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끼의 말뚝
전 정 우
< 3 회 >
나도 한참 잘 나간다 싶을 때는 초저녁에 푹푹 질러서 장을 일찍 보고 늦기 전에 호텔로 가거나 몇 사람이 모여 앉아서 잔을 비우기 일쑤였다. 지금은 폐족이나 다르지 않은 신세지만 그때는 하루에도 '빙고' 소리를 거푸 연발하기도 했다. 도박이란 확률로 따질 게 못 된다는, 운이란 손을 내미는 사람을 향해서 반드시 다가온다는 미신에 홀려 있던 때였다. 돈만 벌충하면 손 씻고 옛날로 돌아갈 결심은 할 줄 알아도 운이란 아무에게 붙지 않는다는 사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 기회는 나에게도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한사코 외면하던 때이기도 했다.
본전 생각이 간절할수록 원정 횟수는 늘어 갔다. 사우스 다코다, 콜로라도, 라스베이거스, 꾼들을 따라나설 곳은 많고 흔했다. 북아메리카 전체가 도박판이었다. 비행기를 동원하고도 돈은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물봉이나 핫바지들만 찾아다니는 비행기가 손짓 한 번에 날아와서 우리를 떼로 업고 도미니카 공화국이나 아틀란티스, 남 캘리포니아 같은 곳으로 날아갔다.
호주머니를 탈탈 털리고 초주검이 되어서 귀가하는 나를 아내가 잡아먹을 듯 잡도리 했다. 또 얼마나 꼬라박았냐고 주리를 트는 식이었다. 거지가 되어봐야 정신 차리겠냐는 위협이 뒤따랐다. 거지가 되기 위서라니, 말씀이 아니었다. 첫째 잃은 돈을 되찾고, 더 나아가 천만금을 손아귀에 움켜쥐겠다는 사내의 야망을 외면하다니 억울했다. 어쨌든 짜릿한 행락은 지그재그로 이어졌다. 일탈을 계속하는 가운데 사업이 휘청했다. 종업원들 움직임부터 몇 박자 느려져 있는 것을 보고도 대책이 없었다. 손님들 발길이 뜸해지면서 돈줄도 짧아져 갔다. 사업이고 무엇이고, 한몫 잡으면 만사 낭창 휘면서 본때 좋게 끝낼 수 있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숨만 쉬고 사는 형편이었다.
잡힐 것 같던 기회는 오지 않고 갈증은 심해갔다. 목구멍이 바삭바삭 안으로 타들어 왔다. 은행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은 다음 날, 아내는 새끼들을 꽁무니에 달고 인천 행 비행기에 올랐다. 소행은 괘씸하지만 아이들까지 끌고 가는 게 잘 된 일이라고, 속으로 고마워했다. 거치적거리던 게 모두 사라졌다. 사내들 눈에는 아내가 가끔 천사로 보이는 법이라던데, 나에게는 그럴 기회 한번 없이 끝나고 말았다. 잭팟이 터져서 돈이 흥청망청 남아돌아도 아내를 부르거나 그녀 곁으로 내가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남자는 뱃장, 여자는 절개라는 유행 지난 말을 나는 잊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가신 분이 내 부친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내 행각이 거기서 멈출 리 없었다. 빚 청산하고 남은 돈까지 수중에 있었다.
카지노 극장에서 쇼를 보고 나와서 몇 잔 들이켜고 불콰한 얼굴로 객장, 슬롯머신 줄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반짝 내 눈을 끄는 누군가가 있었다. 북 아메리카로 떠나오기 전에 함께 근무했던 윤한수, 입사 동기를 알아본 것이었다. 뛰어가서 얼싸 안기보다 도둑 제 발 저리는 식으로 생각했다. 저놈이 나를 먼저 본 게 아닌가? 그랬다면 나의 초라한 쪽이, 저 놈에게 팔렸다? 곧 아니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들었다.출장 와서 공금을 흥청망청 쓰고 있는지 모를 저놈 쪽을 내 쪽에서 사줄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을 바꿔놓았다. 머리가 빠듯하게 돌아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틀림없으리라. 슬금슬금 물러선 내가 저만큼 떨어져서 윤의 동정을 살폈다.
