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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불이공 공불이색)色卽是空 空卽是色 1
정휴는 지함이 내준 땅을 거두면서
하루하루를보냈다.
낮이면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고,
밤이되면 등잔을 밝히고
지함이 가져다준 책을 읽었다.
심 대감 댁에서 농사일을 해보긴 했으나,
이제는자기 스스로 일일이 생각하고
계획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만도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어떤 밭에 어떤씨앗을 뿌리는 게 좋을까,
또 언제 뿌려야 잘 자랄것인가 등
이것저것 생각하고 궁리하다 보면
하루가후딱 지나가곤 하였다.
정휴는 몸에 배다시피 했던 농사일이
새삼 어렵다는생각이 들었다.
그저 뿌리고 가꾸고 거두면그만이려니 했었는데,
이따금 지함이 일러주는 방식만해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었고,
그렇게복잡하게 생장하는 작물의 오묘함에 더 놀랐다.
심 대감 댁에서야 이걸 저 밭에 뿌려라 하고 시키면
그대로 하면 되었고,
김을 매라 하면 매면 되었고,
가을걷이할 때면 그저 들에 나가서
남들 하는 대로거두면 되었던 것이
이제는 일일이 생각과 계산을깊이 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함은 때때로 찾아와 이런 저런 말로
농사짓기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여보게, 정휴. 농부는 임금의 마음을 가지고있어야 하네.
저 수수 한 그루, 감자 한 포기, 고추하나가
다 백성이라고 생각하게.
매운 백성도 있고 신백성도 있고 단 백성도 있다네.
모래를 좋아하는 백성도 있고,
진흙을 좋아하는백성도 있다네.
이렇게 백성이 원하는 게 제각기다르다네.
그렇지만, 이들은 알맞은 땅에 뿌리박게 한뒤
그저 물을 듬뿍 주고 거름만 충분히 주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잘 자란다네.
내가 생각하기로 임금도 농부의 마음으로
백성의마음밭을 갈아 간다면
태평성대가 저절로 이루어질걸세.
사화(士禍) 같은 큰바람만 몰아치지 않는다면
곡식이야 무럭무럭 잘 자라겠지.
자넨 이밭 저밭,경상도밭 전라도밭,
고추 백성 감자 백성 두루두루 잘다스리게.
자넨, 임금이란 말일세, 허허허."
그러니 정휴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생각할 것이많아졌던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복잡한데
농사지으면서 백성을 다스리려니
여간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지함은 지함대로 따로 만든 농사 책력을 베껴다가
정휴에게 주었다.
벌써 홍성에서는 글을 읽을 줄 아는농부들이
지함이 준 책력을 바람벽에 붙여놓고
농사철을 따진다는 것이었다.
입춘에서 대한까지24절기 동안
언제 씨를 뿌리고 거름을 내며
논에서물을 빼어야 하는지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는 토정이 10년 동안 홍성의 기후와 날씨를
살펴적어둔 기록을 통계내어 작성한 것이라고 했다.
해뜨고 지는 시각이며, 조수 간만,
태풍이 불어오는 때까지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이 정도는 생각해야 할 걸세.
뭘하든지 깊이 파고들어가다 보면
곧 도에 이르는 것아니겠나?"
지함은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지만
공부하는틈틈이 들에 나가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세밀히관찰하곤 했다.
쓱 지나가다가도 농부들에게 말을걸어
한두 마디 농사 지식을 일러주곤 했다.
그런그가 정휴에게 오면
잔소리가 많아질 것은 뻔한이치였다.
"여보게, 정휴. 이 밭은 인분을 너무 많이 주었네.
내년에는 퇴비만 내게나.
그리고 저 밭에는 무우를심지 말게.
무우하고 서로 땅이 맞지 않네.
곡식과땅에도 다 궁합이 있는 법일세.
농사를 잘 짓고 못짓고도 그렇지만
곡식도 제 땅을 만나야만 잘 자라는것일세.
땅이 안 맞으면 아무리 거름을 내고 기음을 매고 가꾸어도
잎이 비실비실 자라다가 꽃이 한두송이 피기 무섭게 지고,
설혹 열매가 맺혀도 시름시름앓다가 낙과하고 말지."
정휴는 심 대감 댁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걸
계산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렇지만 지함의
말대로 이것저것 따져나가면서 논밭을 관리하다보니
소출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임금이 된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라,
지함은 늘이렇게 말했다.
세월은 빨리도 지나갔다.
정휴가 홍성에 와서 농사철을 몇 번 보내고 난늦가을,
보령 심충익 대감 댁에서 전갈이 왔다.
대감이 위독하니 급히 오라는 연락이었다.
정휴는 소식을 받자마자 내쳐 뛰다시피 걸어
심대감 댁으로 갔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을 부르는이유를
정휴는 알 수 없었다.
