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구분 없이 공동체 이뤄 예불·기도 상설화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출신 모여 신행활동에 전념 낮은 계층 포용했다는 사실은 평등적·역동적 성격 보여줘 상사분향·염불·치의·치관 등의 활동 양상 두드러지게 특정 대둔사 대웅보전 감로탱(1901) 일부. 조선시대 감로도 하단에서 자주 보이는 남사당패가 사장의 후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세조 대를 거치면서 사장은 그 이름을 걸고 종교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명실상부 불교결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를 뒤이은 예종 대(1468~1469 재위)에서 성종 대(1469~1495 재위)에 이르는 사이 ‘실록’ 에는 바로 그 종교적 색채가 짙은 사장에 대한 몇 건의기사가 연속적으로 보인다.
그 첫 번째는 예종이 즉위하고 10여 개월이 지난 뒤인 재위 1년(1469) 5월의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이에 앞서 승도(僧徒)들의 횡행[橫]이 심하여 탑묘(塔廟)를 짓고 사람들의전원(田園)을 침탈하며 송사(訟事)가 일어나게 되었고, 또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어 모두 집을 버리고 귀의해서생업을 잃고 몰려들어 남녀가 서로 반반씩 되었으니, 이름하기를 사장이라 하였다
. (이들은) 밤낮으로 함께 거처하여 …향리(鄕吏)·일수(日守)·정병(正兵)·선군(船軍)·공사천례(公私賤隷)들의 귀의함이 저자[市]와 같았다.”(‘예종실록’ 5권, 1년 5월9일.)
어조가 자못 부정적이지만, 이것이 군대의 감소를 염려하는 임금의 전교에 대한 사관(史官)의 부연 설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인용문의 내용을 사실 위주로 요약하자면 예종 1년 당시 사장이라 일컬어지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스님들을 따라 귀의하여 성별의 구별 없이 공동체를 이루어 지냈다.
둘째, 스님들과 함께 탑묘를 짓는 등의 신행(信行) 활동을 하였다.
셋째, 향리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다수 이에 속하였다.
그러니까 이 시기 사장이란 스님을 구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 성별과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출신과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자신들의 신행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특히 인용문에서 거론된 향리 등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비교적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의 향리는 대체로 하급의 관인계층으로 평가되고, 일수는 관청에 딸린 심부름꾼을 가리키며,
정병과 선군은 군무(軍務)에 종사하는 양인(良人)의 정규군으로서 특히 수군(水軍)인 선군의 경우 고된 업무로 인하여 기피되던 직업이었다. 이처럼 신분적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 사장 공동체에 널리 포용되었다는 사실은 여성의 존재가 부각되어 보인다는 점과 함께 이 집단이 지니는 평등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의 종교활동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던 것일까.
“근일에 경외(京外)의 남녀노소가 사장이라고 칭하고 혹은 거사(居士)라고 칭하니, … 외방에서는 천만 명이 무리를 이루고서 절에 올라가 향을 불사르고[上寺燒香], 경중에서는 마을에서 밤낮으로 남녀가 섞여 거처하고 징과 북을 시끄럽게 두들기면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예종실록’ 6권, 1년 6월29일.)
“사장 등이 승니(僧尼)를 여염(閭閻)에 불러 모아 염불(念佛)을 일삼으니, 범패의 소리가 나라 안에 넘쳐납니다.”(‘성종실록’ 10권, 2년 5월11일.)
“(사장이) 인연과 화복의 설을 사모하고 … 아미타승(阿彌陁僧)을 일념(一念)하면 불도를 이루고 죄악을 소제한다고 여기고서, 바로 사(社)를 대도(大都)의 여염 가운데에 창건하고 염불소(念佛所)라고 칭하면서 그 업차(業次)를 버리고,
분연히 무리를 모아 치의(緇衣)·치관(緇冠)하여 남자는 동쪽으로 여자는 서쪽으로 하니,
그 형상을 보면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며, 그 거처하는 것을 보면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닙니다.”(‘성종실록’ 10권, 2년 6월8일.)
이 세 기사에서는 사장의 활동 양상으로 세 가지가 두드러지게 특정된다. 바로 상사분향(上寺燒香)과 염불(念佛), 그리고 치의(緇衣)·치관(緇冠)이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언급되고 성종 23년(1492)의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에서 사실로 확인된 탑묘 조성 불사 등은 아마도 이들이 어떤 특별한 계기를 맞아 시간과 공력을 들여 벌이는 간헐적인 행사였을 것이다. 평소에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함께 사찰을 방문하여 예불을 올리고, 자신들의 거처지에서 염불 등의 기도 활동을 상설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징과 북을 두들긴다’는 묘사는 사장 공동체에서 정근기도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밤낮으로…’ 그러했다는 표현에서는 조석예불과 사시마지의 일용의례가 기본적으로 행해졌을 것임을 넉넉히 짐작하게 된다.
또한 ‘범패의 소리가 넘쳐난다’고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사장 공동체에서는 자체적으로 재(齋) 의례의 수행도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성종 2년(1471) 당시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 공간(또는 거처지)을 명백히 ‘염불소’라고 지칭하였고,
관찰자는 이것을 또한 ‘사(社)’라고도 표현함으로써 이들이 지니는 종교 결사로서의 성격이 안팎으로 분명히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검은 옷과 검은 관[緇衣緇冠]의 복색은 사장 공동체가 스님을 구심으로 모이거나 주요 행사에 스님들을 초청하는 양상을 넘어, 이들 스스로가 어느 정도 승인(僧人)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정하게 한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그들을 “그 형상을 보면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며, 그 거처하는 것을 보면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니다”라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일찍이 예종 당시에 임금이 직접 사장에 대한 정역(定役)이 불가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어(‘예종실록’ 8권, 1년 10월10일)
위정자들도 사장을 승단의 범주 속에서 인식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앞선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첩을 소지한 공인승들에 대해서는 신역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 정해진 규정이었다.
예종과 성종 대에 집중적으로 기사화되었던 종교 활동가로서의 사장은 이후 점차 ‘실록’에서 언급이 뜸해지고, 광해군 대를 지나고서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면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 사라지고 만 것일까. 놀랍게도 민속학계에서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민간 예능인 집단인 사당패를 바로 이 사장의 후신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사장과 사당의 음이 비슷한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겠지만, 위에 소개한 예종 1년 6월의 기사에서 사장의 다른 이름으로 소개된
‘거사’가 바로 사당패 남성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기에 여러 모로 흥미를 유발하는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장의 세력이 분화하여 일부는 교단 내로 흡수되고, 다른 일부가 사당패로 변모해 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이러한 주장이 보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정확한 변천의 과정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