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의온누리 교회의 강연을 보았습니다. 그는 한국민에게 “게으른 DNA”가 있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이조 500년”은 통째로 ‘그의 하나님’에게 벌을 받을 만한 게으른 시기로 규정되고, 일본의 침략은 스스로 게으름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는 한국민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축복으로 둔갑합니다.
이런 식의 역사의식은 개인적 판단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의식을 대변합니다. “기독교 근본주의”, 사실 이런 용어는 일반적으로 잘 통용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실질적 권력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권력은 그것이 정치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문화권력이든 약자에게 부정적 명칭을 붙이고interpellation 유포시키는 힘인 거고요.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로 불리는 것은 이런 말장난 때문에 가능해지죠.
문창극이 제국주의 침략을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정당화하고, 문제의 모든 해법을 기독교와 강대국의 은혜로 환원시키는 ‘권력근본주의적 관점’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을 통해 이야기가 많이 되었기에 냅두기로 하지요. 여기서 새삼 다시 곱씹어보고 싶은 것은 “게으른 DNA”를 가진 한국인들이 일제 치하 일본에 유학하면서 공부한 분야가 공학!!이나 의학!!이 아닌 사회학, 철학, 정치학 같은 “게으른” 공부였으며, 그것이 한국민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징표라는 문창극의 말입니다. 그의 말은 한편으로 한국 사회의 지적 지형도에 대한 명료한 깨달음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호러영화를 보는 듯한 오싹함을 금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곧바로 들었던 의문은 “자신도 정치학 공부하지 않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곧 풀렸습니다. 그가 서울대학교에서 받은 정치학박사 학위는 미국에서 신문 일하면서 겸업!으로도 충분히 마칠 수 있는 ‘게으른 공부’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창극식 사유의 결정적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한 발치 떨어져 자신을 살피는 성찰의 능력이 그에게는 뭉텅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성찰의 능력!!, 그것은 자기비판의 능력이자 이웃하는 타인의 견해에 귀를 열어두는 능력이고, 그러면서도 문창극씨가 인용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100여 년 전 사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판단을 자신의 오성을 이용해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칸트는 “자기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짐”으로 인간은 정신적 “미성숙성”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칸트적 관점에서 보면 문창극은 정신적 미숙아라 할 만합니다.
좀 거창하게 접근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서구에서 ‘근대적 인간’은 중세적 진리에 대한 의문과 함께 탄생합니다. 중세에 ‘권력에 의해 진리라고 주장된 것’은 설사 그것이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나 요구라 하더라도 ‘신의 뜻’과 동일시되었고, 그것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 믿고 추종했던 소위 ‘진리’에 의해 배반당하고 희생당했습니다. 그래서 루소가 자연법이라는 걸 들고 나옵니다. 자연법? 루소는 예를 들어 어떤 이유에서건 한쪽에서는 굶어죽는 데 한쪽에서 배 터지게 먹는 것은 자연법에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실정법이 자연법에 어긋나거들랑 그 법을 위반하라고 말합니다. 신이 내려준 것은 인간의 보편적 존엄을 인정하는 자연법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법은 신이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프랑스혁명의 이론적 바탕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자연법적 의식과는 너무도 먼 억지들이 법의 탈을 쓰고 한국을 신음하게 합니다.
자아와 자아의 가치에 대한 의식도 진리(라고 주장된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싹 텄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래 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은 주장된 진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마녀사냥 같은 비기독교적인 일이 기독교의 주도하에 일어나는 불합리에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의문은 권력의 명령에 맞서는 질문이자 약자들의 생각에 대한 탐문이기도 했습니다. 자아에 대한 철학은 그 과정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역시 인문학은 직, 간접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진리의 탈을 쓴 권력의 폭압에 맞서는 학으로서 자신의 존재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이웃의 다양한 생각뿐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 변화를 탐구, 비교해야 하는 인문학은 힘들고 부지런한 노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학은 단순한 공상의 과정이나, 타인의 주장을 섣불리 절대화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창극씨의 기독교근본주의적 태도에서 우리는 성찰 없는 ‘게으른 인문학’의 전형을 발견합니다.
기독교와 제국주의를 숭배하는 시각에서 보니 “무능하고 타락한 고종이란 사람”과 심지어 “민비 시해”라는 용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 오르고 조선시대의 역사 전체가 단칼에 통째로 부정됩니다. 그러니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나라를 팔아 사욕을 챙긴 윤치호의 글이 문창극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듯합니다. 문창극의 ‘게으른’ 공부가 힘 있으면 남을 짓밟아도 된다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만들었다는 추정도 가능하고요.