옛적에 종으로 있을 때의 습성대로
주인이 오라는 것이니 그저 달려왔을뿐
깊이 헤아릴 염이 나질 않았다.
정휴가 내당으로 달려가 기침을 하자 문이 열렸다.
방에 들어가보니 심 대감 댁 식구들이 다 모여있었다.
심 대감은 얼굴이 창백했다.
눈을 감고 있던 심대감이 정휴가 온 걸 알았는지
눈을 뜨고는 손을 들어좌우로 저었다.
그러자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 밖으로나갔다.
가족들이 다 물러나자
심충익은 정휴에게 가까이오라고 손짓했다.
정휴가 심충익에게 가까이 다가가무릎을 꿇자,
심충익이 곧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나직하게 분부했다.
"네게는... 밖에 막내를 들어오라고 하게.
내가너희 둘에게 이를 말이 있으니..."
정휴는 밖으로 나가서
심충익의 막내딸을들어오라고 알렸다.
열다섯된 심충익의 막내딸이
울먹이는 얼굴로 들어왔다.
그동안 한 집안에살면서도
정휴는 얼굴 한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막내딸이었다.
"아버님..."
막내딸이 심충익의 손을 잡았다.
"아니? 어머니. 어머니."
막내딸이 깜짝 놀라면서 밖에 나가 있던
심충익의부인을 불렀다.
심충익이 운명한 것이다.
정휴는 방에서 나갔다.
심 대감의 식솔이 우르르 방안으로 몰려들어가더니
곧 곡성이 집안에 울려퍼졌다.
정휴는 장례가 끝나는 대로 홍성으로 돌아왔다.
심충익이 운명 직전에 왜 자신을 불렀는지,
또막내딸을 왜 함께 불러 앉혔는지
정휴는 알 수가없었다.
심충익은 분명 무슨 말인가 긴한 얘기를 할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죽음이찾아오고 말았다.
막내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겠지.
그렇지만, 네게는... 하고 말을 하다 말고
막내딸을불렀지 않은가?
그건 또 무슨 까닭이었을까?
정휴는 제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심충익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심충익 대감이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막내딸을 들어오라고 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말을 해주려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어디에더 알아볼 방도가 없었다.
정휴는 머리를 세게 흔들어 자꾸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 버렸다.
그래, 나는 나일 뿐이야.
심 대감이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정휴가 아닌 사람이 될 수는없어.
나는 그저 내 인생을 살아가면 돼.
정휴는 금강경을 펼쳐 들었다.
지함을 만난 지 삼 년 쯤 되어가는 대한이었다.
잔뜩 흐려 있던 하늘이 점심 때가 지나면서
마침내함박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어찌나 큰지
바로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감나무마저
보이지 않을지경이었다.
금강경을 읽고 있던 정휴는 책을내던지고
바다로 달려나갔다.
바람 한 점 없어 눈은 휘날리지도 않고
직선으로떨어져 소리없이 바다로 녹아들고 있었다.
하늘도바다도 온통 은빛이었다.
바다란 어쩌면 이렇게 변화무쌍한지
정휴는 오로지감탄스러울 뿐이었다.
삼 년 동안 쭉 바다를 살펴온정휴는
비록 지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수가들락거리는 시간쯤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다와친근해졌다.
바다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매일매일 얼굴이달랐다.
어느 날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며
집채 만한 몸뚱이로 밀어닥치는가 하면
바로 다음날은막 잠이 든 갓난아기의 얼굴처럼
더없이 평화롭기도했다.
눈이 내리는 바다는 또 다른 빛깔이었다.
그것도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과
함박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날이 또 달랐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은
바다가하늘을 향해 거센 항거의 몸짓을 보이는 듯했으나,
오늘처럼 함박눈이 오는 날은 바다가 제 몸을 열어
하늘을 그대로 받아들여 점점 하늘로 변해가는느낌이었다.
혼연 일체, 바로 그대로였다.
날마다 바다의 빛깔이 그리워 바다로 달려오면서도
정휴는 바다가 두려웠다.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이세상처럼.
"그럴 줄 알았네. 여기 있을 성싶어서
집에도들르지 않고 곧장 오는 길일세.
오늘은 자네가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닐세.
눈이, 바다가 날부르더군."
인기척도 없이 지함이 다가와 곁에 서 있었다.
웬일인지 지함의 얼굴은 핼쑥하게 여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함도 바다와 비슷했다.
종잡을 수없는 바다처럼
지함의 표정도 도무지 예측할 수가없었다.
어느 때는 흡족한 촌부의 얼굴이다가
어느 때는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격정으로 들끓는
젊은 선비의 얼굴이다가 어느 때는 수줍은 소년의
얼굴이기도 했다.
오늘 지함의 표정은 어떤가?
초연함과는 다른얼굴이었다.
