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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
(11)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옴
(아사야61-63장)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쌀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쀼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요한계시록14:7-20, 19:11-16, 19-21)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1.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사역
여호와의 종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다. “주 여호와의 신(영)이 내게 임하였으니.”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이다. ‘기름부음’은 위임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임할 때 기름을 부었는데 왕에게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행하기 위해서였고 제사장에게는 사람을 중보하게 하는 직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을 했는데 ‘기름부음’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다.
하나님의 종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다.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임명을 받은 자인 것이다. 우라 나라에서 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그에게 대통령의 권리를 위임하여 그가 어떤 협상을 하거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임명하는 것이다. 일종의 기름부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종에게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쓴 것은 신성한 위임이기 때문이다. ‘기름’과 ‘영’은 같은 의미로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으니’라는 말은 기름을 부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조상 아담은 동산지기로 기름부음 받았다. 그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곳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담은 그 동산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동산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과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은 그 동산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은 함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세상에 있게 되었다. 동산을 지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따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아담에게 위임되었던 동산지기는 인생의 본분이다.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동산지기로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동산을 지킬 자다.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지 못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면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직임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신성한 위임을 잃어 버려서 위임이 없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헛된 위임만 받아서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도록 위임받았다. 그의 여덟 식구와 기식 있는 모든 생물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위임을 받은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여덟 식구는 물론이고 모든 생물의 생명은 보존되지 못했을 것인데 그가 방주를 예비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방주였다.
방주의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이고 성막이다. 성막의 중심인 법궤는 방주의 축소판이다. 방주가 있음으로 구원 받았던 것처럼 법궤가 있으므로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가 법궤가 되신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우리의 방주다. 모든 생명의 방주고 모든 인간의 방주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기름부음 받았다. 창세기 12장 2-3절에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였다. 아브라함을 인해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니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다. 복을 지킬 자인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으려면 아브라함 안에,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나왔다. 갈대아 우르는 바벨론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높아지고 위대해지려고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바벨론을 떠나야 한다. 바벨론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험하던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라. 네가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였다. 천하만국의 영광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원리를 따라야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질 수 없다. 사탄의 영광은 사탄의 원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그 복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갖는 세상의 복이 아니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그 복이다. 세상의 복은 그 복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한다. 자기 몫으로 가져 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계속 싸우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자기가 잘못해서 가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가진 자에게 “왜 너는 많이 가졌느냐?”고 한다. 자기 것을 가져갔다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의 복은 어떤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부족해진다.
하나님의 복은 복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복을 가졌는가? 그의 복으로 인해서 우리가 복을 받는 복이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원리 안에 있으면 이 복을 받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오해했고 지금도 이 복을 물질적인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신 말은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모세에게는 그 백성을 인도하도록 위임하셨다. “너는 내 백성을 인도하라.” 하셨다. 자격도 없고 말도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 백성을 인도하라는 직임을 위임하셨다. 모세가 아니면 그 백성을 인도할 사람이 없었다. 모세가 이 위임을 거절하면 이스라엘은 망하는 것이다. 만일 인도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 그 직분을 버리면 그의 인도를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이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왕국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다윗의 위치에 있어야 왕국은 영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 하셨다. 그러나 그 후손들의 잘못함으로 인해서 그 나라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왕들이 하나님의 위임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종에게 이스라엘을 회복하도록 위임하셨다. 이사야 61장 1-3절에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에게 위로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하게 하려 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회복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가난한 자도 마음이 상한 자도 아니었다. 포로된 자도 갇힌 자도 아니었다. 그들이 잘못해서 가난한 자가 되었고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가 되었다.
근원으로 올라가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할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지위를 버렸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불안과 고통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회복하려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부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갇힌 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은 그 백성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는 말은 희년을 선포한다는 말이다. 희년은 오십 년에 한 번 오는 해로 칠 년이 일곱 번 지난해의 다음 해다. 그 때는 종으로 삼았을지라도 다시 놓아주어야 하고 남의 토지를 샀을지라도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그 기업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다. 어떤 이유로 땅을 팔아먹을 수 있는데 우리 족속의 기업이기 때문에 그 땅은 언젠가는 돌려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무조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법이다. 강원도는 항상 강원도 사람의 땅이고 경상도는 경상도 사람의 땅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각 지파마다 분할해 놓은 땅의 지계표가 옮겨지지 않도록 정해 놓은 희한한 법이다.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이 있는데 일주일에 제 칠 일은 안식일이고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이며 오십 년째 되는 해는 희년이다. 희년에는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게 하려고 기름을 부으셨다고 하였다. ‘신원’은 원수를 갚는다는 뜻으로 그 백성의 원수를 보응하는 날을 전파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은 이런 직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고 그 재를 대신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재를 무릅쓴 상태는 비참한 상태다. 그런데 영광을 주셔서 그 부끄러움을 대신하게 하겠다고 하셨다. 희락의 기름으로, 그 영의 기쁨으로 슬픔을 대신하고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의의 나무는 영광의 나무다. 이것을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인용하였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예수가 곧 이사야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이라고 본 것이다.
