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저수지 상류계곡을 “금화계곡”이라 하며 가산면 금화리에 위치한다. 계곡 위쪽지역에서는 사금과 중석이 많이 나 일제때에는 “소화광산”이라고 하는 큰 광산이 있었으며 이때 마을이 새로 생겼는데 동네 이름도 사금과 중석이 많이 나는 광산에 연유하여 “금화”라고 지었다고 한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담수된 금화지와 계곡주변에 관광농원이 조성되어 있어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특히 여름철엔 시원하여 피서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주변 식당의 보양탕은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좋다. 또 금화저수지 제방쪽 도로에서 산으로 올라가면 신라시대 전통사찰인 금곡사가 자리해 있으며 산너머에도 역시 전통사찰인 대둔사가 있어 당시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산중 깊숙이 들어서 있어 고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은 사금이 많기로도 유명했다. 70년대까지도 사람들은 지금의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부근에 있는 개울에서 사금을 캤다. 덕분에 외지사람이 많아 몽촌은 타 지역에 비해 발전이 빨랐다. 신경문 회장(67)은 인근 마을에서 가장 전기가 빨리 들어왔다고 전한다.
■ 울산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중리 서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다. 사철(砂鐵)ㆍ사금(砂金)을 캐던 곳이라 하여 토점 이라 했다고도 한다
■ 전남 보성군 율어면 칠음리 / 문덕면 봉정리 / 복내면
예로부터 보성지방에는 금광이 여럿 있었고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도처에서 금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율어면의 칠음리에는 당시의 금굴이 지금도 남아있고 면소재지인 문양리의 여시개미란 곳에서도 질좋은 금이 나왔으며, 문덕면 봉정리 오얏등은 사금이 많이 나기로 이름난 곳으로 금방앗간이 있었고 복내면의 구 소재지도 사금을 채취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니 보성(寶城)이란 지명도 따지고 보면 그냥 붙여진 허명(虛名)이 아니다 할 것이다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사구리
송호 해수욕장은 만조때에도 600미터 이상을 걸어 들어가도 사람키를 넘지 않을 정도로 수심이 얕아 안전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썰물때면 바닷가에서 고동과 소라 등을 줍는 재미도 함께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다낚시를 즐길 수도 있어 가족 해수욕장으로 손색이 없다. 사구미 해수욕장이 있는 사구리는 예로부터 사금이 많이 난다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자랑한다.
■ 전북 김제시
김제에는 금구리, 금산리, 금강리 등 쇠 금(金)자가 붙은 지명이 유난히 많다. 신라 때부터 사금이 채취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시대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노다지꾼, 그들을 따라 들어온 밥집, 술집들로 김제군 동쪽 일대가 북적거리기도 했다. 또한 일제 시대에는 전라북도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기름진 땅을 탐낸 일본인들의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 전북 봉남면 내광리 / 김제시 백학동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낚싯대라 봐야 꽂기식 대나무 낚싯대와 손잡이 대가 손목만큼이나 굵은 플라스틱 낚싯대가 전부였지만 그저 낚시를 간다는 즐거움에 약간의 흥분도 있었다. 두 사람이 일주일 먹을 식량과 소품을, 당시 최고의 운송수단이었던 짐자전거에 싣고 집에서 8km 정도 떨어진, 봉남면 내광리로 행했다. 이곳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사금채취를 하고 구덩이를 메우지 않은 방죽이 여럿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낚시를 더 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 좀 더 집 가까운 저수지로 옮겼다. 김제시 백학동 진관마을 앞 성당방죽. 이곳 역시 일제시대 때 사금을 채취한 후 메우지 않은 곳이다.
■ 충남 아산시 도고면
유난히 학(鶴)이 많았던 우리고장은 학과 온천에 연관된 전설이 많으며, 특히 신라시대 어떤 왕자가 행차중 자연적으로 용출하는 약수터에서 다리가 부러져서 병을 앓던 백로가 수개월을 이곳에서 거닐다가 이곳에서 완치하여 날아갔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삼봉 산하에 있는 신라동(지금의 신성리)에 숙소를 정한 후 수차에 걸쳐 목욕을 하기위해 행차하였던 바 그후 지병인 피부병이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시대때 편능이라는 사람이 샘을 만들고 그 물 한그릇에 1전씩 돈을 받고 팔았다는 설이 있으며, 1921년 일본의 고목덕미가 이곳 하천에서 사금을 채취하다 유황 약수온천을 발견한 후 시주하여 개천한 것이 도고온천의 시초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충북 옥천군
동부는 소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마니봉, 월리봉, 대성산등이 중첩되어 있고 금강 상류가 감입곡류(바위사이를 구비구비 돌아 마치 뱀이 움직인 것 같다하여 사행이라고도 함)을 하며 북서류하고, 경부고속도로 및 철도가 군내를 관통하고 있으며 사금, 흑연 등의 광산물과 하천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명승고적이 많고, 삼국시대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진 삼국공방과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동쪽으로 경북 상주군, 서쪽으로 대전직할시, 남쪽으로는 영동군, 북쪽으로 보은군에 인접한 약 539.22㎢의 지역으로 대전의 근교 농업지로서 또는 대전 근교의 공업단지로서 발전이 기대되며, 대전위성도시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남한의 중앙점에 위치하여 앞으로 옥천군을 중심으로 세계화에 앞장 설 수 있는 발전상이 기대되는 한국 최고의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