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명성황후나 대원왕이나 도찐개찐이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있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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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사망 후 당대의 인식
이때
민후(=민비)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小村室의 딸은 민후를 보고 확인하였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屍身을 검은 두루마기에 싸가지고 鹿山 밑 樹木 사이로 가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埋葬하였다. 민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매천야록>
종전에는
국휼(=국상)이 있을 때 언제나 성복기간에 백립(흰 베로 만든 갓. 대상(大祥) 뒤부터 담제 전까지 상주(喪主)가 쓰거나, 국상(國喪) 때 일반 백성이 썼다.) 을 쓰도록 재촉하여 백립 값이 매우 올랐으므로 이때는 곡반(국상 때
곡을 하던 벼슬아치의 반열.) 에 참석한 사람만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민들은 백지로 칠립(=그냥 일반적인 흑갈색 갓)을 싸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머리만 가린 것이었으나 한 달도 안돼 모두 백립을 쓰고 다니라고
하므로, 이때 민간에서는 서로 입을 삐죽거리며 “나에게 무슨 은혜가 있었다고 다시 나에게
백립을 쓰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것은 임오군난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간사한 자들은 백지를 손바닥만하게
접어 삿갓 위에다 붙이고, 고루하고 둔한 사람들은 버젓이 칠립을 쓰고 다녔으나 이런 모습을 본 관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申箕善이 宣諭使로 임명된
후에는 명을 게시하여 엄하게 금하였지만 사람들은 영을 따르지 않았고, 정유년(1897) 봄에는
칠립을 쓴 사람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것은 호남과 영남뿐 아니라 전국이 모두 그러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
흥선대원군
사망 후 당대의 인식
잠시
후 그는 다시 어가가 오지 않느냐고 물은 다음 긴 탄식을 하고 운명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목이 메도록 통곡하였다.
이하응은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공과가 상반하였다.
그는
갑술년(1874)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수차례 위태로운 일이 있었으나 10여 년을 두문불출하고 있는
동안, 국가에 무슨 변이 있으면 군중들의 추대를 받아 누차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좌절되어 거의 자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恩怨의 一念이 사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협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이고 그
명성도 외국에까지 들리므로 조야에서는 그를 大老로 의지하여 그가 사망할 때는 원근이 모두
슬퍼하였다.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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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하면서 민생을 피폐하게 했다고 쫒겨나도 몇번을 쫒겨났을 사람이라고 씹던데...
암만 그래도 자기일신의 영달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무당을 긁어모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마다 다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고 안동김씨가 3대에 해먹은걸 여흥민씨는 고작 10년만에 능가하도록 해먹게 만들고 이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관직(말단공무원까지 몽땅)에 매관매직을 일삼고 군인녹봉 절반을 쌀대신 모래로 지급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만들고 동학농민운동(민란)이 일어나게 만들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진압하고 대한제국의 금광을 비롯한 모든 자원을 헐값에 외국으로 다 팔아넘겨 국채보상운동의 불씨를 일으킨 분만 하겠습니까?
(한일합방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국채가 천삼백만원이었는데 중전민씨가 미국인에 단돈 2700원에 팔아넘긴 운산금광의 일년 채굴량만 수백만원이었다고 함)
표범 48마리를 이어붙인 중전 민씨의 접견실 양탄자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