얼마 안 되는 밥을 닥닥 긁어 먹고
아쉽게 밑바닥을 살피는 어린아이 같다고나 할까,
아니 그보다는 장날 냉이 한 소쿠리를 캐 와서는
해가기울어갈 때까지 마수걸이도 못하고 있는 노파처럼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공부는 잘되어 가나? 무엇이 잡히던가?"
정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요즘은 뭘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네는 거기서 길을 찾게 될 것이야.
헌데,
나는 어디서 길을 찾는다?"
가끔씩 지함은 뚱딴지 같은 말을 던져
궁금증을잔뜩 부풀려 놓고는
뒷말을 싹 삼켜버리곤 했다.
지금도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한번 입을 닫으면
아무리 물어도 다시 입을 여는 법이 없는 지함인지라
정휴는 궁금증을 혼자 삭여야 했다.
"자, 나는 가네. 바다를 보고 나면 그리움이 풀릴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야.
그토록 책을 읽고도
내 그리움의 정체 하나 알아맞추지 못하고 있다네."
지함은 엉뚱한 말을 남겨놓고는 훌쩍 떠나가버렸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발길이 뜸하던 지함은
농사가 막 시작되어 정신없이 바쁜 어느 날
가는비를 맞으며 나타났다.
금강경을 다 읽고 난 정휴는 이래저래 할말이 많았다.
"그래, 길을 찾았는가?"
"이미 길에 들어섰는데 길을 찾았느냐니요?
지금도길에 있고 전에도 길에 있었고,
앞으로도 길에 있을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 위에 있어야 합니다."
"자네는 이제 세상을 달관한 소리만 하는군.
금강경의 효험이 나타나고 있구먼.
하여튼 나는 세상으로 나가네."
"벌써요? 하긴 벌써가 아니지요.
이런 날이 올 줄은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항상 매듭이 있다네.
이때다 싶을때 변화시키지 않으면 썩고 만다네.
나는 썩고 싶지않네.
자네도 금강경만 읽고 있다가는 썩고 말 걸세."
"아닙니다. 금강경이 사람을 썩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썩게 된다면 사람 스스로가 썩어가는것입니다."
정휴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함이 껄껄 웃으면서 말을받았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논하자는 게로군.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공이고, 공이 색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궤변인가?
이것도 저것이고 저것도 이것이고,
도대체 분명한 게하나도 없지 않은가?"
공하다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게는 오히려 세상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늘 꿈을 꾸는 것 같던 정휴의 얼굴에 묘한 광채가서려 있었다.
낮이면 남들과 같이 하루 종일 뙤약볕밑에서 일을 해
얼굴은 검게 탔지만 총명한 기운은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겨울이 되어 빈 밭을 공이라 하고,
여름이 되어 곡식으로 꽉 들어찬 밭을 색이라고 하면되는가
밭은 밭일 뿐 여름이어도 겨울이어도 변함이없으면
들어맞는 말 아닌가?"
"세상 만물이 다 온전하게 있는 듯해도
언젠가는없어지고,
또 아무것도 없는 듯하여도 언젠가는
다시꽉 들어차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이 말씀이 우리끼리 쉽게 비평해 버리고 말 만큼
허무한 말은 아니라고 나도생각하고 있었네.
살다 보면 언젠가 그 깊은 뜻이
저절로 우리에게 와 닿을 날이 있을 거란 생각이드네.
아무래도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이른 듯하이."
지함의 말에 정휴는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지함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금강경 자체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자네가
왜 금강경에서 길을 찾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게나.
내가 없이, 내 처지와 내 시각이 없이는 학문도진리도 없다네.
자네는 늘 그것을 잊고 있더군.
내가없는 진리란 없는 법일세.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것이야."
정휴는 입을 다물었다.
지함의 말이 정휴의 묵은상처를 예리하게 들쑤신 것이다.
정휴의 얼굴이창백해졌다.
"제 처지라니요? 중요한 건 사람 그 자체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형님이 아니시던가요?"
"너는 종놈 출신이니 네게는 학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얘기는 물론 아닐세."
지함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사람의 생각이란 제 처지와 조건에 구애를 받게마련이야.
그것마저 깨고 나와야 된다는 얘길세.
자네가 금강경을 그다지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무언가?
양반도 양반이 아니고 종도 종이 아니고,
양반이 종이고, 종이 양반이라는 말 때문인가?
학문을 하는데 사(邪)가 끼면 안 되는 것이라네.
어쨌든 이만하세.이 얘길랑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세."
할 말이 많은 듯 입이 반쯤 열린 정휴를 보면서
지함은 잘라 말했다.
잠시 말이 끊겼다.
정휴는 자신은 이제 종이 아니노라고 외치고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차피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 종으로 살아온 과거가있는 것을.
그렇지만 이미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않았다
지금은 현재, 정휴는 면천을 하여 양민이되어 있다.
첫댓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