저일까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개별적 존재(홍길동 · 박막동 · 김말녀 등)와 그 존재들을 대표하는 보편적 개념(인간)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것일까?
각각의 사물들이 먼저일까, 아니면 그 사물들을 통칭하는 보편자(일반자)가 우선일까?
중세의 초기에 나타난 보편논쟁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보다도 그것들을 총괄하는 보편적 개념에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실재론(實在論)과, 이와 반대로 오직 개별자만이 현실적이며 일반자란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이름(명목)에 불과하다고 하는 유명론(唯名論)으로 대립되어 전개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실재론이란 눈앞에 있는 것과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고 그것에 의의를 부여하는 오늘날의 실재론1)과는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당시의 실재론은 오히려 오늘날의 관념론에 더 가까워서 개별적 사물보다도 일반적 이념을 더 우월한 위치에 놓으려는 이론이었다.
여기(실재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가령 “홍길동 · 박막동 · 김말녀 등과 같은 개별자는 언젠가 사라져 버리는 데 반해, 그것들을 총괄하는 보편개념인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 후자가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라는 점이다.
이러한 실재론의 입장은 당시 중세 교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각각 개별적인 신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통일체로 그 자체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독보적 권위를 가지는 것임을 눈앞에 보여 줘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데도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삼위일체설이란 결국 각각의 세 신을 주장한 것이 되고 만다.
나아가 인류라고 하는 보편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원죄나 예수의 구원도 설 땅을 잃게 되어 신앙의 기초마저 허물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유명론보다 실재론이 더 유리하게 작용할 것임을 알았고, 그것을 더 간절히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의 일반 상식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개별적 존재가 사물의 실제 모습이며, 보편적 존재란 그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한 관념에 불과하다.
가령 우리의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홍길동 · 박막동 · 김말녀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사람들일 뿐이고, 그 사람들을 총괄한 보편개념인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다만 개별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언어로 일종의 음성이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이 유명론이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먼저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 학자는 에리우게나와 안셀무스이고, 유명론의 대표자는 로스켈리누스다.
그리고 이 두 진영의 대립을 조화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벨라르2)의 입장이다.
이 가운데 아벨라르는 보편개념이 개별자보다 앞선다거나 개별자가 보편개념보다 더 실제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둘 사이를 중재하는 입장에서, 개별자 ‘속에’ 보편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사람’이라고 하는 보편개념 속에는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에게 주어진 ‘사람다움’이라고 하는 동일한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보편개념은 결국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개별적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보편은 개별자에 앞서거나 뒤서지 않는, 오직 그 개별자 가운데 들어 있다는 뜻이다
대상적 사물과 상태와 사건 등에서 '참다운 것,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은 사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법 내지 규칙과 법칙 일반, 정의, 의무 및 권리 등은 개별적인 상황들, 형태들, 현상들, 관계들을 꿰뚫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 공간 속에 감각적으로 현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들의 보편적인 것은 우리에게 속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시적인 현상에 대립된 본체(Noumenon)로서 사물 그 자체의 참다운 것, 객관적인 것, 현실적인 것이며, 플라톤적인 이데아 같은 것이지만, 어딘가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들 속에 실체적 유로서 존재하는 것이다"[『엔치클로페디(제3판) 자연철학』 246절 「보론」].
우리는 특정한 동물을 가리켜 '이것은 동물이다'라고 말하지만, 동물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나 특정한 동물을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동물이라는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특수한 것이지만, 동물이라는 것, 즉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유'는 이러한 특정한 동물들에 속하며, 그 특정한 것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개에게서 동물이라는 것을 제거하게 되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동물이라는 것은 단지 공통된, 지성적으로 동일한 사항, 외적인 유대와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유'로서 개별적인 동물들을 꿰뚫으며 그것들을 자기 속에 포함하고 그것들의 '근거, 근저, 실체'를 이루는 것이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24절 「보론」, 175절 「보론」; 『논리의 학』 5. 26, 6. 300].
이른바 보편논쟁에서의 실재론적-토마스적 발상을 재흥시키면서도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재구성하는 헤겔은 "모든 존재자가 특수한 성질과 상태를 지니는 개별적 현실성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 유" 내지 "보편적인 것으로서 자기를 개별적인 것과 연결하는 특수한 것"인 까닭(논리적으로는 '추리의 형식')을 갈파하는 것이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24절 「보론」, 179절; 『논리의 학』 6. 352, 359].
