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린이집 이야기
우리 병천교회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역시 몸으로 실천하는 선교활동일 것이다. 작은 농촌 지역에서 그래도 규모 있는 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선교활동 덕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교육선교는 그 역사도 깊을뿐더러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고 또 병천이란 지역사회에 여러 가지로 지대한 공헌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공회가 이 지역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학교를 세우고 교육선교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 선교 초창기의 교육사업에 대해서는 이미 전술하였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하지만 50-60년대에 중단되었던 교육선교가 70년대 후반에 다시 시작되었던 것은 선교 초창기의 진명학교의 연장선상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진명학교의 정신을 내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천 그레고리(광길) 신부와 원 요나단(성호) 신부는 오랜 기간 침체된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방안으로 대천덕 신부님 등 외부 인사를 초빙하여 신앙강좌를 꾸준히 개최하였다. 특히 음악을 좋아하고 조예가 깊었던 천 그레고리신부는 병천 지역 내의 어머니들로 구성된 ‘아우내 새마을 어머니 합창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 합창단은 각종 충청남도 합창대회에 참가하여 수차례 수상도 하였다. 이렇듯 교회 안팎에서의 활발한 활동은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고 이로서 많은 새 신자들이 찾는 등 교세는 몰라보게 늘어났다.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장은 주일학교의 성장이었다. 천 그레고리 신부는 주일학교 부흥에 큰 힘을 기울였는데, 직접 노상전도를 다닐 만큼 열성적이었다. 또 당시 주일학교 교사로 있던 홍 수산나(종순) 교우를 비롯하여 김 요한(영철), 김 바우로(재삼) 교우 등은 병천초등학교 교문에서 전도피켓을 들고 하교하는 학생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누어주며 그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저녁 늦게까지 돌보아주었다. 매일 교회로 오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 각종 게임을 개발하여 놀았고, 또 그 아이들의 간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도넛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평일의 교회는 병천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이 찾아와서 뛰어노는 놀이터였다. 당시 주일학교 학생수가 150명이었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다. 병천 지역에서는 ‘부모는 성공회 안 나와도 애들은 보낸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아이들 중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별 문제가 없었는데, 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은 하루종일 돌보아줄 곳이 병천에는 없었다. 그래서 바쁜 농사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은 부모들에게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을 맡아서 돌보아줄 곳이 간절하였다. 이렇듯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이 돌봄 없이 거의 방치되어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교회에서는 지역에서의 이런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아이들을 모아 돌보아주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1979년 원요나단(성호) 신부는 교회 안에 ‘진명어린이집’을 부활하고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물론 정식 인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병천 지역에서는 처음 생긴 어린이 교육기관이었다. 따라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모든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교사는 교인 중에서 홍 수산나(종순)와 진 안나(복자) 교우가 맡아서 수고를 해주었다.
이런 진명어린이집에 대한 병천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실로 대단하였고, 몰려드는 아이들로 교회는 날로 비좁아갔다. 그래서 당시 교회 터에 있었던 마을회관(현 식당)을 빌려 어린이집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1년에는 천원군으로부터 정식으로 새마을유아원으로 인가를 받게 되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현재의 어린이집 교사(校舍)를 신축하게 되었으며 그 명칭을 ‘병천새마을유아원’이라 하였다. 초대 유아원장으로는 병천면의 항규을 부녀회장이 취임하였으며 이로써 명실상부한 유아교육기관으로 탄생하게 되어 매년 많은 어린이들을 교육하여 배출하기에 이른다.
요즘에야 여기저기 유아교육기관이 많이 생겨 경쟁적으로 교육사업을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병천새마을유아원은 병천에서는 유일무이한 유아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 대부분의 그 연령대의 어린이들은 이곳 출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교회에서의 활발한 주일학교 활동이 이렇듯 지역의 교육선교로까지 확대된 좋은 사례를 남겼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창기 교회 내의 진명어린이집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새마을유아원으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교회의 경험 부족과 선교 마인드의 부재로 그 운영권이 교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외부인에게로 넘어가 그가 어린이집을 맡아 운영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문제점을 인식하고 1993년부터 조용환 신부님과 몇몇 열성적인 교인들이 수없이 군청을 드나들고 관청에 진정서를 내는 등 많은 노력을 부단하게 기울인 덕분으로 그 이듬해 운영권을 어렵게 회복하였으며 명칭을 ‘병천어린이집’으로 변경하였다. 그 이후 원장으로는 변금옥(1994-1995), 김혜영(프리스카)(1996-2002), 이정선(수산나)(2003-현재)을 거치면서 교회의 선교적 차원 하에서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7년 1월에는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전국 보육시설에 대한 80여개 항목별 평가에서 ‘참 좋은 어린이집’으로 선정되어 그 운영이 잘 되어가고 있음을 공인받게 되었다. 이는 도시에 최신 시설로 새로 지어지는 수많은 어린이집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서, 그동안 교회의 선교 차원의 관심과 어린이집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 우리 ‘병천어린이집’은 이 인근 지역에서 가장 모범되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유아교육의 표본이 되고 있다.
또한 봉황리교회에서도 한 버나드(호) 부제가 82년부터 봉황어린이선교원이란 교육기관을 만들어 20-30명의 학령 전 아이들을 가르쳤었는데, 아이들이 급격히 줄고 교사 수급에도 문제가 많아 문을 연지 2년 만인 1984년도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