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端宗)과 정순왕후(定順王后)가 폐위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나온 지 1년만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계획(端宗復位計劃)이 사전에 발각되고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관련자가 모두 처형당한다.
그 모의에 연루되었다 하여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며 영월 청랭포(淸冷浦)로 유배(流配)를 가게된다.
따라서 정순왕후(定順王后)도 군부인(君婦人)송씨(宋氏)로 격하(格下)되어 궁(宮) 밖으로 쫓겨 나가게 된다.
유배(流配)를 가는 노산군(魯山君)과 송씨(宋氏)는 宮을 나와 동대문을 지나 이곳 청룡사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노산군(魯山君)과 송씨(宋氏)가 부부로서 마지막 밤을 지낸 청룡사(靑龍寺) 우화루(雨花樓)
다음날 아침.
유배지(流配地)로 떠나는 노산군(魯山君)을 따라 송씨(宋氏)는 조금이나마 동행을 한다.
지금은 동묘(東廟)가 있는 길이지만 당시에는 城밖 천민들의 생활터 였으리라.
이길은 창신동에서 황학동을 지나 중앙시장 공구가게와 그릇가게를 지나 신당동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그 이름이 영도교(永渡橋)다.
이 다리는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도교(永渡橋)는 최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다리를 새로 만들면서 붙인 이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목교(木橋)였는데 "영미교"(穎眉橋)라고 불렀다.
원래의 이 다리는 한양대학교 건너편에 있는 "살곳이다리"처럼 석교(石橋) 였다고 한다.
동대문에 있는 오간수다리와 이 석교(石橋)가 청계천에 있는 처음 생긴 다리였다고 한다.
당시 이 다리는 한양에서 남쪽 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다리였다고 한다.
조선 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이 다리의 석재를 모두 가져갔단다.
단종 (端宗)노산군(魯山君)과 정순왕후(定順王后)송씨(宋氏)는 이 다리에서 영영 이별을 한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원히 이별을 했다고 하여 이 다리를 영리교(永離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후 영리교가 다르게 발음되며 영미교, 영도교로 되었다는 말도 있다.
정순 왕후는 단종과 이별한 후 청룡사에서 머물게 된다.
단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청룡사 위의 낙산(駱山) 꼭대기에서 단종(端宗)이 있을 영월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창신동 쪽에서 본 낙산(駱山)
이 산은 일제시대 때 채석장이 되어 정순왕후가 단종을 기다리던 동망봉(東望峰)의 자리는 없어졌다.
유배를 간 단종(端宗)은 곧바로 사약을 받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진(自盡)했다고 하는데 그 진위는 모른다고 한다.
처음 단종을 모시고 영월로 간 왕방연(王邦衍)이란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詩가 후세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왕방연(王邦衍)은 금부도사(禁府都事)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다.
금부도사(禁府都事)라고 하면 높은 벼슬일듯하지만 실은 아주 말단(末端) 관리(官吏)다.
그는 처음 단종을 모시고 영월을 다녀왔고, 후에 사약(賜藥)을 가지고 또 영월을 간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개울가에 앉아 슬픈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은 님 여희옵고
둘 업셔 냇의 안자시니
져 물도 여 우러 밤길 녜놋다.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며 밤길 가는구나.
단종이 죽자 신숙주(申叔舟)가 세조에게 단종(端宗)의 비(妃)를 자신의 노비(奴婢)로 달라고 청원을 했단다.
하지만 세조는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이를 불허하고 청룡사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살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야사(野史)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신숙주를 미워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일듯하다.
그후 정순왕후는 출가하여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함께 온 시녀(侍女)도 같이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대목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청룡사에서 출가했다는 이야기와 안성(安城) 서운산(瑞雲山)의 석남사(石南寺)에서 출가 했다는 이야기이다.
석남사(石南寺)는 경기도 안성(安城)에서 충북 진천(鎭川)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오른쪽 계곡 속에 숨어있다.
저 멀리까지 여인들만의 힘으로 어떻게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절에서 출가(出家)하였다는 이야기도 석남사(石南寺)의 안내문에만 있는듯하다.
석남사 입구 금광루(金光樓)
주련(柱聯)이 한글로 되어있다.
안성 서운산(瑞雲山) 석남사(石南寺)
세조는 정순왕후가 출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정순왕후 일행은 부역을 면제해 주라는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또한 그 일행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석남사가 흥하게 되었다는데 확실한 내력은 알수 없다.
석남사 대웅전.
위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앞이 협소하여 계단 아래로 내려가야 전체 모양을 잡을 수 있다.
대웅전 앞에서 내려다 본 모습.
입구 오른쪽에 있는 수조(水槽)
중간 계단에 좌우에 있는 석탑(石塔)
이 두 기의 석탑(石塔)만이 석남사(石南寺)가 고찰(古刹)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석남사(石南寺)는 큰 절집은 아니지만 절과 절의 주위가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서운산을 넘으면 "바우덕이"로 유명한 또 다른 청룡사(靑龍寺)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