누가복음 3장 21-22절에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종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는 이사야 61장을 인용한 것이다.
이 영은 경륜적인 영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분은 선재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있는 분인데 무슨 영이 또 왔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영은 경륜적인 영으로 어떤 임무를 집행하기 위한 영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것 때문에 두 파로 갈라졌다. 한쪽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니까 원래부터 성령이 있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성령이 임했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두 파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영은 어떤 일을 위한 경륜적인 영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에게 임했던 영도 어떤 임무를 위한 경륜적인 영이다.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예수님은 인용하셨고 자기와 동일시하셨다.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인용하기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위함이며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하셨다. 위임을 받은 종, 하나님의 영이 임한 종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 회복의 역사
가.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석방시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페르시아의 고레스라는 왕이 세계를 제패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석방되었다. 그래서 고레스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시켰고 성전의 기물들을 돌려보냈다. 칙령을 내려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게 하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회복의 역사다.
고레스에 의해 백성은 자기 땅으로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돌려주었는데 이것은 여호와 경배를 돌려주었음을 의미한다. 성전의 기물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있는 것들이다. 이것을 지금 말로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제단이라는 방식, 물두멍이라는 방식, 떡상이라는 방식, 등대라는 방식으로 섬겨야 한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방법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분리될 수 없다. 어떤 방법으로 경배하느냐에 따라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에 속할 수도 있고 여호와께 속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섬기지 않는 것은 다 우상숭배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가톨릭 역사와 개신교 역사를 통해서 그들은 많은 경배의 방법들을 개발해 냈다. 미사를 드리는 방법, 예배를 드리는 방법, 하나님을 봉사하는 방법들을 만들어 놓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들은 성전의 기물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 성전의 기물들은 영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단을 통과해야 한다. 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십자가가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가는 곳이 물두멍이다. 묻은 때를 거기서 씻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 다음에 가는 곳이 빛이 있는 금등대고 그 다음이 떡상이다. 성전의 기물들은 모두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원칙에 따라서 하나님을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을 건축하게 하였는데 성전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였다. 이 중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곳이 없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어디든지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념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 분이 아니라 땅 위에 계시든지 하늘에 계시든지 둘 중 한 곳에 계신 분이다. 땅 위에 계신 하나님은 반드시 성전 안에만 계셨다. 성전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데도 없고 경배할 데도 없으며 하나님을 경배할 방법도 없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확고한 신앙이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인식이다. 이 인식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라는 말씀이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방인들은 어디든지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방인에게서는 이런 사상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방 세계에 들어오면서 이방 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디든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어디든지 계신 분이 아니다. 성전에 계시지 못하면 하늘에 계셔야 했다. 이 땅 위에 성전이 파괴되어 없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불렀지만 땅 위에 성전이 있을 때는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땅 위에 성전이 없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 왕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전을 건축하게 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중심이 다시 지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을 재건하게 하였다. 예루살렘 성은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성이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 성전이 있고 성전 안에 법궤가 있으며 법궤 안에는 증거판이 있다. 그 백성의 중심 중의 중심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이 고레스 왕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며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었다.