윤이 꼼꼼하게 객장을 살폈다. 슬롯머신과 블랙잭 좌판이 벌려져 있는 층을 살핀 놈이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포커와 룰렛 게임장까지 살피는 것은 코리안, 동족이 있는가, 안전 문제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돌려 짚었다.
첫댓글 초저녁에 푹푹 질러서 장을 일찍 보고 ...
요 말은 돈을 넉넉하게 쓰며 물건을 사왔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물봉'은 만만한 봉 중에서도 제일 만만한 봉을 말할테지요? 혼자 어림잡고 있습니다.
그 세계에서 사용하는 은어가 낯설면서도 그 낯섬이 신선하네요.
신문에서 기사로만 보았던 해외원정을 온 윤이란 인물과 주인공의 관계..그리고 앞으로 윤과 얽힐 사건이 궁금합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여선 님!
좋은 지적을 해주셨군요.
이미 죽은 말에 가까운 물봉과 핫바지! 왜 그런 말을 골라 썼는지, 스스로 의아합니다.
물봉 핫바지가 풍기는 묵은 냄새뿐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는 시골 사람, 혹은 촌사람을 얕잡아 보는 말이었음을 생각하면 다른 말로 바꿔 사용하는 게 열번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신 차리고 단어를 골라 쓸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바우 아니에요.
전 오히려 그런 표현이 좋았는데요.
신선했어요.
제가 모르는 세계를 엿본 것 같아서요.^^
@여선 백복현
화학을 처음 배울 때 추억 하나.
흑판에 'H2OBONG'라고 크게 쓴 화학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
저런 것도 다 있나?
학생들이 서로 얼굴이나 쳐다봤지요. 마침내 일어선 한 놈이 조심해서 입을 엽니다.
그것은 선생님 이름 대신 사용하는 화학식이지 않습니까?
뭐야? 이 놈아! 내가, 왜 물봉이냐?
버럭, 선생님 목소리가 높이뛰기를 하자 학생들이 깔깔대기 시작했지요.
소설을 읽다보니 어릴 때 시골에서 농한기인 겨울만 되면 노름패들이 휩쓸고 다니면서 어리숙하면서도 헛바람 든 시골 사내들 훌쳐먹었던 기억이 겹쳐져 더욱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귀한 작품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옳습니다.
또 맞고요. 다미안 님!
그때는 핫바지 꼴마리(바지춤)에 손을 쑤셔박고 게걸음질을 치던 얼띠기들이 골목을 어스렁거리다 물 길러 나온 처녀들이라도 만나면 수작을 부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지요.
그 시절, 진짜 꼴볼견은 서울에 가서 불량배 시다바리나 하다가 온 치들 몇이 뭉쳐서 다니면서 핫바지를 입은
친구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얕잡아보고 입을 놀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었지요.
어쨌든 핫바지! 가난한 백성들 겨울 나느데 큰 도움을 주던 핫바지가 왜 비하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 추억 속에 뭍히 옛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글 쓰는 사람의 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 시대에 쓰이다 사라져 가는 말들, 이를테면 사바사바, 신나는 달밤, 난짝, 야코가 팍..., 같은 어휘들을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어려운 소재들을 어떻게 풀어 나가실까, 다시 다음이 기다려 집니다.
강 형이야 말로 진짜 족보를 정리하고 계셨군요.
민족의 수난, 거친칠기만 했던 민중의 정서!
양키 병사 앞에 서게 되면 야코가 팍 죽고, 시골 사람들 앞에 서면 야코가 팍팍 살아나서 기세 등등했던 치들, 서울역과 양동, 신설동, 영등포, 청량리 일대를 무대로 삼았던 어둠의 자식들! 이제 그들의 그림자까지 그리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려되는 일 하나는 남북한 사이에 자유왕래라도 하게 될 때, 김일성 사상만 가득한 동포들 앞에 나타타나서 팍팍 야코나 죽이려 드는 건방진 친구들, 짤랑짤랑 호주머니까지 흔들어 보이는 꼴이 없지 않으리라는 점이지요.
형의 다음 대작을 기대해도 좋겠지요.
원래 노름을 잘 못하기도 하거니와 별로 흥미를 못 느껴
라스베가스에 한 번 가봤어도 카지노에서 달랑 $20만 동전 바꿔서 슬로 머신한 게 전부인 저에게는
완전 새로운 이야기네요.
쪽박 찬 이야기라 좀 안되었지만
저에겐 흥미진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