인문학 일반을 게으른 공부로 치부하는 윤치호의 판단은 아집에 빠진 맹목적 실용 중시가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경고해줍니다. 그것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인용하며 공학과 의학 같은 공부만을 일종의 ‘게으르지 않은’ 공부로 찬양하는 문창극에게서 그리고 강대국의 언어인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오늘날 이 땅의 소위 우파 지식인들의 의식에서 윤치호의 걸었던 걸음의 흔적을 느낍니다. 그들이 세계와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부자와 가난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문창극 강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돈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에게 한국은 부자인 한에 조국인 듯합니다.
인문학은 인간 존엄성 같은, 사람이 살며 새기고 지켜져야 할 근본 원칙들을 확인하는 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상상력’은 한 사회에서 가령 인간에게 등급을 매겨 차별하는 식으로 인문적 원칙이 훼손될 경우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모든 감각과 의식, 무의식이 그것의 회복과 정립을 위해 작동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창극이 믿는 하나님은 국가를 1등, 2등, 3등 나라로 구분하는 듯합니다. 소위 선진국의 화려한 교회에 모셔진 예수만이 그가 믿는 예수일 거고요. 평생 누더기와 가난 속에 산 예수는 아마 그의 하나님이 아닌 듯합니다. 그에게 가난은 죄입니다. 가난한 예수도 죄인이겠죠. 예수 없는 기독교, 이게 '대체로' 한국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이건 기독교가 아니라 전형적인 샤머니즘입니다.
한국의 공부가 성찰의 능력이 아닌 암기 능력에 의해 잘하는 못하고를 판별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한국 사회와 독일 사회의 문화적, 경제적 차이는 한국 학교에서 질문 자체를 시간 낭비이자 성가신 일로 평가하는 데 반해, 독일의 학교에서 질문 자체를 능력으로 평가하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찰 능력으로서의 생각하기의 능력은 암기된 것의 단순한 재생과는 다릅니다. 진짜 공부는 비판적 의식의 연마이며 지금 이 정부가 온갖 것에 때려 붙여 쓰는 ‘창조’의 비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암기의 미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교육의 치명적 문제는 암기가 ‘시험’을 위한 제도적 지식의 암기에 국한된다는 점입니다.
한 나라의 국무총리까지 될 뻔한 사람이 대중 앞에서 제국주의적 시각에 의해 작성된 글을 비판적 독서 능력 없이 녹음기처럼 재생하며, 비판과 성찰의 학문인 인문학 일반을 게으른 공부라고 ‘믿는’ 의식과 태도를 지니고 있으니. 이런 권력자들은 한국이 가난해지면 부자나라에 대한민국 팔겠다고 나서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런 독단에 빠져 오직 부자만이 선이고, 기독교와 미국, 일본이 아니었으면 스스로 설 능력이 없(었)다는 ‘철두철미 사대주의자의 민족관!’을 mbc라는 공영 방송을 통해 통채로 보고 들어야 하는 오늘의 대한민국, 참으로 기가 막히고 고통스럽습니다. (2014년 6월 29일)
첫댓글 교수님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과 이를 통치이념으로 고착화시킨 친일독재세력, 그들에게 이념적 토대를 마련해준 부역 학자들, 이를 또 확대재생산한 언론인들.....하나같이 단죄했어야 하는데.....방금 친한 동생이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로부터 문창극이 말대로 우리 민족에겐 그런 dna가 있는거 아니냐는 말듣고 빡쳐 있기에 교수님의 글을 그대로 복사해 전해 주었습니다.
식민사관 무섭습니다..역사관, 친일청산 제대로 정리 없이, 인문학적 접근 없이, 오직 돈만을 위해 경제개발에만 집중해온 부작용이겠지요?
무슨 경로로 이런 사람이 총리로 지명이 됐었는지. 황당한게 한둘이 아니고, 덕분에 이런시각, 이런 사람도 있다는걸 알게 된걸 소득으로 삼아야 할까요? 기가 막힌 사회입니다. ㅠㅠ 교수님..요글도 퍼갈게요..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게 하는 글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국민은 눈높이가 높지 않은데 그저 기본만 바랄뿐인데 이게 무슨 큰 요구사항 이라도 되는지. . 국민의 눈높이를 매도하는 양아치들을 청산할 기적을 바래봅니다
좋은 글 좀 퍼가겠습니다.
저런 인간들도 총리가 될 수 있는 지극히 개방되어 있는 나라인 것 같아요...
미국이라면 아마 지금 대통령은 옷 벗고 물러나야 할 것 같다는...
정말이지 수첩에 적은 정보가 얼마나 얇고 짧고 바닥이 난건지 놀라도 놀라도 끝이 없는 놀래키는 멍청한정부에요
국민수준을 감히 어떻게생각하고 이러는건지 국민으로 살기에 모욕감을 느낄지경입니다
전국민이 분노조절장애 올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그거 온듯해요 ㅜ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