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됨
그러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어떻게 회복되었는가? 누가 이것을 회복할 사람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항상 물질적이고 시공간적인 것으로 생각해 왔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성전은 그 백성의 성전이 아니라 헤롯의 성전이었고 그 백성은 왕권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그 나라의 재건에 있었다. 메시야가 와서 그들의 나라를 재건하여 다윗처럼 왕국을 세우고 솔로몬처럼 성전을 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처음에는 그분이 메시야라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로 알고 따랐던 것이다. 그분은 귀신에게 붙들린 자들을 놓아주고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중풍병자를 고치셨으며 배고픈 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셨다. 그런 일들은 지금 우리가 볼 때는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 61장에 그런 말이 나오기 때문에 따랐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라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배고픈 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니까 그를 메시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도들도 이 말을 쓸 때 그런 의미로 썼던 것이다. 그것이 그분이 그 사람이라고 표현한 방법이었다. 예수님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유대인적인 방법은 귀신들린 자를 놓아준 것과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중풍병자를 고친 것, 배고픈 자에게 양식을 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니까 메시야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죽으심을 통해 그 모든 꿈이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나라가 재건되지도 않았고 국권이 회복되지도 않았다. 예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가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명분상으로는 참람하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들의 메시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일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분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사야 53장에는 우리의 죄를 담당한 여호와의 종이 나온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한 것은 그가 모든 인류를 한 운명 안으로 모아 놓으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을 한 운명 안으로 모으셨다. 죽으심이 아니면 모든 인간을 한 운명 안으로 모을 수 없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마다 자기 종교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종파가 수없이 많아서 종파마다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분의 죽으심 안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면 가짜다. 진짜 정통은 그분의 죽으심 안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이 외에는 다 가짜다. 이 외에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은 없어질 것이다. 왜 차별이 있는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니까 차별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공부를 못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런 차이는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다. 노력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고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차이는 모두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이 원래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는 사람이 하나될 수 없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기독교인이 되고 불교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교인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 만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나라가 갈라지고 언어와 풍습이 갈라졌다. 모든 것이 갈라졌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제하고 나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원주소, 우리의 본질, 우리의 진실은 사람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인생의 진실을 보여준 것이다. 높든지 낮든지 사람의 운명은 한 자리다. 잘났어도 그 자리고 못났어도 그 자리다. 높아도 그 자리고 낮아도 그 자리다. 많이 가졌어도 그 자리고 적게 가졌어도 그 자리다. 우리의 운명은 한 자리다. 여기서 모든 인류는 하나로 연합된다. 이 길이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길이다. 여기서 출발해야 새 것이 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완전하게 끝난 것이 예수님의 죽음이다. 거기서 새 생명이 시작된다. 완전하게 끝나고 다시 난 것이 새 생명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새 생명을 통한 새로운 건축에 있다. 새로 태어난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옛사람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 세상이다. ‘옛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역사와 전통, 습관과 교육, 문화 등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사람이 옛 사람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끝나고 새로 난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이 세계가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의 주, 끝나고 다시 시작된 생명의 창조자가 되셨다.
어떤 교리를 믿고 어떤 교파에 다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의 죽으심 안에서 죽고 그의 사심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이 새 생명이고 거듭남이다.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유대교에는 바리새 파와 사두개 파, 그리고 엣세네 파의 세 파가 있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당신은 무슨 파에 속해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당신은 사두개 파에 속합니까, 엣세네 파에 속합니까?”라고 묻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거듭난 생명이 새 생명이다. 새 생명과 새 건축!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고 목표다.
3. 이스라엘의 이상과 소망
이사야 61장 4절 이하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라는 소망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직도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소망하고 있다.
황폐한 성을 다시 쌓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은 그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농사를 짓고 그들의 양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며 열방은 제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돌아올 것이며 이스라엘은 영광을 얻어 자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치와 능욕 대신에 배나 분깃을 받을 것이고 여호와가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우시며 여호와를 인하여 크게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흩어지지 않도록 했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소망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도 흩어지지 않고 이 소망 안에서 집결되어 있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에 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파견해서 이스라엘을 연구하게 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전군 신자화 운동이라는 것이 생겼다. 신앙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박대통령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기독교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전군 신자화 운동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질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예언은 아직 역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황폐한 성읍이 재건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라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 땅에서는 계속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온전한 성취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그들을 섬길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목장을 관리해 주며 그들의 농사를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말씀을 의지해서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이 그들 앞에 굴복하고 그들을 섬길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다. 그들의 우월감은 대단하지만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원의 옷을 입히고 의의 겉옷을 더하며 보물로 단장케 하고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공의가 횃불 같이 나타날 것이며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어질 것이며 여호와의 면류관이 되며 왕관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사람이 온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던가? 왜 죽이기까지 했던가? 