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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라는 책을 본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성령은 문자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문자가 성령을 포로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때 성령은 문자를 깨뜨려 버린다.”
종교개혁 전, 가톨릭 문자가 너무 강해져 성령이 숨을 쉬기 힘들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을 통해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 신학을 뚫고
바울에게 도달하면서 '말씀이 말씀되게 했다.'
이와 비슷하게 천주교가 들어올 때, 조선은 봉건시대였다.
그러나 봉건의 가치를 끌고 가기에는 더 이상 나눠줄 땅이 있지 않았고
주자 성리학은 충, 효를 기반으로 계급질서를 강요했는데
명분론으로만 존재하는 주자 성리학은 한계를 맞이함에도
조선은 그들의 가치를 아래에 강요했다.
국가가 물감을 독점해서 관직에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
염색한 옷을 입을 수 없어 백의민족이 되어야 했던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입은 검은색 옷은
그 자체만으로도 저승의 색이기에,
위를 거스르는(역상[逆上]) 색의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천주교는 계급질서와 다르게 양반과 천민이 어우러질 수 있는 세상을 기대했다.
당시 시대의 한계를 너머서는 움직임은 2가지가 있었다.
1.종교개혁이 예수와 제자들이 했던 말을 찾아 올라갔던 것처럼
공자나 맹자의 원전을 찾아가는 신유학.
(충(忠)은 마음(心)의 중심(中)을 잡는 것이라
군주와 같이 대상이 외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공자나 맹자가 이야기한 춘추전국시대는 다양한 나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충(忠)이란 하나의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신하된 자가 바른 정치를 하는 임금을 찾아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을 이야기했다.
효(孝)라는 것도 위에서 아래로만 권력이 도덕으로 정당성을 잡은 것과 달리
쌍방향으로 부모의 은혜에 우러나와 보답하는 것이다.)
2.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종교와 과학에 눈이 열린 북학은
이론(명분론)이 아닌 삶(생활)을 이야기했다.
(개량법으로 부의 생산이 가능해지자 계급질서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신유학과 북학이 서로 소통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후 개신교는 봉건시대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시기를 지나
토론을 통해 민주를 경험한 근대화시대에 들어왔다.
이 때는 식민지라는 새로운 상황에 맞서야 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순교자들의 젊은 시기를 기록할 때,
부랑자 생활, 불량배들과 어울려 타락한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걸만한 중요한 가치를 찾지 못해 방황과 고뇌가 있던 시기였다.(구도의 과정)
근대에 기독교와 민족운동으로 저항하는 것은 시대정신이었다.
시대를 읽고 정신이 올바르게 서있다면 순교는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교를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을 돌아보며 순교를 다르게 그리고 다양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사람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 운동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점차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개신교도 여러 부류로 나뉘어졌다.
1.기독교를 고수하는 움직임과
2.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움직임과
3.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의 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근원에서 서로 이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며
농업협동조합, YMCA, 가나안농군학교,
최용신의 상록수운동, 주기철 선생님의 사건 등 다양한 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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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이 기독교사회주의 방향을 모색한 것도
만주에서 사역하다가 사회주의 안에서 기독교의 길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남한은 자유를 극대화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창의와 생산성은 커졌지만 빈부격차가 점차 커져 상실을 맛보는 우리
이와는 다르게 북한처럼 평등이 극대화된 곳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또 다른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서로가 대화할 수 있는 통일 시대를 맞이하고 이어나가기 위해
그에 걸맞는 무언가는 뚫고 나오지 않을까?
그것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평등을 구현하는 사랑의 나눔이 있는 새로운 신학!
우리의 오래된 미래에서 답을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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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순교라고 하면 무언가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로 방향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겨울을 지나 봄에 올라오는 새싹처럼...
부당하게 억압하는 시대에, 시대정신으로 뚫고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주자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안에서 근원을 향한 몸짓이었던 신유학처럼
우리 안에서 성경의 근원을 찾아가는 움직임이...
밖에서 우리의 눈을 열었던 북학처럼
밖이라고 여긴 사회주의에서 근원을 찾아가는 그런 움직임이...
서로 어울리지 못할 것 같던 둘이
서로를 알아가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듯,
우리도 새로운 순교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