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봉암사(鳳巖寺),
구산선문(九山禪門)과 사산비명(四山碑銘)의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
(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
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 함허당)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이다.
[선원禪院의 역사]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세웠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중단되었다. 그 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
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할을 하며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졌다.
1982년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어 1984년 제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 선풍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봉암사의 문화유산]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국보 제315호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 보물 제137호
▶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 보물 제169호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 보물 제171호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보물 제172호
▶ 문경 봉암사 극락전 : 보물 제1574호
▶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748호
▶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 경북유형문화재 제121호
▶ 봉암사석종형부도 : 경북유형문화재 제135호
▶ 문경 봉암사 일주문 : 경북문화재자료 제591호
4.2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국보 제315호(문경 최초)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
(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
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
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