그 이유는 이렇게 엄청난 약속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만 보고 따르거나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을 텐데 이렇게 엄청난 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미워하고 결국은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처럼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볼 때 너무 형편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놈이 우리에게 사기를 쳤구나. 우리를 조롱했구나.” 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옥에 갇힌 사람이 구원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웬 거지 같은 놈이 왔다가 빵이나 한 조각 넣어주고 가 버린 것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빵을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자를 만나면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너무 큰 소망을 가졌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저주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의 종의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으므로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을 들을만 하다. 그런데 주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그가 우리의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가 되시는가? 그분은 죽고 다시 산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서 죽고 다시 산 생명만을 기대한다면 그는 분명히 메시야시다. 그러나 그에게 이 외의 다른 것을 기대한다면 그는 사기꾼인 것이다. 그를 우리 생명의 구원자로, 우리 인생을 제자리로 돌려 준 분으로, 나를 진실 안으로 돌려주신 분으로 생각하면 그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 하지만 황폐한 성읍을 다시 쌓아주고 이방인을 잡아다가 종노릇을 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면 예수는 사기꾼인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처럼 생각하고 믿고 있다. 예수를 오해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때는 유대인들만 예수를 미워하고 죽였지만 이제는 10억의 기독교인들이 다 예수를 죽이려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새 생명으로 인한 새로운 건축을 시작하신 분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분을 주님이라고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라는 회복은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나라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유대 땅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날이 올 것이고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다 그리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서 세상의 군왕들이 망하고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주권을 잡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기독교의 정통 신앙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런 나라가 아니라 어린양의 나라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어린양이 어떻게 승리하시고 어떻게 우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되시며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되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생명에 관계되는 문제다. 결코 역사나 정치에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왜곡되어서 유대인들과 같이 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땅을 수호하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치 출애굽을 했을 때 가나안 땅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웠듯이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정복하고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제 여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당장이라도 다 박살내 버리고 그들의 나라를 세우고 싶을 것이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무엇인가? 참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바울은 말하기를 할례를 받았다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 아니고 육신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경륜은 완전히 바뀌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에서 영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구약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바라는 그런 회복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의 회복이 있다. 새로운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사회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교회는 새 사람으로 인한 새로운 건축이다. 교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사실은 이 땅 위의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다. 세계 정치를 바꾸어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새로운 건축을 해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못자리는 교회밖에 없다. 비록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교회가 못자리다. 못자리가 없으면 벼를 심을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셨던 예언의 영적 실제를 회복하신다. 그때 황폐한 성읍은 다시 쌓아질 것이다. 새 생명의 새로운 건축으로 황폐한 백성들은 다시 조성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은 저절로 종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당연히 여호와의 제사장이 될 것이며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 예언들은 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교회가 합당한 인격으로 건축되는 것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일한 소망이다. 이 땅의 어떤 정치 형태도 인간에게 완전한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오히려 더욱 혼란만 줄 뿐이다. 교회만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참된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못자리가 교회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발달된 사회가 된다고 해도 참된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세상은 세상대로 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유대인은 물질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고 교회는 새 예루살렘을 기다린다. 새 예루살렘은 완전한 회복의 계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는 새 예루살렘으로 회복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구성된 성이다. 금과 진주와 보석은 인격을 의미한다. 신성한 생명을 상징하는 금과 승리하는 생명의 상징인 진주, 그리고 연단되어 영광으로 빛나는 보석으로 한 사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회복이다.
새 생명과 그 건축!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맞물려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물질적인 재림으로 생각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마치 비행기가 내려오듯이 예수라는 분이 오실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새 생명의 건축과 관계된다. 새 생명의 건축과 동시에, 새 생명과 함께 예수님은 지금도 오고 계신다. 새로운 세계는 지금도 오고 있다. 아직 완성은 아니지만 오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중이다. 아직 다 오지 않았지만 지금도 오고 계신다. 언제 다 오시는가? 새 예루살렘이 완성될 때다. 꿈을 꾸었다거나 환상을 보았다거나 계시를 받았다며 몇 년 몇 월 며칠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는 황당한 사기꾼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모르니까 속는 것이지 알면 속지 않는다. 완전한 회복은 새 생명과 그 건축이다. 예수님은 새 생명과 그 건축의 완성과 함께 다시 오신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보여진 여호와의 종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회복은 교회의 회복과 인류의 회복이다. 인류 사회가 언제 완전하게 회복되는가? 언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되는가?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통해서 이 땅 위에 새 생명의 새 건축이 이루어질 때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땅 위에 당신의 전을 건축하셔서 그 백성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시고 그 백성과 함께 아내와 남편으로 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하고 당신의 최종적인 목표가 새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수천 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신 대로 오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회복되는 놀라운 계시가 우리에게 비쳐진 것을 감사합니다. 아직도 이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실망의 대상이었지만 우리는 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면서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새로운 창조자요 우리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당신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만이 완전한 소망이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일이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이 확고한 길로 분명한 길로 변치 않는 길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