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20-24 하나님의 마음
코끼리 왼쪽 엉덩이 닮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일까요?
지난 한 주간 스트레스 많이 받았지요? 나에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푸는 방법 알려 드릴게요. 빈 의자 하나 가져다 놓고 그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 하세요.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너 만나 살 줄 알았으면 초등학교만 나올 것인데”
“나보고 안 이쁘다 자주 하는데 너 만나려고 이 정도로 태어난 거야,
다른 사람 만나게 하려 했으면 더 이쁘게 태어났겠지!”
“나를 무시하는데 이래 봬도
나는 돈과 행복이 어울리는 사람이야.
나는 형통과 잘됨이 어울리는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자녀고 천국 갈 사람이야. 까불고 있어!”
(혼자 있을 때 스트레스 풀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두 아들 중 철없는 둘째가 아버지 품을 떠나려는 욕망 때문에 멀쩡히 살아 계신 아버지께 상속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철이 없고 매우 이기적인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아픔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의 욕심만 채우면 그만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대단한 일을 했을까요? ‘허랑방탕’했습니다. 받은 유산 모두 탕진하고 돼지 치는 일을 했습니다. 흉년이 찾아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을 수 없는,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눅 15:17)
주려 죽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가 생각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살길 찾은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으라고 징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부르고 잘 나가고 잘 살 때는 깨닫지를 못하고 주님께 돌아오지 않으니 깨닫고 두 손을 들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7)
긍휼과 용서 준비해 두시고 하나님께 어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 목적은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데 있습니다. 또 다른 말씀입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호 5:15)
고난 받을 때 깨닫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돌아가 기다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각인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은 태어난 지 몇 년 만에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65세에 예수님을 마음으로 모셔 들이고 믿으셨다면 우리 주님은 당신을 65년 문밖에서 기다리셨습니다. 더 하십니다.
태어나 죽기 직전까지 기다리고 기다려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한 강도는 임종 직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신 주님을 임종 직전에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기다리신 주님께 돌아오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3, 4장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딱 한 번 기회 줄 테니 할 거냐 말 거냐? 하지 않으시고 그를 인내하며 설득했습니다.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가서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부족해서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계속 설득하셨습니다.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그런 모세를 또 설득하자 모세는 또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며 모세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그를 설득하고 표적까지 보여주어 마침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쓰시고자 하나님께서 삼고초려를 한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에 놀라 신앙시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 모세를 어디에, 뭔 일을 시키기 위해 그리하셨냐는 것입니다. 설득하시고 참고 또 설득하시고 참으시며 네, 순종하겠습니다. 할 때까지 설득하셨냐는 것입니다. 모세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그리하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어 큰 감동과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고 아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 하는 둘째를 보면서, 그리고 떠나는 아들의 뒤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무엇이 부족하다고 아픔을 주고 간 자식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향해 있는지. 나간 날부터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마음과 눈이 집 나간 둘째에게 향해 있습니다. 매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버지는 사신 것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찬송가 527장)
기다리는 자식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자 그를 보고 제일 먼저 느끼는 아버지의 감정이 무엇입니까? 측은히 여김입니다. 살아있었구나! 잘 왔다! 고생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소리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아들로서의 권위와 지위),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라.(상속자로서의 자격), 신을 신기고(주인 됨을 인정),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하자 먹고 즐기자 합니다.
여러분, 이해되십니까? 잔치하면 둘째가 주인공이 됩니다. 성공해서 금의환향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잘했다고 잔치입니까? 이 장면이 이해가 안 가 화를 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남, 둘째의 형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자를 위한 잔치라니요. 화가 난 형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잘못한 자식, 아픔 주고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다가 거지 되어 돌아온 자식 무조건 용서합니다. 그리고 제일 기뻐하며 그를 위한 잔치를 엽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 15:24) 아들의 존재만으로, 살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아버지는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많은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갔고 예레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자들도 정복자들의 포악에 시달렸습니다. 여인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자식의 시체를 먹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성전에서 살육을 당했습니다. 남녀노소가 길거리에서 학살당하고, 처녀들과 소년들이 무참하게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애 2:20~21)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생각할 때마다 쑥과 담즙을 마시는 것처럼 그 고통이 극심하여 슬퍼하며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절망 중에 소망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죄를 범한 유다를 징계하신 것이지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그 70년의 포로 기간에 유다 백성들은 회개하고 율법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예레미야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황폐와 고난과 슬픔의 참혹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그는 소망을 품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32~33)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안다면 그 어떤 상황과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소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읽고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중을 내 마음에 담아두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 15:31~32)
예수님께서 고치시고 말씀으로 먹이시고 육체의 배고픔까지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보리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병을 고쳐주시길 원하십니다. 고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육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시길 원하십니다. 채워주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주님의 뜻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듬뿍 담긴 말씀을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4~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사랑과 마음을 예수님께 다 담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느껴야 합니다. 받아 누려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예수님을 찔리고 상하고 징계받고 채찍에 맞고 철저히 가난하게 하셨습니까? 내가 무엇이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하늘비전 성도 여러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먼저 받으시고 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여 하늘의 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호렙산 떨기나무에