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 한 특공대가 적진에 뛰어 들어 지휘 본부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다시살아 돌아올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한 병사가 중대장에게 질문합니다. '그럼 어떻게 귀환합니까?' 그러자 그 병사를 응시하며 중대장이 대답합니다. '제군, 우리는 적진에 들어가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 돌아오라는 명령까지 받은 것은 아니라네.'
박애주의자의 눈에는 몰인정하게 보이겠지만 이는 전쟁에 나선 병사라면 누구나 같은 처지입니다. 상관의 명령이면 죽을 확률이 높다고, 위험하다고, 하기 싫다고 "나 안가!' 할 수 없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태 8, 9) 백부장의 말처럼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버려야 하는 것이 군인의 사명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디후 2, 3) 우리의 사령관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싸우라 하시면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명령하십니다. 주의 군사된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땅 끝까지 나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증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있는 흔적(스티그마)을 지닌 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는 손바닥에 그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 손바닥을 펴시고 흔적을 살펴 보십시오. 정말 그 곳에 주님의 피가 묻어 있습니까? 그런 자에게는 목숨을 거는 일이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명에 낙오되는 일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주의 병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성화입니다. 교회에 여성의 비율이 많고, 점점 감성에 촛점을 맞추어 나아가다 보니 피, 싸움, 무기 같은 낱말이 보기 힘들어지고 야성은 무식하고 과격한 것으로 보이기 까지 합니다. 예언자는 사라지고 점쟁이만 남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류 관순 열사나 잔 다르크 같은 신앙의 야성으로 포효하는 자는 사라지고 심야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가 읽던 '목마와 숙녀'류의 카푸치노만 남았습니다.
이제 스타벅스에서 나와 땅 끝으로 가십시오. 직장의 땅 끝, 가정의 땅 끝, 사회의 땅 끝, 나라의 땅 끝, 세상의 땅 끝이 우리를 부릅니다. 주님이 명하십니다.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계시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