본래 헤겔에 따르면 다름 아닌 "참다운 것, 이념이 공허한 보편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신에서 특수한 것, 규정된 것인 보편적인 것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지성에 대립하는 철학의 일"이다 [『철학사』 18. 43]. 보편 및 특수성과 개별성을 외연의 좁고 넓음 내지 양의 관계 및 종속관계에서 파악하는 지성적 파악은 "합리적인 것의 비합리적 인식"에 불과한 것으로서 물리쳐진다[『논리의 학』 6. 289, 295]. 이것들은 우선 '절대자' 그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매개운동의 계기 내지 자기 구별적으로 자기 동일적인 변증법적 활동성으로서의 '개념'의 세 계기로 보아야만 하며, 이러한 '개념'은 '무규정성'으로서의 보편과 그것의 자기 '규정(부정)성'인 특수와의 통일로서 개별이자 자기의 규정성을 관통해가는 '주체'인 '구체적 보편'에 다름 아니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164절; 『법철학』 24절].
이러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은 "이성적인 것" 내지 "자기를 아는 이성"이라고도 불리며[『법철학』 같은 곳; 『엔치클로페디(제3판) 정신철학』 577절], 체계적으로는 '논리학'의 영역에서 보편, 특수, 개별의 완전한 매개관계가 제시된다. 그에 대해 '자연'에서 보편은 자기에게 적합해 있지 않으며(이것이 생명적인 것의 근원적 질병과 타고난 죽음의 맹아를 이룬다), '개념'은 그 현존재의 외면성과 유한성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동물적 개체가 지니는 자연성 내지 그 실재성의 직접성을 지양함으로써 자연 속에서는 단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데 불과한 보편이 대자적으로 된다. 여기서 '개념'의 '주체성', 즉 '구체적 보편'이 정립되게 된다. "보편이 보편에 대해서 존재함으로써 개념은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정신에서 비로소 출현한다. 여기서 개념은 자기를 대상화한다. 그러나 그에 의해 개념으로서의 개념의 현존재가 정립되는 것이다"[『엔치클로페디(제3판) 자연철학』 375절, 376절 「보론」].
'정신'에서 이러한 보편은 그 규정성의 단계들을 거쳐 간다. "정신은 마음으로서는 추상적 보편의 형태를 지니며, 의식으로서는 특수화의 형태를 지니고, 그것만으로 존재하는 정신으로서는 개별성의 형태를 지닌다"[『엔치클로페디(제3판) 정신철학』 387절 「보론」]. 이러한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 그 자체의 참된 존재인 '인륜'으로부터 세계사에서의 '사유하는 정신[이성]'은 특수한 민족정신이 지니는 피제한성 내지 자기의 세계성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신의 '구체적 보편'을 파악하고 '절대적 정신'의 지로 고양된다[같은 책 513, 552절]. "자기를 정신으로서 아는 정신"[『정신현상학』 3. 591]의 자기지에서 말하자면 자연 및 문화의 총체가, 즉 그 일체의 역사적 · 사회적 단계들이 지양되게 된다.
이것들을 스스로(자기의 '타자'로서) 산출하면서 자기로 귀환하는('타자'를 포월(übergreifen)함으로써 '타자'에서 자기 자신에 존재하는) '정신'으로서의 이 '정신'은 '절대적 보편'인 것이다[『논리의 학』 6. 277, 279; 『엔치클로페디(제3판) 정신철학』 577절]. 이러한 "참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은 인간의 의식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수천 년을 필요로 하며, 기독교에 의해 비로소 완전히 승인되게 된 사상"이라고 헤겔은 보고 있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163절 「보론」].
-야마다 다다아키(山田忠彰)
첫댓글 *개별이 느끼는 공포(제도, 구조, 언어 등 보편적 속성이 갖는 폭력성)
스테이플러씨 / 2019 국제신문 신춘문예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 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 아래 각을 맞추는 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사열되어
제왕의 예의를 갖추듯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 구름은 종이 한 장 차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따악,그 소리
일침으로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개별은 이해가 된다(둘 이상이 모이면 보편이고 붙는 것이고 닮아가는 것이고, 사물의 실재 모습이 아니다)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2019경향신문 신춘문예당선작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무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는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정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닮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